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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악회자료집

1. 한국산악회와 우리 국토

국토구명학술조사 전개와 의의
  • 저필자
    이영준|한국산악회 학술문헌위원장

1. 머리말

조선산악회(한국산악회)가 창립 이후 가장 중점을 두고 벌인 사업은 국토구명학술조사였다. 1946년부터 1955년까지 10년간 총 11차례 이어진 학술조사는 미군정기 과도정부를 거쳐 6.25전쟁 시기에도 계속되었다. 구명(究明)이란 ‘사물의 본질, 원인 따위를 깊이 연구하여 밝힘주 001
각주 001)
표준국어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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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는 뜻으로, 이 땅에서 100년 남짓한 역사를 지닌 근대적 산악활동이 초기부터 단순한 여가활동이나 체육활동을 넘어 학술적인 연구와 병행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라 하겠다.
등산과 학술연구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한국산악회 창립 회칙에서 잘 드러난다. 창립총회에서 인준된 회칙 3조는 “본회는 산악에 관한 연구, 지식의 보급과 건전한 등산기풍에 진흥을 기하고”라며 활동 목적의 최우선에 산악에 관한 연구를 밝히고 있다.
이 같은 산에서의 학술연구는 서구에서 탐험적 근대등산이 태동한 것부터 기원을 찾을 수 있다. 1786년 알프스 최고봉 몽블랑(4,807m) 초등 이전에도 유럽의 과학자들은 빙하와 산악지대를 직접 답사하며 실증적 연구활동을 해왔다. 특히 몽블랑 초등에 상금을 걸기도 했던 스위스의 자연과학자 소쉬르는 빠까르와 발마의 초등 이후 자신이 직접 등반에 나서 이듬해인 1787년 등정에 성공하고 다양한 조사와 실험을 진행했다. 소쉬르는 자력계, 청색계, 풍속계, 청력계, 머리카락을 이용한 습도계 등 직접 개발한 도구들을 가지고 등정했으며, 기상학, 지질학, 물리학 분야의 연구를 토대로 자신의 7차례 탐험을 정리한 『알프스 여행(Voyages dans les Alpes)(1779–1796)』이라는 학술보고서를 남겼다.
이처럼 미지의 세계를 향한 탐험은 학술적인 연구와 병행되어 시작되었으며, 등산이 취미, 레저, 스포츠로 분화되어가는 동안에도 학술등산이라는 한 분야로 자리 잡았다.
한국의 근대등산은 20세기 초 서구의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되기도 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일본을 통해 조직적 산악운동으로 변화했다. 일본은 문부성 방침을 통해 1928년 식민지 조선의 각 학교 교사를 연수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신설한 체육 과목 중 등산이 다른 스포츠와 같은 한 갈래로 정착하게 되었다.
일본 역시 근대등산의 도입 초기부터 학자들의 활동이 두드러졌고, 이 같은 경향은 식민지 조선으로 옮겨와 다양한 연구조사 활동을 통해 지배와 수탈의 기틀을 마련했다. 1902년 백두산을 비롯한 전국의 산을 답사하고 지질조사를 진행한 고토 분지로를 시작으로 해방 이전까지 동식물 채집, 측량, 지리 및 수원 조사 등 학술조사를 표방하거나 일본인 학자가 동행한 등산은 24차례에 이른다. 주 002
각주 002)
손경석, 「한국등산사 연대표」, 『한국등산사』. 이마운틴,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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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진행한 학술등산이 순수한 학문의 목적 외에 군사, 관광, 교통 및 사회 인프라 등 수탈을 위한 기초적인 조사와 연구였다면 한국산악회의 국토구명학술조사는 여기에 ‘민족’과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이 더해진 것이었다.
이 글에서는 광복과 함께 새롭게 열린 ‘모든 가능성의 시대’ 에 진행했던 11차례 국토구명학술조사를 짚어보며 이 사업이 이후 우리 산악계와 사회에서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지에 대해 고민해보고자 한다.
 

2. 국토구명학술조사의 시작과 배경

한국산악회는 1945년 9월 15일 창립하며 초대 회장에 송석하(1904- 1948)를 추대했다. 송석하는 1932년 손진태, 정인섭 등과 함께 조선민속학회를 조직하며 민족주의에 입각한 우리나라 민속학과 인류학의 초석을 다진 것으로 평가받았던 인물이다. 그는 또한 1934년 진단학회 발기인으로 참여해 활동하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에 의해 활동이 중단되었던 학회를 광복과 함께 재건해 1945년 8월 31일 재창립총회 이후 회장을 맡고 있었다.
송석하와 산악인들과의 인연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김정태의 기록에서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
창립총회 때 설립 발기인으로 42년 백두산 멤버였던 학술계의 송석하, 최승만, 문화계에서 김상용 세 분을 위의 준비위원과 합쳐서 8.15 해방 꼭 한 달 만인 9월 15일 종로 YMCA 강당에서 75명의 산악인이 모여 창립총회를 가지고 한국산악회를 출범시켰다. 주 003
각주 003)
김정태, 『천지의 흰 눈을 밟으며』, 225쪽, 케른, 1988. 김정태의 기록 중 최승만은 백두산에 간 적이 없고 김상용은 1930년에 안재홍 등과 함께 백두산을 오른 후 『신생』에 백두산음(白頭山吟)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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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과 1943년 두 차례 조선총독부 학무과와 조선체육진흥회에서 주최한 백두산탐구등행단에 참가했던 김정태는 이를 계기로 각 분야의 학자들과 인연을 맺었던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김정태와 손경석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두 차례 등행단에 참가했던 조선인은 송석하, 홍종인, 신업재, 김정태, 백남홍, 최계복, 김영제, 이두철, 방봉덕, 주형렬, 안중희, 김양희, 김정호, 안택영, 이재수, 안효선, 채숙, 김병철, 류재선, 성락봉 등으로 나와 있다. 하지만 이들의 창씨명이 확인되지 않아 1942년의 공식보고서 『登行』(1943)과 이후 두 등반대의 대장이었던 시로야마 쇼오조(城山正三)가 쓴 『祕境 白頭山天地』(1969)에 실린 명단과 일치하는 지는 확인할 수 없다.
백두산탐구등행단은 학술행사를 내세웠지만 ‘백두산 천지에 배를 띄워서 태평양전쟁의 승리를 기원하는 제사’와 ‘북변 수호를 기원하는 제단 설치’가 포함된 사업이었다. 또한 징병을 앞둔 양정중학생 15명도 학도반이라는 이름으로 인솔해 갔다. 주 004
각주 004)
오석민, 박중훈, 이용찬, 「백두산 천지의 승전 기원행사에 참여하다」, 『민속학자 송석하의 부와 학문-문화민족주의자의 민낯을 보다』, 162쪽, 민속원,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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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행단은 총무, 의학, 문화, 호소(湖沼), 기상, 동물, 식물, 농림, 지질, 수송, 보도 등으로 역할을 나누어 구성했으며 산악인들은 총무반에서 전체적인 산행과 안전에 필요한 기술적인 부분을 담당하고 나머지 분야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현지조사와 연구를 진행했다. 이 같은 행사 진행의 구성은 이후 국토구명학술조사에서도 비슷한 형태로 운영되었다.
송석하는 1943년 백두산행을 다녀온 뒤 별다른 학술적 연구결과를 발표하지는 않았다. 『매일신보』와의 인터뷰에서 ‘재가승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종덕사라는 여진족 일파’의 관습을 소개주 005
각주 005)
「天池湖森嚴한靈域에 聖戰完遂의祈願祭 處女登行路開拓과新發見不少 白頭山採究鍊成報告」, 『매일신보』, 1943년 8월 10일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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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것이 전부다. 하지만 이 시기 송석하는 학술연구가 국가의 정책과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서 파악하고 있었다. 송석하는 조선민속학회에서 활동하며 1930년대 초반부터 봉산탈춤을 조사하고 연구 보급해왔는데, 이러한 노력 끝에 봉산탈춤이 1941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보급 조장할 향토예술”로 지정되는주 006
각주 006)
「普及助長할 鄕土藝術로 鳳山탈춤 指定」, 『매일신보』, 1940년 9월 28일,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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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에 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러한 성과들을 바탕으로 송석하는 훗날 민족주의자로 인식되었지만, 이에 대해 “일제 식민지 상황에서 조선인이 조선민속을 조사하고 연구했다 하여, 그것이 바로 반일 내셔널리즘의 사회적 의미 산출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주 007
각주 007)
남근우, 「조선민속학과 식민주의: 송석하의 문화민족주의를 중심으로」, 『한국문화인류학』 35집 2호, 한국문화인류학회, 2002, 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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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비판적 견해도 있다.
8·15 광복과 함께 우리 사회는 모든 것을 처음부터 만들어갈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시기였다. 한국산악회는 창립취지문에서 “우리의 금수강산도 참답고 아름다운 자태로서 우리 손으로 돌아오니 이 산천의 향토를 토대로 해서 조선도 세계에 진출하여 자랑하고 견줄만한 산악문화를 세워볼 희망과 정열이 누구나 불타오를 것”이라며 “산악등산에 관한 연구와 보급장려를 실천함으로써 사회생활을 정화하고 민족정신의 고양과 국가지상의 이상을 조성함을 겸하여, 문화발전에 공헌함을 기하려”한다고 밝히고 있다.
제1회 국토구명학술조사의 취지문에서도 같은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우리는 그간 가혹한 압제 아래 자기 국토조차 자유롭게 탐사할 기회를 못 가졌다. 따라서 조선과 일본 및 중국의 중간에 놓여있어 소위 차귀문화권(遮帰文化圈)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특이한 존재로 학술, 교통, 산업 상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제주도 역시 일본군국주의의 비밀 정책 아래 진정한 자태를 구명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해방된 오늘날 우리는 미개미지(未開味知)의 국토를 과학적으로 탐사하는 제1보적 의의에 있어서 한라산을 중심으로 제주도를 연구의 대상으로 선정한 것이다. 주 008
각주 008)
일부 현대어로 윤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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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혹한 압제’, ‘자기 국토조차 자유롭게 탐사할 기회를 못 가짐’, ‘일본군국주의의 비밀정책’ 등은 광복을 맞은 산악인과 학자들의 이제야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속내였는지도 모른다.
한편 국토구명학술조사에 대해 고희성주 009
각주 009)
고희성(1927-2019)은 양정중학교 산악부장으로 활동하던 1943년 백두산탐구등행단에 다녀왔으며, 한국산악회 창립멤버 중 한 사람으로 1946년 오대산-태백산맥 학술조사, 1947년 울릉도-독도 학술조사 등에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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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증언은 광복과 함께 시작된 분단으로 인해 과거 산악운동의 주요 무대였던 곳들이 사라지자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말한다.
학술조사대는 산악인이 갈 곳이 없다. 산악인이 갈 곳이 없으니까 좁은 국토를 구명하자 그게 포인트에요. 한국산악회가 굉장히 애로에 부딪친 게 뭐냐면 (남한에는) 금강산 같은 집선연봉 그런 산이 없거든요.
그럼 한국산악회가 갈 곳이 뭐냐. 우왕좌왕한 거예요. 김정태 씨가 안을 낸 게 학술로서 변형을 시키자. 그래서 조복성 박물관장, 석주명 나비박사, 어류관계로는 김 뭐시기인가 그런 학자들을 모아서 자연생태계가 어떻게 변해가느냐 그런 걸 한국산악회가 지도를 해서…. 주 010
각주 010)
이 내용은 필자가 2017년 7월 9일 일본 도쿄에서 고희성을 인터뷰하며 녹취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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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구명학술조사는 광복 이후 한국사회에서 정치, 경제, 제도와 문화가 완전한 형태로 자리 잡기 이전에 시행되었다. 따라서 조사에 참여한 인물들의 면면에서는 다른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불과 얼마 전까지 적극적 친일에 앞장섰던 사람들도 눈에 띈다. 때문에 국토구명학술조사의 활동을 단순히 민족주의 또는 국수주의적인 애국활동으로만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올바른 평가가 뒤따라야 하겠다. 또한 11차례의 학술조사에서 단 한 번도 종합보고서가 발간되지 않았던 것도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다. 각 분야에서 국내 최고의 석학들이 참여한 가운데 진행된 학술조사 이후 대중강연 또는 전시가 진행되기는 했지만 관련 논문 등 연구 성과는 각 개인들의 몫으로 돌아갔기에 이 사업에는 여러 이해관계가 얽혀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주 011
각주 011)
국토구명학술조사가 끝난 뒤인 1964년 손경석은 국토구명사업 등을 전개한 공로로 류홍렬의 추천을 받아 한국산악회를 3.1문화상 후보로 공적조서를 작성했으나, 당시 부회장이던 이민재는 “산악회의 공적이 큰 것은 사실이나 파랑도 답사, 독도 측량, 한라산 종합조사 등 모두가 그 결과 논문은 그 당시 참가한 해당분야의 학자들의 것이지 산악회의 것일 순 없으니 도장을 찍을 수 없다”며 상신을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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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구명학술조사는 회장 송석하의 사회적 경험과 김정태를 위시한 일제강점기 산악활동을 해왔던 산악인들의 경험이 합쳐지며 만들어낸 새로운, 그러나 또한 새롭지 않은 시도였다. 그러나 모든 것을 차치하고라도 광복과 함께 이 사회에 불어온 새로운 바람은 ‘국토’와 ‘구명’의 큰 동력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3. 국토구명학술조사 현황

1. 광복 후 미군정기부터 전쟁 이전까지
식민지에서 해방은 되었으나 사회는 혼란스러웠다. 연합국은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점령 했으며 순식간에 북쪽의 산들은 갈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소련이 38선을 봉쇄한 것은 1945년 8월 26일이며 남한에 미군이 진주한 것은 1945년 9월 9일이다. 맥아더 포고령으로 남한 지역이 미국의 지배를 받게 된 상황에서 국토구명이라는 아이디어는 미군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송석하는 좌우 구분 없는 다양한 정치활동을 통해 인맥을 넓히고주 012
각주 012)
송석하가 광복 이후 처음으로 보인 정치적 행보는 조선과 소련의 문화교류와 친선을 표방하며 사회주의자들이 참여했던 조소문화협회다.
이후 조선연극인대회 위원장을 역임했으나 다시 친미군정인 한국민주당 발기인이 되었다가 반이승만 계열인 조선민족청년단 전국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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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미군정청에서 점령지인 한반도의 정보를 얻기 위해 채용한 인류학자 유진 크네즈(Eugene Irving Knez)와의 인연을 통해 첫 번째 국토구명학술조사를 성공적으로 이끌어가게 된다.
유진 크네즈는 1945년 9월 부임했으며 송석하가 1945년 11월 8일 초대 국립민족박물관장에 임명된 것을 계기로 가까워졌다고 자신의 회고록 『한 이방인의 한국사랑』(1997)에서 밝히고 있다.
국립인류학박물관의 공식 개관에 맞춘 첫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나는 제주도를 답사하였다. 송석하 교수는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는 동안, 자신은 물론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그곳을 여행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던 제주도를 추천해주었다. 그는 제주도의 민속문화가 한국의 대중들에게 흥미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국립인류학박물관에는 송석하 교수와 김수경 교수 등 단지 2사람의 직원만 있었으므로, 다른 학자들과 기술자, 체육인들이 초빙되어 합류하였다. 주 013
각주 013)
Knez, Eugene I, 박경·김진명 『한 이방인의 한국사랑』, 국립중앙박물관,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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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악회의 국토구명학술조사 계획이 세워지고 처음으로 향한 곳은 제주도였다. 첫 대상지를 제주도로 한 것은 태평양전쟁 이후 일제가 제주도를 군사기지화하며 산악지역의 입산을 금지했기 때문에 수 년 간 등산한 기록이 없었고, 따라서 탐험적 등산과 학술적 연구의 수요가 있었다. 김정태는 당시 계획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제주도 한라산은 38년 1월 경성제대의 동계 초등반 때 마에가와(前川) 대원의 조난사가 있은 후 주목을 받아 모두 가보고 싶어 했으나, 40년 이래 일본이 전쟁기지화하여 입산을 금했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먼저 관심을 끈 것이다. 주 014
각주 014)
김정태, 『천지의 흰 눈을 밟으며』, 231쪽, 케른,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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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2월 26일부터 3월 17일까지 진행한 제1회 적설계 제주도 한라산 학술등산대는 송석하 회장을 대장으로 총 19명으로 구성되었다. 등반대는 김정태(리더), 주형렬(장비), 신업재(의무), 이재수(총무), 채숙(식량), 박순만(장비), 현기창(식량, 기록), 이용민(촬영), 임병호(촬영보조) 등 9명이었으며, 학술대는 조명기(민속), 윌리엄 케르(William L. Kerr, 개신교 전도사), 김수경(사회), 러셀 메이슨(Russel C. Mason, JODK 라디오방송국 음악감독), 유진 크네즈(Eugene Irving Knez, 인류학, 미군정청 교육문화담당관) 등과 방송담당 양재용, 이원익, 이천기, 임동혁 등이 참가했다. 당시 참가자들의 면면 중 조명기, 김수경주 015
각주 015)
김수경(1919-1999)은 1940년 경성제국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경제국대학교 대학원에서 언어학을 전공했다. 해방 전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했으며 1946년 10월부터 김일성종합대학 조선어문학부 교수로 재직했다. 학술조사대에서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월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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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이 산악회 회원이었는지는 확인되지 못했지만 등반대를 제외하고 미국인 3인 등 학술대 대부분은 외부인으로 구성되었다.
학술등산대는 미군 전용 특별객차 한량을 통째로 빌려 오후 2월 26일 5시 10분 서울역을 출발, 25시간 만에 목포에 도착한 후 이틀을 기다린 끝에 3월 1일 오전 7시 미군 수송함 LST 019호를 타고 출항했다. 3월 2일 제주도 도착 후 3월 6일 관음사에서부터 산행을 시작했으며 개미목과 왕관릉을 거쳐 10일 관음사로 다시 하산했다. 탐사대는 하산 후 선박을 섭외하느라 15일 새벽까지 제주읍내와 서귀포, 모슬포 등지에 머무르며 학술조사를 진행했다. 다시 서울로 돌아온 것은 3월 17일로 20일 만이었다.
이 산행에서 촬영 대원으로 참가한 이용민주 016
각주 016)
이용민(1916-?)은 한국산악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한국산악회 초기 산악영상을 촬영했다. 공포영화를 주로 제작한 영화감독으로 활동한 그의 대표작으로 『목 없는 미녀』(1966) 등이 있으며 『제주도풍토기』는 그가 처음으로 제작한 영화이지만 현재 필름은 남아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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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영상을 기록으로 남겨 『제주도 풍토기』라는 영화를 제작해 4월 15일 개봉했다. 메이슨 중위는 한국인 음향기술자의 도움을 받아 제주도 민요를 녹음하고 채록해 기록으로 남겼다. 주 017
각주 017)
위의 책 88-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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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학술조사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자 한국산악회는 새로운 활력을 얻고 다음 학술조사 대상지로 오대산을 비롯한 태백산맥 학술조사를 진행했다. 특히 1946년 6월 28일 제1회 총회를 거치며 산악회에는 학계와 언론계의 인물들이 새롭게 유입되었으며, 이후 학술조사에서 중요한 역할들을 하게 된다. 이때 선임된 부회장으로 조선일보 주필 홍종인과 서울대 약대 학장 도봉섭이 있었으며, 이사로는 곤충학자 석주명, 식물학자 조복성, 역사학자 류홍렬 등이 합류했다.
1946년 7월 25일부터 8월 12일까지 진행된 오대산-태백산맥 학술조사대는 오대산에서 가리왕산을 거쳐 정선 백운산, 함백산, 태백산을 지나 강릉으로 빠져나오는 코스로 진행되었으며, 총 930킬로미터를 산행하며 산간지역을 조사했다.
송석하 회장을 대장으로 32명으로 구성된 조사대는 김정태, 김정호, 남행수, 주형렬, 유재선, 윤현필, 현일영, 박종대, 임석제가 본부반을 맡았으며 학술반으로 최상수(민속), 석주명, 이영로(식물), 장진(식물), 이민재(식물) 등의 학자가 참여했다.
2회 학술조사대부터는 답사 후 대중을 대상으로 한 전시회 및 보고회가 진행됐다. 1946년 10월 16일부터 22일까지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에서 열린 전시회는 파노라마 사진 7매, 전지 사진 250매 각종 도표와 식물 표본 등 526종을 전시했으며, 이와 함께 국립과학박물관에서 강연회를 열어 송석하(인문 생활), 김정태(등산 운행), 석주명(동물), 심학진(식물), 경과보고는 유하준이 발표했다.
1947년에는 제3회 소백산맥 학술조사대와 제4회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대를 파견했다. 1947년은 좌우 대립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미소공동위원회는 건국문제와 사회문제 협의를 위해 각 단체들을 정치적으로 끌어들이고자 했다. 한국산악회는 송석하 회장의 소집으로 6월 11일 임시총회를 열고 사회단체로서 정치에 참여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했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한 끝에 결국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며 산악회 내의 정치논쟁은 잠시 잦아들었다. 이런 사건을 겪은 한 달 뒤인 7월 12일 소백산맥 학술조사대가 출발하게 되었다.
당시 신문에 실린 기사를 보면 3회 학술조사대부터는 문교부가 후원하며 정부기관의 지원을 받았다. 주 018
각주 018)
「산악회 주최 문교부 후원 소백산맥 학술탐사 7월 6일부터」, 『동아일보』, 1947년 7월 4일자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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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신문 기사를 모집하는 광고를 진행했으며, 학술조사반의 자격으로는 “동식물, 농림, 광물지질, 민속, 사회, 경제 등 각 부문을 학술적으로 조사하여 보고할 수 있는 자”로 참가비는 12,600원이었다. 문교부의 후원 규모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는 나와 있지 않으나, 손경석은 “한국산악회의 국토구명사업에는 언제나 전매청이나 외자청 등에서 소금, 담배 등을 자금원으로 기증받는 것이 상례”주 019
각주 019)
손경석, 『등산반세기』, 83쪽, 도서출판 산악문화,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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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적고 있다. 송석하는 1946년 9월 뇌충혈 뇌출혈 진단을 받아 한 달 이상 치료를 받는 등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였기에, 소백산맥 학술조사대에는 참가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대장은 당시 산악회 부회장이던 홍종인이 맡게 되었다. 부대장은 석주명, 학술반으로 어류학자 최기철 등 9명이 참가했다고 전해지나 구체적인 명단은 남아있지 않다. 운행을 담당한 본부반은 김정태, 박종대, 남행수, 전탁 등 6명이 참가했다.
소백산맥 학술조사대는 속리산, 백화산, 수안보를 거쳐 월악산과 도솔봉, 죽령 등지를 돌아보고 단양에서 서울로 돌아왔다. 김정태의 기록에 따르면 “소백산이 극도로 치안이 험악해서”주 020
각주 020)
한국산악회50년사 편찬위원회, 『한국산악회 50년사』, 79쪽, 한국산악회,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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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돼 있던 소백산은 오르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1946년 야산대(野山隊)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시작한 남로당의 무장 세력이 소백산과 태백산 일대에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소백산맥 학술조사대는 귀환 후 국립과학박물관에서 보고회를 개최했으며, 홍종인은 사회 분야를, 최기철은 식물, 석주명은 동물, 김정태는 전체 운행 보고를 진행했다.
소백산맥에서 돌아온 후 곧바로 이어진 제4회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는 국토구명학술조사 사업 전체를 통틀어 63명이라는 가장 많은 인원이 참가한 대규모 행사였다. 이와 관련해서는 기존의 연구가 다양하게 진행되었으므로 이 글에서는 생략하겠다. 다만 1~3회 제주도 한라산과 태백산맥, 소백산맥 등지에서 진행된 국토구명학술조사가 산악지역을 대상으로 했다면 4회부터는 도서지역으로 그 폭을 넓혔고, 이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영토 규정의 중요한 근거로 남았다. 특히 2022년 새롭게 발굴된 송석하의 1947년 독도 탐사 관련 자료와 이를 바탕으로 한 홍성근의 연구는 기존 학계에서 통설로 여겨져 오던 ‘과도정부의 조선산악회 파견’이 아니라 당시 계획이 이미 산악회 내에서 1946년부터 진행되어왔으며 자체적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또 미군정이 공무원들에게 독도 출장 승인을 하며 이미 당시에 독도가 한반도의 부속도서로 여겨졌다는 증거가 밝혀졌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 주 021
각주 021)
홍성근, 「1947년 조선산악회의 울릉도 학술조사대 파견 경위와 과도정부의 역할」, 『영토해양연구』Vol. 23, 동북아역사재단,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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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1948년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틀 뒤인 8월 17일부터 30일까지 14일간 제5회 차령산맥 학술조사대를 파견했다. 8월 5일 송석하 회장이 지병으로 타계했지만 차기 회장이 선임되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했던 행사였다. 대장은 석주명이 맡았으며 본부반은 김정태, 남행수, 현기창, 윤현필, 윤두선, 학술반은 이민재, 이희대, 김희호 외 12명 등 총 22명이 참가했다. 차령산맥 학술조사대는 그 이전해 소백산맥을 조사할 때 치안 문제로 소백산에 가지 못했던 것을 다시 시도하고 일대 남한의 잔여지역을 종합 답사하는 데에 주안점이 있었다. 한국산악회에 보관 중인, 현기창이 촬영한 것으로 추측되는 사진들은 각 날짜별로 스크랩되어 있으며, 당일 운행 지점과 시간, 고도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차령산맥 학술조사대는 원주에서 시작해 신림을 거쳐 남대봉에서 백운산과 치악산을 오른 후 다시 백덕산으로 이동해 소백산 능선을 조사한 뒤 풍기와 단양을 거쳐 종주하고 조치원을 경유해 서울로 이동하는 코스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1948년은 제주도 4.3사건과 10월 여순사건 등으로 이후 남한의 산악지역에 대한 치안이 더욱 악화되어 더 이상 산악지역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기 어려워지게 되었다. 따라서 산악회가 눈을 돌린 곳은 도서지역 탐사였다.
1949년 두 차례 학술조사는 선갑도·덕적군도 일대와 다도해를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석주명 대장을 비롯해 55명으로 구성된 조사단은 학술반원으로 류홍렬, 이숭녕, 장형두, 윤익병, 도봉섭, 이희태, 남태경, 옥승식 등 12명의 학자들과 의료반으로 조중삼, 김영택 등 6명, 보도반으로는 이용민, 이종호, 권영일, 임정규 등 4명, 그리고 처음으로 여성 3명이 참가했는데, 주영하, 최옥자, 조마리아 등 당시 경성여전 학생이었다.
52명이 참가한 선갑도·덕적군도 학술조사대가 그곳을 대상지로 한 이유는 전 해인 1948년 인천산악회의 답사가 계기가 되었다고 손경석은 밝히고 있다.
어느 날인가 인천산악회의 문철수 씨가 덕적군도에 선갑도라는 무인도가 있는데 험한 암벽이 볼만하다고 가르쳐주었다.
문철수씨는 광복 직전 군용 알루미늄을 모아 등산코펠을 제작한 산악인이었다. 주 022
각주 022)
손경석, 『등산반세기』, 81쪽, 도서출판 산악문화,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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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단은 6월 11일 인천항을 떠나 해군 함정을 이용해 덕적도 진리항에 닿았으며, 본도를 일주하고 문갑도에서 1박 후 굴업도와 가도를 거쳐 백아도에 도착, 무당골 해식동굴 답사를 마친 뒤 울도를 거쳐 무인도인 선갑도에 도착했다.
서울로 돌아온 답사대는 7월 15일 국립과학박물관에서 보고회를 가졌으며, 42명이 참석한 가운데 동물반 석주명, 식물반 장형두, 지질반 옥승식, 문화반 류홍렬, 이숭녕, 의학반 조중삼, 본부반 김정태가 각각 발표했다.
이어 곧바로 8월 8일 제7회 국토구명사업으로 다도해 학술조사대가 출발했다. 석주명 대장과 함께 본부반에 김정태, 유기석, 정인호, 윤두선, 학술반에 이민재, 이영로, 윤익병, 이희태, 조중삼 등 총 22명이 참가했다. 목포항에서 수산시험장 소속 선박 조양호를 타고 현지로 이동했으며, 대흑산도-홍도-상태도-중태도-하태도-소흑산도-거차군도를 거쳐 하조도-추자도-횡간도-거문군도-완도에서 우수영으로 나와 목포로 귀환하는 코스를 따라 답사했다. 총 17일간 13개 도서를 조사했으며, 9월 30일 76명이 모인 가운데 보고회를 가졌다.
한편 이 무렵 산악단체의 섬과 해양지역 탐사는 한국산악회뿐 아니라 1947년 새롭게 결성된 한국학생산악연맹의 주요 사업이기도 했다. 서울대학교가 설립되고 산하 9개 대학산악회원들의 연합체로 결성된 한국학생산악연맹은 1948년 1월 울릉도 성인봉 스키등반 등 초기 순수한 산악활동을 시작했지만 이후 서해안 일대와 흑산도 등 두 차례 도서지역 학술조사대를 꾸리게 된다.
서울에 9개 대학을 합쳐가지고 블록을 만들었을 적에 그 호칭을 학생자연생태연구회로 바꾸면 어떠냐 해서 그거 좋은 아이디어다 해서 자연과학을 탐구하는 단체를 만들자. 서울대학의 장이욱 박사가 총장을 했거든요. 이춘호 박사가 할 적엔 오리무중이었는데 장이욱 박사가 할 적엔 이게 옳은 길이다, 학생들이 각 대학이 모여가지고 자연과학을 연구하는게 바람직하다 해서 학생산악연맹이 자연과학탐구로 변해가요. 주 023
각주 023)
2017년 7월 9일 녹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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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악회의 국토구명 학술조사가 7회를 이어오며 등산을 통해 자연과 인문을 연구하는 기풍은 당시 지식인층이 대다수였던 산악인들에게 전파되고 보고강연회를 통해 일반 대중에게도 우리 국토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알려주며 사회적인 공명을 얻었다. 하지만 사회 혼란이 지속되며 산악지역에 대한 출입이 불가능해져 새로운 대상지를 찾아내는 것, 산악회 내에서도 기존의 멤버를 대체할 새로운 동력을 얻는 것은 이 사업의 지속성에 있어 중요한 일이었다. 고희성의 증언은 모든 것을 뒤집어놓은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6.25 때문에 가치관이 확 달라진 거에요. 6.25 때 학자들이 다 이북으로 가버리고 그러니까 뚜렷해진거죠. 그거를 개혁할만한 김정태 씨 연령, 건강 이런 게 뒤따라오지 못해요. 그러니까 점점 노화되어가는 거죠. 중요한 게 뭐냐, 한국산악회가 하고자 하는 것이 학술답사인데 그걸 뒤이어 가지고 따라와 계승할만한 게 학생연맹인데 전쟁으로 인해 전부 갈 사람은 가버리고 분열되어버렸다는 거죠. 그 분열이 우리나라로 따지면 비극이에요. 주 024
각주 024)
2017년 7월 9일 녹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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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전쟁 시기의 활동
한국전쟁 시기에 국토구명학술조사는 두 차례 진행되었으나 기존과 다른 점은 모두 해양 도서지역이었고 정부의 의뢰사업이었다는 점이다. 특히 제8회 제주도·파랑도 학술조사대는 형식적으로는 문교부와 국방부가 한국산악회에 조사를 의뢰해 진행한 것으로, 1947년 독도 탐사와 함께 영토 주권 확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51년 9월 18일부터 26일까지 진행된 제주도·파랑도 학술조사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을 앞두고 한일회담을 준비하던 유진오가 홍종인 한국산악회 부회장에게 의뢰해 진행된 것이다.
당시 실무처장이던 유진오 씨가 최남선 씨의 귀띔을 들었다. 목포와 일본 나가사키, 그리고 중국 상해를 연결하는 삼각형 중심 해중에 파랑도가 있는데, 섬의 표면이 얕아서 물결 속에 묻혔다 드러났다 한다.
‘파랑도’라는 뜻은 물이 파랗다고 해서 하는 말인지, 물결 속에 들어갔다 나왔다 한다는 데서 파랑이라고 한 것인지 확실치 않으나 어쨌든 그 섬을 우리나라 영토로 명확히 해두는 껏 것이 장차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유진오 씨 등 당시의 실무진은 조약의 초안 2조 A학에 우리나라 영토를 규정하는 조문에 한국의 부속도서로서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만 명시하고 종래까지의 관습상 부속도서까진 열거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독도가 명시되지 않아서 오늘날까지 문제가 되고 있거니와 파랑도를 명시해두는 것은 장차의 해양주권에 크게 유리함을 예측해서 조약문의 수정과정에서 이들 섬을 추가했었다 (…)
1951년 8월 당시 한국산악회 부회장 홍종인 씨는 유진오 씨와 각별한 친교가 있는 사이였다. 이 말을 듣고 한몫 거들지 않을 수 없었다. 국토구명사업은 한국산악회의 단골사업인데 좌시할 수는 없었다.
이에 따라 전란 중 피난수도 부산에서 산악회원들을 수소문해서 모았고 회원인 학자들도 소집되었다. 주 025
각주 025)
손경석, 『등산반세기』, 142-143쪽, 도서출판 산악문화,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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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인 대장 등 회원 23명과 기타 34명 등 57명으로 구성된 조사대는 해군 902호를 타고 부산을 떠나 3일간 항해한 끝에 해면 아래의 암초를 발견했으나 수중조사는 하지 못하고 ‘대한민국 영토 파랑도’라고 새긴 동판을 수중에 가라앉히는 것으로 탐사를 마쳤다.
변완철은 자일에 몸을 묶고 내려가 보자고 우겼다. 배는 심한 격랑 때문에 한시도 멈출 수 없었다. 그 주위를 몇 번이고 돌다가 대장의 결심으로 ‘대한민국 영토 파랑도’라고 새긴 동판 표지를 해면 아래 검은 암초에 가라앉힐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뱃머리를 돌리는 대원들의 얼굴엔 실망과 더불어 그러나 큰일을 하나 해냈다는 기쁨이 섞여있었다. 주 026
각주 026)
위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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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파랑도 학술조사대는 9월 26일 제주도로 귀환해 곧바로 제주북초등학교 강당에서 강연회를 진행했다. 강연 내용은 제주도와 서양과의 관계(홍이섭), 상대인의 해양발전(이흥식), 본도 위생사정(김영택), 방언에 대하여(이숭녕), 생물학 상으로 본 제주도(최기철), 제주도의 지질(옥승식) 등으로 일반 대중을 위한 교육 목적의 강연이었다.
1952년 9월 17일부터 28일까지는 제9회 국토구명학술조사로 울릉도 독도 조사단이 파견되었다. 1947년 이후 두 번째 답사로, 이 또한 많은 선행연구와 평가가 있으므로 생략하도록 하겠다. 당시 10월 9일 부산시청 회의실에서 개최된 보고강연회는 400명이 참석할 정도로 국민들의 독도에 관한 관심이 높았다. 이 자리에서 독도문제(홍종인), 독도측량계획(박병주), 역사상으로 본 독도(류홍렬), 독도이야기(홍이섭), 울릉도의 유물과 유적(김원룡), 울릉도의 땅과 사람(이지호), 동해수상과 독도(전찬일), 울릉도의 식물과 육수(임기홍), 독도 조사 운행(김정태) 등의 주제발표가 진행됐다.
3. 수복 후 국토재건과 학술조사
1953년 10월 11일부터 17일까지 진행된 제10회 국토구명학술조사는 3차 울릉도·독도 탐사로, 1952년 조사대가 폭격으로 독도에 상륙하지 못해 미완으로 남은 독도 측량과 표석 설치가 주목적이었다. 이 또한 많은 자료가 발표되었으므로 이 글에서는 생략하겠다.
전쟁으로 인해 기존의 산악운동은 많은 부분이 바뀔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큰 변화는 창립 이후 10여 차례 학술조사에 참가했던 학자와 산악인들이 대거 납북, 또는 월북하거나 전쟁 중 사망·실종된 것이다. 세 차례 학술조사대를 이끌었던 석주명은 1950년 10월 6일 서울 거리에서 총격으로 사망했으며, 함한영, 신방현, 조선형 등 학술조사대에 참가했던 대원들도 숨졌다. 식물학자 도봉섭, 사진가 현일영, 생물학자 윤익병, 정명근, 방봉덕, 김인환, 김일, 오용석, 김정호 등 국토구명학술조사대에 참가했던 대원들은 월북하거나 실종되어 소식이 끊겼다.
기존 38도선에서 휴전선으로 남북의 경계가 바뀌며 강원도 지역의 일부가 수복되었으며, 그중에는 설악산이 포함되어 있던 것도 전쟁이 가져온 변화 중 하나였다.
한국산악회는 회원들을 다시 규합해 1954년 5월 6일 서울대 치대 강당에서 1953년 3차 독도 조사에 관한 보고강연회를 개최했다. 독도영유권 문제(홍종인) 독도측량과 지도(박병주) 역사상으로 본 독도(이숭녕), 울릉도와 독도의 인문(김광용), 지리학상으로 본 울릉도와 독도(이지호), 울릉도와 독도의 생물(임기홍), 독도 운행 문제(김정태) 등의 내용을 발표했으며, 이용민이 촬영하고 문공부가 제작한 문화영화 『독도』를 상영했다.
1954년 11월 6일 국립도서관 강당에서 전후 처음으로 임시총회를 열고 홍종인이 회장에 취임하며 한국산악회는 새로운 재건의 전기를 맞았다. 1955년 8월 18일부터 28일까지 진행된 제11회 국토구명사업 수복지구 설악산 학술등반대는 전후의 사정을 잘 보여주는 모습이다. 홍종인 대장과 이숭녕, 김정태, 남궁기, 정명식 등 대원 28명 중에는 신재숙, 김봉화 등 이화여대산악부 여성도 6명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서울에서 춘천까지 기차로 이동 후 인제와 원통을 거쳐 한계리에서 대승령을 올라 내설악으로 내려선 후 외설악 신흥사로 횡단하는 코스로 등산과 조사를 진행했다. 당시 계획서를 보면 조선일보사가 후원했으며, 참가자는 산악회원으로 가입하는 것을 필수 조건으로 적고 있다.
전쟁이 끝난 뒤 각 대학교에는 산악부가 새롭게 생겨나며 젊은 층의 유입이 크게 늘었고, 한국산악회 역시 전후 새로운 동력으로 이들을 필요로 했다.
학술조사 뒤 홍종인은 『조선일보』지면에 5회에 걸쳐 등반기를 연재했으며, 학술반원으로 참가한 이숭녕은 『동아일보』에 「은어유형(隱語類型)의 신발견-설악산 산삼채취인의 변말」이라는 글을 실었다.
실질적으로 한국산악회가 실시한 국토구명학술조사의 마지막이었던 설악산 탐사는 그전과 같은 보고강연회가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새롭게 생겨난 대학산악부를 중심으로 설악산이 새로운 대상지로 급부상되며 뒤이어 많은 등반대들이 설악산을 찾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두 달 뒤 서울문리대산악부는 이미 여러 차례 국토구명학술조사에 참가한 바 있는 류홍렬을 지도교수로 24명이 설악산 천불동 계곡과 울산암 등지를 초등했으며, 1956년에는 슈타인만클럽이 동계 초등을, 1957년에는 고려대산악부와 한양대산악부, 서울공대산악부, 강원산악회 등이 설악산을 무대로 새로운 활동을 펼쳐갔다.
 

4. 국토구명학술조사의 영향

11차례 진행된 국토구명학술조사는 연인원 342명이 참여해 전국 41개 산과 21개 도서를 답사했다. 한국산악회는 이 과정에서 “전국의 지형지세, 동물, 식물, 광물 분포 및 농림, 지질, 방언 등 각종 학술자료를 조사 수집하여 매번 전국을 순회하며 보고강연회, 전시회, 영사회를 통해 학계 및 일반에 발표함은 물론 국가의 학술분야 기본자료에 큰 표본이 되었으며 이 학술조사대를 통해 류홍열, 이숭녕, 이민재, 홍이섭, 김원용, 최기철, 최상수 씨 등 저명한 학자를 많이 배출했다”주 027
각주 027)
한국산악회 편집문헌위원회, 『한국산악회 요람』, 한국산악회,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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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평가한다.
한국산악회의 학술조사 활동은 이후 생겨난 각 대학교 산악부를 중심으로 아카데믹한 풍토를 조성하는데에 조성하는데 영향을 미쳤으며, 이른바 ‘학술등반대’라는 이름을 내건 여러 시도들을 이어지게 했다. 특히 국토구명학술조사의 핵심 멤버들이 교수로 재직하던 학교들을 중심으로 이 같은 행사가 계속되었다. 또한 울릉도와 독도를 세 차례 답사하며 대중을 대상으로 열었던 전시회와 강연회 등은 이후 산악운동에 있어 우리 영토에 대한 관심과 탐구로 이어졌다.
서울문리대산악부는 1955년 제1차 하계 한라산 학술원정, 1956년 한국산악회 학생해양산악훈련단에 학술대원 파견, 1958년 백령· 대청·소청·연평도와 제주도 학술조사, 1966년 정부에서 주관한 설악산 천연보호구역 종합학술조사단 참가 등으로 학술등반의 명맥을 이어갔으며, 1962년 창립한 대구경북학생산악연맹은 1967년 울릉도 산간학교를 열어 청소년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계몽적인 활동을 펼쳤다.
한국산악회 또한 국토구명학술조사 사업에 뿌리를 둔 탐승 형식의 사업들을 1960~70년대까지 계속했다. 1969년 6월에는 문화공보부와 공동으로 1차 전국명승지종합조사단을 꾸려 오대산 일원을 탐사했으며, 8월에는 남해와 다도해 일원을 조사했다.
1973년에는 한국산맥답사대라는 이름으로 태백산맥과 영남지역의 산들을, 1974년에는 2차년도 사업으로 영남 동부지역의 산악지대를 다시 답파했다.
1962년 창립한 대한산악연맹 또한 1968년부터 1972년까지 5년간 ‘국토종주삼천리-통일에의 의지’라는 행사를 통해 마라도에서부터 강원도 향로봉까지 총연장 1,732km를 종주했다. 당시 지휘를 맡았던 사람은 대한산악연맹 초대 회장으로 한국산악회 국토구명학술조사에 여러 차례 참가했던 이숭녕이었다.
특히 1966년 이민재를 단장으로 한 설악산 천연보호구역 종합학술조사단의 성과는 이후 설악산이 국립공원과 유네스코 생물권보존지역으로 지정되는데에 지정되는데 기초가 되었다.
 

5. 맺음말

이상으로 한국산악회가 창립 이후 10여 년간 진행해온 국토구명학술조사 사업의 시작과 배경, 진행 과정과 이후 산악계를 비롯한 사회에 끼친 영향에 대해 살펴보았다. 일제강점기 태동한 한국의 산악운동은 많은 부분 일본의 영향 속에 진행되어왔고, 태평양전쟁을 거치며 수탈과 억압 속에 학술조사의 이름을 빌렸으나 정치적으로 변질된 형태로도 진행되었다. 광복과 함께 찾아온 자유와 해방공간에서 산악인들은 피폐해진 우리 국토를 우리가 직접, 우리의 시각으로 새롭게 바라보고 해석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국토구명학술조사를 시작했으며 극심한 좌우대립으로 혼란을 겪었던 미군정 과도정부 시기와 한국전쟁 중에도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11차례 이어온 이 같은 활동은 이후 독도와 파랑도 등 대한민국의 영토주권을 확립하는 데에 중요한 역사적 자료로 남았으며, 전후 젊은 층을 대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현재까지 전해지는 문건과 자료가 극히 부족하고 당시 학술조사에 참가했던 사람들의 증언을 이제는 들을 수 없는 상황에서 보다 많은 자료 발굴 노력과 연구가 이어져야 하겠다. 또한 ‘국토구명’이라는 말에 내재된 ‘내셔널리즘’의 의미가 이후 군사독재와 분단 이데올로기 속에서 산악계와 우리 사회에 어떤 모습으로 해석되어갔는지에 대해서도 들여다볼 필요를 느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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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석민, 박중훈, 이용찬, 『민속학자 송석하의 부와 학문: 문화민족주의자의 민낯을 보다』, 민속원, 2023.
- 안치운, 『침묵하는 산: 일제강점기 조선 산악인의 그림자』, 2023,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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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근우, 「조선민속학과 식민주의: 송석하의 문화민족주의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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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근, 「1947년 조선산악회의 울릉도 학술조사대 파견 경위와 과도정부의 역할」,
『영토해양연구』 Vol. 23, 동북아역사재단, 2022.

『매일신보』, 1943년 8월 10일
『매일신보』, 1940년 9월 28일
『동아일보』, 1947년 7월 4일

  • 각주 001)
    표준국어대사전 바로가기
  • 각주 002)
    손경석, 「한국등산사 연대표」, 『한국등산사』. 이마운틴, 2010.  바로가기
  • 각주 003)
    김정태, 『천지의 흰 눈을 밟으며』, 225쪽, 케른, 1988. 김정태의 기록 중 최승만은 백두산에 간 적이 없고 김상용은 1930년에 안재홍 등과 함께 백두산을 오른 후 『신생』에 백두산음(白頭山吟)을 발표했다.  바로가기
  • 각주 004)
    오석민, 박중훈, 이용찬, 「백두산 천지의 승전 기원행사에 참여하다」, 『민속학자 송석하의 부와 학문-문화민족주의자의 민낯을 보다』, 162쪽, 민속원, 2023.  바로가기
  • 각주 005)
    「天池湖森嚴한靈域에 聖戰完遂의祈願祭 處女登行路開拓과新發見不少 白頭山採究鍊成報告」, 『매일신보』, 1943년 8월 10일 6면 바로가기
  • 각주 006)
    「普及助長할 鄕土藝術로 鳳山탈춤 指定」, 『매일신보』, 1940년 9월 28일, 3면 바로가기
  • 각주 007)
    남근우, 「조선민속학과 식민주의: 송석하의 문화민족주의를 중심으로」, 『한국문화인류학』 35집 2호, 한국문화인류학회, 2002, 30쪽 바로가기
  • 각주 008)
    일부 현대어로 윤문함.  바로가기
  • 각주 009)
    고희성(1927-2019)은 양정중학교 산악부장으로 활동하던 1943년 백두산탐구등행단에 다녀왔으며, 한국산악회 창립멤버 중 한 사람으로 1946년 오대산-태백산맥 학술조사, 1947년 울릉도-독도 학술조사 등에 참가했다.  바로가기
  • 각주 010)
    이 내용은 필자가 2017년 7월 9일 일본 도쿄에서 고희성을 인터뷰하며 녹취한 기록이다.  바로가기
  • 각주 011)
    국토구명학술조사가 끝난 뒤인 1964년 손경석은 국토구명사업 등을 전개한 공로로 류홍렬의 추천을 받아 한국산악회를 3.1문화상 후보로 공적조서를 작성했으나, 당시 부회장이던 이민재는 “산악회의 공적이 큰 것은 사실이나 파랑도 답사, 독도 측량, 한라산 종합조사 등 모두가 그 결과 논문은 그 당시 참가한 해당분야의 학자들의 것이지 산악회의 것일 순 없으니 도장을 찍을 수 없다”며 상신을 거부했다.  바로가기
  • 각주 012)
    송석하가 광복 이후 처음으로 보인 정치적 행보는 조선과 소련의 문화교류와 친선을 표방하며 사회주의자들이 참여했던 조소문화협회다.
    이후 조선연극인대회 위원장을 역임했으나 다시 친미군정인 한국민주당 발기인이 되었다가 반이승만 계열인 조선민족청년단 전국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13)
    Knez, Eugene I, 박경·김진명 『한 이방인의 한국사랑』, 국립중앙박물관, 1997.  바로가기
  • 각주 014)
    김정태, 『천지의 흰 눈을 밟으며』, 231쪽, 케른, 1988.  바로가기
  • 각주 015)
    김수경(1919-1999)은 1940년 경성제국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경제국대학교 대학원에서 언어학을 전공했다. 해방 전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했으며 1946년 10월부터 김일성종합대학 조선어문학부 교수로 재직했다. 학술조사대에서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월북한 것이다.  바로가기
  • 각주 016)
    이용민(1916-?)은 한국산악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한국산악회 초기 산악영상을 촬영했다. 공포영화를 주로 제작한 영화감독으로 활동한 그의 대표작으로 『목 없는 미녀』(1966) 등이 있으며 『제주도풍토기』는 그가 처음으로 제작한 영화이지만 현재 필름은 남아있지 않다.  바로가기
  • 각주 017)
    위의 책 88-91쪽 바로가기
  • 각주 018)
    「산악회 주최 문교부 후원 소백산맥 학술탐사 7월 6일부터」, 『동아일보』, 1947년 7월 4일자 3면.  바로가기
  • 각주 019)
    손경석, 『등산반세기』, 83쪽, 도서출판 산악문화, 1995.  바로가기
  • 각주 020)
    한국산악회50년사 편찬위원회, 『한국산악회 50년사』, 79쪽, 한국산악회, 1996.  바로가기
  • 각주 021)
    홍성근, 「1947년 조선산악회의 울릉도 학술조사대 파견 경위와 과도정부의 역할」, 『영토해양연구』Vol. 23, 동북아역사재단, 2022.  바로가기
  • 각주 022)
    손경석, 『등산반세기』, 81쪽, 도서출판 산악문화, 1995.  바로가기
  • 각주 023)
    2017년 7월 9일 녹취.  바로가기
  • 각주 024)
    2017년 7월 9일 녹취.  바로가기
  • 각주 025)
    손경석, 『등산반세기』, 142-143쪽, 도서출판 산악문화, 1995.  바로가기
  • 각주 026)
    위의 책.  바로가기
  • 각주 027)
    한국산악회 편집문헌위원회, 『한국산악회 요람』, 한국산악회, 1980.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