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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중일한관계사료

조선 정국의 변화에 따라 불의의 사고에 대비하겠다는 서리북양대신의 서신과 조선의 난사(亂事)에 대한 용병 문제 상담 관련 첨부 문서

조선의 정국이 다시 한번 변하여 추가로 2개 영을 대동하여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고자 합니다.
  • 발신자
    署理北洋大臣 張樹聲
  • 수신자
    總理衙門
  • 날짜
    1882년 6월 29일 (음)(光緖八年六月二十九日) , 1882년 8월 12일 (光緖八年六月二十九日)
  • 문서번호
    4-2-16(498, 780b-783b)
6월 29일 서리 북양대신 장수성이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이번 달 24일 직자(直字) 20호 서신 한 건을 보냈고, 또한 26일 직자 21호 서신 한 건을 올렸으니, 모두 도착하였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날 이어서 직자 685호 비밀 서신을 받았는데, 적절한 대책과 지시를 받으니 감사하고 다행스러운 마음이 비할 데가 없습니다. 오장경 제독은 26일 저녁에 천진에 도착해서 모든 사안을 논의하였고, 오늘 정오에 천진에서 윤선을 타고 등주로 돌아갔습니다. 남양대신이 파견한 등영주(登瀛洲)・어원(馭遠) 두 척은, 상해도대가 보낸 전신 보고에 따르면 이미 북쪽으로 출항하였고, [상해도대 주(朱)의 전보에 따르면 어원(馭遠)은 선박이 이미 노후하며 등영주(登瀛洲)로 바꾸어 동원하였다고 합니다] 대략 다음 달 2, 3일 오장경 부대가 배를 탈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장수성은 조선 원조를 위해 군대를 파병하고, 대책을 마련한 상황을 오늘 이미 주접을 갖춰서 상주하였으니, 아울러 총리아문에 자문을 보냅니다. 본래 오장경이 2천 명을 이끌고 동쪽으로 가도록 지시하려고 하였는데, 뒤이어 25일 여서창이 보내온 전보를 받아보니, 왕비와 대신이 살해당하였고, 이하응이 정권을 잡았다고 하므로. 국면이 다시 한번 변하여 위엄을 보이는 것을 매우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이 때문에 오장경과 다시 논의하여 2개 영(營)을 추가로 파견하기로 논의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국왕이 무탈하여 이하응이 감히 폐위하려는 뜻을 드러내지 못하니, 천자의 뜻을 멀리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번에 수・륙의 대군이 신속히 동쪽으로 이동할 때 혹 서슴없이 사람들이 저항할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으나, 그 또한 알 수는 없습니다. 일본인이 그곳에 도착한 후 어떻게 간여하고 있는지 소식을 아직 듣지 못하였는데, 생각건대 준비하지 않고 우려하지 않으면 군대를 제대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진해관도 주복이 또한 김윤식과 필담을 주고받았고, 이를 그대로 베껴 첨부해서 올리니 살펴봐 주십시오. 이에 삼가 특별히 비밀리에 서신을 보냅니다. 편안하시길 빕니다.
 
첨부문서:
별지: 「광서 8년 6월 26일, 진해관도 주복과 조선 영선사 김윤식의 문답 필담」: 조선 난사에 대한 용병 문제를 상담하였습니다.
 
(1) 「광서 8년 6월 26일, 진해관도 주복과 조선 영선사 김윤식이 나눈 문답 필담(光緒八年六月二十六日, 津海関道周馥與朝鮮領選使金允植問答筆談)」
주복: “어제 25일 여서창이 일본에서 전보를 보내왔습니다. ‘귀국 왕비의 변고를 이야기하며 왕비와 민씨 대신 13명이 살해당하고 현재 대권이 흥선대원군 손으로 돌아갔는데, 「조・미조약」을 비준하지 않으려는 뜻이 있으며, 부산(釜山)・원산(元山) 등 관리가 일본인을 후대하는 일은 드물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현재 직예총독께서 총리아문의 주접 원고를 받았는데, 유지를 받들어서 신속히 고급・하급 무관을 파견해서 조사하도록 보냈다고 하니, 군함은 대략 오늘쯤 인천에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육군 병력은 현재 이미 준비를 마친 상황으로, 소식을 들으면 즉시 출발할 예정입니다. 다만 그러한 상황과 병력을 움직이는 시기가 마땅히 서로 부합해야만 결국 효과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난당이 몇 명인지, 흥선군과 흥인군, 이재면이 한패인지 아닌지, 국왕 폐립의 논의를 주창하려고 하는지, 조선에서 동조하는 자가 몇인지, 병력을 움직이려면 우선 식량과 말먹이가 중요하여 현지에서 취득하지 않을 수 없는데 임시로 백은(白銀)을 주면 구매할 수 있는지, 산길로 은복(隱伏)하여 병력이 진군하면 몇 개 부대로 나누어야 하는데 어떤 경로가 안정적인지, 만일 난당을 모두 섬멸하면 선후의 대책은 어떻게 마련할지, 이번 기회에 하나하나 상세하게 알려주시길 청합니다. 장차 서신으로 적어서 부대의 대원에게 전달하여 그 때에 맞춰 채용하게 하겠습니다.”
김윤식: “국사(國事)의 창망(蒼茫)함이 이 지경에 이르러, 국왕이 폐위되지 않았으나 폐위된 것이나 마찬가지며, 또한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대원군이 비록 잠시 위력(威力)으로 조정의 신하를 몰아세우겠지만, 심복하여 호응하는 사람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최초로 은밀히 결집한 흉당은 반드시 모두 죽여야 합니다. 흥선군의 일문은 결코 군량과 말먹이를 내주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국왕께서는 손이 묶인 상황이라 빈 자리를 지킬 뿐 다른 누군가 대신해서 다스리니, 반드시 한양을 공략한 다음에 가서야 호령이 실행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인천에서 한양으로 이동하는 경로는 몇 개가 있는데, 하나는 다소 평탄하나 몇 리를 돌아가고 하나는 험하나 다소 빠릅니다. 반드시 조선 사람의 길 안내를 받아야만 진군할 수 있습니다. 인천항은 수심이 얕아 군함이 20리 밖에서 정박하고 작은 배 여러 척을 구해서 병사를 싣고 건널 수 있습니다. 아마 현재 항구에 한 척의 배도 보이지 않을 수 있는데, 이것이 염려되는 바입니다. 만일 작은 배가 있다면, 배는 얕은 항구를 운항할 수 있는 것이 가장 좋고, 해안의 수비 병력은 반드시 포화(砲火)로 이들을 저지할 것입니다. 이러한 소선(小船)도 역시 소포(小砲)를 실을 수 있는지?”
주복: “듣기에 왕비 일족과 관련된 사람 가운데 상서 직을 맡은 사람이 있다던데, 그렇습니까? 살해당한 대신이 혹시 신헌(申櫶), 김홍집, 조영하처럼 같이 조약을 체결한 사람들입니까? 어윤중, 이응준(李應浚) 등이 돌아가다 변고를 당하지는 않았습니까? 귀하는 흥선군과 사이가 나쁩니까?”
김윤식: “왕비 민씨는 외교의 논의를 힘써 주장한 까닭에 독화(毒禍)가 먼저 미쳤습니다. 또 갑술(甲戌) 이래 흥선군이 항상 변고를 일으키고자 하였고, 국왕께서는 비록 이를 아셨지만 어찌할 수 없어서, 궁중은 밤에도 불이 끌 수 없었던 것이 지금까지 9년째입니다. 민씨는 항상 사안마다 무당과 박수에게 빌었고, 항상 근신들과 결탁할 것을 생각하여 포상을 내림이 자못 많았으므로, 이 때문에 나라의 원망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는 모두 화를 두려워해 스스로 보호하려는 계책이었습니다. 정말 슬픕니다! 정말 슬픕니다! 민씨 가운데 먼저 죽을 사람으로는 참판(參判) 민영익(閔泳翊)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공정하고 충실하게 나라를 위하고, 외교 업무를 처음부터 끝까지 힘써 맡았습니다. 그다음으로 상서 자리를 맡은 사람은 민영익의 숙부 민겸호(閔謙鎬)이고, 민영익의 생부는 민태호(閔臺鎬)입니다. 하지만 민태호는 본디 흥선군에 아첨하는 데 능하여 힘써 외교를 배격하는 논의에 힘을 썼으니 오히려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범이 되는 노인으로 그는 화의를 힘써서 주장한 적이 없기에 반드시 화가 미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김홍집, 홍영식 등은 분명히 죽었을 겁니다. 변원규, 이조연 등도 분명 죽었을 겁니다. 어윤중이 만약 나라 안에 있었다면 분명히 죽었을 것이고, 나도 그렇고, 처자식들 역시 이미 피해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무릇 외교에 관계된 사람은 백에 하나라도 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응준은 귀국 도중에 변란의 소식을 들었다면, 필시 감히 성에 들어가지 않았을 겁니다.”
주복: “전국이 모두 반란을 일으킬 수는 없습니다. 난당이 해구(海口)를 굳게 지키고 있더라도, 우리 병력이 차근차근 진공하는 것이 가능한데, 실제 정예 병력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국왕이 아직 죽지 않았음은 혹 흥선군이 차마 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천조의 책봉이 두려워 감히 독수를 뻗지 못한 것일 뿐입니까? 장래에 진군하는 날에 그 밖의 변동이 발생하지 않을지, 국왕은 과연 아무런 걱정 없이 안전할 수 있을지?”
김윤식: “그 부분이 가장 어렵고, 별다른 부분입니다. 그가 국왕을 시해하지 않은 것은 역시 간사한 계책이 있습니다. 하나는 천조를 두려워하는 것이고, 하나는 조선 백성의 입을 막아, 감히 위를 향해 공격할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줄곧 군대를 진군시키면 변동의 움직임이 일어날 우려도 없지는 않습니다. 이 일은 의당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지, 제 생각으로는 먼저 지시를 내려 흥선군이 중국군의 군영으로 오게 해서 일의 사정을 묻는 것입니다. 만약 그가 오면 죽이지 않고, 오지 않으면 군대를 일으켜 토벌하는데, 좋고 나쁜 사람 모두가 함께 희생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천조의 위엄이 진동하면 그 역시 두려움을 알아서 당연히 국왕에게 해를 가할 생각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주복: “군량미나 화약은 모두 휴대할 수 있고, 말먹이 역시 임시로 스스로 구할 수 있다면. 우리 군대가 한양에 들어갈 경우 인천과의 거리가 80리로, 그 도중에 마땅히 주둔해야 할 텐데, 난당의 습격을 방어할 수 있겠습니까? 조선 군대가 과연 난당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울가요? 주둔지는 요충지여야만 하고,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내려볼 수 있는 형세여야 하는데, 말먹이와 식수가 충분히 공급된다면 더욱 좋습니다. 인천에서 수도까지 거리에 몇 곳의 후보지가 있을 것 같습니다.”
김윤식: “행군할 때는 사방을 정탐하여 의심할 것이 없은 다음에야 진군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나라는 곳곳이 험준하여 방어할 만한 곳은 매우 많습니다. 비록 조선의 군대가 공격 전투에 익숙하진 않지만, 전방에서 한번 패배하면 다시 분발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만약 상륙해서 차츰차츰 진군하면 다른 우려가 없다는 점을 보증할 수 있겠습니다. 인천과 수도 사이에 군대를 주둔시킬 만한 곳은, 제가 직접 지나다녀본 적이 없어서 감히 추측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대저 땔감과 식수는 이곳 여기저기에 자뭇 풍부합니다.”
주복: “그대의 재식(才識)이면 충분히 군대를 도울만한 것 같습니다. 장차 총독께 보고해서 함께 파견할까 하는데 어떻습니까?”
김윤식: “제게 그럴만한 재식은 결코 있지 않습니다. 다만, 군을 수행하려면 하찮은 직위라도 있어야 군영에 출입하기 편할 것이고, 또한 조선에 도착한 후에 저 스스로 보호할 권력이 있어야만 훗날의 재앙을 방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김윤식과 어윤중은 잠시 하찮은 직위라도 빌려 종군하기 편하게 해주시길 원합니다.”
주복: “이번의 군사 행동은 반드시 토벌 전투가 있을 것이고, 한 장의 포고문만으로 타일러 복종시킬 수 없을까 염려됩니다. 그대는 누대로 벼슬을 한 집안의 사람으로, 저 난당은 그대가 우리 군영에 있는 것을 알게 된다면, 창끝이 그대를 가리켜 장차 원망이 그대 한 사람에게 돌아갈 것이 염려됩니다. 귀국이 위급한 상황에서, 이렇게 정직한 신하가 충성을 바치는데, 다만, 사후에 원망이 깊어져서 그대에게 불리함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총독께서 허락하셔서 함께 가게 되면, 군함에 몸을 숨기고 있어도 좋습니다. 작전 회의에 참가하되, 상륙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김윤식: “대인께서 고신(孤臣)의 정절(情節)을 살펴주셔서 마음속 깊히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현재 조선은 나라가 어지럽고 군주가 위태로우며, 집안 사람은 이미 모두 죽었으니, 또 더 이상 원망을 피하는 것을 첫 번째로 삼겠습니까? 가르침에 따라 정여창 제독의 보호를 받고자 하니, 만일 물으실 것이 있다면 당연히 아는 모든 것으로 답해드릴 것입니다. 또 우리 군주께서 만약 폐립당하는 변고가 생기면 즉, 비록 격문을 포고해서 성토하는 것이 가능하겠으나, 현재 신하된 자로서 처신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의당(원문은 여기서 중단되고 그 뒷부분의 내용은 실려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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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국의 변화에 따라 불의의 사고에 대비하겠다는 서리북양대신의 서신과 조선의 난사(亂事)에 대한 용병 문제 상담 관련 첨부 문서 자료번호 : cj.k_0003_0020_01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