Ⅵ. 필리핀 민족운동

필리핀은 마젤란(Ferdinand Magellan, 1480~1521)에 의해 ‘발견’ 되었다. 1565년 스페인 군대가 상륙하여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이후 380여년간 필리핀은 스페인, 미국,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되었다. 330 여년의 스페인 식민 통치 기간 필리핀의 농민들과 회교도들은 끊임없이 저항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19세기 유럽의 자유주의와 남아메리카에서 여러 나라가 독립을 쟁취하자 필리핀에서도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는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독립 운동이 더욱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 민족주의 운동의 주체는 필리핀계 가톨릭 성직자, 스페인 유학생, 농민들이었다. 초기의 대표적 지도자는 호 세 리살(Jose Rizal, 1861~1896) 이었는데, 1892년 필리핀민족동맹을 조직하여 사회개혁운동을 지도하다가 체포되었다. 보니파시오(A. Bonifacio) 와 아기날도(Emilio Aguinaldo, 1869~1964)는 1896년 민족주의 비밀결사 카티푸난(Katipunan)을 조직하여 스페인 지배세력, 성직자와 대지주에 대항하여 혁명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아기날도는 홍콩으로 망명 하였다. 이에 연루된 혐의로 호세 리살이 사형을 당하자 필리핀인들이 대규모로 봉기하였다. 이에 힘입어 아기날도는 홍콩에서 1897년과 98년두 차례에 걸쳐 필리핀 공화국의 독립을 선포하였다.
1898년 미국이 스페인과 전쟁을 벌이자 아기날도가 이끄는 필리핀 혁명군은 미국을 도와 스페인군을 물리쳤다. 이에 필리핀은 독립을 선포하고 혁명정부를 구성하고 아기날도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이어 헌법을 제정하고 1899년 1월 필리핀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군정을 실시하였다. 이에 필리핀 혁명정부는 1899년 2월부터 미국과 격렬한 독립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1901년 3월 아기날도 대통령이 미군에 체포되었고, 감금된 상태에서 그는 교전 종식을 선언하고 미국의 지배권을 승인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후에도 무장 저항은 계속되었는 데 1902년 4월에 이르러서 종결되었다.^{주 882}

각주 882)

권오신(2000), 『미국의 제국주의 : 필리핀인들의 시련과 저항』, 문학과 지성사, 27~67쪽.

이후 미국의 식민 지배에 대한 저항은 일부 게릴라에 의한 산발적 투쟁에 머물렀다.
미국은 필리핀의 식민 지배에서 ‘당근과 채찍’ 을 병용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미국의 통치를 거부하는 혁명적 민족주의 세력에 대해서는 탄압을 가하는 대신, 자치를 약속하면서 급진주의자들을 제도권 내로 포섭하는 정책을 취했다. 이에 1903년에는 지방 선거가 실시되었고, 1907년에는 국회의원 선거가 시행되어 필리핀 국회가 구성되었다. 제한적으로나마 정치활동이 허용되 면서 1906년 완전하고 즉각적인 독립을 목표로 한 민족당이 결성되었다. 민족당은 미국과의 합병을 주장하는 연방당을 매국당이라고 비판하였다. 이에 연방당은 미국과의 합병이라는 정강을 폐기하고 진보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들 세력들은 민족운동의 주도권 획득을 위한 경쟁을 하다가 협력 하면서 미국으로부터 자치정부를 수립할 수 있도록 인정받기 위한 장기적 운동으로 방향을 바꾸었다.^{주 883}

각주 883)

권오신, 위의 책, 113~114쪽.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필리핀의 민족지도자들은 미국에 독립을 청원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8년 필리핀 의회는 필리핀의 독립에 관한 문제를 연구하고 미국과 협상하기 위해 독립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 위원회의 주된 활동은 미국에 독립사절단을 파견하는 것이었는데, 1919년 초부터 1935년 필리핀 과도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11차례에 걸쳐 사절단이 파견되었다. 그러나 사절단의 독립 요구는 미국에 의해 번번이 거절되었다. 이에 1927년 필리핀의회는 완전하고 즉각적인 독립을 위한 국민투표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식민지 총독과 미국 대통령은 이를 무시하였다. 이에 필리핀인들의 분노가 폭발하였고, 1930년 독립의회가 구성되기에 이르렀다. 2차례에 걸쳐 열린 독립의회에서는 독립 결의안을 통과시킴과 동시에 케존(Manuel L. Quezon)을 단장으로 한 사절단을 미국에 다시 파견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도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주 884}

각주 884)

권오신, 위의 책, 184~192쪽.

1930년대 미국은 경제공황으로 위기를 맞이하였다. 필리핀에서의 값싼 농산물 수입으로 생계의 위협을 느낀 농민 단체들은 필리핀의 독립을 지지 하였다. 이 결과 미국에서는 필리핀을 10년간의 준비기간을 거친 후 독립시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1934년 7월 선거를 통해 제헌의회가 구성되어, 1935년 2월 헌법을 제정하였다. 이 헌법에 의해 시행된 선거를 통해 11월 케존 대통령과 부통령 오스메나(Sergio Osmena) 가 이끄는 독립 과도정부가 출범하게 되었다.^{주 885}

각주 885)

권오신, 위의 책, 211~214쪽.

이로써 식민지 총독 체제는 종식되었다.
미국의 협조 아래 독립을 준비하고 있던 필리핀 과도 정부는 일본의 침략으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1941년 12월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4시간 뒤 필리핀을 기습 공격하였다. 곧이어 1월 3일 일본군은 마닐라를 점령하였다. 일본의 공격에 대해 미국은 필리핀의 독립을 지원 할 것을 선언함으로써 필리핀인들을 대일전쟁에 참여시키고자 하였다. 필리핀 정규군과 예비군은 미국군에 통합되어 대일전쟁을 수행하였다. 그러 나 1942년 5월 필리핀은 일본군에 의해 완전 점령당하였다. 케존 대통령이 이끄는 과도정부는 오스트레일리아를 거쳐 미국의 샌프란시스코로 망명하였다. 필리핀은 다시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되었다.^{주 886}

각주 886)

권오신, 위의 책, 254~264쪽.

일본은 필리핀을 백인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킨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군정을 실시했다. 일본은 필리핀의 저항을 약화시키고 군정을 안정화시킬 목적으로 협력에 대한 보상으로 독립을 인정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1943년 6월 일본 군정 당국에 의해 신필리핀봉사대 내에 라우렐(Laurel)을 의장으로 하는 필리핀독립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이어 9월 필리핀공화국 헌법이 제정되었으며 단원제로 구성된 국회에서 공화국 대통령으로 라우렐을 선출 하였다. 10월 라우렐 대통령은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공화국 수립을 선포 하였다. 이로써 일본의 군정은 형식적으로는 종식되었지만, 사실상의 통수권은 일본군에 있어 필리핀은 일본군의 통제를 받았다.
일본은 1944년 9월 위성정부에 대해 대미·대영 선전포고를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라우렐대통령은 명목상의 선전포고만 하였고 군을 징집하지 않 았다. 또 선전포고안의 승인을 위한 국회가 소집되었으나 대다수의 국회의원이 불참하여 정족수를 채우지 못했다. 필리핀 정부가 전쟁 참여에 비협족적인 태도를 취하자 일본은 친일적인 필리핀애국동맹을 조직하여 필리핀공화국 정부를 무너뜨리려고 했으나 실패하였다.^{주 887}

각주 887)

권오신, 위의 책, 272~277쪽.

필리핀인들은 일본의 군사점령에 대해 무장으로 저항하였다. 게릴라들의 무장 투쟁은 미군과의 협력 속에서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미국에 망명한 필리핀 정부는 1944년 8월 케존 대통령이 사망한 이후에는 오스메나가 이끌었다. 망명 정부의 선전 활동은 필리핀인들의 항일 무장투쟁을 고무하였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 사령관이 이끄는 미군은 1944년 10월 필리핀에 진주한 이후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한 끝에 1945년 2월 마닐라를 탈환하였다. 패퇴한 일본군은 라우렐과 위성정부 내각 요인을 억류하였다가 일본으로 데려갔다. 라우렐은 일본이 항복하자 정부를 공식으로 해산했다.
미국에 망명 중인 정부 요인들은 미군과 함께 1944년 10월 레이테만(Leyte Gulf)으로 귀국하여 1945년 2월 27일 독립과도정부가 마닐라에서 재수립되었다. 이로써 군사령관으로 필리핀 정부를 대표하던 맥아더 사령관은 과도정부 대통령인 오스메나에게 권력을 이양했다. 1945년 7월 4일 잔여 일본 세력이 미군에 의해 제거됨으로써 필리핀은 완전히 해방되었다.^{주 888}

각주 888)

권오신, 위의 책, 277~290쪽.

과도 정부는 미국의 재정적 지원을 받으면서 독립국가로서의 기초 작업을 추진하였다. 해방 후 감옥에서 풀려난 로하스(Manuel Roxas, 1892~1948)가 미국의 지원을 받아 새로운 민족지도자로 부각되었다. 1946년 4월 23일 시행된 선거에서 로하스가 이끄는 자유당이 승리를 거두어 로하스가 대통령에, 퀴리노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5월 28일 로하스는 과도정부의 마지막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7월 4일 미국의 독립기념일에 필리핀이 미국으로부터 정식으로 독립하자 로하스가 필리핀공화국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이로써 필리핀은 380년간 지속된 식민통치를 벗어나 독립을 성취하게 되었다.^{주 889}

각주 889)

권오신, 위의 책, 292~30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