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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참고자료

참고자료

집안고구려비(集安高句麗碑)주 014
각주 014)
耿鐵華, 2017, 『集安高句麗碑硏究』에 수록된 윤용구, 여호규를 비롯한 국내 연구자와 耿鐵華, 徐建新을 비롯한 중국 학자들의 대표 판독문을 참조해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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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면 1행]
□□□□치세에 하늘의 도가 내려지니, 스스로 원왕을 이어 시조 추모왕께서 나라의 기틀을 여셨다.
□□□□주 015
각주 015)
비석 우측 윗부분이 절단되어 해당 부분의 비문을 확인할 수 없다. 다만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 11행에 “聖太王之世”라는 문구가 있으므로(노태돈(판독), 1992; 李樂營, 耿鐵華 主編, 2016 참조), 필자는 ‘聖太王之’世로 추독한 바 있다(조우연, 2013). 그 외, 耿鐵華는 ‘惟太王之’世로 추독해 비슷한 견해를 제시했다(耿鐵華,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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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必授天道自承元王始祖鄒牟王之創基也
[전면 2행]
□□□ 아들이요, 하백의 손자로서, 신령스러움□□□□나라를 열고 땅을 넓히니, 그 후손으로 이어져 서로 계승해왔다.
□□□주 016
각주 016)
비문이 훼손되어 판독 불가 상태인데, 〈광개토왕비문〉이나 〈모두루묘지〉를 통해 추독 가능하다. 다만, 전자의 경우 ‘天帝之’子 혹 ‘皇天之’子라고 했고, 후자는 ‘日月之’子라고 달리 표현하고 있어, 학계 의견도 두 가지로 갈리고 있다. 그럼에도 지고신(至高神)을 지칭하는 표현이라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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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河伯之孫神靈□□□□開國辟土繼胤相承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주 017
각주 017)
노태돈(1992), 王健群(1984), 朴眞奭(2001)등 판독문을 참조하여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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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면 1행]
생각건대 옛날에 시조 추모왕께서 나라의 기틀을 여셨다. 북부여에서 나왔고, 천제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내려오니, 태어나서 성스러움이 있었다. □□□□□□(판독 불가)명하시어 수레를 타고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出自北夫餘天帝之子母河伯女郎剖卵降世生而有聖□□□□□□命駕
[1면 2행]
남하 순행하다가 길이 부여의 엄리대수에 다다랐다. 왕께서 나루에 임하여 이르기를 “나는 황천의 아들이요, 어머니가 하백의 딸인 추모왕이다. 나를 위해 갈대를 잇고 거북이를 떠오르게 하라” 하시니, 그 소리에 응해 즉시
巡幸南下路由夫餘奄利大水王臨津言曰我是皇天之子母河伯女郎鄒牟王爲我連葭浮龜應聲卽爲
[1면 3행]
갈대가 이어지고 거북이들이 떠올랐다. 이에 강을 건너 비류곡 홀본 서쪽에 이르러, 산위에 성을 쌓아 도읍을 세웠다. 세상의 지위를 즐겁게 여기지 않으니, 이에 황룡을 내려 보내 왕을 맞이했다. 왕께서 홀본 동쪽 언덕에서
連葭浮龜然後造渡於沸流谷忽本西城山上而建都焉不樂世位因遣黃龍來下迎王王於忽本東岡履
[1면 4행]
용머리를 밟고 승천했다. 세자 유류왕에게 고명하여 도로써 나라를 흥성하게 다스리도록 하니, 대주류왕이 그 기업을 이었다.
龍頁(負)昇天顧命世子儒留王以道興治大朱留王紹承基業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주 018
각주 018)
노태돈(1992), 勞榦(1944), 武田幸男(1981), 耿鐵華(2000)등의 판독문을 참조하여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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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행] 하박(하백)의 손자요, 해와 달의 아들인 추모(河泊之孫日月之子鄒牟)
[4행] 성왕은 원래 북부여에서 나왔다. 천하 사(聖王元出北夫餘天下四)
[5행] 방이 이 나라가 가장 성스러운 것을 알고 있다.(方知此國郡最聖□□□)
[6행] 이 고을을 다스리니□□□ 성(治此郡之嗣治 □□□聖)
[7행] 왕의 노객인 조상□□□북부(王奴客祖先 □□□北夫)
[8행] 여로부터 성왕을 따라 왔다. 노객□□□(餘隨聖王來奴客 □□□)
[24행] 하박의 손자요, 해와 달의 아들이 태어난(河泊之孫日月之子所生)
[25행] 고장으로 오니, □북부여 대형 염(모)(之地來 □北夫餘大兄冉)
[38행] □하박, 해와 달의 손자인□□□(□河泊日月之孫 □□□)
[48행](하)박의 손자, 해와 달의 아들인 성왕(□泊之孫日月之子聖王□)
 
『위서(魏書)』 권100 열전88 고구려
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왔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선조는 주몽이라고 한다. 주몽의 어머니 하백의 딸로서, 부여왕에 의해 방에 유폐되었는데, 햇빛이 비추기에 몸을 이끌어 피했으나 햇빛이 다시 쫓아왔다. 곧 임신해 알 하나를 낳았는데, 다섯 되(升)만큼 컸다. 부여왕이 그것을 버려 개에게 주었으나, 개가 먹지 않았고, 돼지에게 주었으나, 돼지 역시 먹지 않았다. 길에 버렸으나 소와 말이 피했다. 후에 들에 버렸으나, 뭇 새들이 깃털로 감쌌다. 부여왕이 쪼개려 했으나 깨뜨릴 수 없자, 마침내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었다. 그 어머니가 물건으로 감싸서 따뜻한 곳에 놔두었더니, 한 사내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다. 장성하자 자(字)를 주몽이라고 지었는데, 그 속언(俗言)에 ‘주몽’이란 활을 잘 쏜다는 뜻이다. 부여사람들은 주몽이 사람 소생이 아니므로 장차 딴 뜻을 품을 것이라 하여 그를 없애기를 청했으나, 왕이 듣지 않고 그에게 말 기르기를 명했다. 주몽이 항상 사사로이 시험해, 어떤 말이 좋고 나쁜지를 알고, 준마는 먹이를 줄여 여위게 하고, 굼뜬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했다. 부여왕은 살찐 말을 자기가 타고, 여윈 말을 주몽에게 주었다. 후에 사냥터에 나가 사냥을 하게 되었는데, 주몽이 활을 잘 쏜다 하여 화살 하나만 주었다. 주몽은 비록 화살이 적었으나 많은 짐승을 잡았다. 부여의 신하들이 다시 모의해 그를 죽이려고 했다. 주몽의 어머니가 몰래 알고는 주몽에게 말하기를 “나라에서 장차 너를 해치려 하니, 너의 재주와 지략으로는 사방으로 멀리 떠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이에 주몽은 오인, 오위 두 사람과 함께 부여를 버리고 동남쪽으로 달아났다. 도중에 큰 강을 만났는데, 건너려 했으나 다리가 없었고, 부여 사람들이 급박하게 추격해왔다. 주몽이 강물에 고하기를 “나는 태양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자이다. 오늘 도망가고 있는데, 추격하는 군사가 거의 쫓아오니, 어찌하면 (강을) 건널 수 있겠는가” 이에 물고기와 자라가 함께 떠올라 그를 위해 다리가 되어주니, 주몽이 강을 건널 수 있었고,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지므로, 쫓아오던 기병들은 건널 수 없었다. 주몽이 마침내 보술수에 이르러 세 사람을 만났는데, 한 사람은 마의(麻衣) 입었고, 한 사람은 납의(衲衣)를 입었으며, 한 사람은 수조의(水藻衣)를 입고 있었다. (이들은) 주몽과 더불어 흘승골성에 이르러 마침내 정착하니,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이로써 성씨를 삼았다.
高句麗者, 出於夫餘, 自言先祖朱蒙. 朱蒙母河伯女, 爲夫餘王閉於室中, 爲日所照, 引身避之, 日影又逐. 旣而有孕, 生一卵, 大如五升. 夫餘王棄之與犬, 犬不食, 棄之與豕, 豕又不食, 棄之於路, 牛馬避之. 後棄之野, 衆鳥以毛茹之. 夫餘王割剖之, 不能破, 遂還其母. 其母以物裹之, 置於暖處, 有一男破殼而出. 及其長也, 字之曰朱蒙, 其俗言朱蒙者, 善射也. 夫餘人以朱蒙非人所生, 將有異志, 請除之, 王不聽, 命之養馬. 朱蒙每私試, 知有善惡, 駿者減食令瘦, 駑者善養令肥. 夫餘王以肥者自乘, 以瘦者給朱蒙. 後狩于田, 以朱蒙善射, 限之一矢. 朱蒙雖矢少, 殪獸甚多. 夫餘之臣又謀殺之. 朱蒙母陰知, 告朱蒙曰, 國將害汝, 以汝才略, 宜遠適四方. 朱蒙乃與烏引·烏違等二人, 棄夫餘, 東南走. 中道遇一大水, 欲濟無梁, 夫餘人追之甚急. 朱蒙告水曰, 我是日子, 河伯外孫, 今日逃走, 追兵垂及, 如何得濟. 於是魚鼈並浮, 爲之成橋, 朱蒙得渡, 魚鼈乃解, 追騎不得渡. 朱蒙遂至普述水, 遇見三人, 其一人著麻衣, 一人著衲衣, 一人著水藻衣, 與朱蒙至紇升骨城, 遂居焉, 號曰高句麗, 因以爲氏焉.
_ 1974, 『魏書』, 中華書局 참조
 
『논형(論衡)』 권제2 길험편(吉驗篇)
북이 탁리국왕의 시비가 임신하게 되어 왕이 죽이려 했다. 시비가 대답하기를 “계란 만한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오므로 제가 임신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그 후 아들을 낳자, 돼지우리에 버렸더니, 돼지가 입김을 불어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구간에 옮겨 말에 깔려 죽게 했으나, 말도 입김을 불어 죽지 않았다. 왕은 하늘의 아들이라 여겨, 그 어미에게 거두어 종처럼 키우게 했는데, 이름을 동명이라 하고 말과 소를 기르게 했다. 동명이 활을 잘 쏘므로, 왕은 그 나라를 빼앗아갈까 두려워 그를 죽이려 했다. 동명이 도망해 남쪽의 엄호수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가 되어, 동명이 건널 수 있었다.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져, 추격해온 군사들은 건널 수 없었다. 도읍을 정하고 부여의 왕이 되니, 그런 까닭에 북이 중에 부여국이 있게 되었다.
北夷橐離國王侍婢有娠,王欲殺之. 婢對曰, 有氣大如鷄子, 從天而下, 我故有娠. 後産子, 捐於猪溷中, 猪以口氣噓之, 不死. 復徙置馬欄中, 欲使馬藉殺之, 馬復以口氣噓之, 不死. 王疑以爲天子, 令其母收取, 奴畜之, 名東明, 令牧牛馬. 東明善射, 王恐奪其國也, 欲殺之. 東明走, 南至掩淲水, 以弓擊水, 魚鱉浮爲橋, 東明得渡, 魚鱉解散, 追兵不得渡. 因都王夫餘, 故北夷有夫餘國焉.
_
 
주나라 시조 후직(后稷)설화
주나라 후직(后稷)의 이름은 기(棄)이다. 그 어머니는 유태씨(有邰氏)의 딸로서, 강원(姜原)이라고 한다. 강원은 제곡(帝嚳)의 원비(元妃)이다. 강원이 들에 나갔다가 거인의 발자국을 보고 마음이 환하게 기뻐 그것을 밟고 싶어져서 밟았더니 임신한 것처럼 몸이 움직였다.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상서롭지 못하다고 여겨 골목에 버렸으나, 지나가던 말과 소가 모두 피해서 밟지 않고, 그것을 숲속으로 옮겼으나, 마침 숲속에 사람이 많으므로 옮겨서 도랑의 얼음 위에 버렸더니, 새들이 날개로 덮어 감싸주었다. 강원이 신(神)이라고 여겨, 마침내 받아들여 키웠다. 처음에 버리려 했으므로 이름을 ‘기(棄)’라고 했다.
周后稷, 名棄. 其母有邰氏女, 曰姜原. 姜原為帝嚳元妃. 姜原出野, 見巨人跡, 心忻然說, 欲踐之, 踐之而身動如孕者. 居期而生子, 以為不祥, 棄之隘巷, 馬牛過者皆辟不踐, 徙置之林中, 適會山林多人, 遷之, 而棄渠中冰上, 飛鳥以其翼覆薦之. 姜原以為神, 遂收養長之. 初欲棄之, 因名曰棄.
_ 『史記』 卷第4 周本紀第4
 
서언왕(徐偃王)설화
『서언왕지』에서 이르기를, 서(徐)나라 임금의 궁인(宮人)이 임신해 알[卵]를 낳으니,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물가에 버렸다. 독고모(獨孤母)에게 곡창(鵠蒼)이라는 개가 있어, 물가에서 사냥하다가 버려진 알을 얻어, 그것을 물고 동쪽으로 돌아왔다. 독고모가 신기하게 여겨 그것을 따뜻하게 덮어주었더니, 곧 알을 깨고 아이가 태어났는데, 나면서 반듯하게 누워있었다고 하여 그것으로 이름하였다. … 붉은 빛 활과 화살을 얻었는데, 하늘에서 내린 상서로움을 얻었다 하여, 마침내 그로 인해 이름을 궁이라 하고 스스로 서언왕이라 칭했다.
徐偃王志云, 徐君宮人娠而生卵, 以爲不祥, 棄之水濱. 獨孤母有犬名鵠蒼, 獵於水濱, 得所棄卵, 銜以東歸. 獨孤母以爲異, 覆暖之, 遂烰成兒, 生時正偃, 故以爲名 … 得朱弓矢, 以已得天瑞, 遂因名爲弓, 自稱徐偃王.
_ 『博物志』 卷7 異聞
 
신라 석탈해(昔脫解)설화
(석)탈해는 본래 본래 다파나국(多婆那國)에서 태어났다. … 그 나라 왕이 여국왕(女國王)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는데, 임신한 지 7년이 되어 큰 알[卵]을 낳았다. 왕은 사람으로서 알을 낳으니 상서롭지 못하다. 버리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 여자는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어, 알을 비단으로 감싸 보물과 함께 궤짝에 넣어 바다에 띄워 아무 곳이나 가도록 했다. … 바닷가의 노모(老母)가…거두어 기르니, 장성하여 키 9척에 풍채가 훤하고, 지혜와 식견이 뛰어났다.
脫解本多婆那國所生也 … 其國王娶女國王女爲妻, 有娠七年乃生大卵, 王曰, 人而生卵, 不祥也, 宜棄之, 其女不忍, 以帛裹卵幷寶物, 置於櫝中, 浮於海, 任其所往 … 海邊老母 … 取養之, 及壯, 身長九尺, 風神秀朗, 智識過人
_ 『三國史記』卷第1 新羅本紀 第1, 脫解尼師今
 
선비 단석괴(檀石槐)출생설화
선비의 단석괴라는 자는 그 아버지가 투록후(投鹿侯)이다. 처음에 3년 동안 흉노에 종군하였는데, 그 아내가 집에서 아들을 낳았다. 투록후가 돌아와 이상하게 여겨 죽이려 하자, 아내가 말하기를 “낮에 길가다 천둥소리를 듣고 하늘 쳐다보는데, 우박이 입안에 들어오므로 삼키니 곧 열 달을 임신해 낳았습니다. 이 아이는 반드시 신이함이 있을 것이니, 장성하는 것을 지켜봄이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투록후는 듣지 않고 곧 버렸다. 아내가 몰래 친정에 보내 기르게 하고, 이름을 단석괴라고 지었다. … 그리하여 부락들이 두려워 복종했다. … 곧 대인(大人)으로 추대되었다.
鮮卑檀石槐者, 其父投鹿侯, 初從匈奴軍三年, 其妻在家生子, 投鹿侯歸怪, 欲殺之. 妻言嘗晝行聞雷震, 仰天視, 而雹入其口, 因吞之, 遂姙身十月而産, 此子必有奇異, 且宜長視. 投鹿侯不聼遂弃之, 妻私語家令收養焉, 名檀石槐 … 由是部落畏服 … 遂推以為大人.
_ 『後漢書』卷120 列傳第80, 烏桓鮮卑傳
 
은나라 시조 설(契)설화
은나라 설의 어머니는 간적(簡狄)인데, 유융씨(有娀氏)의 딸로서, 제곡(帝嚳)의 둘째 비(妃)이다. 세 사람이 함께 목욕하다가, 검은 새가 알을 떨어뜨린 것을 보고, 간적이 그것을 가져다 삼켰더니, 그로 인해 임신하게 되어 설을 낳았다.
殷契, 母曰簡狄, 有娀氏之女, 爲帝嚳次妃. 三人行浴, 見玄鳥墮其卵, 簡狄取呑之, 因孕生契.
_ 『史記』卷第3 殷本紀第3
 
청 태조 조상설화(불고륜설화)
처음에 하늘에서 세 선녀가 호수에 내려와 목욕했는데, 장녀 이름은 은고륜, 차녀 이름은 정고륜, 삼녀 이름은 불고륜이다. 목욕을 마치고 언덕에 올라오니, 신비한 까치(神鵲)가 붉은 과일을 물어다가 불고륜의 옷 위에 놓았다. 색깔이 아주 고와 불고륜이 아까워 손에서 놓지 못하다가 마침내 입에 넣고 옷을 입던 중에, 그 과일이 뱃속으로 들어가 곧 감응하여 임신하였다. … 불고륜이 후에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태어나서부터 말할 수 있었고, 금세 장성하였다. 어미가 아들에게 이르기를, 하늘이 너를 낳았으니, 실로 너에게 나라의 분란을 평정할 것을 명함이다. … 나는 천녀 불고륜의 소생으로서, 성은 애신각라이고 이름은 포고리옹순이다. 하늘이 그대들의 분란을 평정하라고 나를 내려보냈다. … 그 국호를 만주라고 정하니, 그가 바로 시조이다.
初天降三仙女浴於泊, 長名恩古倫, 次名正古倫, 三名佛庫倫. 浴畢上岸, 有神鵲銜一朱果置佛庫倫衣上, 色甚鮮妍, 佛庫倫愛之不忍釋手, 遂銜口中甫著衣, 其果入腹中, 即感而成孕 … 佛庫倫後生一男, 生而能言, 焂爾長成. 母告子曰, 天生汝, 實令汝以定亂國 … 我及天女佛庫倫所生姓愛新覺羅名布庫哩雍順, 天降我定汝等之亂 … 其國定號滿洲乃其始祖也.
_ 中華民國 23年(1934), 『滿洲實錄』卷1, 北平文殿閣書莊 참조
 
몽골 칭기즈칸 조상설화(알랑고아설화)주 019
각주 019)
중국어 번역본(策·達木丁蘇隆 編譯, 謝再善 譯, 1956, 『蒙古秘史』, 中華書局)을 참조해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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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밤 누런 옷을 입은 사람이 천창(天窓)에서 빛처럼 비쳐 내려와 내 배를 어루만졌는데, 그 빛이 내 뱃속으로 스며들어갔다. 그이는 해와 달빛을 따라 마치 누런 개처럼 솟아올라 가버렸다. 너희가 무슨 얘기를 함부로 하는 것이냐? 하늘의 아들처럼 보이니, 어찌 일반인과 비교한단 말이냐? 훗날에 천하의 황제가 되면 사람들은 그때서야 그 도리를 알 것 이니라.
_ 『蒙古秘史』第1章 第 21節
 
백제 조상설화
백제 조상은 고려국(고구려)에서 나왔다. 그 나라 왕의 한 시비가 갑자기 임신하여 왕이 죽이려고 했다. 시비가 이르기를 “계란처럼 생긴 물건이 와서 나에게 감응하므로 임신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했다.(이에)왕이 내버려두었다. 후에 사내애 하나를 낳았는데, 뒷간에 버렸으나, 오래 지나도록 죽지 않자, 신이라고 여겨 키우도록 명하고, 이름을 동명이라고 지었다. 장성하자, 고려왕이 시기하므로 동명이 두려워 엄수(淹水)에 도망갔는데, 부여 사람들이 함께 받들었다.
百濟之先, 出自高麗國. 其國王有一侍婢, 忽懷孕, 王欲殺之. 婢云, 有物狀如雞子, 來感於我, 故有娠也. 王捨之. 後遂生一男, 棄之廁溷, 久而不死, 以爲神, 命養之, 名曰東明. 及長, 高麗王忌之, 東明懼, 逃至淹水, 夫餘人共奉之.
_ 『隋書』卷81 列傳第46 百濟
백제의 먼 조상 도모왕이라는 자는 하백의 딸이 일정에 감응되어 태어났다.
百濟遠祖都慕王者, 河伯之女感日精而所生
_ 『續日本紀』40, 桓武 延曆8年(789년)12月條
백제 태조 도모대왕이라는 자는 일신의 정령이 강림해, 부여에서 나와 나라를 열었다. 천제가 녹을 주어 여러 한(韓)을 다스리고 왕을 칭하게 했다.
百濟太祖都慕大王者 日神降靈 奄扶餘而開國 天帝授錄 總諸韓而稱王
_ 『續日本記』40, 桓武 延曆9年(790년) 7月條

  • 각주 014)
    耿鐵華, 2017, 『集安高句麗碑硏究』에 수록된 윤용구, 여호규를 비롯한 국내 연구자와 耿鐵華, 徐建新을 비롯한 중국 학자들의 대표 판독문을 참조해 옮겼다. 바로가기
  • 각주 015)
    비석 우측 윗부분이 절단되어 해당 부분의 비문을 확인할 수 없다. 다만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 11행에 “聖太王之世”라는 문구가 있으므로(노태돈(판독), 1992; 李樂營, 耿鐵華 主編, 2016 참조), 필자는 ‘聖太王之’世로 추독한 바 있다(조우연, 2013). 그 외, 耿鐵華는 ‘惟太王之’世로 추독해 비슷한 견해를 제시했다(耿鐵華, 2013). 바로가기
  • 각주 016)
    비문이 훼손되어 판독 불가 상태인데, 〈광개토왕비문〉이나 〈모두루묘지〉를 통해 추독 가능하다. 다만, 전자의 경우 ‘天帝之’子 혹 ‘皇天之’子라고 했고, 후자는 ‘日月之’子라고 달리 표현하고 있어, 학계 의견도 두 가지로 갈리고 있다. 그럼에도 지고신(至高神)을 지칭하는 표현이라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바로가기
  • 각주 017)
    노태돈(1992), 王健群(1984), 朴眞奭(2001)등 판독문을 참조하여 정리했다. 바로가기
  • 각주 018)
    노태돈(1992), 勞榦(1944), 武田幸男(1981), 耿鐵華(2000)등의 판독문을 참조하여 정리했다. 바로가기
  • 각주 019)
    중국어 번역본(策·達木丁蘇隆 編譯, 謝再善 譯, 1956, 『蒙古秘史』, 中華書局)을 참조해 옮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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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자료번호 : gt.d_0001_0030_0010_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