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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1. 압록강 중상류의 자연지리와 환경

1. 압록강 중상류의 자연지리와 환경

1) 자연지형과 기후환경의 특성
고구려는 압록강 중상류 일대에서 발흥했는데, 이곳에 널리 산재한 고구려 초기의 적석묘(積石墓)와 성곽은 이를 잘 보여준다(지도 2, 지도 3). 지도 1에서 보듯이 이 지역은 만주와 한반도에 걸친 접경지역으로 백두산에서 뻗어 내린 중국 쪽의 장백산맥(長白山脈), 그 지맥인 노령산맥(老嶺山脈)과 용강산맥(龍崗山脈), 북한 쪽의 낭림산맥과 강남산맥 등의 산줄기가 크게 발달하여 험준한 산악지형을 이룬다.
지도2 | 압록강 중상류의 고구려 적석묘 분포도(여호규, 2014)
- [渾江 유역] 1. 高力墓子 2. 上古城子 3. 望江樓 4. 連江村 5. 大荒溝 6. 楊家街 7. 五道河子 8. 溤家堡子 9. 川里 10. 蔡我堡 11. 董船營 12. 灣灣川 13. 聯合 14. 大靑溝 15. 大把 21. 橫路九隊 22. 母背嶺 23. 潘家街 24. 繁榮 25. 下龍頭 26. 南頭屯 27. 江沿村 28. 萬發撥子 29. 向陽村
[압록강 중류 유역] 31. 涌溝일대 32. 下活龍 33. 上活龍 34. 남상리 35. 고산리 36. 분토 37. 미타동 38. 별오리 39. 문악리 40. 長川 41. 蒿子溝 42. 良民 43. 조아리 44. 서해리 45. 연풍리 46. 토성리 47. 장성리 48. 호하리 49. 법동리 50. 신풍동 51. 송암리 52. 舍長里 53. 老虎哨 54. 地溝·弓潦川·楡林河河口 55. 新川洞 56. 운평리[운해천동] 57. 연무리 58. 古馬嶺 59. 太平溝 60. 大高力墓子·小高力墓子 61. 高地 65. 공귀리 66. 심귀리 67. 남파동 68. 내평 69. 간평 70. 풍청리 71. 하천장 72. 연상리 73. 미타골 74. 연하리 75. 양강동 76. 용연동 77. 만호동 78. 덕암동 79. 관평리 80. 동서리
[압록강 상류 유역] 81. 賈家營 82. 長川 83. 砬臺 84. 東甸子 85. 西馬鹿泡子 86. 龍崗 87. 七道溝 88. 十二道溝 89. 安樂 90. 干溝子 91. 良種場 92. 金華
[松花江 상류 유역] 93. 新安村
[청천강-대동강 상류 일대] 95. 용호동 96. 상초리 97. 소민리 98. 묵방리 99. 봉창리
지도3 | 압록강 중상류의 고구려 성곽 분포도
- [集安 지역]1. 國內城 2. 山城子山城 3. 覇王朝山城 4. 望波嶺關隘 5. 關馬墻關隘 6. 大川哨所 7. 七個頂子關隘 8. 灣溝老邊墻關隘 9. 長川古城 10. 良民古城
[桓仁 지역] 11. 五女山城 12. 下古城子城 13. 蝲哈城址 14. 馬鞍山城 15. 高儉地山城 16. 城墻砬子山城 17. 瓦房溝山城 18. 北溝關隘 19. 東古城과西古城
[新賓 지역] 21. 黑溝山城 22. 四道溝山城 23. 轉水湖山城 24. 孤脚山山城
[通化 지역] 31. 自安山城 32. 赤柏松古城 33. 建設山城 34. 南台古城 35. 太平溝門古城 36. 依木樹古城 37. 英戈布山城 38. 二道溝門關隘 39. 石湖關隘
[臨江 지역] 41. 臨城古城 42. 樺皮甸子古城 43. 夾皮溝古城 44. 東馬鹿村古城
[長白 지역] 51. 八道溝鎭山城 52. 十二道灣關隘 53. 十四道溝古城/關隘
백두산에서 발원한 압록강은 총길이 790km, 유역 면적 3만 1,739km²로 한반도에서 가장 긴 강이지만, 하류 유역을 제외하면 넓은 평야가 거의 발달하지 않았다. 백두산에서 중강진에 이르는 구간은 백두산의 화산 활동으로 형성된 현무암지대로 해발고도가 1,000m 이상인 험준한 산악지대이다. 중강진 이후 구간도 압록강 연안 남쪽에는 강남산맥, 북쪽에는 노령산맥과 용강산맥 등 여러 산줄기가 동북에서 서남으로 내달리며 험준한 산악지형을 이룬다.
압록강 중상류 일대는 험준한 산악지대로 농사짓기에 열악한 자연환경이다. 이에 흔히 이 지역은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넓은 들판이나 비옥한 토지는 적어” 산골짜기를 따라 거주하던 고구려인들이 “부지런히 농사지어도 식량이 충분하지 못했다”고 전한다.주 001
각주 001)
『삼국지(三國志)』 권30 위서 동이전 고구려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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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건국지인 환인(桓仁) 지역에는 해발 1,000m 이상 봉우리만 64좌이며(桓仁滿族自治縣文物志編纂委員會, 1990), 두 번째 도성이 위치했던 집안(集安) 지역의 경지율은 6.6%에 불과하다(吉林省文物志編委會, 1984d).
그렇지만 이 지역이 험준한 산악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압록강 본류와 그 지류인 혼강(渾江), 독로강, 자성강 등지에는 곳곳에 상당히 넓은 충적평지가 형성되어 있다. 초기 중심지였던 환인 지역에는 부이강(富爾江), 아하(雅河), 육도하(六道河) 등이 혼강으로 흘러들면서 곳곳에 충적평지를 펼쳐 놓고 있는데, 환인분지는 최대 직경이 10여 km에 이를 정도로 상당히 넓다. 집안시 일대에도 무수한 소하천이 압록강이나 혼강으로 흘러들며 곳곳에 충적평지를 형성하고 있는데, 집안분지는 폭 2~4km, 길이 16km에 이른다.
환인과 집안 지역은 기후도 만주의 다른 지역에 비해 좋은 편이다. 환인과 집안의 연평균기온은 6.2~6.3˚C로 만주에서는 상당히 온난하며, 집안분지 일대는 ‘만주의 소강남(小江南)’이라 불릴 정도로 따뜻한 편이다. 연강수량도 900~1,000mm 전후로 만주 지역에서는 강수량이 풍부한 다우지역에 속하고, 서리가 내리지 않는 무상일수(無霜日數)도 140~160일로 농사짓기에 부족함이 없다.
산간지대에는 산림이 울창하며 집안 지역의 경우 수종이 600여 종에 이른다. 울창한 숲속에는 곰, 멧돼지, 노루, 사슴, 토끼 등 다양한 야생동물이 서식하고 있으며, 각종 약초와 야생과일도 풍부하게 산출된다. 울창한 산림 사이를 흐르는 압록강과 그 지류는 수량이 풍부해 잉어와 붕어 등 각종 어류가 서식하고 있다(吉林省文物志編委會, 1984d; 集安縣地方志編纂 委員會, 1987).
시조 주몽(朱蒙)이 부여에서 남하해 지금의 환인분지인 졸본천(卒本川)을 둘러보고 “토양이 기름지고 산천이 험준하다”고 했다거나주 002
각주 002)
『삼국사기(三國史記)』 권13 고구려본기 제1 동명성왕 즉위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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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명왕이 지금의 집안분지인 국내 지역으로 천도하면서 “산천이 험준하고 토양이 오곡을 짓기에 알맞고 사슴·물고기 등이 풍부하다”라고 했다는 것은주 003
각주 003)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 제1 유리명왕 21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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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역이 험준한 산간지대이면서도 농경에 적합하며, 수렵과 어로 자원이 풍부했음을 잘 보여준다.
이 지역 주민들은 이러한 자연환경을 바탕으로 일찍부터 강 연안의 충적평지를 터전 삼아 농사를 지으며 가축 기르기, 사냥, 물고기잡이 등을 병행하며 생활을 영위했다. 이 지역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는 바닥이 평평한 빗살무늬토기를 비롯하여 돌도끼나 돌괭이 등의 농공구, 그물추, 돌화살촉 등이 출토되고 있다. 특히, 두께가 얇은 돌괭이가 대량으로 출토되고 있어 농경의 비중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고, 그물추와 화살촉은 어로와 수렵을 병행했음을 알려준다.
청동기시대에 들어서면 토기와 석기 제작기술이 더욱 발전했다. 다양한 용도의 석기를 대량생산함으로써 농경이 발달했고 주민집단 상호간에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다만 이 지역의 청동기시대 유적에서는 대부분 석기만 다량으로 출토되며 청동기는 거의 없거나 극히 소량만 출토되고 있다. 본격적인 청동기시대로의 진입이 주변의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었던 것이다.
다른 지역보다 뒤늦게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로 진입했지만, 이 지역에는 구리와 철 등의 지하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어서 금속기를 자체 제작할 여건이 마련되어 있었다. 통화(通化) 소도령(小都嶺)유적이나 만발발자(萬發撥子)유적에서 석제 용범(鎔范)이 다량 출토된 것에서 보듯이(滿承志, 1987; 中國 國家文物局 主編, 2001) 청동기를 자체적으로 제작했다. 또한 독로강변의 노남리 쇠부리터에서 보듯이 철기도 자체 제작하여 사용했다.
이 지역은 서북으로는 요동 지역, 동남으로는 동해안으로 통하는 동서 교통로상의 중심지이다. 서쪽으로는 서해, 서남으로 대동강·재령강 유역의 평야지대, 북쪽으로는 송화강 유역의 대평원지대나 요하 상류 방면의 초원지대로 통할 수 있다. 이러한 지리적 위치는 이 지역 주민에게 일찍부터 주변 지역과 활발히 교류하고, 고구려 건국 이후에는 사방으로 영역을 확장할 토대를 제공했다.
 
2) 압록강 수로망과 수운교통
압록강 중상류 유역은 산간지대이기 때문에 육로만 놓고 본다면 험준한 산줄기를 넘어야 하므로 각 지역 사이에 소통이 매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압록강과 그 지류는 수량이 풍부하기 때문에 배를 이용해 쉽게 왕래할 수 있었다. 제15대 미천왕(美川王) 을불이 백부인 봉상왕의 박해를 피해 다니며 소금장수를 할 때, 배를 타고 압록강 본류와 그 지류인 비류수(沸流水: 渾江)를 넘나들었다는 이야기는 이를 잘 보여준다.주 004
각주 004)
『삼국사기』 권17 고구려본기 제5 미천왕 즉위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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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압록강 수로를 활발히 이용한 사실은 3세기 전반 손오(孫吳)와의 관계를 통해 엿볼 수 있다. 고구려는 230년대에 요동 지역의 공손씨(公孫氏) 정권을 협공하기 위해 남중국의 손오와 교류했는데, 안평구(安平口)를 통해 사신과 물자를 주고받았다.주 005
각주 005)
『삼국지』 오서(吳書)2 오주전(吳主傳) 황룡(黃龍)2년 시세조 주인(注引) 오서(吳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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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구는 서안평(西安平)으로 오늘날 압록강 하구의 단동(丹東) 애하첨고성(靉河尖古城)으로 비정된다(曹汛, 1980). 고구려는 3세기 전반에 압록강 하류 방면의 수로를 이용해 손오와 교섭했던 것이다.
20세기 전반 혼강에는 하구에서 강을 따라 상류 방면으로 100여 리까지 100석 정도의 대형 선박이 운항했고(張拱垣 編, 1931), 60~70석 소형 선박은 통화현성(通化縣城)까지 운항했다고 한다(羅寶書·邱在官 편, 1935). 수량이 많은 우기(雨期, 重水期)에는 혼강 상류인 백산시(白山市: 八道江)까지도 소형 선박이 운항했다(渾江市地方志編纂委員會 編, 1994). 압록강 하류 방면의 지류인 독로강에도 강계까지 목선(木船)이 운항했고(吳允珍 편, 1933), 충만강에도 하구에서 49km 정도까지 항행이 가능했다(楚山郡誌編纂委員會 편, 1983). 도성인 국내성 주변이나 그 하류 방면의 압록강 수로는 20세기 전반까지도 활발하게 활용되었던 것이다.
발해시기에 황해를 다니던 대선(大船) 이용자는 압록강 하구에서 100여 리 지점(西安平: 丹東 靉河尖古城)까지 거슬러온 다음, 소선(小船)으로 갈아타고 30여 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박작구(泊汋口: 고구려 泊灼城, 寬甸 虎山山城)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시 500여 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구려 도성이었던 환주 006
각주 006)
원문에는 ‘구(九)’로 나오나, ‘환(丸)’의 오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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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에 도착했으며, 다시 동북 방향으로 200여 리를 거슬러 올라가 서경압록부의 소재지인 신주(神州: 북한 중강진 맞은편의 臨江)에 도착했다. 여기에서 육로를 통해 도성이었던 현주(顯州)로 나아갔다.주 007
각주 007)
『신당서(新唐書)』 권43하 지리지7하 등주(登州)조에 인용된 가탐(賈眈)의 도리기(道里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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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 보아 고구려시기에도 국내성 하류뿐 아니라 상류 방면의 수로를 활발하게 이용했다고 추정된다. 실제 20세기 전반에 100석을 적재하는 대형 목선은 임강시(臨江市)나 중강진(中江鎭)까지 운항했고, 이보다 작은 선박이나 프로펠러선은 장백현(長白縣) 13도구하(道溝河)나 신갈파진(新乫坡鎭: 김정숙시)까지 운항했다(渾江市地方志編纂委員會 編, 1994; 金在鎬 편, 1980). 40석 정도의 소형 목선(木船)은 장백진(長白鎭)-혜산(惠山)까지도 운항했다(長白縣志編纂委員會 編, 1993; 惠山郡誌編纂委員會 편, 1999). 그러므로 고구려시기에 소형 선박은 압록강 상류를 거슬러 13도구하-신갈파진 일대,주 008
각주 008)
13도구하(道溝河) 직전인 압록강과 장진강의 합류 지점 북안(北岸)에는 석축방단(石築方壇)과 흙무지(土包)로 이루어진 장백(長白) 하외자(下崴子)유적이 있다(『長白朝鮮族自治縣文物志』, 44~47쪽). 장진강과의 합류처로 압록강 수로상의 요충지인 만큼 수운 역참과 연관된 시설일 가능성이 높다(여호규, 2008, 141~1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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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장백-혜산까지 운항했을 것이다.
고구려 고분군의 분포 현황도 이러한 가능성을 시사한다. 압록강 중상류 일대에서는 100여 곳 이상의 고분군이 확인되었는데, 대부분 압록강 본류와 지류를 따라 분포해 있다(지도 2). 특히 상류 방면에는 임강 동전자고분군(東甸子古墳群)이나 서마록포자고분군(西馬鹿泡子古墳群)처럼 육로로 접근하기 힘든 압록강 연안 충적대지에 위치한 경우가 많다(孫仁杰·遲勇·張殿甲, 2004). 이러한 지역은 주로 압록강 수로를 이용해 왕래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임강 화피전자고성(樺皮甸子古城)이 주목된다. 화피전자고성의 남쪽 0.5km에 왕팔발자요지(王八脖子窯址)가 있다. 1960년 발견 당시 20여 개의 가마 구덩이가 산기슭을 따라 펼쳐져 있었다(吉林省文物志編委會, 1984a). 가마터의 규모로 보아 이곳에서 생산한 토기는 화피전자고성으로 운반해 보관했다가 압록강 수로를 통해 국내성 등 각지로 운송한 것으로 보인다. 화피전자고성이 수운(水運) 역참(驛站)으로 기능했던 것이다(여호규, 2008).
20세기 전반 임강에서 수로를 따라 압록강 하구까지 4~5일 정도 소요되었으므로(兪榮慶 편, 1925; 羅寶書·邱在官 편, 1935), 거리가 그곳의 1/3인 집안(국내성)까지는 1~2일이면 도착했을 것이다. 또한 장백에서 임강까지는 3~6일 정도 소요되었다(渾江市地方志編纂委員會 編, 1994). 압록강 최상류인 장백에서 집안까지 4~7일이면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수로를 통한 물자 운송은 험준한 산간지대를 오르내려야 하는 육로에 비해 시간이나 노동력 등에 있어서 굉장히 효율적이었던 것이다.주 009
각주 009)
압록강 하류에서 상류 방면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압록강 하구에서 임강까지는 순풍을 만나야 20여 일만에 갈 수 있었고, 그렇지 않으면 30~40일 정도 소요되었다. 또한 임강에서 장백까지도 18~26일 정도 소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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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고구려인들은 압록강 수로를 활발하게 이용했다. 압록강은 고구려인들에게 농사지을 들판과 풍성한 어로자원을 제공하며, 압록강 중상류 전체를 하나로 이어주는 교통로 구실까지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한·중 양국의 영토로 양분된 오늘날과 달리, 고구려시기에는 압록강 중상류 전체가 물길로 연결되어 하나의 생활권을 이루었던 것이다. 고구려인들이 조영한 적석묘가 압록강 물길을 따라 남·북 양 지역에 모두 분포한 사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지도 2).
이러한 점에 주목해 만주 전역으로 시야를 넓히면 압록강 중상류의 자연환경이 고구려사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더욱 선명하게 부각된다. 만주는 지리적으로 서북의 대흥안령산맥(大興安嶺山脈)과 동북의 소흥안령산맥(小興安嶺山脈) 그리고 동남쪽의 장백산맥으로 둘러싸인 지역을 일컫는다. 이들 산맥 사이에는 요하와 송화강이라는 거대한 하천이 흐르는데, 두 강의 본류 연안에는 광활한 대평원이 끝없이 펼쳐진다. 고구려 발상지인 압록강 중상류 일대와는 판이한 자연환경이다.
더욱이 만주의 서북부는 비가 적게 오는 초원지대로 이곳 주민들은 수렵이나 유목을 했고, 동북부는 날씨가 춥고 산림이 울창해 주로 사냥이나 어로를 하며 생활했다. 만주의 서북부와 동북부 지역은 압록강 중상류와 생활방식마저 달랐던 것이다. 만주와 한반도에 걸친 압록강 중상류 유역은 만주보다 한반도의 자연환경에 더 가까웠던 것이다. 특히 산간지대에서 성장한 고구려인들에게 만주 중심부의 광활한 대평원은 쉽게 다가가기 힘든 낯선 땅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고구려가 요동평원을 장악한 다음에도 대평원지역을 거의 방기한 채, 그 안쪽의 하곡평지 입구에 성곽을 축조한 사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 고구려가 5세기 전반 천도(遷都)를 단행하며 요동 방면이 아니라 서북한의 평양 지역을 선택한 것도 이와 연관된다. 고구려인들은 압록강 중상류의 자연환경을 배경으로 축적한 문화기반과 정체성을 바탕으로 국가의 발전 방향을 모색했던 것이다.

  • 각주 001)
    『삼국지(三國志)』 권30 위서 동이전 고구려조. 바로가기
  • 각주 002)
    『삼국사기(三國史記)』 권13 고구려본기 제1 동명성왕 즉위년조. 바로가기
  • 각주 003)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 제1 유리명왕 21년조. 바로가기
  • 각주 004)
    『삼국사기』 권17 고구려본기 제5 미천왕 즉위년. 바로가기
  • 각주 005)
    『삼국지』 오서(吳書)2 오주전(吳主傳) 황룡(黃龍)2년 시세조 주인(注引) 오서(吳書). 바로가기
  • 각주 006)
    원문에는 ‘구(九)’로 나오나, ‘환(丸)’의 오기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7)
    『신당서(新唐書)』 권43하 지리지7하 등주(登州)조에 인용된 가탐(賈眈)의 도리기(道里記). 바로가기
  • 각주 008)
    13도구하(道溝河) 직전인 압록강과 장진강의 합류 지점 북안(北岸)에는 석축방단(石築方壇)과 흙무지(土包)로 이루어진 장백(長白) 하외자(下崴子)유적이 있다(『長白朝鮮族自治縣文物志』, 44~47쪽). 장진강과의 합류처로 압록강 수로상의 요충지인 만큼 수운 역참과 연관된 시설일 가능성이 높다(여호규, 2008, 141~142쪽). 바로가기
  • 각주 009)
    압록강 하류에서 상류 방면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압록강 하구에서 임강까지는 순풍을 만나야 20여 일만에 갈 수 있었고, 그렇지 않으면 30~40일 정도 소요되었다. 또한 임강에서 장백까지도 18~26일 정도 소요되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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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압록강 중상류의 자연지리와 환경 자료번호 : gt.d_0001_0010_001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