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고구려통사

3. 현도군 개편과 고구려의 성장

3. 현도군 개편과 고구려의 성장

1) 현도군의 퇴축과 고구려의 성장
『후한서』 권85 동이전 예(濊)조에는 기원전 82년에 진번군, 임둔군을 폐지하고 그 속현들을 낙랑군과 대방군에 병합하였음을 전하고 있다. 그런데 진번군과 임둔군이 동시에 폐지되었다고 보기도 하고, 기원전 82년에는 진번군만 폐지되고 그다음 변혁기인 기원전 75년에 임둔군이 폐지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한편, 『삼국지』 권30 동옥저전에는 현도군이 ‘이맥(夷貊)’의 침략을 받아 고구려의 서북 방면으로 옮기고 현도군 군치였던 옥저성을 낙랑군에 소속시켰다고 기록하면서, 이때 옮긴 현도군치를 『삼국지』를 편찬할 당시에는 “현도고부(玄菟故府)”라고 부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삼국지』를 편찬할 당시에는 제3현도군으로 군치는 지금의 무순 지역에 있었다. ‘현도고부’는 곧 제2현도군의 군치를 가리킨다.
그리고 『한서』 권26 천문지(天文志)에는 기원전 75년 정월에 요동(遼東)과 현도성(玄菟城)을 축조하였음을 전하고 있다. 이때 현도성의 축성은 이맥(夷貊)의 침입에 따라 현도군 군치를 옮기게 되는 상황이 단지 군치 이전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 옮긴 현도군치에 군사적 방어책이 급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현도군은 대략 기원전 82~기원전 75년 사이에 고구려 서북 방면으로 퇴축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으며, 현도군이 이들 고구려 세력의 공세에 대해 군사적으로 적극 반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이성제, 2011).
이러한 현도군의 변화를 보여주는 일련의 과정은 처음 설치되었던 한의 4군체제가 크게 변동하고 있으면서 이 지역에 대한 한의 지배력 약화를 드러내고 있다. 물론 진번군과 임둔군을 폐지하고 그 속현들을 낙랑군과 현도군에 병합하는 과정은 비록 2개 군이 소멸되었지만, 그 속현을 편입한 낙랑군과 현도군의 기능이 강화된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한의 지배력이 약화되었다고 볼 수 없다는 견해가 있다(이성제, 2011). 물론 그런 점도 고려되어야 하지만, 일단 군을 유지할 수 없는 임둔군과 진번군 지역의 어떤 사정이 한의 군현정책에 변화를 초래한 것은 틀림없다. 더욱 임둔군을 편입한 현도군조차 얼마 지나지 않아 군치를 고구려 서북 방면으로 이치할 정도로 대대적인 개편이 뒤따랐기 때문에, 낙랑군을 제외하고는 한의 군현지배정책을 변화시키는 어떤 상황이 상당히 넒은 범위에서 진행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처럼 기원전 82년부터 기원전 75년 사이 현도군의 지배력은 현저히 약화되어 갔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군현 지배에 대한 토착세력의 저항만이 아니라, 이 무렵 한의 대외정책 변화도 고려되어야 한다. 기원전 87년에 무제(武帝)가 죽은 후 한은 주변 국가들에 대하여 소극적인 대외정책을 구사하였다. 염철논쟁(鹽鐵論爭)이나 유가(儒家)를 중심으로 신흥 정치세력에 의해 주요 외교정책론으로 제기된 이이제이론(以夷制夷論)등도 그러한 흐름 속에서 나타났다. 하지만 이 시기 한 군현의 잦은 변동 원인을 한의 대외정책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 현도군 군치의 이동이 ‘이맥(夷貊)’의 침공임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는 기사에서 보듯이 토착세력의 강력한 반발이 군현 지배체제 변동에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여기의 이맥은 고구려를 건국하는 압록강 중상류 일대의 정치세력으로 파악되며(여호규, 2002), 현도군치가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이동했다는 점에서 이맥이 침입한 지역은 아마도 현도군 관할 아래에 있던 고구려 지역일 것이다(田中俊明, 1994).
즉 이맥에 의하여 요동군에서 동해안의 옥저성까지 이어지는 교통로가 차단되자, 부득이 한 정부는 옥저성을 낙랑군 소속으로 재편하고, 현도군의 군치는 고구려의 서북 방면인 고구려현으로 이전시켰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현도군은 고구려에 대한 견제라는 기능을 맡게 되었을 것이며, 고구려의 군사적 압박에 대응하기 위하여 요동성과 현도성을 축조했던 것이다. 이러한 한의 대응 양상으로 보아 당시 고구려 세력이 현도군에 대해 가하는 압박이 매우 강력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기원전 75년 무렵에 압록강 중상류 유역에는 ‘이맥’이라 불리우며 주변 세력과 구분되고, 동시에 현도군 세력을 퇴축시킬 수 있는 정도로 정치적 통합과 군사력을 갖춘 보다 강력한 정치체가 등장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여호규, 2005). 이 ‘이맥’이 초기 고구려를 구성하는 세력 집단일 것이다. 이를 『삼국지』 고구려전에 보이는 초기 왕실인 소노부(消奴部) 중심의 연맹체가 형성된 결과로 추정하기도 한다(이준성, 2019).
그리고 뒤에서 언급하듯이 늦어도 제2현도군에 고구려현이 설치되었다는 사실은 기원전 75년 이전 혹은 현도군의 설치 이전에 ‘고구려’라는 이름의 정치체 혹은 세력집단이 존재하였음을 뜻한다. 현도군을 퇴축시킨 이맥이 고구려라는 이름과 깊이 연관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를 통해 늦어도 기원전 75년경에는 고구려가 국가 형태를 갖추고 주위의 국가들과 연합하고 있었다고 보고, 고구려의 국가 형성 시기를 현도군 설치 이전으로 올려보기도 한다(이기백, 1986).
그러면 기원전 75년 무렵에 현도군의 군치를 고구려현으로 옮기고 옥저현을 낙랑군에 이관시킴에 따라 현도군의 관할범위는 어떻게 변화되었을까? 제1현도군 시기에 현도군의 관할범위나 지배방식을 광역의 지배범위가 아니라 공로상의 지배로 파악한 이유는 현도군의 설립 초기 현 수에 대한 기록이 없는 상황에서 제2현도군 시기에 현 수가 3개에 불과하다는 점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이제 현도군의 운영 및 중심지(군치)문제와 관련하여 현도군의 군현 문제를 살펴보자.
『한서』 권28 지리지에는 현도군의 속현으로 고구려(高句驪), 상은태(上殷台), 서개마(西蓋馬)3개 현을 기록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기원전 75년 무렵 현도군이 고구려 서쪽으로 이치된 이후인 제2현도군에 소속된 현의 수로 파악된다. 다만 현도군의 호구 수는 2만 5,006호(戶)에 22만 1,845구(口)라고 기록하고 있어서, 3개라는 현의 수에 비하여 호구 수가 매우 과도하다. 같은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낙랑군의 경우 25개 현에 인구는 40만 6,748명으로 1개 현당 평균 약 1만 6,000명이며, 요동군은 18개 현에 27만 2,539명으로 1개 현당 평균 1만 4,000명의 인구 분포를 보이고 있었다. 그에 비해 현도군은 1개 현당 평균 7만 3,000명의 인구를 보유하는 것으로 나타나, 그 수가 지나치게 많음을 알 수 있다. 『한서』 지리지에서 1개 현의 인구가 평균 7만 명 이상인 경우는 대규모 인구가 밀집한 중원 지역만 해당되며, 이 외에는 대체로 1만 5,000명에서 2만 명의 인구를 보유함이 일반적이다. 낙랑군 치소가 위치한 조선현(朝鮮縣)의 경우 6만 명에 가까운 인구수이지만, 본래 고조선의 수도라는 점을 고려하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낙랑군의 나머지 속현들도 대부분 인구수 2만 명을 넘지 않는다(이종록, 2018). 따라서 속현은 제2현도군 시기의 기록이며, 호구 수와 인구수는 제1현도군 시기의 호구수 기록으로 이해하기도 하고(李丙燾, 1976), 또는 호구 수는 왕망(王莽)대 이전으로, 속현은 왕망 대 이후의 것으로 보기도 한다(末松保和, 1961). 그러나 『한서』 지리지 현도군조의 현 수 및 호구 수가 시기 차이가 큰 기록이 혼재되어 있다는 앞의 추정은 뚜렷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지는 못하다.
『한서』 지리지의 군국(郡國)별 호구적은 원시(元始) 2년(2년) 상계부(上計簿)에 의해 작성된 것이고, 군국별 소속 현목은 원연(元延)-수화(綏和) 연간(기원전 9~기원전 8년)에 작성된 것이다(肥後政紀, 1998). 그렇다면 현도군의 경우에만 굳이 호구 수와 현 수 기록이 시차를 크게 달리한다고 파악할 근거는 없다. 호구 수나 현 수 모두 제2현도군 시기의 상황으로 파악함이 타당하다(윤용구, 2007).
그러면 현 수와 호구 수 사이에 나타나는 이러한 불균형의 배경은 무엇일까? 호구 수에는 현도군 관할 외부에 있는 고구려사회의 주민 수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견해가 있고, 또는 이 호구 수를 실제 현도군이 관할하던 속민으로 보며 속현의 수가 적은 것은 변군에 고구려를 제압해야 하는 입장인 현도군의 특수성이 반영되었다고 추정하는 경우도 있다(이성제, 2011). 또는 제2현도군 설치 당시 고구려에 대응하기 위한 정책으로 대규모 사민(徙民)의 결과로 이와 같은 과대한 인구를 보유하게 되었다고 이해하기도 한다(박대재, 2017).
이러한 현 수와 호구 수의 불균형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우선 제2현도군의 군치인 고구려현 및 상은태현, 서개마현 세 현의 위치를 비정해보자. 『한서』 지리지에는 이들 세 현의 위치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高句驪), 요산(遼山)에서 요수(遼水)가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흘러 요대(遼隊)에 이르러 대요수(大遼水)로 들어간다. 또 남소수(南蘇水)가 있는데 서북쪽으로 흘려 새외(塞外)로 나간다. 상은태(上殷台), (왕)망이 하은(下殷)으로 고쳤다. 서개마(西蓋馬), 마자수(馬訾水)가 있는데 서북쪽으로 흘러 염난수(鹽難水)로 들어가고, 서남쪽으로 흘러 서안평(西安平)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두 군을 지나는데, 길이가 2,100리이다.(왕)망이 현도정(玄菟亭)으로 고쳤다.주 011
각주 011)
『한서』권28 지리지8하1, “高句驪 遼山遼水所出 西南至遼隊 入大遼水 又有南蘇水 西北經塞外上殷台 莽曰下殷西蓋馬 馬訾水西北入鹽難水 西南至西安平入海 過郡二 行二千一百里 莽曰玄菟亭.”
닫기
 
먼저 고구려현은 소요수(小遼水), 즉 혼하(渾河)가 그 경내에서 발원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제2현도군 때의 상황으로서 소자하 상류에 소재하고 있는 현재 신빈현 영릉진고성으로 비정하는 데 이견이 없다. 문제는 제1현도군 때 고구려현의 위치이다, 그동안 고구려의 수도였던 현 길림성 집안(集安)지역으로 보는 견해가 주류였다. 이는 현도군의 중심지와 고구려의 중심지를 동일한 곳으로 파악하는 입장이다. 그리고 초기 현도군의 군치를 옥저현으로 보는 견해에서도 제1현도군 시기 고구려현의 위치를 중국 길림성 집안으로 비정하고 있다(田中俊明, 1994). 즉 제1현도군에서 제2현도군으로의 변화에는 군치(郡治)의 변화뿐만 아니라 고구려현도 이동하였다고 파악한다.
사실 그동안 집안에 현도군 고구려현이 있었다는 논거가 없지 않았다. 집안시문물보관소는 국내성을 조사하면서 고구려시기의 석축 성벽 아래층에서 판축(版築)으로 쌓은 토축 성벽을 발견하였고 이를 한대 고구려현성의 흔적일 가능성을 제기하였다(閻毅之·林至德, 1984). 이러한 한대 토성지의 존재는 집안 지역을 고구려현의 소재지로 비정하는 결정적인 근거였다. 집안 지역만이 아니었다. 중국 요령성 환인(桓仁)현에 있는 하고성자(下古城子) 고성지(古城址)유적 역시 한의 현성이었던 것을 고구려가 전용하게 되었다고 이해하였다(魏存成, 1985). 이렇게 고구려 세력의 중심지에 현도군의 현치가 자리잡았다고 이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추론으로서 그동안의 주류 견해였다.
그러나 근래의 고고학적 조사에 따르면 집안 국내성유적에서 보고되었던 토축 성지는 한대의 토성지로 볼 수 없고, 고구려시기 축성 방식의 일부로 파악하는 견해가 유력해졌다. 마찬가지로 환인의 하고성자성지 유적도 근래의 조사에서는 한의 축조법을 이용하여 고구려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李新全, 2004). 이러한 근래의 고고자료에 대한 새로운 조사와 이해에 따라 고구려 세력의 중심지인 환인 지역과 집안 지역에서 한 군현 치소의 존재를 인정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에 고구려현의 위치가 처음부터 신빈 영릉진(永陵鎭)한대 고성(古城)으로서, 제1현도군과 제2현도군의 고구려현의 위치는 동일한 곳이었다는 견해도 등장하였다(이성제, 2011).
그러면 제2현도군의 고구려현으로 비정되는 신빈 영릉진고성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를 살펴보자. 영릉진고성은 큰 성인 남성(南城)과 작은 성인 북성(北城)으로 이루어져 있다. 2004~2008년에 걸쳐 북성을 발굴한 결과 북성의 성벽은 세 차례에 걸쳐 축조되었고, 내부에는 5개 문화층이 존재하고 있다고 한다. 제1기는 청동기문화층, 제5기는 요금대(遼金代)문화층이고, 그 사이의 제2~4기 문화층이 한(漢)이나 고구려와 연관된 문화층이다. 그중 제2기 문화층은 전한시기, 제3기 문화층은 후한시기로 편년되고 있다. 제4기 문화층은 다시 전기와 후기로 나뉘는데, 발굴보고자들은 전기는 후한 붕괴 이후 요동 지역의 패권을 장악한 공손씨(公孫氏) 정권과 연관되며, 후기는 고구려나 전연(前燕)와 연관된 것으로 파악하였다(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2017).
그중 제2기 문화층이 현도군 시기와 겹치는데, 보고자들은 북성이 제1현도군 시기에 처음 축조되었고, 기원전 75년에 개축되었다고 보았다. 더욱 5기 문화층에서 봉니(封泥)잔편이 출토되었는데, 윗면 왼쪽에 ‘馬’변, 아랫면에 ‘丞’자가 남아 있다. 잔존 글자와 자획으로 보아 이 봉니는 ‘고구려승(高句驪丞)’이라는 네 글자가 찍혔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봉니는 교란에 의해 제5기 문화층에 들어간 한대 유물로 영릉진고성의 북성이 고구려현의 치소임을 가리키는 증거가 된다.
이러한 발굴보고의 견해에 근거하면, 제1현도군 시기의 고구려현도 영릉진고성에 위치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제1현도군을 압록강 중상류 일대에 두었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소자하 유역에 위치한 영릉진고성의 북성이 기원전 75년경에 처음 축조했다고 추정하고 있다(여호규, 2020). 현재의 고고자료가 이 정도 시차를 밝혀내기는 어렵기 때문에, 일단 제1현도군 고구려현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차후 성과를 더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규모가 작은 북성을 현도군의 수현(首縣)인 고구려현 치소로 본다면, 이웃하고 있는 규모가 큰 남성은 적어도 제2현도군 시절 군치로 추정할 수 있다. 북성과 남성의 축조 시기 및 유적 관계에 대해서는 앞으로 남성에 대한 발굴이 이루어진 뒤에 보다 분명해질 것이다.
다음 제2현도군의 또 다른 현인 서개마현과 상은태현의 위치에 대해 살펴보자. 서개마현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제기되었는데, 현재의 혼강과 부이강(富爾江)의 합수처(李丙燾, 1976), 신빈 목기토성(田中俊明, 1994), 현재의 강계 지역(和田淸, 1951), 위원(渭原)에서 초산(楚山)으로 나가는 일대(윤용구, 2008)등으로 비정하고 있다. 앞서 살펴본 문헌 기사에서 약간의 단서를 찾아볼 수 있는데, 서개마현의 관내에 흐른다고 하는 염난수와 마자수를 어디로 비정할 것인지, 그리고 왕망 대에 ‘현도정’으로 불렸다는 점에서 현도군에서 요동군으로의 입경지대에 있었을 가능성(이병도, 1976)을 고려할 것인지 여부에 따라 위치 비정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런데 대체로 마자수를 강계에서 서북쪽 만포진으로 흐르는 독로강으로, 염난수를 압록강으로 비정하게 되면(和田淸, 1951)서개마현은 독로강 유역과 압록강 중류 지역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집안, 강계, 위원에서 초산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가 이에 해당한다. 현도군과 요동군을 연결하는 교통로상에 위치하였다고 본다면 신빈이나 소자하 일대에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겠지만, 서개마현이라는 이름으로 보아도 압록강 중류 지역에 비정함이 타당하다. 그런데 집안은 근래에 이루어진 발굴조사 결과 이 지역에서 한대의 치소가 있었을 가능성이 부정되었으므로, 일단 후보에서 제외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강계 혹은 위원에서 초산 일대로 보는 견해가 교통로상에서 볼 때 가장 가능성이 높다.
상은태현은 그 위치를 짐작할 만한 기록이 없지만, 기사의 기술 순서에서 고구려현과 서개마현의 사이에 기재되어 있는 점을 전제로 대략 그 위치를 추정하고 있다. 서개마현을 압록강 중류 지역 또는 집안현 일대로 보면서, 상은태현을 고구려현와 서개마현을 연결하는 위치인 혼강 유역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노태돈, 1999). 개연성이 높다고 보는데, 구체적으로 상은태현의 유력한 후보지로 통화(通化)의 적백송고성(赤柏松古城)을 고려할 수 있다(邵春華 外, 1987; 李健才, 1990; 노태돈, 1999). 이외에 영릉진고성으로 비정되는 고구려현으로 이어지는 교통로상에서 고구려현을 방어하는 지리적 위치를 고려하여 상은태현을 신빈의 백기보고성에, 서개마현을 신빈현 목기진 부근의 목기토성에 비정하는 견해(田中俊明, 1994)가 있다.
상은태현을 비정할 수 있는지 여부와 관계 없이 통화의 적백송고성은 한대 현성(縣城)유지(遺址)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특히 근래의 발굴 조사 결과가 유의된다(王義學, 2008). 즉 적백송고성에서는 두 시기의 문화층이 확인되었는데, 아래층인 1기는 전한(前漢)중후기로 편년되며, 위층인 제2기는 후한(後漢)초로 편년된다. 두 문화층 가운데 아래층인 제1기는 비교적 장기간 사용했는데, 전한 중후기로 편년된다. 반면 제2기는 단기간 사용했는데, 후한 초로 편년되며 미완성 상태에서 폐기된 유구가 다수 확인되었다. 제2기 건물군이 미완성 상태에서 폐기된 것은 고구려가 후한의 유화책을 틈타 이곳을 공격하여 점령했기 때문으로 본다(여호규, 2020). 어쨌든 적백송고성이 전한 말 나아가 후한 초까지 존속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고고자료의 정황은 제2현도군의 속현인 상은태현으로 비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제2현도군의 서개마현과 상은태현의 위치 비정을 둘러싸고도 적지 않은 논란이 있는 만큼 여기서 그 위치를 분명히 하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서개마현과 상은태현 2개 현은 제1현도군에서 제2현도군으로 변천하는 과정에서 현치가 이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제1현도군 고구려현과 제2현도군 고구려현의 위치를 어디로 파악하느냐는 현도군의 성격이나 관할범위를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점이 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현재까지 조사된 고고자료로서 고구려 세력의 중심지역 즉 집안이나 환인 지역에서 한대 현도군의 군현 치소가 설치되었다는 근거를 확인하기 어렵기 때문에 고구려현의 후보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제1현도군의 고구려현을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압록강 중류 지역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보는 견해(여호규, 2005)가 있고, 아니면 제1 현도군과 제2현도군 고구려현은 그 위치가 동일하다고 파악하는 견해가 있다(이성제, 2011). 전자의 경우에는 고구려 세력의 중심지를 벗어난 곳에 현치를 두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지고, 후자의 경우에는 고구려세력권을 벗어난 곳에 설치한 현을 왜 고구려현이라고 명명했는지가 의문이다. 현재까지의 문헌자료나 고고자료로서는 제1현도군의 고구려현 위치를 확정하기 어려운데, 만약 후자의 견해처럼 제1현도군과 제2현도군의 고구려현이 동일한 곳 즉 신빈 영릉진고성이라고 한다면, 현도군과 고구려 세력집단과의 관계를 지금까지의 여러 견해와는 상당히 다르게 파악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고구려현의 위치 비정 문제는 앞으로도 깊은 관 심을 기울여야 한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제2현도군 때에 고구려현과 현도군 군치는 영릉진고성 일대임은 분명하고, 상은태현은 통화 적백송고성에 비정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서개마현의 위치를 강계 혹은 위원에서 초산 일대로 보는 견해에 따르게 되면, 이들 3개 현의 지리적 위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고구려 발흥지의 중심부인 환인이나 집안 지역을 외곽에서 감싸는 형국을 이루고 있다. 이는 당연히 현도군을 서쪽으로 이전시키는 요인이 되었던 성장하는 고구려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다(윤용구, 2008).
그런데 상은태현과 서개마현은 제1현도군 때부터 설치되었던 현이며, 고구려현의 경우 제1현도군 때의 위치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적어도 고구려 세력의 핵심지역인 집안이나 환인 지역이 아니었음은 고고자료의 현황으로 볼 때 어느 정도 분명하다. 고구려현이라는 이름을 갖는 현이 고구려 세력의 핵심지역에서 벗어나 있다고 한다면, 혹 제1현도군 시기에 위 3현 외에도 다수의 현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고구려의 세력범위 외곽에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에 대해 이 시기 현도군의 기능을 교통로상의 몇 개 거점을 중심으로 현성을 설치하고 이를 잇는 지역을 관할하면서, 토착사회인 고구려의 중심지와는 유리된 위치에서 고구려 세력을 감시, 견제한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낙랑군이 토착사회의 세력집단별로 현성을 설치한 반면, 현도군은 몇 개의 거점을 중심으로 현성을 설치하고 관할범위를 정하였던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윤용구, 2006). 이런 견해가 타당성이 있다면, 현도군 설치 당시의 관할범위나 성격, 그리고 현도군의 기본 성격으로 파악하고 있는 교통로의 운영 양상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견해와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앞으로 새로운 연구방법이 필요한 연구과제가 될 것이다.
한편, 제2현도군이 불과 3개의 소속 현만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점에서 고구려 세력에 대한 군사적인 대응 방식에 유의하는 연구도 있다. 우선 기원전 75년에 현도군치를 옮기는 시기를 전후하여 군국의 무리를 모아 요동성과 현도성을 축조했다는 『한서』 권7 소제기(昭帝紀)의 기사가 주목된다. 즉 군치 이전을 전후하여 ‘이맥소침’에 대응하여 이 지역 군사력 강화의 조치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때 축조된 현도성은 새로운 군치 즉 영릉진한대고성으로 종래의 현성을 군치로 전용하게 되면서 대대적으로 개축한 것을 뜻한다. 특히 군국의 무리를 모아 축조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규모의 성곽을 쌓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동시에 요동성도 함께 축성하였다는 점에서도 한이 요동 지역에 대한 군사력을 강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같은 조치들은 단지 고구려 세력의 성장만이 아니고 요동의 서북방에서 흥기하고 있던 오환(烏桓)문제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권오중, 1995; 여호규, 2005).
당시 요동 지역에서 오환이 문제를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요동군의 약체화에 따른 것으로 도요장군(度遼將軍)이라는 중앙의 원정군이 출격해야 할 정도로 무기력한 상태에 있었다. 이는 소제(昭帝)대의 긴축정책 때문이었다. 또한 도요장군이 출정했다는 것은 요동 지역에 거주하는 이민족이 동요하고 있음을 시사한다(권오중, 1995). 오환의 위협에 더하여 압록강 중류 일대의 주민집단인 이맥(夷貊)이 제1현도군을 공격하였다. 즉 당시 한은 동북방에서 오환과 고구려 양 지역에서 동시에 위기상황에 직면하게 되었고, 일단 더 큰 위협인 오환을 토벌하는 데 한의 군사력을 집중하였고, 이맥에 대해서는 현도군치의 이전과 현도성 축조로서 대처한 것이다(여호규, 2005).
한편,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현도군의 군사적 방어체체로서 중국 요령성 무순(撫順)일대에서 조사 보고된 한대 봉수선(烽燧線)에 주목한 연구도 있다. 보고에 따르면 이 봉수선은 무순을 중심으로 그 서쪽으로는 심양까지, 동쪽으로는 소자하 연안을 따라 동남쪽으로 신빈 영릉진고성과 왕청문(旺淸門)일대까지 이른다. 이 봉수선의 수효는 약 60여 기로 약 150km의 구간에 걸쳐 분포하고 있다(蕭景全, 2000). 그런데 이 봉수열은 지역적으로 혼하와 소자하의 연안선에 집중하여 설치되었다는 점에서 가도(街道)를 따라 설치된 ‘도상수(道上燧)’이며, 제2현도군 시기에 배치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를 현도군에 새로 설치된 군사적 역량강화정책의 하나로 이해하고 있다(이성제, 2011). 이 봉수유적의 성격에 대해서는 앞으로 좀더 구체적인 검토가 필요하겠지만, 한 현도군이 고구려 세력에 대한 대응책의 하나로 주목할 만하다.
적백송고성의 발굴결과에서 보듯이 후한 초에 적백송고성이 폐기되었다. 특히 미완성 건축유지를 보면, 이러한 폐기 과정이 매우 돌발적인 가능성을 보여준다. 즉 현도군의 최전방 현치의 퇴축은 곧 고구려 세력의 공세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현도군과 고구려 세력 사이의 국경선 중 하나는 지금의 통화에서 신빈 사이 어느 지점에서 형성되었을 것이다.
 
2) 책구루의 설치 시기
제2현도군 때에 고구려와 관계를 보여주는 사료는 거의 없는데, 다음 기사는 양자 관계의 맥락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런데 현도군 자체가 두 번이나 치소를 옮겨서 제1현도군에서 제3현도군으로 변천하는 데다가 이 기사에는 특정 시점에 한정되지 않고 장기간에 걸친 현도군과 고구려 관계를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이 기사의 해석을 둘러싸고 적지 않은 논란이 있다. 책구루의 설치 시점과 관련하여 여러 견해가 제기되는 중요한 이유이다. 구체적인 이해를 위하여 『삼국지』 권30 고구려조의 관련 기사를 제시한다.
① 한나라 시기에 북·피리·악공(伎人)을 하사했는데, 항상 현도군에 와서 조목(朝服)과 의책(衣幘)을 받아갔으며, 고구려령(高句麗令)은 그 명적을 관리했다. ② 그 뒤에 점차 교만하고 방자해져 다시는 [현도]군에 오지 않았다. ③ 이에 동쪽 경계에 작은 성곽을 쌓아 안에 조복과 의책을 두면 세시(歲時)에 와서 가져갔다. ④ 지금도 오랑캐들은 여전히 이 성곽을 책구루(幘溝婁)라 부르는데, ‘구루’는 구려에서 성곽을 일컫는 말이다.주 012
각주 012)
『삼국지』권30 위서30 동이전 고구려, “漢時賜鼓吹技人 常從玄菟郡受朝服衣幘 高句麗令主其名籍, 後稍驕恣 不復詣郡, 于東界築小城 置朝服衣幘其中 歲時來取之, 今胡猶名此城爲幘溝漊 溝漊者 句麗名城也.”
닫기
 
이 기사에서는 모두 네 개의 시점이 등장하고 있다. 이 네 개의 시점 중 그 시기가 비교적 명료한 시점은 ④ 이다. 즉 『삼국지』가 편찬되는 3세기 중엽이다. 여기서 오랑캐는 아마도 산상왕 때에 고구려에 투항한 호(胡), 즉 선비집단일 것이다. 고구려는 이들 선비집단을 책구루 지역으로 사민시킨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는 책구루가 위치하고 있는 지역이 3세기 중엽까지도 고구려와 위(魏)사이의 완충지대로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기사이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다.
그런데 ④를 제외한 ①, ②의 시점이 모두 명확하지 않으며, ③의 시점, 즉 책구루가 설치된 시기 또한 불분명하다. 각 기사의 시점에 대해 먼 저 살펴보자.
① 기사는 ‘한시(漢時)’라고 표현된 시점인데, 한이 북·피리·악공(伎人)을 하사하고, 고구려령(高句麗令)이 명적을 관리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이 제1현도군 때의 상황인지 아니면 제2현도군 때의 상황인지, 아니면 양 시기를 모두 포괄하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이 점과 관련하여 ②“그 뒤 점차 교만하고 방자해져”라는 시점에 대한 이해가 서로 달라진다. 즉 이를 기원전 75년 현도군의 군치를 옮기게 되는 이유가 된 “이맥소침(夷貊所侵)”으로 이해하는 견해에서는 당연히 그 앞의 ‘한시(漢時)’의 상황을 제1현도군 때의 내용으로 파악하게 된다(박경철, 1998).
그러나 “점차 교만하고 방자해져”라는 표현은 “이맥소침”에 따른 군치의 이동과 같은 매우 적대적인 상황으로 이해하기 어렵다고 판단된다. 해당 기사의 전후 맥락을 볼 때 ① 시기에서부터 ③ 시기에 이르기까지 현도군에서 고구려와의 동계(東界)를 설정할 수 있는 동일 지역에 위치한 현도군의 상황을 반영한다는 지적대로(여호규, 2005), 사료에서는 특별히 현도군의 위치가 변경된 정황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①‘한시(漢時)’의 상황 역시 제2현도군의 상황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면 ② 기사의 내용 즉 “점차 교만하고 방자해져 다시는 [현도]군에 오지 않았다”라는 기술은 어떠한 상황을 뜻하는 것일까? 이러한 변화는 그동안 고구려 계루부 왕권의 강화 및 부체제(部體制)의 등장과 관련하여 설명되어 왔다. 즉 ① 단계에서는 고구려사회의 ‘나(那)’ 등 소집단 수장들이 개별적으로 외교권과 무역권을 행사하여 현도군과 교섭하였으나, ② 단계에서는 고구려 계루부 왕실이 등장하면서 현도군에 의한 분리조정책을 차단하고 고구려사회 내 세력집단의 독자적인 외교 교섭을 통제하면서 이들을 결집시킨 결과로 이해하였다(노태돈, 1976).
그리고 이러한 양자 관계의 변화, 고구려사회 내부의 정치적 결집은 최종적으로 현도군의 동계에 책구루가 설치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책구루의 존재는 고구려 계루부 왕권이 대외무역권과 교섭권을 장악하고 통제하고 있는, 즉 고구려의 대외교섭창구의 일원화를 뜻하는 것으로, 바로 계루부 왕권의 강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이해하였다.
그러면 책구루가 설치된 시점은 언제일까? 이에 대해서도 여러 견해가 제기되었다. 기원전 75년 전후설(윤용구, 2006; 이성제, 2011), 유리왕설(이종욱, 1999), 유리왕 말기에서 대무신왕대설(김미경, 2007; 김현숙, 2007), 태조왕대설(노태돈, 1975; 김기흥, 1987; 김창성, 2004; 여호규, 2005) 등이다.
먼저 태조대왕설은 책구루가 계루부 왕실이 대외교섭권을 일원화한 결과로 파악하고, 이를 고구려의 5부체제 성립과 동일한 과정으로 파악하는 관점에서 제기되었다. 이후 여러 연구자들이 이 견해에 동의하면서 5부체제가 성립된 태조왕 무렵에 책구루가 설치되었다고 보는 것이 현재까지 주류적 견해이다. 하지만 이 견해는 고구려사회의 내부 문제인 5부체제의 문제와 대외관계의 결과인 책구루 설치가 반드시 연계된다는 점이 충분히 논증되지 않았기 때문에 책구루의 설치 시점에 대해 반론이 제기될 수 있었다.
이에 책구루의 시점을 당시 전한, 왕망, 후한으로 이어지는 시기의 국제정세 및 중국 왕조의 대외정책, 동방정책 등과 관련시켜 검토하는 연구가 나왔다. 즉 제2현도군 등장의 배경으로 오환의 흥기에 주목하면서, 오환 문제가 안정되자, 한은 압록강 중류 지역 주민집단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해 나갔다고 보고, 그 구체적인 내용이 『삼국지』 기사에서 고취기인(鼓吹技人)사여하고 고구려현령이 명적(名籍)을 관장하였다는 기사라고 파악하고 있다(여호규, 2005).
하지만 책구루는 고구려가 현도군만을 교섭 상대로 하던 시기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볼 때, 태조왕대의 대외관계를 보면 이미 현도군을 넘어 요동과 요서 일대의 군현 및 선비(鮮卑)등 주변 유목세력과도 활발히 교섭하고 있기 때문에, 태조왕대를 책구루의 설치 시기로 보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왔다(윤용구, 2006). 또한 책구루 설치의 의의를 현도군과의 교섭 창구 일원화로 설정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꼭 태조왕대로 보아야 하느냐는 점에 의문을 제기하는 반론도 나타났다. 고구려는 기원전 75년 무렵 ‘이맥소침’ 사건이 증명하는 것처럼 상당한 정도의 응집력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태조왕대 이전에 이미 고구려가 현도군과의 교섭을 단일화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본 것이다(이성제, 2011).
이러한 입장에서 근래에 책구루는 전한 소제 말에서 왕망(王莽)이 등장하기 이전에 설치 운용되었다는 견해가 등장하여 여러 연구자들이 동의하거나 비슷한 입장에서 논증하는 견해가 다수 등장하고 있다. 이들 견해에서는 다시금 ②의 단계를 『삼국지』 동이전에 기록된 이맥의 현도군 침략, 곧 당초 현도군의 영역에 포함되었던 고구려가 현도군을 공격하여 양자 교섭이 단절되었던 사건의 결과로 해석하고 있다(윤용구, 2006; 이성제, 2011; 박노석, 2015). 이처럼 책구루의 설치 시기를 왕망대 이전으로 본다면 제2현도군으로 이전한 기원전 75년에서 9년 사이에 해당한다(이종욱, 1987). 책구루의 설치 시기를 이렇게 앞당겨 본다면, 기존의 주류적 견해인 태조왕대설과는 상당히 다르게 고구려 초기 역사상을 구성해야 하기 때문에 신중한 접근이 요구된다.
이러한 새 주장의 문헌적 근거는 비교적 후대에 등장하는 사서인 『북사(北史)』와 『통전(通典)』, 『문헌통고(文獻通考)』의 고구려조 관련 기사에서 책구루 관련 기사에 이어서 왕망에 의한 고구려병의 징발 관련 기사가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기사의 기술 순이 연대기적인 내용을 갖는다고 보고, 책구루의 설치를 왕망대 이전으로 판단하고 있다. 물론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태조왕대에는 고구려와 한의 접촉 지점이 현도군만이 아니라 요동군 등 보다 폭넓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상황도 깊이 고려되고 있다.
하지만 『북사』 등 후대 사서의 기사에 보이는 기술 순은 연대기적인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 기사는 대체로 『삼국지』 고구려조의 관련 기사를 전재하고 있는데, 『삼국지』 고구려조의 내용을 보면, 책구루 관련 기사가 기술되고 이어서 관등이나 풍속 등 민족지적인 내용이 기술되고 있으며, 그 뒤에 왕망 초기에 고구려병 징발 관련 기사 등 기년 기사가 연대기순으로 기술되고 있다. 이와 같은 『삼국지』 고구려조 기술 순서를 고려하면 후대 사서 편찬자들이 책구루 기사와 왕망 초기 기사 사이에 있는 민족지적인 기사를 생략하고 관련 기사를 전재하다 보니, 자연스레 책구루 기사가 왕망 초 기사 앞에 기술되는 결과가 되었던 것이다. 『북사』 등 후대 사서에 보이는 책구루 기사의 기술 순서를 연대기순으로 파악하는 것은 신중한 검토가 요구된다.
다음 태조왕대 후한과의 관계에서 고구려가 현도군을 넘어 요동 일대를 유린하고 이에 대해 요동군이 대응하고 나서는 상황 역시 하나의 정황일 뿐이며, 현도군과 고구려의 관계를 부정할 수 있는 근거로는 부족하다. 오히려 후한의 입장에서 고구려와의 군사적인 충돌에 대응하더라도, 현도군을 통하여 책구루 설치 등 보다 유화적인 교섭창구를 유지할 필요성이 더욱 커졌다고 볼 수도 있겠다.
앞서 인용한 바 있는 『삼국지』의 책구루 관련 기사를 보면 일단 기사 ①~③에서 현도군치의 이동을 고려할 만한 정황이 언급되어 있지 않아, 기사 ②의 내용 역시 제2현도군 시기의 상황으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실제로 49년 이후 105년까지 고구려와 제2현도군의 교섭 기사는 거의 확인되지 않는데, 이는 기사 ②의 내용이 이 시기의 상황임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면 책구루의 기능에 대해 살펴보자. ‘이맥소침’ 이후인 제2현도군 단계에서도 ①에서 전하는 바와 같이 현도군은 고구려를 대상으로 조복과 의책을 사여하였으며, 이후 고구려가 ‘교만하고 방자해져서’ 군에 찾아오지 않았음에도 현도군에서는 책구루라는 성을 쌓아가면서까지 교섭을 유지하였다는 점에 주목하면, 즉 조복과 의책 사여 및 책구루 설치가 고구려보다는 현도군의 필요에 의한 것임을 짐작케 한다(이종록, 2018). 이러한 상황을 한이 동방 주변 지역 주민들에 대해 중국 문물을 제공한다는 조건으로 군(郡)에 속하게 한다는 정책을 추진한 결과라고 파악하기도 한다(이준성, 2019).
그러면 조복의책의 사여나 책구루의 설치를 통해 현도군이 추구한 것은 무엇일까? 우선 고구려 현령에 의해 관장되는 ‘명적(名籍)’이란 조복의 책의 수여 대상이 기재된 명부(名簿)로 파악하고. 한 군현이 이민족을 통제하기 위한 방책으로 ‘호시(互市)’를 개설하였는데, 호시 출입은 군현이 제공한 조복의책을 소지한 자만이 가능하였다는 점에서 현도군 고구려현도 고구려를 상대로 한 호시를 개설하였다고 파악했다(이성제, 2011). 책구루의 설치 시기를 기원전 75년 무렵으로 보고 있는 입장에서는 현도군이 책구루라는 호시를 통해 고구려사회에 대한 분리조종책을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윤용구, 2006; 이성제, 2011). 한편, 책구루의 성격에 대해 호시가 아니라 외교적 위세품을 두던 곳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김창석, 2004; 여호규, 2005).
또는 한 관인들의 공식 복식인 조복의책의 성격에 주목하여 이를 사여하는 것은 한나라 측에서 해당 지역의 대표자임을 공인해주는 일종의 책봉 행위로 파악하기도 한다(장병진, 2015). 하지만 조복의책에 특정한 책봉 관작(官爵)의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고 보기에는 이를 매년 정기적으로 가져갔다고 하는 점에서 의문이 있다. 또 조복의책을 하사받는 행위 그 자체에 의미가 있었다면 책구루에서 서로 접촉조차 하지 않았던 것으로 묘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책구루를 통한 조복과 의책 사여를 현도군에 소속되는 것을 조건으로 하는 하사품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김창석, 2004; 장병진, 2015).
그런데 한대의 호시는 군현 외부의 이민족을 상대로 하여 개설되었다. 기사 ①에서 조복의책과 명적을 단서로 당시에 한이 고구려와 사이에 호시를 개설하였고, 그 연장선에서 책구루를 호시로 보면서 책구루의 설치를 기원전 75년으로 보는 견해에 따르면, 기원전 75년 이전, 즉 제1현도군 시기에도 현도군의 영역 외부에 새외(塞外)의 고구려 세력이 존재하게 된다(이성제, 2011). 12년 무렵 현도군과 고구려 사이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 왕망의 신(新)왕조와 고구려 사이에 벌어진 분쟁이다. 『후한서』 고구려전에 의하면 12년에 왕망이 흉노 정벌에 고구려 병사를 강제로 동원하자, 고구려 병사들이 모두 ‘새외(塞外)’로 도망쳐서 오히려 변경을 노략질하였다. 이에 요서대윤(遼西大尹)전담(田譚)이 이들을 추격하였다가 죽임을 당하자 군현이 고구려에게 허물을 돌리게 되었고, 왕망은 엄우(嚴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여 엄우가 고구려후 추(騶)를 사로잡아 살해하였으며, 이에 왕망이 고구려를 하구려(下句麗)로 이름을 바꾸어 포고했다고 한다.
같은 내용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 31년조에 전하는데, 여기에는 유리왕의 장수 연비(延丕)가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와 관련된 독자적 전승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다만 고구려본기의 기사 내용은 대체로 중국측 사서의 기사와 별 차이가 없기 때문에, 독자적 전승기록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어느 시기엔가 연비라는 이름만 전해지는 형태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기사는 당시 고구려사회와 현도군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점을 전해주고 있다. 군현의 징발 대상이 되고 있는 고구려인이 있는데, 이들이 군현의 동원을 거부하고 새외로 도망쳤다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새내(塞內) 즉 현도군 경역 내에 거주하는 고구려인이었다. 이와는 달리 새외에 거주하는 고구려인의 존재도 살필 수 있는데, 군현이 허물을 고구려후 추에게 돌렸다는 점에서 이를 추정할 수 있다(이병도, 1975; 윤용구, 2006).
즉 고구려인의 거주지역 중에서 현도군의 관할 대상이 된 지역과 현도군의 관할범위 밖에 있는 존재로 구분하고 있다. 따라서 제2현도군에 소속된 새내의 고구려인 및 새외에 거주하는 고구려인에 대한 파악은 제2현도군의 관할범위 및 기능과 관련된 문제이다. 현도군 소속의 3개 현인 고구려현, 서개마현, 상은태현은 고구려사회의 외곽에 설치되었기 때문에 이 3개 군현에 소속된 고구려인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 즉 새내의 고구려인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현도군의 경우 현 수와 호구 수에 불균형한 내용을 보이는 것은 현 수는 현도군 소속이지만, 호구 수는 현도군의 관할 주민만이 아니라, 관할 밖의 고구려 주민들까지 포함한 것으로 추정함이 타당하겠다.
『삼국지』 고구려조의 책구루 관련 기사에서 ①의 시기에 고구려현령이 고구려의 명적을 관리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아마도 고구려현령이 주관하는 명적에는 현도군 관할 밖의 고구려사회의 주민 수도 파악하여 포함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런데 현도군의 호구 수 상황을 보여주는 작성 시점이 2년(원시 2년)이라고 한다면, 이때가 바로 ①의 고구려현령이 명적을 주관하는 시기와 겹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점에서도 새내의 고구려인 및 새외에 거주하는 고구려인이 구분되는 왕망대에는 책구루가 성립되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한다.
그러면 책구루가 설치되는 시점은 언제일까? 교섭을 중단하고 있는 고구려에 대한 유화책으로 책구루가 설치되었음을 고려하면 한의 대외정책 변화에서 그 단서를 찾아볼 수도 있겠다. 41년에 요동태수로 파견된 제융(祭肜)은 부임 초기에는 선비와 오환의 침공을 무력으로 방어하다가, 49년경부터 무력보다 재리(財利)와 은신(恩信)으로써 주변 족속을 위무하였다. 이러한 제융의 유화책은 개인적인 정책이 아니라 후한 조정 차원에서 구체화된 대외정책이었다. 후한은 46년경 극심한 자연재해로 흉노가 쇠퇴하자, 변군의 정후(亭候)와 이졸(吏卒)을 혁파하는 한편 재리(財利)를 앞세워 주변 국가나 족속을 회유했다(여호규, 2005).
이러한 상황에서 보자면 책구루의 설치도 이 무렵 혹은 그 이후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면 책구루가 위치한 현도군의 ‘동계’는 어디였을까? 동계는 제2현도군의 입장에서 기술한 표현이므로 영릉진고성에서 동쪽 방향 곧 소자하 상류 방면에 위치했다고 할 수 있다. 영릉진고성에서 소자하 상류 방면으로는 신빈현 소재지를 지나 백기보(白旗堡)일대까지 상당히 넓고 평탄한 하곡평지가 이어진다. 백기보 동쪽에는 소자하와 부이강을 가르는 분수령지대가 남북 방향으로 펼쳐져 있는데, 이곳을 통과하면 부이강 유역으로 진입해 고구려 건국의 중심지인 환인분지로 나아갈 수 있다. 이로 보아 동계는 소자하-부이강의 분수령지대를 지칭한다고 파악된다(여호규, 2020). 또한 현재까지 조사된 한대 고성(古城)의 분포양상을 고려하면, 책구루의 가장 유력한 후보로는 백기보고성(白旗堡古城)을 들 수 있다(曹德全, 2001; 여호규, 2020). 백기보고성은 소자하 유역의 한대고성 가운데 가장 동쪽에 위치했을 뿐 아니라, 그 앞쪽으로 소자하-부이강의 분수령 지대가 펼쳐져 있으며, 혼강과 소자하를 잇는 교통의 요지로서 환인 동북의 전략지점으로 여겨진다(여호규, 2020). 물론 백기보고성을 상은태현 혹은 고구려현성에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田中俊明, 1994).
책구루의 존속 기간은 영릉진고성에 위치한 제2현도군이 존재할 때까지이다. 그러면 제2현도군은 언제 무순으로 군치를 옮긴 제3현도군으로 바뀌었을까? 『후한서』 권33 군국지(郡國志)현도군조에 인용된 『동관서(東觀書)』에는 후한 안제(安帝)즉위년에 새로 요동군에 소속된 고현(髙顯), 후성(候城), 요야(遼陽)3개 현을 현도군에 분속시켰다고 하였다. 『동관한기(東觀漢記)』 권7 지리지에도 동일한 내용이 나온다. 그동안 많은 연구자들이 이 기사를 근거로 고구려가 106년(후한의 안제 즉위년)을 전후해 제2현도군을 혼하 방면으로 퇴축했다고 보았다(箭內亙, 1913). 또는 고구려가 요동군을 대대적으로 공략하던 105년에 제2현도군을 점령했다고 보기도 한다(池內宏, 1941; 和田淸, 1951).
그런데 후한은 1세기 말경에 이미 내부 정세가 불안정해지고, 강족(羌族)과 선비의 침공에 직면하고 있었다. 특히 97년경부터 선비가 후한을 대대적으로 공격했는데, 이때 요동태수 제삼(祭參)은 선비의 비여(肥如) 침공을 방어하지 못했다는 죄목으로 주살되기도 했다. 이로 인해 동방 지역에 대한 후한의 지배력은 급격히 약화되고, 이를 틈타 제2현도군을 점령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즉 선비가 후한을 공격하기 시작한 97년을 전후하여 고구려가 제2현도군을 공격해 점령했으며, 이때는 요동태수 제삼이 주살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현도군을 재정비할 겨를이 없었고, 106년에 요동군의 고현·후성·요양 등을 현도군에 분속시킨 사실은 후한이 다시 현도군을 재정비한 결과로 파악한다. 즉 105년에 고구려가 요동을 공격한 기사에 현도군은 보이지 않고, 요동태수인 경기(耿夔)가 방어에 나선 것도 제2현도군에서 퇴축된 이후 아직 현도군이 정비되지 못한 상황을 반영한다(여호규, 2005).
105년 고구려의 요동 공격 이후 후한은 현도군을 복구하기 위해 106년에 요동군의 고현·후성·요양 등을 현도군의 속현으로 재편하면서, 혼하 남안의 무순에 제3현도군의 치소를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치소가 지금의 무순 노동공원고성이다. 그리고 고구려현, 상은태현, 서개마현 등 종전의 속현도 혼하 일대로 이치하고, 혼하와 동주하(東洲河)를 따라 설치되었던 요동고새(遼東故塞)를 대대적으로 수리했다. 이를 통해 후한은 제3현도군의 중심부인 무순 일대를 감싸는 요동고새를 최전방 방어선으로 삼아 고구려에 대한 방어태세를 갖출 수 있었다(여호규, 2005).
신빈 영릉진고성을 군치로 하는 제2현도군에서 무순의 노동공원고성을 군치로 하는 제3현도군으로의 변천은 고구려 세력에 의한 현도군의 퇴축 과정이었으며, 이는 제2현도군 시기, 즉 기원전 75년부터 1세기를 전후한 무렵까지 대략 120여 년 동안에 고구려가 현도군으로 대표되는 한의 군현 지배와 대외정책을 어떻게 제압하면서 국가적으로 성장해가는지를 보여주는 시기로 이해할 수 있다. 초기 고구려의 국가적 성장과 지배체제의 정비 과정은 대외적으로는 제2현도군과의 길항 관계, 퇴축 과정이었다.

  • 각주 011)
    『한서』권28 지리지8하1, “高句驪 遼山遼水所出 西南至遼隊 入大遼水 又有南蘇水 西北經塞外上殷台 莽曰下殷西蓋馬 馬訾水西北入鹽難水 西南至西安平入海 過郡二 行二千一百里 莽曰玄菟亭.” 바로가기
  • 각주 012)
    『삼국지』권30 위서30 동이전 고구려, “漢時賜鼓吹技人 常從玄菟郡受朝服衣幘 高句麗令主其名籍, 後稍驕恣 不復詣郡, 于東界築小城 置朝服衣幘其中 歲時來取之, 今胡猶名此城爲幘溝漊 溝漊者 句麗名城也.” 바로가기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3. 현도군 개편과 고구려의 성장 자료번호 : gt.d_0001_0030_002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