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부의 구조와 성격
1. 나부의 구조와 성격
고구려 초기 정치체제의 성격에 대한 견해는 나부(那部)의 성격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크게 나부체제론과 집권체제론으로 나뉜다. 그럼 나부는 어떠한 형태로 존재했고, 그 성격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나부에 관한 사료는 『삼국지』 고구려전과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초기 기사에 비교적 풍부하게 나온다.
사료 1
본래 5족(五族)이 있었는데, 연노부(涓奴部, 消奴部의 오기),주 005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계루부(桂婁部)이다. 본디 소노부가 왕이 되었는데 점차 미약해져 지금은 계루부가 대신한다. … 소노부는 본래 국주(國主)로서 지금은 비록 왕이 되지 못하지만 적통을 이은 대인(大人)은 고추가(古鄒加)를 칭할 수 있었고, 또 종묘를 건립하여 영성(靈星)과 사직(社稷)에 제사지낼 수 있었다. 절노부는 대대로 왕과 혼인했으므로 고추의 칭호를 더했다. 여러 대가(大加)는 독자적으로 사자(使者), 조의(皂衣), 선인(先人)을 설치했는데, 그 명단은 모두 왕에게 보고되었다. 경(卿)이나 대부(大夫)의 가신(家臣)과 같았는데, 모임의 석차에서 왕가(王家)의 사자, 조의, 선인과 같은 열에 앉을 수 없었다.
_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전
본래 5족(五族)이 있었는데, 연노부(涓奴部, 消奴部의 오기),주 005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계루부(桂婁部)이다. 본디 소노부가 왕이 되었는데 점차 미약해져 지금은 계루부가 대신한다. … 소노부는 본래 국주(國主)로서 지금은 비록 왕이 되지 못하지만 적통을 이은 대인(大人)은 고추가(古鄒加)를 칭할 수 있었고, 또 종묘를 건립하여 영성(靈星)과 사직(社稷)에 제사지낼 수 있었다. 절노부는 대대로 왕과 혼인했으므로 고추의 칭호를 더했다. 여러 대가(大加)는 독자적으로 사자(使者), 조의(皂衣), 선인(先人)을 설치했는데, 그 명단은 모두 왕에게 보고되었다. 경(卿)이나 대부(大夫)의 가신(家臣)과 같았는데, 모임의 석차에서 왕가(王家)의 사자, 조의, 선인과 같은 열에 앉을 수 없었다.
_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전
위 기사는 3세기 초·중반의 상황을 전한다. 이에 따르면 당시 고구려에는 소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계루부 등 5부가 존재했다. 이 가운데 본래 소노부가 왕 노릇을 했는데, 점차 미약해져서 계루부가 왕이 되었다고 한다. 다만 소노부의 적통대인(適統大人)은 당시에도 고추가라는 칭호를 사용했고, 종묘와 사직을 별도로 건립하여 제사를 지냈다. 또 절노부가 왕실과 대대로 혼인하여 고추가의 칭호를 더했다. 5부 가운데 왕을 배출하는 계루부를 비롯해 소노부와 절노부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삼국지』 기사에 나오는 5부에 비견되는 존재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나오는 나(那)와 나부(那部)이다(표 1). 나와 나부의 용례는 크게 조나(藻那)와 주나(朱那)의 나, 비류나부(沸流那部), 환나부(桓那部), 관나부(貫那部), 연나부(椽那部)의 나부로 분류할 수 있다(표 2). 이 가운데 4나부는 『삼국지』 고구려전의 5부 가운데 왕실이 속한 계루부를 제외한 4노부(奴部)와 동일한 실체로 파악된다.
표1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나·나부 관련 기사
| 순번 | 연대 | 나·나부 명칭 | 기사 내용 |
| a | 대무신왕 5.7(22) | 연나부 | 부여왕의 사촌 동생이 … 만여 명과 함께 와서 내투하니 왕이 봉하여 왕으로 삼고 연나부(掾那部)에 안치했는데, 등에 낙문(絡文)이 있어서 낙씨(絡氏) 성을 내려주었다. |
| b | 대무신왕 15.3(32) | 비류부 | 대신(大臣) 구도(仇都), 일구(逸苟), 분구(焚求) 세 사람을 서인으로 삼았다. 이 세 사람은 비류부(沸流部)장이 되었는데, 그 자질이 탐욕스럽고 야비하여 다른 사람의 처첩(妻妾)과 소, 말, 재화 등을 빼앗고 하고 싶은 대로 했으며, 만약 주지 않는 자가 있으면 채찍질을 했다. 이에 사람들이 모두 분통해하며 죽었다. 왕이 이를 듣고 죽이려 하다가 동명성왕의 옛 신하여서 차마 극법으로 다스리지 못하고 퇴출시켰다. 남부(南部) 사자 추발소(鄒㪍素)를 대신하여 부장으로 삼았다. |
| c | 태조왕 20.2(72) | 관나부 조나 | 관나부(貫那部)의 패자(沛者) 달고(達賈)를 보내어 조나(藻那)를 정벌하고, 그 왕을 사로잡았다. |
| d | 태조왕 22.10(74) | 환나부 주나 | 왕이 환나부(桓那部)의 패자 설유(薛儒)를 보내어 주나(朱那)를 정벌하고, 그 왕자 을음(乙音)을 사로잡아 고추가로 삼았다. |
| e | 태조왕 80.7(132) | 관나 환나 비류나 | 수성(遂成)이 왜산(倭山)에 사냥을 나갔다가 주위 사람들과 연회를 열었다. 이에 관나(貫那) 우태(于台) 미유(彌儒), 환나(桓那) 우태 어지류(菸支留), 비류나(沸流那) 조의 양신(陽神) 등이 수성에게 이르기를 …. |
| f | 차대왕 2(147) | 관나 환나 비류나 | 2월, 관나 패자 미유를 임명하여 좌보(左輔)로 삼았다. 7월, 좌보 목도루(穆度婁)가 병을 이유로 은퇴하자, 환나 우태 어지류를 좌보에 임명하고 관작을 더하여 대주부(大主簿)로 삼았다. 10월, 비류나 양신을 중외대부에 임명하고, 관작을 더하여 우태로 삼았다. 모두 왕의 옛 친구이다. |
| g | 차대왕 20.10(165) | 연나 | 연나(椽那) 조의 명림답부(明臨荅夫)가 백성들이 견디지 못하므로 왕을 시해했다. |
| h | 고국천왕 1(179) | 소노 | 발기(拔奇)가 형이면서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소노가(消奴加)와 함께 각기 하호(下戶) 3만여 명을 거느리고 공손강(公孫康)에게 투항했다가 되돌아와 비류수(沸流水) 변에 거처했다. |
| i | 고국천왕 2.2(180) | 제나부주 006 | 왕비 우씨(于氏)를 세워 왕후로 삼았다. 왕후는 제나부(提那部) 우소(于素)의 딸이다. |
| j | 고국천왕 12·13(190·191) | 4연나 | 12년 9월, 중외대부인 패자 어비류(於畀留), 평자(評者) 좌가려(左可慮)는 모두 왕후의 친척으로서 나라의 권력을 장악했다. 그 자제들이 권세를 믿고 교만하고 사치를 부리며 다른 사람의 자녀를 노략질하고 경작지와 집을 빼앗아 국인(國人)이 원망하며 격분했다. 왕이 이를 듣고 격노하며 주살하려 하니, 좌가려 등이 4연나(椽那)와 함께 모반을 획책했다. 13년 4월, 무리를 모아 왕도를 공격했다. 왕이 기내(畿內)의 병마를 징발하여 평정했다. |
| k | 산상왕 | 관노부 | 이이모(伊夷模)가 아들이 없어서 관노부(灌奴部)와 사통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위궁(位宮)이라 불렀다. |
| l | 중천왕 1.10(248) | 연씨 | 연씨(掾氏)를 세워서 왕후로 삼았다. |
| m | 중천왕 4.4(251) | 관나 부인 | 왕이 관나부인(貫那夫人)을 가죽주머니에 넣어 서해에 던져버렸다. |
| n | 중천왕 7.4(254) | 비류 | 국상(國相) 명림어수(明臨於漱)가 사망했다. 비류 패자 음우(陰友)를 국상에 임명했다. |
| o | 중천왕 9.11(256) | 연나 | 연나(掾那) 명림홀도(明臨笏覩)를 공주에게 장가들여 부마도위(駙馬都尉)로 삼았다. |
표2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나·나부 용례의 분류
| 분류 | 용례 | |
| 나(那) | 조나(藻那) | 조나(藻那, c) |
| 주나(朱那) | 주나(朱那, d) | |
| 나부(那部) | 연나부(椽那部) | 연나부(掾那部, a), 연나(椽那, g), 제나부(提那部, i), 4연나(四椽那, j), 연씨(掾氏, l), 연나(掾那, o) |
| 비류나부(沸流那部) | 비류부(沸流部, b), 비류나(沸流那, e·f), 비류(沸流, n) | |
| 관나부(貫那部) | 관나부(貫那部, c), 관나(貫那, e·f), 관나부인(貫那夫人, m) | |
| 환나부(桓那部) | 환나부(桓那部, d), 환나(桓那, e·f) | |
* 알파벳은 표1의 순번이다.
표3 | 나·나부·방위부의 시기별 추이
| 명칭/연대 | 50 | 100 | 150 | 200 | 250 | 300 | |
| ㉮ | ㉯ | ㉰ | ㉱ | ||||
| 나 (那) | 조나 (藻那) | ★ | |||||
| 주나 (朱那) | ★ | ||||||
| 나부 (那部) | 연나부 (椽那部) | ★ | ★ ★ | ★★ ★ ★ ★ | |||
| 비류나부 (沸流那部) | ★ | ★ ★ | ★ | ||||
| 관나부 (貫那部) | ★ | ★ ★ | ★ ★ | ||||
| 환나부 (桓那部) | ★ | ★ ★ | |||||
| 방위부 (方位部) | 남부(南部) | ☆* | ★★ | ||||
| 동부 (東部) | ★ ★ | ★ | |||||
| 서부 (西部) | ★ ★ | ||||||
| 북부 (北部) | ★★ | ||||||
* 방위부 가운데 가장 이른 사례인데, 신빙성에 의문이 있다(金賢淑, 1992).
연나부는 표 1의 i·j·l에서 보듯이 2세기 후반~3세기 중엽에 계속 왕비를 배출했는데, 왕실과 대대로 혼인했다는 『삼국지』 기사의 절노부에 해당한다(이기백, 1959; 1996). 비류나부는 주몽집단이 남하하기 이전에 이 지역의 맹주였던 비류국(沸流國)의 후신인데, 비류국왕으로 나오는 ‘송양(松壤)’은 소노부(消奴部)의 ‘소노’를 지칭하는 것으로 파악된다(이병도, 1956; 1976).주 007 관나부는 표1의 m에서 보듯이 3세기 중반에 소후(小后)를 배출했는데, 산상왕 이이모가 사통하여 동천왕 위궁을 얻었다는 관노부(표1의 k)에 상응한다.
『삼국지』 고구려전의 계루부는 당시 국왕을 배출하던 왕실이고, 절노부는 연나부, 소노부는 비류나부, 관노부는 관나부에 각기 상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각기 하나씩 남은 순노부와 환나부도 같은 실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삼국지』의 계루부는 왕실이 속한 부이고, 나머지 4노부는 『삼국사기』의 4나부에 해당하는 것이다(노태돈, 1975). 『삼국지』의 4노부와 『삼국사기』의 4나부가 동일한 실체라는 사실은 고구려 초기 정치체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사를 준다.
다만 초창기 연구에서는 『삼국사기』의 나와 나부를 크게 주목하지 않고, 주로 『삼국지』의 5부를 둘러싸고 다양한 논의를 전개했다. 『후한서』 고구려전을 주석한 당의 장회태자 이현(李賢)은 『삼국지』의 5부를 중·후기 도성의 행정구역인 방위부와 같은 것으로 이해했다. 『한원(翰苑)』 고려전을 주기(注記)한 옹공(雍公) 예(叡)주 008도 『삼국지』 찬자가 5부를 ‘5족(五族)’이라고 표현한 것에 주목하여 초기의 5부와 중·후기의 방위부를 동일시하면서 ‘귀인의 족(貴人之族)’으로 파악했다.
『삼국지』의 5부와 중·후기의 방위부를 동일시하는 이해방식은 20세기 전반까지도 이어졌다(白鳥庫吉, 1914; 白南雲, 1933). 더욱이 중국 학계에는 최근까지도 초기의 5부와 중·후기의 방위부를 동일시하는 견해가 남아 있다(李殿福, 1986; 何海波·魏克威, 2009).주 009 북한 학계도 초기의 5부와 중·후기의 방위부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특히 『삼국지』의 5부를 『삼국사기』의 나부와 같다고 보아 지역적 단위집단으로 파악하면서도 ‘5족(五族)’이라는 표현에 주목해 5부를 각 부에서 핵심 역할을 담당한 귀족적 씨족의 상층을 지칭한다고 보기도 한다(손영종, 1984).주 010
그런데 20세기 전반에 활동한 일본 학자나 한국 학자는 대부분 인류학이나 사적유물론을 바탕으로 고구려 초기사를 연구하면서 『삼국지』의 5부와 중·후기의 방위부를 구분하여 파악했다. 다만 이들은 『삼국사기』의 나부에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고, 『삼국지』 찬자가 5부를 ‘5족’이라 표현한 것에 주목해 혈연적인 조직으로 파악했다. 초기의 5부는 씨족이나 부족 등 혈연에 바탕을 둔 원시사회조직이고, 중·후기의 방위부는 지연(地緣)에 바탕을 둔 왕도의 행정구역이나 지방행정구역이라고 구분해 파악한 것이다(今西龍, 1921; 1937; 池內宏, 1926; 1951; 白南雲, 1933; 金洸鎭, 1937).
이로써 초기의 5부와 중·후기의 방위부를 구분하고, 원시사회에서 고대국가로의 전환이라는 고대사의 일반적인 전개 과정을 고찰할 단서를 확보했다. 다만 『삼국지』 고구려전의 기사가 중시되는 가운데 초기의 5부는 ‘5족’ 곧 씨족이나 부족 등의 혈연조직으로 상정되고, 혈연성이 강한 사회 상태가 3세기 이후 상당 기간 지속되었다고 파악되었다. 이렇게 초기의 5부가 ‘가부장적 공동세대에 기초한 원시부족국가’(白南雲, 1933)나 ‘씨족사회에 기초한 부족’(金洸鎭, 1937) 등으로 이해되는 가운데, 고구려 초기는 아직 국가가 성립되지 않은 국가 형성상의 과도기로 상정된 것이다.
이런 연구경향은 1940년대를 거쳐(孫晉泰, 1949; 李仁榮, 1950) 1960년대까지도 이어졌다.주 011 1960년대에는 청동기와 철기의 생산력 차이에 주목해 고구려 초기 사회가 종전의 씨족이 아니라 ‘가부장 가족장’이라는 새로운 사회세력을 바탕으로 성립했다고 보았지만, 5부(5족)는 여전히 혈연에 기반을 둔 부족이나 부족국가로 이해하였다. 이로 인해 관등제나 제가회의 등 주요 정치기구를 다각도로 고찰했지만, 고대국가의 정치제도가 아니라 부족연맹체의 지배체제로 이해하였다(김철준, 1956; 1964).
이처럼 1960년대까지의 연구에서는 초기의 5부와 중·후기의 방위부를 구분함으로써 초기사의 다양한 면모를 밝힐 수 있었다. 그렇지만 초기의 5부를 혈연조직으로 파악함으로써 고구려 초기를 국가 형성상의 과도기로 상정하고, 중기로의 전환도 고대국가의 성립 과정으로 이해했다. 고구려사의 전개 과정에서 초기를 독자적인 정치체제와 운영 원리를 갖춘 시기로 상정하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1950년대에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초기 기사를 다각도로 검토하여 ‘나(那)’의 뜻을 새롭게 규명한 연구성과가 나왔다. ‘나(那)’라는 단어는 ‘노(奴)’나 ‘내(內)’로도 표기되는데, 땅(地)이나 강가의 평야를 뜻하며, 강가나 계곡에 자리한 지역집단을 가리킨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나’는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아 산곡(山谷)을 따라 거주하던주 012 고구려인의 거주 양태를 반영하는 용어라는 것이다(三品彰英, 1954). 이로써 초기의 5부를 혈연조직이 아니라 지연집단에 바탕을 둔 정치체로 파악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주 013
각주 013)

미시나 아키히데(三品彰英) 이후 일본 학계에서는 초기의 5부에 대해 군사조직(矢澤利彦, 1954), 중앙지배층인 귀족의 조직(末松保和, 1962; 1996), 부족(部族)이 아니라 왕권을 배경으로 출현했으면서 자립성을 보유한 존재(川本芳昭, 1996) 등으로 이해하는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다만 미시나 아키히데의 연구성과를 계승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는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초기 기사에 대한 불신론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로 인해 초기 정치체제에 대한 연구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삼국지』 고구려전의 관명(官名)을 분석한 관등제 연구가 거의 유일한데, 이 경우에도 족제(族制)적 성격을 많이 강조했다(武田幸男, 1978; 1989).
한편 1960년대 후반에 『삼국사기』 초기 기사에 대한 신빙론이 제기되고(김원룡, 1967), 1970년대 초에 고대국가형성론이 활발하게 논의되는 가운데 부족국가나 부족연맹체라는 개념의 문제점이 지적되었다(천관우 편, 1975). 이러한 논의의 영향을 받으며 고구려 초기사 연구도 크게 진척되었는데, 『삼국사기』 초기 기사를 활용해 국가 형성과 초기 정치체제를 다각도로 고찰했다. 이를 통해 고구려 초기는 국가 형성상의 과도기가 아니라 국가체제가 확립된 시기로 파악되었다.
특히 1970년대 이후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나(那)를 지연집단으로 파악한 연구성과를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나’는 고구려 국가 형성 이전부터 지연집단으로 존재한 것으로 이해되었고, 그 성격은 지역별 단위정치체(노태돈, 1975), 성읍국가(이기백, 1985), 군장사회(금경숙, 1989; 박경철, 1996), 독립소국(이종욱, 1982b; 손영종, 1984), 초기국가(김기흥, 1990) 등으로 파악되었다. 이러한 나(那)가 국읍(國邑)과 다수의 읍락(邑落)으로 이루어졌다고 보아 나국(那國)으로 정의하기도 했다(임기환, 1987).
이로써 나(那)를 매개로 고구려의 국가 형성을 파악할 단서를 확보했다. 그렇지만 ‘나’가 고구려라는 국가로 결집되는 과정은 논자에 따라 다르게 이해하였다. 나부체제론자가 여러 나의 통합으로 유력한 5나가 형성되고 이들이 건국 주도세력으로 등장하여 계루부의 영도력 아래 국가체제를 성립시켰다고 본 반면(노태돈, 1975; 김기흥, 1990; 여호규, 1996b), 집권체제론자는 계루부가 다른 나를 정복·복속함으로써 국가가 성립되었다고 이해했다(이종욱, 1982b; 박경철, 1996). 그 결과 나부체제론자가 국가 성립 이후의 나부를 자치권을 지닌 단위정치체로 파악한 반면, 집권체제론자는 지방통치조직(이종욱, 1982b)이나 군사 단위(김광수, 1983a)로 파악했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국가 형성과 초기 정치체제를 이해하는 관건인 나와 나부의 성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전술했듯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4나부는 『삼국지』 고구려전의 4노부와 같은 실체인데, 나부의 용례는 이 4나부에 한정된다. 표 3에서 보듯이 나부는 1~3세기에 존재하다가 3세기 말에 소멸했고, 나부의 소멸과 더불어 도성의 방위별 행정구역인 방위부가 새롭게 등장했다. 나부는 단순한 지역집단이 아니라, 1~3세기 곧 고구려 초기라는 특정한 시기에만 존재한 것이다.주 014
각주 014)

이러한 점에서 나부는 초기 정치체제의 성격과 깊이 연관된다고 생각하는데, 표 1을 통해 다음과 같은 특징을 추출할 수 있다.〈충주고구려비〉에 나오는 “前部 大使者 多于桓奴 主簿 貴德”의 ‘환노(桓奴)’를 환나부로 파악하기도 하지만(李鍾旭, 1982a), ‘다우환노(多于桓奴)’는 인명으로 보인다(邊太燮, 1979). 또 〈광개토왕릉비〉의 ‘관노성(貫奴城)’을 관나부(李玉, 1984), 〈평양성각자성석(平壤城刻字城石)〉에 나오는 “卦婁蓋切小兄加群”의 ‘괘루(卦婁)’를 계루부로 보기도 하지만(손영종, 1984), 관노성은 성곽 명칭이며, 괘루는 인명의 일부로 추정된다(盧泰敦, 1999). 현전하는 사료상 4세기 이후에도 나부가 존속했다고 볼 만한 명확한 근거는 없다.
먼저 표 1의 a·b에서 보듯이 각 나부는 계루부 왕권의 통제를 받았으며, c·d에서 보듯이 계루부 왕권의 명령을 수행하기도 했다. 다음으로 소노가가 비류수 유역에 위치했다거나(h) 4연나가 왕도와 기내를 공격했다는(j) 사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나부는 계루부와 뚜렷이 구별되는 별도의 지역이나 공간을 차지하며 존재했다. 더욱이 연나부에 안치된 부여왕의 사촌 동생이 만여 명을 거느렸다거나(a) 소노가가 하호 3만여 명을 거느렸다는(h) 것에서 보듯이 각 나부의 인구 규모는 수만 명에 이르렀다.
비류부장 3명이 과도한 수탈을 하다가 계루부 왕권의 제재를 받았다거나(b), 소노가가 하호 3만여 명을 거느리고 공손씨에게 투항했다는(h) 기사 등으로 보아 각 나부는 자치권을 보유했다고 추정된다. 실제 각 나부는 다른 나를 정복하거나(c·d), 왕도를 공격할(j) 정도로 독자적인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또 『삼국지』 고구려전의 기사에서 보듯이 각 나부의 지배세력인 대가(大加)들은 사자(使者), 조의(皂衣), 선인(先人) 등 독자적인 관원조직을 보유했다. 다만 이들 관원의 명단은 국왕에게 보고되어 통제를 받았으며, 국왕 직속의 관원에 비해 위계도 낮았다.
나부는 계루부 왕권의 통제를 받았지만, 계루부와 구별되는 별도의 지역을 차지하며 수만 명의 인구를 보유했고, 독자적 관원조직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자치권을 행사했던 것이다. 각 나부는 계루부 왕권의 통제를 받았지만, 단순한 지역집단이 아니라 자치권을 지닌 단위정치체라고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고구려 초기의 나부는 계루부 왕권의 통제를 받으면서 초기 정치체제를 구성하던 ‘하부단위정치체’라고 정의할 수 있다(노태돈, 1975; 임기환, 1987; 여호규, 1992; 김현숙, 1995).
한편 표 1의 c·d에는 왕명을 받은 관나부 패자 달가나 환나부 패자 설유에 의해 정복된 조나와 주나가 나오는데, 이들은 ‘부(部)’라는 표현이 없다는 점에서 4나부와 뚜렷이 구별된다. 조나와 주나는 고구려에 정복되기 이전에 왕이나 왕자가 존재했고, 정복군에 대항할 만한 군사력도 보유하고 있었을 것이다. 조나와 주나는 본래 계루부 왕권에 의해 편제된 나부와는 성격이 다른 독립적인 단위정치체였던 것이다.주 015
나부가 고구려의 초기 국가체제를 구성하는 하부단위정치체라는 뜻에서 ‘부(部)’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면, 조나와 주나는 독립적인 단위정치체라는 의미에서 이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각 나부가 계루부 왕권에 의해 편제되기 이전에는 ‘나(那)’라는 독립적인 단위정치체로 존재했다고 볼 수 있는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용례상 이러한 존재의 하한은 1세기 중엽이다. 이러한 나는 왕이 존재했을 뿐 아니라 군사력을 보유했고, 후술하는 바와 같이 그 규모가 삼한 소국과 비슷했다는 점에서 그 성격을 ‘나국(那國)’이라고 파악할 수 있다.
한편 나(那)는 의미상 강가나 계곡에 자리한 지역집단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나가 나국으로 성장하기 이전에는 소규모 지역집단으로 존재했다고 추정된다. 독자적인 국(國)을 형성한 ‘나국’과 그 이전 단계의 ‘나’를 개념상 구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주 016 나국으로 성장하기 이전 단계의 ‘나’는 소규모 지역집단으로 존재했다는 점에서 ‘나집단(那集團)’으로 개념화할 수 있다. 압록강 중상류의 여러 정치체는 본래 나집단이나 나국과 같은 독자적인 단위정치체로 존재하다가, 국가체제의 확립과 함께 계루부 왕권에 의해 나부라는 하부단위정치체로 편제되었던 것이다(여호규, 1992; 1996b).
표 1의 c·d에서 보듯이 태조왕 20년과 22년에 관나부와 환나부로 하여금 각기 조나와 주나를 정벌하도록 했다. 이는 계루부 왕권이 나부와의 결합을 통해 다른 나국을 통합하던 양상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기사를 마지막으로 4나부 이외에 ‘모모나(某某那)’를 칭하는 단위정치체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태조왕대에 계루부가 압록강 중상류 일대의 독자적인 단위정치체에 대한 통합을 마무리했음을 뜻한다. 계루부가 1세기 중반을 전후해 압록강 중상류의 독자적인 단위정치체를 4나부로 편제하면서 이 지역 전체를 통괄하는 국가체제를 확립한 것이다(노태돈, 1975).주 017
그런데 각 나부는 비록 계루부에 의해 편제되어 그 통제를 받았지만, 자체의 관원조직과 독자적인 군사력을 보유했다. 또 계루부는 이 지역 전체를 통괄하는 국가권력으로 부상했지만, 나부를 통해 통치력을 관철하는 한계를 지녔다. 계루부와 4나부는 고구려 국가를 성립시킨 주체로서 이 지역 전체에 통치력을 행사하는 두 축이었다. 이처럼 각 나부가 계루부와 함께 국가 운영의 중요한 주체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고구려 초기 정치체제는 ‘나부체제’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점은 나부의 내부구조를 통해서도 파악할 수 있다. 표 1의 b에 비류부장 3명이 등장하는데, 비류나부를 대표하던 지배세력으로 파악된다. 물론 대무신왕 시기에 계루부 왕권이 비류나부의 부장을 서인으로 강등시킬 만큼 통제력을 행사했다고 보기 힘들지만, 이를 통해 비류나부를 구성하는 하위 세력집단이 3개 존재했을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다. 표 1의 h에 따르면 2세기 말경 소노부 곧 비류나부가 거느린 하호는 약 3만 명이었다. 시기적인 차이가 있지만 두 기사를 비교하면 비류나부를 구성하던 하위 집단의 규모는 대략 만여 명 전후였다고 추산할 수 있다.
표 1의 a에 따르면, 부여왕의 사촌 동생(從弟)은 만여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내투했는데, 왕에 봉해지며 연나부에 안치되었다. 이로 보아 부여왕의 사촌 동생이 거느린 집단은 고구려로 남하한 다음에도 결속력을 유지한 상태에서 연나부의 하위 집단으로 편제된 것으로 추정된다. 연나부를 구성한 하위 집단의 규모도 만여 명 전후로 추산할 수 있는 것이다.주 018 또 표 1에서 j의 ‘4연나’라는 표현은 연나부가 4개의 하위 집단으로 구성되었음을 보여준다. 연나부도 4개 정도의 하위 집단으로 구성되었고, 각 하위 집단의 규모는 만여 명 전후로 추산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각 나부는 3~4개 전후의 하위 집단으로 구성되었고, 각 하위 집단의 규모는 만여 명 전후로 추산된다.주 019 당시 호당 평균 인구는 약 5~6.5명이다. 따라서 3만~4만 명에 이르는 각 나부의 호수는 5,000~8,000호, 만여 명 전후인 하위 집단의 호수는 2,000여 호로 추산된다. 이러한 추산치를 계루부를 제외한 4나부에 적용하면, 4나부 전체의 호수는 약 2만~3만 2,000호로 추산된다. 이러한 수치는 3세기 중반경 3만여 호라는 원고구려 지역의 인구 규모와 거의 부합한다. 각 나부의 인구 규모를 통해서도 계루부 왕권이 원고구려 지역 전체를 4나부로 편제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임기환, 1987).
그런데 3세기 중반경 삼한 소국의 규모는 대체로 2,000~3,000호로 추산된다(이현혜, 1976). 각 나부를 구성하는 하위 집단은 본래 삼한 소국에 상응하는 정치체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각 나부는 본래 삼한 소국에 상응하는 나국의 통합과 복속에 의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고, 나부를 구성한 하위 집단은 크게 다른 나국을 통합·복속한 중심 나국과 그에 통합된 피복속 나국으로 양분할 수 있다. 관나부나 환나부가 각기 왕명을 받고 조나나 주나를 정벌했다는 표 1의 c·d 기사는 비록 계루부 왕권이 개입하고 있지만, 나국 사이의 통합과 복속 양상을 잘 보여 준다.
한편 나국으로 성장하지 못한 개별 나집단은 나국 단계로 성장한 정치세력의 통제를 받으며 지역집단으로 존재했을 것이다. 3세기 중반경 집단 간의 통합이 완만했던 변진(弁辰)의 소국은 600~700가 정도였다고 하는데, 이는 수천 가로 이루어진 소국 단계로 통합되기 이전의 집단 규모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나국 이전 단계의 개별 나집단은 대체로 변진의 소국과 비슷한 규모였다고 추정된다.
결국 각 나부를 구성한 세력집단은 인구 규모에 따라 크게 600~700가 정도의 나집단 단계와 2,000~3,000가 정도의 나국 단계로 양분할 수 있다. 그리고 나국 단계의 세력집단은 통합을 주도했던 중심 나국과 그에 예속된 피복속 나국으로 나뉜다. 이러한 나부의 내부구조를 통해 고구려 초기의 국가체제가 나집단의 성장과 이들 간의 통합과 복속, 그리고 나국의 성립과 이들 간의 통합과 복속 등 여러 단계를 거쳐 확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 고구려 초기 정치체제를 구성하는 각 나부는 어떠한 요인 때문에 자치권을 보유하게 되었을까? 각 나부가 자치권을 보유한 것은 단순히 계루부 왕권이 미약했기 때문이 아니라, 고구려 초기의 사회경제적 기반과 깊이 연관된다. 표 1의 j에서 보듯이 고구려 초기 지배세력은 사치노예나 가내노예로 삼을 수 있는 처첩, 그리고 소·말·재화 등 동산적 부(富)를 주요 수탈대상으로 삼았다. 유리명왕 11년에 선비(鮮卑)를 공파한 부분노(扶芬奴)가 식읍을 사양하고 황금 30근과 말 10마리를 받은 사실도 당시 지배세력이 토지보다 동산적인 부를 더 선호했음을 보여준다.
나부의 지배세력은 토지와 노동도구라는 두 범주의 생산수단 가운데 주로 노동도구에 대한 집적을 통해 경제기반을 확대하고, 노동력 확보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것이다. 이에 따라 토지에 대한 읍락의 본원적 소유권은 완전히 해체되지 않고, 계층 분화도 읍락을 넘지 않는 범위에서 진행되었다. 읍락의 공동체적 관계가 존속하는 가운데 계층 분화나 토지사유화가 제한된 범위에서 진행된 것이다. 이에 나부의 지배 세력들은 철제농공구를 비롯한 노동도구를 집적하는 한편, 읍락의 공동체적 관계를 이용하여 읍락민의 노동력을 조직적으로 편제하면서 세력기반을 확대 재생산했다(여호규, 1992).
나부의 여러 지배세력이 읍락의 공동체적 관계를 바탕으로 세력기반을 확대 재생산했기 때문에 각기 일정 정도의 자치권을 보유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계루부 왕권이 각 나부를 매개로 통치력을 관철하려면 먼저 각 나부의 다양한 세력집단을 편제하는 기준을 마련하고, 나아가 왕권을 뒷받침할 정치기구를 마련해야 했을 것이다. 나부의 지배세력도 자치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이를 뒷받침할 관원조직을 갖추어야 했을 것이다. 고구려 초기 정치체제가 계루부 왕권의 집권력과 각 나부의 자치권을 조화시키는 방향으로 성립되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초기 관등제의 구성은 이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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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나 아키히데(三品彰英) 이후 일본 학계에서는 초기의 5부에 대해 군사조직(矢澤利彦, 1954), 중앙지배층인 귀족의 조직(末松保和, 1962; 1996), 부족(部族)이 아니라 왕권을 배경으로 출현했으면서 자립성을 보유한 존재(川本芳昭, 1996) 등으로 이해하는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다만 미시나 아키히데의 연구성과를 계승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는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초기 기사에 대한 불신론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로 인해 초기 정치체제에 대한 연구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삼국지』 고구려전의 관명(官名)을 분석한 관등제 연구가 거의 유일한데, 이 경우에도 족제(族制)적 성격을 많이 강조했다(武田幸男, 1978;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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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4)
〈충주고구려비〉에 나오는 “前部 大使者 多于桓奴 主簿 貴德”의 ‘환노(桓奴)’를 환나부로 파악하기도 하지만(李鍾旭, 1982a), ‘다우환노(多于桓奴)’는 인명으로 보인다(邊太燮, 1979). 또 〈광개토왕릉비〉의 ‘관노성(貫奴城)’을 관나부(李玉, 1984), 〈평양성각자성석(平壤城刻字城石)〉에 나오는 “卦婁蓋切小兄加群”의 ‘괘루(卦婁)’를 계루부로 보기도 하지만(손영종, 1984), 관노성은 성곽 명칭이며, 괘루는 인명의 일부로 추정된다(盧泰敦, 1999). 현전하는 사료상 4세기 이후에도 나부가 존속했다고 볼 만한 명확한 근거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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