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중국 동북지역에서 초기철기문화 도입과 역사적 배경
3. 중국 동북지역에서 초기철기문화 도입과 역사적 배경
연나라(燕: 기원전 11세기~기원전 222년)는 전국(戰國)시기 주(周)나라 북방지역에 위치한 제후국으로, 중원과 중국 동북지역을 연결해주는 가교 구실을 하였다. 기원전 5세기경의 철기가 출토되는 연하도(燕下都)유적의 상황을 보면, 연나라는 일찍부터 강철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철기는 농경지 및 산림 개간, 수리사업 등에 있어 청동기시대 주요 도구였던 석기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효율성이 높았기 때문에, 철기의 본격적인 사용은 농업생산력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연나라 역시 발전된 철기 생산기술을 바탕으로 경제가 발전하고 군사력이 증대하여 북방과 동북지역으로 영역을 급속하게 확장해 나갔다.
이와 관련하여 『사기(史記)』 흉노열전(匈奴列傳)에는 “연나라 역시 장성을 축조하였는데, 조양(造陽)으로부터 양평(襄平)에 이르렀다. 상곡(上穀),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요서(遼西), 요동군(遼東郡)을 설치하고 흉노(胡)를 막았다”라는 기록이 전한다. 양평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중국에서는 대체로 요령성 요양(遼陽)으로 비정하고 있다. 그러나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에는 『위략(魏略)』을 인용하여 “연나라가 이에 장수 진개(秦開)를 보내 그 서방을 공격하여 땅 2,000여 리를 취하고,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경계로 삼으니, 조선(朝鮮)이 점차 약해졌다. 진(秦)이 천하를 병합한 후, 몽염(蒙恬)을 보내 장성을 쌓게 하였는데, 요동에 이르렀다”라고 되어 있어 장성이 한반도 서북한지역까지 확장되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홍승현, 2014).
현재 장성과 관련된 흔적은 요서 지역까지만 확인되므로, 장성으로는 연의 요동 점유를 설명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다만 기원전 6세기~기원전 5세기로 비정되는 조양 십이대영자유적, 객좌 남동구(南洞溝)유적 등에서 비파형동검과 같은 재지적 전통의 유물이 연나라 계통의 중원 청동기들과 함께 출토되고 있어, 요서 지역은 비교적 일찍부터 연의 문화적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요동 지역은 지석묘, 석개묘, 비파형동검의 재지적인 문화요소가 강하며, 요서 지역과는 달리 전국시대 연나라와 이후 한나라의 문화요소가 유입됨에도 비교적 오랜 기간 재지적인 문화 요소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소지역별로도 지역성이 뚜렷하여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특징은 철기의 유입과 변천 과정에서도 동일하게 확인된다(김상민, 2017).
고고학적인 증거가 부족한 연나라의 동쪽 국경 문제는 논외로 치더라도, 능원(凌源) 안장자(安杖子) 고성지, 조양 원대자유적, 금서(錦西) 소황지(小荒地) 고성지, 금주(錦州) 오금당(烏金塘) 동주(東周) 무덤, 태안(台安) 백성자(白城子) 유적, 여순 고려채(高麗寨) 유적, 관전 여명촌(黎明村)교장(窖藏)유적, 무순 연화보(蓮花堡)유적 등에서는 기원전 4세기 말~기원전 3세기 중엽에 해당하는 연나라 철기가 발견되고 있다. 이는 연나라에서 대량생산으로 인해 철기문화가 보편화되었고, 중국 동북지역 전반에 걸쳐 연나라 주조철기가 보급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이 시기는 연과 고조선이 상호 경쟁을 하던 때여서, 전쟁 무기보다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소형 철제농공구가 교역 등의 방법으로 요동 지역으로 전래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상위 계층의 무덤에는 여전히 다량의 청동기가 부장된다.
요동 지역은 요서 지역보다 다소 늦은 기원전 3세기에 철기가 도입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에 대해서는 재론의 여지가 있다. 여순 목양성(牧羊城)과 윤가촌12호묘에서 출토된 연나라의 고배(高杯)를 근거로 기원전 4세기대에 연의 문화가 요동에 유입되었다는 주장(이후석, 2012)이나, 일본에서 발견되는 연계 주조철부(또는 철곽)가 일본 학계의 주장과 같이 기원전 4세기 혹은 기원전 3세기 이전이라고 한다면, 유통의 거점이라고 할 수 있는 요동 지역 역시 기원전 3세기 전반 이전에 동 기종의 철기가 보급되었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이청규, 2014).
한편, 요동 지역에서 출토되는 연계 철기는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분포하는 양상이다. 분묘는 천산(千山)산맥 서쪽 구릉과 요동반도 대련 일대에 집중되고 있는데, 천산 일대는 토광묘와 석개묘에서 연계 철기류와 함께 세형동검 등의 재지계 유물이 공반되는 반면, 대련 일대는 패묘(貝墓)에서 철기류와 함께 전한경(前漢鏡), 화폐, 청동기, 토기 등 한나라 계통의 유물이 주로 출토된다. 패묘는 중국 한대 무덤 형식 중 하나로, 습기를 막기 위하여 관 주위에 패각을 두껍게 쌓아 흙으로 덮어 만든 무덤이다. 취락은 주로 천산산맥 서쪽 요하 지류 주변의 구릉대지와 압록강 일대를 중심으로 확인되는데, 전자는 요동군(遼東郡)이 설치된 요양 일대라는 점에서 주목된다(김상민, 2017).
연나라의 철기는 이후 한반도까지 그 범위가 확대된다. 요동 지역에서는 기존의 비파형동검을 대체한 세형동검이 유행하고 있었고, 한반도에서도 기원전 3세기가 되면 연나라 화폐인 명도전, 주조 방식으로 제작된 철제농공구, 회색 타날문토기 등 새로운 문화요소가 등장한다. 특히 기원전 3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명도전이 중국 동북지역과 한반도 서북한 북부에 대량 확산되는 양상이 눈길을 끄는데, 문헌에 기록된 진개(秦開)가 주도한 연의 동진(東進)이 계기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송호정, 2007). 실제로 혼강 중류의 통화를 비롯한 압록강 중류의 자강도 용연동유적, 청천강 중류의 평안북도 영변군 세죽리유적, 두만강 유역의 함경북도 무산군 호곡동유적 등지에서는 기원전 3세기대 연나라 계통의 유물이 확인되고 있다. 특히 용연동유적과 세죽리유적에서는 연나라 화폐인 명도전(明刀錢)이 다량으로 출토되었을 뿐만 아니라, 도끼와 낫 등 철제농공구와 창끝과 같은 철제무기 등 전형적인 연나라 철기가 함께 발견되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연계 철기 유물의 분포범위 확대 현상은 관련 유적의 수도 적고 그 분포 역시 제한적일 뿐만 아니라, 연의 지방통치와 관련된 유적 역시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서북한 지역까지 연나라가 영역을 확장했다고 보기는 어렵겠다. 그보다는 동북아시아 전역으로 철기문화가 확산되는 과정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한편, 기원전 4세기 말부터 중국 동북지역에 전래되기 시작한 철기문화는 보급 속도와 발전 양상에 있어서 지역마다 큰 차이를 보인다. 고고학 시대구분에 따르면 초기철기시대인데, 한국에서는 요동 지역과 청천강 이북의 서북한 지역을 중심으로 한 세죽리-연화보유형, 송화강 유역의 대해맹-포자연유형,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단결-크로노프카유형, 그리고 청천강 이남의 남성리-초포리유형 등으로 구분하고 있다. 이 시기는 연나라의 영향으로 주조철기가 보급되고 철기문화가 시작되지만, 아직까지는 철 소재와 철기의 대량생산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는 못한 단계라 할 수 있다(한국고고학회, 2015). 한반도에서는 철기의 도입과 맞물려 청동기 제작기술 역시 최고 수준에 이르게 되는데, 비파형동검과 다뉴조문경에서 세형동검과 다뉴세문경으로 유행이 변하게 된다. 역사적으로는 후기 고조선과 위만조선에 해당한다.

그림6 | 요동 지역과 한반도에서 출토된 연나라 계통의 철기(白雲翔, 2013, 도9, 도10)
실제로, 본계의 상보촌(上堡村)석관묘유적에는 중국계 주조철기와 회색토기 외에도 고조선 계통의 점토대토기와 요령식세형동검(또는 변형 비파형동검)주 014
각주 014)

이 함께 부장되고 있고, 요동 동부지역에 해당하는 혼강과 압록강 중하류 유역의 통화 만발발자(萬發撥子)유적, 관전 조가보자(趙家堡子) 석관묘, 집안 오도령구문(五道嶺溝門)적석묘(또는 적석매납유구) 등에서는 요령식세형동검을 비롯한 청동기가 다량으로 부장된 무덤이 발견되고 있어 철기문화가 도입된 이후에도 해당 지역에는 재지 세력이었던 고조선의 영향력이 여전히 남아있었음을 알 수 있다.기원전 4세기 말~기원전 3세기 초 연나라의 철기문화가 전래되는 시점에, 요동 동부에서는 비파형동검의 돌기부나 세형동검의 결입부(抉入部)와 절대(節帶)등이 없는 대신, 검신의 폭이 비교적 좁고 봉부가 길다는 공통점을 지닌 동검이 확인된다. 불룩한 검신 하단부는 비파형동검의 속성, 직선화된 검날은 세형동검의 속성을 각각 반영한다. 비파형동검의 말기 형식 또는 세형동검의 초기 형식으로 볼 수 있는 이러한 과도기적 동검을 연구자에 따라 변형 비파형동검 내지는 중간형(중세형)동검으로 구분하기도 한다(여호규, 2011, 186쪽). 다만, 최근에는 변형 비파형동검을 요령식세형동검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이와 관련된 자세한 논의는 이후석(2018)의 논문을 참고하기 바란다.

그림7 | 초기철기시대 지역별 문화유형(한국고고학회, 2015, 그림71)
기원전 3세기 말 진·한 교체기에는 요동 지역을 둘러싸고 급격한 정세 변화가 있었다. 연나라의 수도를 공격한 진나라는 요동에 피신한 연왕 세력을 축출하고 이 지역을 장악하였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에 의해 기원전 222년 연나라가 멸망하면서, 명도전은 화폐 기능을 상실하였고, 이에 많은 명도전 퇴장유적이 생겨나게 되었다.
요동 지역은 진한시기에도 연나라 시기와 마찬가지로 요동군을 필두로 한 군현(郡縣)제도가 계속 시행되었다. 이로 인해 이 지역에서는 진과 서한(西漢: 기원전 202~8년)전기의 철기가 더욱 광범위하게 발견되고 있으며, 수량은 물론 종류도 훨씬 다양하다. 연나라 계통의 대형 주조철부는 더이상 확인되지 않는 대신, 소형의 주조철부가 동병철검(銅柄鐵劍), 철과(戈), 철모 등의 철제무기류와 함께 한경, 반량전(半兩錢), 오수전(五銖錢) 등이 함께 출토된다. 그렇지만 전국에서 서한 시기에 해당하는 송눈(松嫩)평원의 한서(漢書)유적이나 압록강 중상류의 장백현 간구자(干溝子)적석묘에서는 여전히 연나라 계통의 철기가 출토되고 있어, 서한시기 초까지도 연나라계 철기문화가 이어졌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白雲翔, 2013). 이러한 상황은 연-진-한 교체기에 발생한 혼란으로 인해 연나라를 비롯한 중원지역의 주민들이 중국 동북지방과 한반도로 대거 이주하였다는 당시의 역사적 배경주 015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헌기록에는 기원전 195년 위만(衛滿)이 이끄는 집단이 요동(遼東)의 요새를 나와 패수(浿水)를 건너 진나라의 옛 공지인 상하장(上下障)에 살다가, 기원전 194년에 고조선의 정권을 장악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위만조선의 물질문화는 청동단검을 표지로 한 토착문화에 외래에서 유입된 철기문화가 융합된 형태였을 것이다. 실제로 요동과 서북한 지역에서는 세형동검, 동과, 다뉴세문경 등과 함께 철제농공구나 철제무기를 비롯한 중원계 유물이 함께 발견된다. 소위 ‘세죽리-연화보유형’이라고 부르는 요동과 서북한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초기철기문화는 천산산맥 이남 지역에서 압록강 중하류에 이르는 요동 지역에서 기원전 3세기대에 형성되었다. 기원전 2세기대에는 서북한 지역까지 철기문화가 확산된다.
이 시기에 해당하는 위만조선은 국가 단계에 이르렀다고는 하나 고구려, 백제, 신라와 같은 광대한 영역국가를 구축했다고 볼 만한 근거가 부족하여, 요동과 서북한 지역 전체를 그 영역으로 상정하기는 곤란하다. 기원전 3세기대에 청천강을 경계로 명도전 등 연나라 화폐 출토 유적의 빈도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으므로 서북한 북부와 남부를 동일한 성격의 고조선 영역으로 인정하기도 어렵다. 이에 당시 고조선의 중심을 청천강 이남이라고 한다면, 위만조선의 북쪽 경계는 요동 남부의 동서부 지역까지 이르지 못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요동 남부와 서북한 전체를 아우르는 고고학적 문화 중에서 위만조선의 물질문화를 찾아야만 한다. 기본적으로 고조선의 청동기를 토대로, 연나라 계통의 주조 철기와 한나라에서 유입된 단조철기를 갖추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무리가 없겠으나, 위만조선의 중심과 경계에 대해서는 현재 고고학적으로 단정하기 어려운 상황이다(이청규, 2014).
이후 위만조선은 한나라를 배후에서 위협할 정도로 세력이 커졌으나, 기원전 108년 한나라에 패하였다. 이로 인해 기존의 고조선 관할 영역에 낙랑(樂浪), 현도(玄菟), 임둔(臨屯), 진번(眞番)의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되면서, 중국 동북지역과 한반도는 한나라 철기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다만 현도군 내에 고구려현(高句麗縣)의 명칭이 있는 것으로 볼 때, 고구려는 주몽이 국가를 세우기 이전부터 압록강과 혼강 일대를 중심으로 이미 일정 수준 이상의 세력을 형성한 정치체로 성장하였음을 가늠할 수 있다. 그리고 같은 시기 송화강 유역에는 부여가 성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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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4)
기원전 4세기 말~기원전 3세기 초 연나라의 철기문화가 전래되는 시점에, 요동 동부에서는 비파형동검의 돌기부나 세형동검의 결입부(抉入部)와 절대(節帶)등이 없는 대신, 검신의 폭이 비교적 좁고 봉부가 길다는 공통점을 지닌 동검이 확인된다. 불룩한 검신 하단부는 비파형동검의 속성, 직선화된 검날은 세형동검의 속성을 각각 반영한다. 비파형동검의 말기 형식 또는 세형동검의 초기 형식으로 볼 수 있는 이러한 과도기적 동검을 연구자에 따라 변형 비파형동검 내지는 중간형(중세형)동검으로 구분하기도 한다(여호규, 2011, 186쪽). 다만, 최근에는 변형 비파형동검을 요령식세형동검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이와 관련된 자세한 논의는 이후석(2018)의 논문을 참고하기 바란다.
- 각주 0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