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정치체제의 구조와 운영
1장 정치체제의 구조와 운영
고구려는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국가적 성장을 이룩했을 뿐 아니라주 001 초기사와 관련한 사료도 비교적 풍부하게 전한다. 『삼국사기』 초기 기사의 경우, 신라본기나 백제본기는 신빙성에 대한 많은 의문이 제기되었지만, 고구려본기는 상대적으로 신빙성이 높다고 평가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도 백제와 신라는 아직 삼한 소국의 하나인 백제국과 사로국으로 나와 국가적 실체를 명확하게 파악하기 어렵지만, 고구려는 별도 항목으로 기술했을 뿐 아니라 관련 사료도 풍부한 편이다.
이러한 역사성과 사료 조건으로 인해 고구려 초기사는 일찍부터 많은 주목을 받았다. 특히 1970년대에 고대국가형성론이 학계의 큰 관심을 끌면서 삼국의 국가 형성이나 초기 정치체제를 둘러싸고 다양한 논의가 전개되었는데, 사료가 풍부한 고구려 초기사가 가장 많은 주목을 받았다. 이를 통해 고구려 나아가 삼국의 국가 형성과 초기 정치체제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었다.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고구려 초기는 혈연조직에 바탕을 둔 사회로 국가 형성상의 과도기로 상정되었다. 그런데 1970년대 이후의 논의를 통해 늦어도 1세기 중반에는 고구려가 고대국가로 발돋움했고, 3세기 후반 이후에는 중기 사회로 전환한 것으로 밝혀졌다. 즉, 고구려 초기는 국가 형성상의 과도기가 아니라 국가체제가 확립된 시기이고, 중기 이후와 명확히 구별되는 정치체제를 갖추었다고 이해한 것이다.주 002
다만 연구의 진전에 따라 시각의 차이도 심화되었다. 고구려 초기 정치체제에 대한 견해는 크게 나부체제론(那部體制論)과 조기집권체제론(早期集權體制論, 이하 ‘집권체제론’)으로 양분되는데, 나부(那部)의 성격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핵심 쟁점이다.주 003 나부체제론자가 나부를 자치권을 지닌 단위정치체로 파악하며 계부루 왕권과 함께 초기 정치체제 운영의 중요한 주체로 상정하는 반면, 집권체제론자는 왕권 강화와 집권화를 강조하며 나부를 정치 운영의 주체로 설정하지 않는다.
이에 따라 양자는 초기 정치체제의 구조와 운영도 다르게 이해한다. 나부체제론자가 계루부 왕권의 집권력과 나부의 자치권을 조화시키는 방향으로 정치체제가 성립했다고 이해한 반면, 집권체제론자는 왕권 중심의 행정적·관료적 정치기구가 일찍부터 정비되었다고 이해한다. 나부체제론자가 국왕과 나부의 지배세력으로 구성된 제가회의(諸加會議)를 가장 중요한 정치기구로 상정한 반면, 집권체제론자는 국왕 직속의 군신회의 및 좌보(左輔), 우보(右輔), 국상(國相) 등의 관직을 주요 정치기구로 설정한다.
그런데 국가 성립 이후 계루부 왕권의 영도력이 확립되고 더욱 강화된 사실은 나부체제론자도 인정하고 있다. 또 독자적인 지역집단이나 정치체로 존재하던 나(那)가 계루부 왕권을 중심으로 통합(복속·편성)되어 연맹체적 정치조직을 형성했다가 집권화 단계로 전환했다는 사실은 집권체제론자도 대부분 받아들이고 있다. 이와 함께 나부의 지배세력이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지닌 수장적 존재였고, 나부가 자치권을 보유했다는 사실은 집권체제론자도 부분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나부체제론자와 집권체제론자의 시각이 상당히 다르지만, 공통점도 적지 않은 것이다.
이에 이 글에서는 나부체제론자와 집권체제론자의 견해를 종합하여 계루부 왕권의 집권력과 나부의 자치권을 동시에 고려하면서 초기 정치체제의 구조와 운영 양상을 고찰하고자 한다.주 004 제1절에서 나부의 구조를 검토하여 초기 정치체제의 성립 과정과 전반적인 성격을 파악한 다음, 제2절에서 관등제의 구성을 통해 초기 정치체제의 구조를 고찰하고자 한다. 이를 바탕으로 제3절과 제4절에서 왕권의 위상 변화에 따라 제가회의, 좌·우보, 국상 등 주요 정치기구가 변모하는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