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환인에서 집안으로의 천도 시기
5. 환인에서 집안으로의 천도 시기
2000년 이래 중국 길림성 집안 지역에 대한 활발한 발굴결과, 그동안 ‘국내성’으로 불리던 집안 평지성과 그 배후의 산성자산성 내부에서 3세기 이전의 유물이 출토되지 않았다(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a;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b). 특히, 2009년과 2011년 집안 평지성 동·남벽 조사 시, 성벽의 가장 안쪽 토축 기초부분에서 출토된 토기편들이 4세기 초로 편년됨에 따라(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12), 집안 평지성의 초축 연대를 4세기 초 이전으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바꿔 말하면, 3세기 이전에는 집안 평지성과 산성자산성 일대가 고구려의 도성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제기된 것이다. 이로써 기왕에 환인에서 집안으로의 천도 시점을 유리왕 22년으로 판단했던 통설은 의심받기 시작하였다. 관심은 3세기 이전 고구려 도성의 위치와 환인에서 집안으로 도성이 옮겨 온 시점, 이 두 가지 문제로 모아졌고, 논의는 후자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환인에서 집안으로 도성을 옮겨 온 시점에 관해서는 크게 유리왕대설, 태조왕대설, 신대왕대설, 산상왕대설의 네 가지 견해가 제기되었다. 단, 논의의 시발이 2000년 이래 집안 평지성과 산성자산성에서 3세기 이전의 유물이 출토되지 않는다는 발굴결과였으므로, 다음에서는 그 이후에 제기된 견해로 한정하여 정리하겠다.
첫째, 산상왕대설이다(노태돈, 1999; 김희선, 2010; 노태돈, 2012). 『삼국지』의 “갱작신국” 기사를 환인에서 집안으로의 천도 기사로 활용하면서, 환인에서 집안으로의 천도 시점을 산상왕대로 보고 있다. 사료상으로 유리왕대 천도 기사 이후 산상왕대까지 천도 관련 기사가 없다는 점과 고고학적으로 3세기가 되어서야 집안 평지성과 산성자산성이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 주요 근거이다. 이 경우 유리왕대의 국내 위나암을 환인 지역으로 비정하면서 3세기 이전까지 고구려 도성은 꾸준히 환인이었다고 본다. 단, 여기에는 두 가지 풀어야 할 숙제가 있다. 첫째, 『삼국사기』 동천왕대 기사 중, 고국천왕의 부인이자 산상왕의 부인이었던 태후 우씨(于氏)가 죽고 나서 산상왕 곁에 묻히자, 국양(國壤), 즉 고국천왕의 귀신이 분을 못 이기고 더불어 싸웠고, 돌아와 생각해보니 차마 국인(國人)들을 볼 낯이 없으니 자기를 가려달라고 무자(巫者)에게 말했다는 기록이다.
이 기록을 통해 세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는데, 하나는 국인, 즉 도성인들을 볼 낯이 없다는 점을 통해 고국천왕의 장지가 도성에서 멀지 않았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부인이 산상왕릉 곁에 묻히는 것을 보고 더불어 싸울 만큼 산상왕릉과 고국천왕릉이 멀지 않았다는 점, 마지막은 동천왕대에도 고국천왕의 장지가 고국양(故國壤)이 아닌 국양으로 불렸다는 점이다. 이 기록을 종합하면, 고국천왕과 산상왕은 공히 동천왕대의 도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묻혔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바꿔 말하면, 고국천왕대와 산상왕대, 동천왕대의 도성이 같은 곳이었다는 의미일 수 있다. 둘째, 『삼국사기』에서 신대왕이 즉위 후에 졸본에 가서 시조묘에 제사 지내고 한 달 후에야 돌아왔다는 점이다. 만약 산상왕대설을 따른다면, 신대왕은 당시 환인 지역에 있었고, 그곳에서 멀지 않은 졸본을 다녀오는데 한 달이나 걸렸던 셈이다. 훗날 도성이 평양에 있던 시절의 고구려왕들 또한 시조묘에 제사지내기 위해 졸본에 다녀왔는데, 그 기간이 역시 한 달이었다는 점에서, 비교적 이동 거리가 짧았던 신대왕대 역시 한 달의 시간이 걸렸다는 사실은 유독 어색하다. 산상왕대설은 천도 관련 기사의 존재와 고고학적인 증거로 뒷받침되지만, 『삼국사기』에는 이미 산상왕대 이전에 도성이 집안으로 옮겨왔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있었다.
둘째는 태조왕대설이다(김종은, 2003; 余昊奎, 2005; 권순홍, 2015; 강현숙, 2015). 앞에서 확인한 대로, 『삼국사기』 신대왕대의 졸본 행차 기록과 동천왕대에 보이는 태후 우씨 관련 기록을 통해서 늦어도 신대왕대에는 집안 지역이 도성이었다는 전제 아래, 비록 집안 평지성 일대에서는 3세기 이전의 유물들이 보이지 않지만, 집안 마선구 일대의 고고학적 정황이 1세기 후반~2세기 전반, 즉 태조왕대의 중심지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보는 견해이다. 특히, 집안 마선구의 건강유적에서 1세기 후반~2세기 전반으로 편년되는 유물들이 출토되었다는 사실(王志剛 외, 2012)과 그 주변에 무기단적석총이 밀집하면서도 초대형 적석총의 위계화가 진행되었다는 사실(강현숙, 2015)에 주목한 것이다. 마선구 일대에서는 평지성 유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지적되기도 하지만, 당시 고구려는 아직 평지에 성을 조성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면서, 오히려 고구려는 오직 불사(佛寺)·신묘(神廟)·왕궁(王宮)·관부(官府)에만 기와를 사용하였다는 『구당서』의 기록을 참고하면, 기와편이 출토되는 건강유적이 당시 고구려의 중심지였을 개연성이 충분하다고 본다. 다만, 풀어야 할 숙제도 없지 않은데, 집안분지 내에서 마선구 일대보다 입지조건이 좋은 집안 평지성 자리가 아니라, 마선구를 택했던 이유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다.

그림4 집안 지역 도성 관련 유적 분포도(구글어스, 2020년 12월)
한편, 고고학적 정황은 위와 같더라도, 천도와 같은 국가 중대사가 『삼국사기』 태조왕대 기사에 남지 않은 이유는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설명 방법에 따라 태조왕대설은 다시 둘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유리왕대 천도 기사를 태조왕대 사실이 소급된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余昊奎, 2005)이고, 다른 하나는 『삼국지』의 왕실 교체 기사를 통해서 태조왕대 환인에서 집안으로의 개도(改都)로 설명하는 견해(권순홍, 2015)이다. 두 견해는 기왕에 유리왕대 천도 기사를 태조왕대의 사실이 소급된 것으로 파악함과 동시에 『삼국지』의 왕실 교체 시기를 태조왕대로 이해하면서 소노부에서 계루부로의 왕실 교체는 소노부의 소재지 환인에서 계루부의 소재지 집안으로의 중심지 교체와 표리라고 해석했던 견해(김종은, 2003)로부터 각각 시사받은 바가 적지 않다. 다만, 이 경우 유리왕대로 소급된 태조왕대의 천도 기사와 왕실 교체 간의 관계를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환인에서 집안으로 도성이 옮겨 간 것이 태조왕 특정 연도의 천도에 의한 것인지, 왕실교체에 따른 개도에 의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주장을 동시에 한 셈인데, 따라서 위의 두 견해는 양자택일로 문제를 해결했다. 전자의 경우, 『삼국사기』 유리왕대 기사에 등장하는 지명들이 유독 태조왕대 지명들과 겹친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천도 기사를 포함한 유리왕대 기사들 중 일부가 태조왕대 사실들이 소급되어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면서, 『삼국지』에 나오는 왕실 교체는 동명왕대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한다(余昊奎, 2005). 반면, 후자의 경우, 일부 지명이 겹친다는 점만으로 몇몇 기사들만 소급되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치게 자의적인 해석이라고 평가하면서, 유리왕대 천도 기사는 유리왕대 사실로 인정하되, 왕실 교체 시기를 태조왕대로 볼 수 있다면, 태조왕이 환인에 살다가 집안으로 이동해 간 천도가 아니라, 이전에 환인에 있던 소노부 왕 대신 집안에 살던 계루부의 태조왕이 고구려의 왕이 됨에 따라 중심지가 바뀐, 개도로 이해한 것이다. 단, 이 경우 왕실 교체 시기를 태조왕대로 볼 수 없다면 입론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약점이 있다. 한편, 유리왕대 천도 기사에 대한 해석을 자세히 밝히진 않았지만, 국내 위나암을 산성자산성으로 비정하면서도 고고학적인 정황상으로는 환인에서 집안으로 도성이 옮겨 간 시점을 1세기 후반~2세기 전반이라고 추정함으로써, 『삼국사기』의 기년을 그대로 믿지 않기도 한다(강현숙, 2015).
셋째는 신대왕대설이다(임기환, 2015; 기경량, 2017a; 강진원, 2018; 임기환, 2018b). 『삼국사기』 신대왕대의 졸본 행차 기록 등을 통해서 늦어도 신대왕대에는 집안이 고구려의 도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 견해는 앞서 제기된 태조왕대설에 대한 비판이자 대안이었는데, 집안 마선구의 건강유적은 도성유적으로 단정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태조왕대 천도 기사가 유리왕대로 소급되었다고 보기도 어렵고, 왕실 교체 역시 태조왕대로 확정할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다만 마선구 일대에서 왕궁유적이 발견되는 등 결정적인 증거가 수집되지 않는 이상, 입지조건이 훨씬 좋은 집안 평지성 자리, 지금의 집안 시가지가 당시 중심지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상식적인 추정이다. 아직은 이 일대에서 1세기~2세기로 편년되는 기와편 등 중심지로 볼 만한 고고학적 정황이 나타나길 기다릴 뿐이다. 단, 이후 집안 시가지에서 3세기 이전의 도성으로 볼 만한 유물이 출토되더라도, 두 가지를 충분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이 지역과 마선구 건강유적의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신대왕대 천도 기사가 없는 이유이다. 후자의 해결을 위해 『삼국지』의 왕실 교체 기사를 활용하기도 한다(임기환, 2018b; 임기환, 2019). 왕실 교체를 통해 천도 기사의 부재를 해결하려 했다는 점에서 앞서 제기되었던 태조왕대 개도설(권순홍, 2015)과 같지만, 유리왕대 천도 기사를 후대의 분식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달랐다. 고구려의 초기 왕계를 주몽-대무신왕-민중왕-모본왕의 졸본(환인 지역)왕계와 유리왕-[재사(再思)]-태조왕의 국내(집안 지역)왕계로 구분하고, 왕실 교체를 통해 국내(집안 지역)왕계가 집권한 뒤, 자신들의 시조 유리왕을 왕계에 편입시키면서 국내(집안 지역)로의 천도 기사를 삽입하여 재구성했다는 해석이었다. 다만, 사료의 부족으로 왕실 교체의 시점을 태조왕-신대왕대로 추정할 뿐, 신대왕대로 특정하지 못하고, 산상왕대 “갱작신국”의 주요 배경을 왕실 교체로 설명함으로써 방증하였다(임기 환, 2019).
넷째는 유리왕대설이다(김현숙, 2017). 이 견해 역시 앞서 제기된 태조왕대설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했는데, 대안으로서의 신대왕대설마저도 사료에 천도 기사가 없다는 결정적 약점이 있으므로 따르기 어렵다고 본다. 국가 중대사인 천도가 기록에서 누락되었다고 보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기 때문에 유리왕 22년 천도 기사를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다만 과거의 통설과 다른 점은 국내와 위나암을 구분한다는 점이다. 국내는 집안이지만, 위나암은 산성자산성이 아닌 패왕조산성으로 비정한다. 한편, 이 견해도 신대왕대설과 마찬가지로 3세기 이전의 고구려 도성은 입지조건이 좋은 집안 평지성 일대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데, 고고학적 물증이 없다는 약점이 남아 있다.
이상을 통해 환인에서 집안으로 도성이 옮겨 간 시점을 중심으로 3세기 이전 고구려 도성의 위치에 관한 문제까지 정리하였다. 관건은 고고학적 정황과 문헌사료 간의 시차였고, 이에 대한 해석에 따라 산상왕대설과 태조왕대설, 신대왕대설, 유리왕대설이 차례로 제기되었다. 다만 각각의 약점도 분명했다. 산상왕대설은 고고학적 정황으로는 적절하지만, 사료 상의 모순이 있었다. 반면, 유리왕대설은 사료상으로는 모순이 없지만, 고고학적으로 입증하기 어려웠다. 태조왕대설은 유리왕대 천도 기사 혹은 『삼국지』 왕실 교체 기사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무리가 있고, 신대왕대설은 태조왕대설을 비판하면서 내놓은 대안이었지만 가능성 이상으로 보기엔 어렵다. 한편, 대체로 도성이 옮겨 온 시점에 따라서 3세기 이전 고구려 도성의 위치에 대한 견해도 나뉘었다. 먼저 산상왕대설은 산상왕 이전의 도성을 환인 지역으로 비정하였는데, 오녀산성의 3기에 해당하는 기원전 1세기~1세기의 고고학적 물증 이외에, 환인 지역에서 3세기까지 중심지였다는 물질자료는 나오고 있지 않다. 태조왕대설은 태조왕대부터 3세기 이전까지의 중심지를 집안 마선구로 보았다. 단, 앞서 지적한 대로, 입지 조건이 훨씬 좋은 집안 시가지 일대에 대한 해석이 숙제로 남아 있다. 신대왕대설과 유리왕대설은 공히 3세기 이전에도 집안 평지성 자리, 즉 지금의 집안 시가지가 고구려의 도성이었을 것으로 추정하였지만, 고고학적 물증이 없다는 약점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