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고구려통사

1. 고구려의 국가 형성 관련 자료

1. 고구려의 국가 형성 관련 자료

고구려의 등장이나 국가 형성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 상황은 상당히 영세하다. 약간의 문헌자료 및 적석총 관련 고고자료가 고구려의 국가 형성에 대한 단서를 줄 뿐이다. 문헌기록으로는 우선 고구려 자체 전승자료라고 할 수 있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에 전하는 건국설화를 비롯한 초기 기사를 들 수 있다. 그런데 주몽설화로 알려져 있는 건국설화는 설화적 전승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 또 설화상의 건국 기년이 기원전 37년 무렵으로서 이 기년을 그대로 인정할 수는 없지만, 전반적으로 그 이전 시기의 상황에 대한 단서가 부족하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적지 않다. 물론 고구려 초기 등장 과정에서 고구려사회의 내부 모습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다음은 중국 측 문헌자료이다. 고구려라는 존재가 중국 측 기록에 등장하는 계기는 중원 왕조 한(漢)이 동방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현도군(玄菟郡)을 설치하면서부터이다. 물론 그 이전에 고구려 혹은 고구려를 포함하는 정치세력에 대한 언급이 없지는 않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른바 예군(濊君)남려(南閭)로 대표되는 28만 구 집단 및 한의 창해군(滄海郡) 설치 관련 기록이다. 그리고 현도군의 설치 및 군현 운영도 고구려 정치세력의 존재 방식 및 국가적 성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창해군, 현도군 관련 문헌자료가 고구려의 정치적 성장 및 국가 형성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파악함이 중요하다.
이러한 문헌자료의 영세함을 보완할 수 있는 자료가 고고자료이다. 고구려의 세력기반인 압록강 중상류, 혼강(渾江)일대에서 발견되는 다수의 고고자료 현황을 고구려의 등장과 국가 형성이라는 맥락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구려가 주변 주민집단과 뚜렷이 구별되기 시작하는 고고 자료의 지표는 적석묘(積石墓)의 축조이기 때문에 적석묘 관련 고고자료가 고구려의 국가 형성 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 자료가 된다.
이상의 자료 중에서 본 장에서 주되게 살펴보려는 자료는 현도군 관련 문헌자료이다. 가장 이른 시기의 고구려 등장 과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현도군 관련 자료는 고구려의 성장을 반영하는 간접적인 자료라서 고구려의 내부 사정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이에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및 적석묘 관련 고고자료를 통해 대략이나마 고구려의 국가 형성 추이를 파악하고 이를 기초로 현도군의 동향을 통해 고구려의 국가적 성장 양상을 파악하도록 하겠다.
묘제상에서 고구려 적석묘는 하나의 문화 범주, 종족 범주를 구성하고 있다. 고구려 초기 적석묘는 지상에 돌을 쌓아 묘단을 만든 다음 그 위에 시신을 안치하고 돌로 덮는 형태로 축조되었는데, 지상의 묘단에 매장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지석묘나 석관묘, 토광묘 등과 명확하게 구분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고구려 적석묘의 분포범위가 고구려의 국가 형성 과정에서 세력범위에 해당한다(여호규, 2014).
그런데 고구려 초기 적석묘에서는 동검, 동모, 동경 등 전형적인 청동기시대의 유물은 출토되지 않는 반면, 청동제 장식품과 생활용구 및 철제농공구와 무기가 많이 출토된다. 대표적으로 통화 만발발자유적이나 환인 오녀산성에서 청동기시대 후기층과 고구려 초기문화층이 명확하게 구별되고 있어, 고구려 초기 적석묘가 철기문화의 보급과 더불어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구려의 등장이나 국가 형성의 문화적 기반이 철기문화임은 분명하며, 이는 고구려의 등장 시기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기도 하다.주 001
각주 001)
적석묘에 관한 고고학적 접근 및 구체적인 현황에 대해서는 본 총서 고고자료편을 참고하기 바란다.
닫기
압록강 중상류 지역을 포함한 천산산맥 동부 산간지대에서는 요동의 다른 지역보다 다소 늦은 기원전 3세기 말경부터 철기문화가 본격적으로 보급되었다. 가장 이른 시기로 편년되는 위원 용연동 명도전(明刀錢) 유적과 장백 간구자고분군은 고구려 초기 적석묘와 동일한 축조방식을 택하고 있는데, 기원전 3세기 말부터 기원전 2세기 초경으로 편년되고 있다. 즉 철기문화가 보급되는 초기 단계에 압록강 중류와 상류에 거의 동시에 적석묘가 축조되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구려 초기 적석묘는 기원전 3세기 말 명도전 유적의 확산 및 철기문화의 보급과 더불어 조영되기 시작하였으며, 이 적석묘는 외부에서 이주하거나 유입된 묘제가 아니라 이 지역의 토착 주민들이 철기문화를 수용하면서 조영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여호규, 2014).
고구려 초기 적석묘의 분포범위는 대체로 압록강 중상류 일대로 한정된다는 점에서 문헌상에 보이는 고구려의 지리적 범주와 일치한다. 시기상으로는 후대이지만 『삼국지』 동이전에 서술된 고구려의 공간범위, 즉 요동군의 동쪽, 부여의 남쪽, 동옥저의 서쪽, 낙랑군의 북쪽이라는 지리적 범위 내에서 적석묘가 분포하고 있다.
따라서 공간적으로는 압록강 중상류 일대라는 범위 내에서 시기적으로는 기원전 3세기 말경에 문화적으로 철기문화를 기반으로 적석묘라는 독자적인 묘제를 갖추고 있는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는 주민집단이 출현한 것이다. 이 주민집단은 종족상으로는 주변의 예맥사회와 동일하지만, 3세기 말 무렵에는 문화적·정치적으로 주변 예맥사회와 구분되어 ‘고구려’ 혹은 ‘구려’로 불리게 되었다. 이 주민집단이 고구려를 구성하는 기반이라는 의미에서 ‘원(原)고구려사회’로 지칭하기도 한다(여호규, 2014).
이처럼 적석묘 등 고고자료를 통해 철기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고구려의 등장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철기문화의 보급에 따른 사회 변화와 정치적 성장을 통해 고구려의 국가 형성 과정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기원전 3세기 말부터 보급된 철제농공구를 기반으로 농업생산력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농업생산력의 발전은 이른바 읍락공동체 내부의 사회경제적 분화, 또한 읍락과 읍락 사이의 분화를 초래하고 촉진시키면서 원고구려사회에 계층화 과정을 진전시키고, 이 과정에서 일정한 공간 범주를 갖는 지역 단위정치세력집단이 등장하였을 것이다.
이와 관련된 적석묘 자료가 바로 기단적석묘의 등장이다. 무기단적석묘에서 기단적석묘로의 발전은 고분 축조기술의 발전과도 연관되지만, 동시에 사회경제적 분화에 따른 계층화, 신분화, 위계화의 물질적 표현으로 파악된다. 즉 기단적석묘 축조 집단의 등장은 읍락사회 내부의 주민에 대한 통제, 주변 읍락이나 지역집단을 통솔, 장악해가는 지배집단이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지역 단위 읍락사회를 기반으로 등장하는 정치세력들의 동향을 간접적으로 추정할 수 있는 자료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보이는 나(那), 곡(谷)집단이다. 고구려본기 및 『삼국지』 고구려전에 보이는 이른바 5부(部)의 이름, 즉 나부(那部)의 나(那)와 노부(奴部)의 노(奴)의 존재를 통해 고구려의 국가 형성 기반으로서 읍락사회가 어떻게 결속되어 가 는지를 추정할 수 있다.
고구려본기에는 나(那), 나국(那國), 나부(那部)의 용례가 등장한다. 나(那)는 노(奴)와 통하고 지(地), 양(壤)또는 내(川)나 천변(川邊)의 평야를 뜻하는 말로서, 곧 ‘나’란 명칭의 집단은 대개 천변 또는 계곡의 어떤 지역 집단을 뜻하며, 그것은 씨족공동체가 붕괴된 이후 각 지역별로 성립된 단위정치체로서의 성격을 지니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노태돈, 1975).
물론 고구려본기에 나타나는 ‘나(那)’의 역사적 실체는 이러한 어의적인 이해와는 구별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즉, 고구려본기의 ‘나’는 부(部)의 원형 내지는 구성 단위로서의 ‘나국’과 부(部)로서 성립된 이후에 나타나는 ‘나부’로 구분된다(임기환, 1992). 고구려본기에서 독립된 정치체로서 나국으로 파악되는 구체적인 사례로는 태조왕대에 복속되는 조나(藻那)와 주나(朱那)를 들 수 있다. 이들 나국과 나부가 ‘나(那)’라고 하는 지역집단의 성격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논리적으로 본다면 ‘나부’를 구성하는 집단 역시 고구려의 하부 단위정치체로 편제되기 이전에는 ‘나국’이라는 독자적인 정치체로 존재하였음을 상정할 수 있다. 이러한 나국의 존재는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조나, 주나가 나타나는 1세기 중엽을 전후한 시기가 그 하한이 되다. 즉 1세기 중엽 태조왕대까지 압록강 중상류 일대 공간 범주 내에서 고구려의 국가 통합이 완료되어 갔음을 뜻한다.
한편, 논리적으로 추론해보면 독자적인 나국을 형성하지 못하였지만 일정한 세력을 이루고 있었던 집단으로서의 ‘나’, 즉 나국으로 성장하기 이전의 ‘나’를 상정해 볼 수 있다.
고구려본기에는 이러한 집단을 ‘나’라고 칭하는 사례는 보이지 않지만, 이에 해당하는 집단의 모습은 많이 등장하는데, 천(川)·원(原)·곡(谷) 등으로 표현되는 집단들이다. 그래서 이들 집단을 ‘곡(谷)집단’으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고(임기환, 1987), ‘나(那)집단’이라는 용어로 개념화하는 견해도 있다(여호규, 1992). 그리고 고구려 지역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정치집단으로서의 곡집단 혹은 나집단의 성격을 『삼국지』 동이전에 보이는 읍락(邑落)에 비견되는 존재로 이해할 수 있다(임기환, 1987).
이와 관련하여 『삼국지』 위서 한전(韓傳)에 보이는 삼한(三韓)의 소국이 국읍(國邑)을 중심으로 다수의 읍락이 결합된 정치적 통일체이듯이, 고구려 나국의 구성 역시 이와 유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논리적으로 본다면 압록강·혼강 유역의 각 지역에 분산적으로 성립되어 있던 단위정치집단인 곡집단 혹은 나집단인 ‘나(那)’가 성장하면서 상대적으로 우세한 ‘나’를 중심으로 결속하여 ‘나국’을 구성하고, 이들 나국이나 읍락들의 상호통합 과정의 결과 최후로 5개의 단위정치체인 5나부가 성립되고, 이들이 하나의 고구려연맹체를 구성하였던 것이다. 이들 5개의 단위정치체 중에서 더 강대한 세력기반을 가진 자가 고구려연맹체의 영도세력으로 등장하게 되는데, 초기에는 소노부, 즉 비류나부가 연맹왕권을 차지하였다가, 그 후 새로 성장하는 계루부가 연맹장의 지위를 차지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계루부는 연맹왕권의 기반을 공고히 다지면서 이들 5개의 단위정치체를 나로 편제하여 태조대왕대에는 5나부연맹체를 확립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즉 나부의 내부 구조인 ‘나(那)-나국-나부’를 통해 고구려의 국가 형성 과정을 투사할 수 있다(임기환, 2004; 여호규, 2014).
이상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초기 적석묘 자료를 통해 철기문화를 기반으로 압록강 중상류 일대에서 원고구려사회가 형성되었고, 고구려본기에 보이는 단위정치체의 양상을 통해 이들이 나(곡집단, 나집단), 나국을 형성하면서 발전하여 최종적으로 5나부로 편제, 구성되는 고구려를 성립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압록상 중상류 일대의 강변이나 계곡에 존재하는 초기 적석묘군의 분포 양상을 통해 ‘나’ 또는 ‘나국’의 모습을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 단위정치체가 성장해가면서 어느 시기부터 고구려가 국가를 형성하는지에 대해서는 중국 측 문헌자료 특히 현도군 관련 자료를 통해 파악할 수밖에 없다.
이 글에서도 현도군의 개편 과정과 고구려의 성장 과정을 연관하여 정리한다. 고구려의 국가 성장 과정을 보여주는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현도군의 변화 과정을 통해 간접적으로 고구려의 성장 양상을 파악하고자 한다. 그런데 현도군 관련 문헌자료는 자료 해석을 둘러싸고 다양한 논의가 제기되고 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점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첫째, 현도군의 설치 배경으로서 그 이전 창해군의 설치에 대해 살펴본다. 즉 예군 남려로 대표되는 28만 구 집단이 한의 요동군으로 귀속하고, 이를 계기로 한이 창해군을 설치하고 폐지하는 과정,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그 후 현도군의 설치 및 운영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 살펴본다. 이는 28만 구 집단에 압록강 중상류 지역의 고구려가 포함되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둘째, 제1현도군의 설치 과정 및 그 기능과 관련하여 군현의 지리적 위치, 군현의 치소와 각 현의 위치 등이 주요한 논제가 되고 있는데, 이는 현도군과 고구려 지역과의 관련성을 파악하는 주요 논점 중 하나이다. 즉 현도군의 관할 대상은 누구였으며 그 중심지를 어디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여러 논의와 그 근거를 살펴본다.
셋째, 제2현도군으로의 변천 및 그 배경으로 사료에 보이는 “이맥소침(夷貊所侵)”의 실체에 대해 살펴본다. 이때 현도군 군치를 고구려의 서북으로 옮겼다는 기록은 고구려 세력의 성장과 동향이 현도군의 퇴축과 밀접하게 관련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동시에 제2현도군의 군현 구성 및 위치를 파악하여 고구려에 대한 통제 기능을 수행하는 제2현도군의 성격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현도군에 대응하는 고구려 세력의 존재 방식에 대해서도 살펴본다.
넷째, 현도군의 퇴축 과정과 더불어 고구려의 정치적 성장을 보여주는 또 다른 지표로서 이른바 책구루(幘溝婁)의 설치에 대해 일찍부터 주목해왔다. 다만 근래에 책구루의 설치 시점에 대해서는 여러 논의가 분분하다. 책구루의 설치가 고구려의 정치적 구심점의 성장 및 국가체제로서 5나부 체제의 성립과 연관하여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책구루의 설치 시점은 고구려의 국가 형성 시점과 맞물려 있어 중요한 논점이 되기 때문에 이에 대해 정리한다.

  • 각주 001)
    적석묘에 관한 고고학적 접근 및 구체적인 현황에 대해서는 본 총서 고고자료편을 참고하기 바란다. 바로가기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1. 고구려의 국가 형성 관련 자료 자료번호 : gt.d_0001_0030_002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