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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중일한관계사료

신속하게 이하응을 체포해야 반란을 진압하고 일본이 문제를 파생시키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며 서리 북양대신이 총리아문에 보낸 서신과 관련 첨부 문서

반드시 신속하게 이하응을 획치하여 국왕이 권력을 되찾고 반란을 진압하게 해야만, 비로소 일본인이 따로 문제를 파생시키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 발신자
    署理北洋大臣 張樹聲
  • 수신자
    總理衙門
  • 날짜
    1882년 7월 14일 (음)(光緒八年七月初十四日) , 1882년 8월 27일 (光緒八年七月初十四日)
  • 문서번호
    4-3-04(520, 824b-828a)
7월 14일 서리 북양대신 장수성이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어제 조선 국왕이 보내온 자문을 받았는데, 이미 상주하여 황상께 올리고, 아울러 총리아문에도 보냈습니다만, 자문을 가져온 통사(通事)가 또한 조선의 전(前) 의약대관(議約大官) 조영하(趙甯夏)가 마건충 도대와 정여창 제독에게 보내는 서신도 전달하여 삼가 베껴 올립니다. 원 서신은 이미 그날로 진해관도 주복(周馥)에게 부쳐 넘겨주어, 해당 통사에게 질문하도록 하였는데, 그의 진술에 따르면 의주부(義州府)의 관리 역시 조(趙) 씨이며, 조영하가 여전히 생존하고 있음을 확실히 알고 있으며, 서신에서도 그것을 따로 갖추었다고 하였는데, 응당 역시 이하응의 지시에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천진에 있던 조선 사역원(司譯院)의 봉사(奉事) 최성학(崔性學)에게 물어보니, 조선 국왕이 예부(禮部)에 보내는 공문 한 통이 따로 있어. 이미 12일에 북경에 들어가 직접 전달하였고, 아울러 뒤이어 조선에서 3품 문직(文職) 관원을 파견할 것이라고 들었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7월 15일에는 조선에서 출발하여 왕비의 부고(訃告)를 알려 온다고 하는데, 역시 최성학이 여러 통사로부터 들은 이야기라고 합니다. 이상입니다. 편안하시길 빕니다.
 
삼가 다시 비밀리에 알립니다.
마침 편지를 밀봉하여 발송하려는 순간 오장경이 초8일에 보낸 서신과 더불어 김윤식과 어윤중이 탐색한 각 사정에 대한 첨부 보고를 받았기에, 살펴보시도록 삼가 베껴 올립니다. 장수성 역시 이미 부주(附奏)에서 우리 군대가 조선에 도착한 다음 조선의 인정(人情)이 우리 쪽으로 기울어지는 모습을 아뢴 바 있는데, 조영하와 김홍집이 모두 다행히 무고하여 이미 중국 부대의 주둔지를 방문하였으며, 반란의 소동은 점차 줄어드니 이하응은 이미 세력이 고립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부사 요시모토는 마침 한성에 있어 기세가 실로 서로를 압박하는 모양새인데, 어윤중이 탐문한 하나부사 요시모토의 발언은 비록 실제에 가까운 것 같지만 결국 깊이 믿기는 곤란할 것입니다. 결국 반드시 이하응을 신속하게 획치(獲致)하여 국왕이 권력을 되찾고 반란을 진압하게 해야만, 비로소 일본인이 엿보거나 따로 다른 문제를 파생시켜 대처가 더욱 어려워지는 일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장수성은 이미 오장경 등에게 상세하게 서신을 보내 신속하고 적절하게 처리하여 상황 변화에 대응하되, 마건충 도대가 한성에 먼저 들어가고 오장경 부대가 뒤를 이어 진군하게 하였습니다. 만약 상황에 대한 새로운 보고가 있으면 그때 다시 신속하게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상입니다. 다시 편안하시길 빕니다.
별지: 「조선의 조영하(趙寧夏)가 정여창 제독, 마건창 도대에게 보낸 서신」: 조선 난병의 봉기 및 이하응의 난병 해산 상황.
 
(1) 「조선의 조영하가 정여창 제독, 마건창 도대에게 보낸 서신(朝鮮國趙寧夏致丁提督汝昌·馬道建忠書)」주 001
각주 001)
조영하(趙寧夏, 1845~1884)는 자가 기삼(箕三), 호가 혜인(惠人)으로 신정왕후(神貞王后) 조대비의 조카이다. 1863년(철종 14)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이후 통리기무아문당상, 독판군국사무, 공조판서, 지중추부사 등을 지냈다. 민씨 척족과 결탁하여 대원군 세력 축출에 앞장섰으며, 1874년 대원군이 실각하고 고종의 친정이 선포되자 금위대장에 발탁되고, 이어 무위도통사(武衛都統使)를 겸하였다. 1875년 훈련대장이 되고, 1876년 지경연사(知經筵事)・공조판서, 예조판서, 공조판서를 지내고, 1880년 이조판서・한성부판윤・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같은 해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이 신설되자 통리기무아문당상이 되고, 1882년 전권대관(全權大官)으로 일본의 변리공사(辨理公使) 하나부사(花房義質)와 그리고 「조・미수호조약」 체결 예비교섭차 인천에 도착한 마건충(馬建忠)과도 접견하였다. 그 뒤 같은 해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이 다시 집권하자 지삼군부사로 좌천되었다가, 다시 대청 외교의 사무를 전담함으로써 국왕과 민씨 척족의 신임을 받았다. 이후 관세・외교 담당 고문으로 독일인 묄렌도르프(P. G. von. Mollendorf)를 초빙, 입국하게 하였고, 청과 「중국・조선상민수륙무역장정(中國・朝鮮商民水陸貿易章程)」을 의정(議定)하였는데, 갑신정변 때 피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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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창(丁禺亭) 제독, 마건창 관찰 두 분 대인께.
배 위에서 이별한 추억이 그윽한데, 바다의 달이 마침 둥글어질 때 황급하게 보내주신 서신을 받으니, 그리운 마음이 더욱 간절해집니다. 조선은 최근 불행한 일이 있어 병졸과 백성이 반란을 일으켜 재상과 고위 관료를 살해하고 그 집을 파괴하여 순식간에 거의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한데다가, 홀연히 다시 분노의 감정을 옮겨 먼저 일본인을 살해하고 나아가서는 왕궁을 침범하였습니다. 곳곳에 소리를 지르면서 들이닥쳐, 왕비께서 불행하게 서거하셨으니, 이것은 고금 이래의 세계에서 있어 본 적이 없는 큰 변고입니다. 차마 어찌 이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 때의 상황에서 종사가 중요하므로 먼저 진무(鎮撫)를 행하여 마침내 차츰 수그러들기는 하였지만, 지금 저 조영하 같은 경우는 죽지 못해 남은 여생(餘生)으로 어찌 감히 붓을 들어 그 만에 하나라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불 분주하게 자문을 보내 자연스럽게 사정을 전달하는 것에, 그래도 한두 가지 아뢸 것이 있어 따로 갖추었으니, 받아 살펴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거센 바람을 맞고도 간신히 붙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지만, 이윽고 좀 더 기다려 계속 소식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삼가 편안하시기를 여쭙니다. 공경하지 못한 글을 드렸습니다. 제대로 상세히 다루지는 못하였습니다.
임오년 6월 19일. 조영하가 인사드립니다.
 
다시 갖춥니다.
변란이 일어났을 초기에는 그 기세를 막기 어려웠으나, 다행히 대원군이 날카로운 칼끝을 피하지 않고 몸소 거듭된 포위를 뚫고 안에 들어가 명분으로 이들을 깨우치자 마침내 완고한 무리가 감동하여 물러나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는 실로 종사와 백성의 큰 복입니다. 하지만 각국과의 조약을 염두에 둘 때 영원히 화호(和好)의 관계를 닦고, 힘써 장래에도 국체를 보존해야 합니다. 각하께서 임무를 맡아 왕림하였는데 우리 대원군과 면담을 갖지 못해 혹은 구애받거나 할 수도 있지만, 창고의 곡식을 쏟아부어 서로 돕고, 광대뼈와 턱처럼 서로 의존하는 관계라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고 아프고 가려운 것까지 조금도 서로에게 숨김이 없어야 비로소 중외일체(中外一體)가 될 수 있으니, 만약 나라에 이롭다면 응당 예의를 갖추면서 일을 처리할 것입니다. 편지는 말을 다 할 수 있는 도구가 아니고, 말은 모든 뜻을 다 전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니, 귀하께서 양해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광서 8년 7월 12일 도착.
별지: 「김윤식이 어윤중이 탐문한 각 사정에 대해 진술한 절략」: 중국이 반란 국면을 진무(鎭撫)하려면 오로지 군사적 위력으로 임해야만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습니다.
 
(2) 「김윤식이 어윤중이 탐문한 각 사정에 대해 진술한 절략(金允植述魚允中所探各情節畧)」
반란이 처음 일어난 것은 흥선군이 군심을 격변시킨 데서 비롯되었고, 이 반란의 우두머리[窩主]가 자칭 국태공을 칭하면서, 국권을 장악하고 일본 공사를 강박하여 쫓아낸 다음, 혹은 물의가 커질까 두려워 사람을 보내 해명하면서 난민에게 죄를 돌렸습니다. 일본 군대가 한성에 들어오자 흥선군은 누차 통호(通好)의 뜻을 비치었으나, 일본인이 응하지 않자 세력이 고립되어 있음을 자각하게 되었으며, 중국이 군대를 파견하여 지원하여 보호한다고 하자, 이쪽으로 마음을 기울여 친부(親附)하려는 뜻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지금 대관(大官) 조영하와 부관(副官) 김홍집을 파견하여 종전처럼 영접하면서 몹시 원만한 관계를 원하는 성의를 보이고 있습니다. 또한 그 뜻은 중국의 군사력 위세를 빌어 일본군을 공격하여 물리치려는 것이니, 정말 이렇게 어리석습니다. 현재 난국의 정돈은 반드시 용병(用兵)할 필요는 없고 단지 군사적 위협으로만 임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본군 쪽에도 역시 조선의 김옥균(金玉均), 서광범(徐光範) 두 사람이 있는데, 이 두 사람은 뜻을 같이하는 친구로 그들이 조정하면 반드시 의외의 말썽이 생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윤중 또한 하나부사를 가서 만났는데, 그 말에 의하면, 일본은 처음 이 일을 들었을 때 대규모의 병력으로 내침(來侵)하고자 하였는데,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주 002
각주 002)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1825~1883)는 일본의 정치가로 유신 10걸 가운데 한 사람이다. 메이지 정부의 외무경(外務卿)으로 조약개정을 위해 스스로 특명전권대사가 되어 기토 다카요시(木戸孝允)・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과 함께 1871년부터 1월 10개월에 걸쳐 구미 각국을 방문한 이와쿠라 사절단(岩倉使節團)을 이끈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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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노우에 가오루가 힘껏 안 된다고 반대하여, 단지 1,3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와 스스로 지킬 권리로 삼게 되었다고 합니다. 일본의 뜻 역시 오로지 국왕에 권력을 돌려주는 데 있으며, 내정에 간섭할 생각은 없다는 것입니다. 중국이 이를 틈 타 사태를 진정시키면 정상적이고 올바른 일 처리로 병력을 이용할 필요도 없고 다툼의 구실도 주지도 않을 수 있으니 혹시 또한 우리에게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진신(縉紳) 가운데 피살된 사람은 흥인군(興寅君), 민겸호(閔謙鎬). 김보현(金輔鉉), 민창식(閔昌植) 등 몇 사람이 이외에 민영익(閔泳翊)이나 홍영식(洪英植) 등은 다행히 화를 피할 수 있었으며, 김홍집 역시 그 자리에서 도피하여 집 건물이 파괴되기는 하였지만, 나중에 슬슬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 여러 사람이 모두 화를 면한 것은 정말로, 정말로 다행입니다. 이곳 백성들은 흩어지고 집이 비어 있어 군대에 필요한 물품도 사들일 곳이 없습니다. 듣기에 대원군은 정권을 탈취한 다음 부민(富民)의 쌀과 돈을 강제로 빼앗아 한성에 쌓아 두고 있는데, 그 물량이 적지 않으며, 아마 난당의 병정들에게 나누어주어 군심을 수습하려는 생각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렇게 군량을 옮겨 충당하는 것은 안 될 일은 아니지만, 지금 그 세력이 고립되어 위태로운 것을 염려하여 중국을 흘겨보고 있으니, 제(김윤식)가 줄곧 배 안에 숨어 있다가 혹시라도 정탐당하면 도리어 의심을 살 수 있는 빌미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어윤중 등과 함께 군대를 따라 입경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게 하고, 기회를 보아 양가의 권속을 돌보아 역시 화를 피하게 하는 것이, 특히 스스로 외부 인사로 보아 그들과 거리를 둔다는 혐의도 없앨 것입니다.
별지: 「오장경 제독이 조선에서 장수성에게 보낸 서신」: 1) 군함을 조선에 보내고 탐색하게 하였는데 일본이 아직 반격하는 상황은 보이지 않습니다. 2) 만약 대원군을 사로잡을 수 있다면, 반란은 쉽게 진정되고 또한 일본인의 협박을 막을 수도 있습니다.
 
(3) 「오장경 제독이 조선에서 장수성에게 보낸 서신(吳提督長慶自朝鮮來函) (7월 13일 도착)」
초4일 연대에서 보낸 서신 한 통은 일찌감치 받아보셨을 줄 압니다. 이날 각 부대가 배에 오르는데, 등주(登州)의 해탄(海灘)이 아주 넓어 윤선이 해안에서 4, 5리 떨어져 있는 데다가, 병력을 옮겨 나르는 박선(駁船)은 겨우 십여 명, 수십 명이 탈 수 있을 뿐이고, 모든 군수 물자와 기계를 싣는 게 더욱 곡절이 많아, 미각(未刻, 오후 1~3시)이 돼서야 배가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이 날 석탄을 추가로 싣고자 연대에 잠시 머무를 때, 동해관도(東海關道) 방우민(方佑民) 도대와 후속 군수 지원 문제를 대략 상의하였습니다. 초5일 진각(辰刻, 오전 7~9시)에 출발하였는데, 바람과 파도가 크게 일어, 병용(兵勇) 가운데 배에 쓰러진 사람이 십중팔구여서, 잠시 위해위(威海衛)에 닻을 내리고 바람을 피하였습니다. 초6일 진각에 바람이 가라앉자 윤선이 출발하였으므로, 저녁 무렵에야 바다가 잔잔해졌고, 뒤이어 초7일 진각에 조선의 인천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때 이미 일본 선박 7척, 육군 1개 영이 주둔해 있었으므로 우리 부대가 만약 같은 곳에 머무르면 불편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약 60~70리 떨어진 남양(南陽)의 경계 내에 머물렀는데, 마산포(馬山浦)와 약 30리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민간 선박이 많지 않고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대체로 약 3장주 003
각주 003)
1丈은 10척인데, 오늘날 기준으로 하면 약 3.3m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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쯤 되었습니다. 따라서 왕복하려면 모두 조수의 흐름을 기다려야 하는데, 계산해 보면 조수가 한번 바뀔 때 겨우 1~2개 영 정도의 병력을 싣고 상륙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즉시 각 윤선의 삼판(舢板)을 준비하게 하여, 조수를 틈타 먼저 1개 영을 상륙시켜 잠시 주둔케 함으로써 차근차근 전진하는 기지로 삼게 하였습니다. 듣기에 남양부(南陽府)에서는 십여 척의 선박을 준비하여 이용할 수 있게 하였는데, 제가 본 민간 선박으로 계산하건대 역시 아마 그리 크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불편함은 특히 몹시 수고롭게 하므로, 대고(大沽)에 현재 있는 광정(廣艇) 가운데 견고하여 쓸만한 배 몇 척과 수수(水手)를 추가하여 빠른 시간 내로 조선에 보내주어 병력 등을 옮기는 데 도움을 줄 수 있기를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조선과 일본의 상황은 어윤중이 비밀리에 탐문하여 확인한 바에 의하면, 마건충 도대가 이야기한 것과 다르지 않아, 일본군은 초3일 한성에 들어갔고, 국왕과 이하응이 모두 접견하지 않았는데, 아마 중국의 지원을 믿고 우리 부대의 도착을 기다리는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 사람들은 우리 대군의 도착 소식을 듣고 환호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런 사정을 볼 때 실로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시기입니다. 하지만 일본군이 이미 입성하였으므로, 비록 어윤중이 탐문한 바에 의해 하나부사가 따로 무슨 반격의 상황을 보이지는 않는다고는 하지만, 우리 부대는 멀리서 이동해 왔으므로, 부득불 조금은 신중한 태도를 통해 변고를 막아야 할 것입니다. 마침 마건충 도대와 상의하여 결정하길, 내일 아침 2개 초(哨)의 부대를 보내, 마건충과 함께 한성으로 달려가 자세하게 동정을 살펴보고, 오장경 부대는 배치가 대략 정해지면 즉시 진격하여 이하응이 세력이 고립되고 힘이 다한 때에 쉽게 기세를 제압하자고 하였습니다. 다만 이 사람을 처치하면 반란이 진정되고 또한 일본인의 협박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윤중이 탐문한 각 사정에 대해서는 따로 기록해 올려서 살펴보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오장경은 감히 우완(迂緩)함으로 기회를 놓치고자 하지 않으며, 또한 경솔함으로 일 처리를 그르치고자 하지 않습니다.
 
첨부합니다. 오장경은 오늘 오각(午刻, 정오, 또는 11~1시)에 남양에 상륙하여 주둔하는데, 그 곳에는 조선의 대관 조영하와 부관 김홍집이 와 있으며, 국왕이 각종 군사 업무를 처리하도록 파견하였으니 또한 이들을 통해 조선의 최근 사정을 알아보고 상황에 따라 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오장경이 다시 알립니다.
초8일 진각.

  • 각주 001)
    조영하(趙寧夏, 1845~1884)는 자가 기삼(箕三), 호가 혜인(惠人)으로 신정왕후(神貞王后) 조대비의 조카이다. 1863년(철종 14)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이후 통리기무아문당상, 독판군국사무, 공조판서, 지중추부사 등을 지냈다. 민씨 척족과 결탁하여 대원군 세력 축출에 앞장섰으며, 1874년 대원군이 실각하고 고종의 친정이 선포되자 금위대장에 발탁되고, 이어 무위도통사(武衛都統使)를 겸하였다. 1875년 훈련대장이 되고, 1876년 지경연사(知經筵事)・공조판서, 예조판서, 공조판서를 지내고, 1880년 이조판서・한성부판윤・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같은 해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이 신설되자 통리기무아문당상이 되고, 1882년 전권대관(全權大官)으로 일본의 변리공사(辨理公使) 하나부사(花房義質)와 그리고 「조・미수호조약」 체결 예비교섭차 인천에 도착한 마건충(馬建忠)과도 접견하였다. 그 뒤 같은 해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이 다시 집권하자 지삼군부사로 좌천되었다가, 다시 대청 외교의 사무를 전담함으로써 국왕과 민씨 척족의 신임을 받았다. 이후 관세・외교 담당 고문으로 독일인 묄렌도르프(P. G. von. Mollendorf)를 초빙, 입국하게 하였고, 청과 「중국・조선상민수륙무역장정(中國・朝鮮商民水陸貿易章程)」을 의정(議定)하였는데, 갑신정변 때 피살당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2)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1825~1883)는 일본의 정치가로 유신 10걸 가운데 한 사람이다. 메이지 정부의 외무경(外務卿)으로 조약개정을 위해 스스로 특명전권대사가 되어 기토 다카요시(木戸孝允)・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과 함께 1871년부터 1월 10개월에 걸쳐 구미 각국을 방문한 이와쿠라 사절단(岩倉使節團)을 이끈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3)
    1丈은 10척인데, 오늘날 기준으로 하면 약 3.3m정도이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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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속하게 이하응을 체포해야 반란을 진압하고 일본이 문제를 파생시키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며 서리 북양대신이 총리아문에 보낸 서신과 관련 첨부 문서 자료번호 : cj.k_0003_0030_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