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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2. 관등제의 구성과 운영

2. 관등제의 구성과 운영

고대 관등제는 단순히 관직의 서열을 표시하는 관품(官品)이 아니라 국가 운영에 참여하는 다양한 지배세력의 정치적 위상이나 신분 등급을 표시하는 위계(位階)로 기능했다(하일식, 1995; 임기환, 2003). 고구려 초기 관등제도 국가 형성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각 나부의 다양한 지배세력을 편제하는 과정에서 성립했다(김철준, 1956; 1975). 초기 관등제의 성격과 관련해 나부체제론자는 다원적인 구성과 복합적인 기능에 많이 주목한다(여호규, 1992; 임기환, 1995a; 노태돈, 1999). 반면 집권체제론자는 국왕을 중심으로 분화된 직능을 담당하던 집권적 관제였다고 보거나(김광수, 1983a), 관직과 엄격히 분리된 관등(관위)으로 성립했다고 파악한다(이종욱, 1982a; 금경숙, 2004).
다만 이러한 관등제는 국가체제 확립과 함께 비로소 정비되었다. 국가체제 확립 이전인 동명성왕~대무신왕 시기에는 관등이 보이지 않고, 봉주(封主), 봉왕(封王), 사성(賜姓)의 사례가 확인된다. 봉주의 사례로는 동명성왕 2년에 비류국 송양이 항복하자 다물주(多勿主)에 봉했다는 기사가 있다.주 020
각주 020)
『삼국사기』 고구려본기1 동명왕 2년 6월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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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이 지역의 맹주가 소노집단에서 계루집단(주몽집단)으로 바뀐 사실을 설화적으로 기술한 것인데(이병도, 1956; 1976), 계루집단이 맹주권을 장악한 다음 송양을 다물주에 봉해 그 영도권을 인정했음을 보여준다. 계루집단이 맹주권을 장악했지만, 소노집단 내부의 세력집단까지 직접 편제하지는 못한 것이다.
봉왕의 사례로는 대무신왕 5년에 부여왕의 사촌 동생이 만여 명을 거느리고 내투하자, 왕에 봉하고 연나부에 안치했다는 기사가 있다.주 021
각주 021)
『삼국사기』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5년 7월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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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왕의 사촌 동생을 왕에 봉해 그의 영도력을 인정한 것인데, 만여 명이라는 대규모 집단을 분산하지 않고 연나부에 안치했다는 사실에서 그 내부의 세력집단에 대한 편제를 시도하지 않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봉주나 봉왕은 계루집단이 맹주권을 장악한 초기에 독자적인 단위정치체에 대한 영도력을 강화하던 방식이었다고 파악된다.
사성 기사도 동명성왕~대무신왕 시기에 집중적으로 나오는데,주 022
각주 022)
김광수, 1983b, 962쪽의 도표 및 여호규, 2014, 205쪽의 표 4-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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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를 받은 집단이 매우 다양하다. 이에 사성을 국왕 중심의 체계적인 제도로 이해하기도 하지만(김광수, 1983b), 4세기 이후 중기 귀족이 왕실과의 관련성을 강조하기 위해 족조전승(族祖傳承)으로 내세운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노태돈, 1994; 서영대, 1995).주 023
각주 023)
귀족의 성씨록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상정하기도 한다(김기흥,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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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자에 따른다면 현전하는 사성 기사는 많이 윤색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사성 기사가 계루부 왕실과 특정 지역세력의 결합 과정을 묘사했다는 점에서 계루집단이 독자적 세력집단을 편제하면서 맹주권을 강화하던 과정을 일정 정도 반영한다고 생각된다.
사성을 받은 집단 가운데 세력가가 1명만 나오는 사물택(沙勿澤), 기산들판(箕山之野), 비류원(沸流源)은 개별 나집단에 해당하며, 세력가가 세 명 등장하는 모둔곡(毛屯谷)은 여러 나집단으로 이루어진 곡집단으로 파악된다. 또 인구 규모가 만여 명에 이르는 부여왕 사촌 동생 집단은 나국 단계에 상응한다(여호규, 1996b). 사성을 받은 집단이 매우 다양하여 일정한 기준이나 원리를 상정하기 힘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사성도 국가체제 확립 이전에 계루집단이 독자적인 단위정치체를 편제하던 방식의 하나로 이해된다. 다만 사성은 부여왕의 사촌 동생이나 추발소의 사례를 제외하면 대체로 나국보다 규모가 작은 개별 나집단에 게 수여되었다.
이처럼 계루집단은 맹주권을 장악한 초기에는 봉주, 봉왕, 사성을 통해 영도력을 강화하고 독자적인 단위정치체를 편제했다. 아직 다양한 단위정치체를 편제하는 일원적인 원리를 마련하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편제 원리는 국가체제 확립과 함께 비로소 마련되었을 텐데, 초기 관명을 종합하여 기술한 다음 기사는 이를 잘 보여준다.
사료 2
그 나라에는 왕이 있고, 관명으로는 상가(相加), 대로(對盧), 패자(沛者), 고추가(古鄒加), 주부(主簿), 우태(優台), 승(丞), 사자(使者), 조의(皂衣), 선인(先人)이 있는데, 존귀하고 비천함에 따라 각각 등급이 있었다. … 관(官)을 설치할 때, 대로가 있으면 패자를 두지 않았고, 패자가 있으면 대로를 두지 않았다. … 여러 대가(大加)는 또한 독자적으로 사자, 조의, 선인을 두었는데, 그 명단은 모두 왕에게 보고되었다. 경이나 대부의 가신과 같았는데, 모임의 석차에서 왕가(王家)의 사자, 조의, 선인과 같은 열에 앉을 수 없었다. … 대가와 주부는 머리에 책(幘)을 썼는데 [중국의] 책과 같았지만 드리운 부분이 없었다. 그 소가(小加)는 절풍(折風)을 썼는데 형태가 고깔(弁) 같았다. _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전  
이 사료는 3세기 중반경 고구려 관제의 전체 구성을 잘 보여준다. 모두 10개 관명이 나오는데, 패자, (대)주부, 우태, (대)사자, 조의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 관등명으로 확인된다. 또 고추가는 사료 1에서 보듯이 계루부의 대가를 비롯하여 소노부의 적통대인과 절노부의 대인에게 수여했는데, 고구려본기에는 고구려에 복속된 주나의 왕자에게 수여한 사례가 나온다(표 1의 d).
대로는 고구려본기 초기 기사에서는 확인되지 않지만, 5세기 이후 사료에는 다수 나온다. 패자와 교치(交置)되었다고 하므로 패자와 동격의 관등이었다고 파악된다. 그 밖에 상가를 제외하면, 고구려본기에서 확인되지 않는 관명으로 승과 선인이 남는다. 선인은 중기 이후에 최하위 관등으로 나오며, 승은 이 기록 이외에는 관련된 사료가 확인되지 않는다.주 024
각주 024)
승(丞)은 제1현도군 시기의 군현 속리에서 연원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權五重, 1992), 오기라고 파악하기도 한다(金哲埈,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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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료2의 10개 관명 가운데 후술하듯이 국상(國相)으로 비정되는 상가, 봉작(封爵)적 성격이 강한 고추가, 다른 기록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승을 제외한 7개 관명은 모두 관등으로 파악된다.
특히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초기 기사에는 관등의 승진 사례가 다수 나오는데, 조의는 우태나 패자, 우태는 대주부나 패자, 대사자는 대주부로 승진한 것으로 확인된다.주 025
각주 025)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3 차대왕 2년조, 제4 신대왕 2년조, 제5 봉상왕 3년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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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례를 종합하면 조의 → 우태 → 대주부·패자, 또는 대사자 → 대주부라는 관등의 서열을 상정할 수 있는데, 이는 상기 기사의 기술 순서와 일치한다. 그러므로 고구려 초기 관등제는 대로=패자, 주부, 우태, (승), 사자, 조의, 선인의 서열로 구성되었다고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관등은 태조왕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또 ‘나부명 + 관등명 + 인명’의 순서로 기재되어 있는데, 나부명과 병기된 사실이 주목된다. 초기 관등명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태조왕대는 초기 국가체제가 나부체제라는 형태로 확립된 시기이다. 그러므로 초기 관등제는 나부체제를 바탕으로 성립되었고, 나부체제의 구조와 깊은 연관 관계를 맺으며 운영되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럼 각 관등의 성격과 기능을 구체적으로 검토하여 초기 관등제의 구성과 운영 양상을 살펴보도록 하자.
10개 관명 가운데 가장 상위인 상가의 성격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는데, 다음 절에서 상술하는 바와 같이 3세기 중반경 최고위 관직인 국상으로 비정된다. 그 다음에 대로와 패자가 연이어 기재되어 있는데, “대로가 있으면 패자를 두지 않고 패자가 있으면 대로를 두지 않는다”라고 하였듯이 양자는 교치되었다.
이에 대로와 패자의 관계에 대해 일찍부터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초창기 연구에서는 초기 5부를 부족이나 부족국가로 파악해 양자를 원시사회의 추장과 군사령관의 관계(백남운, 1933), 또는 대로는 족장적 신분층이고 패자는 그를 보좌하던 자(김철준, 1956; 1975) 등으로 이해했다. 그 뒤 초기 5부가 단위정치체라는 사실이 확인되자, 패자는 나부의 직책이고 대로는 일반 읍락의 수장층이라고 보기도 했다(김광수, 1983a). 또 3세기 중반경 나부가 소멸하는 대신 계루부 왕권의 강화와 더불어 방위부가 등장한다는 사실에 주목해 패자는 나부 계통의 관등이고 대로는 방위부 계통의 관등(임기환, 1995b; 2004), 패자는 나부의 대가이고 대로는 계루부의 대가로 중앙귀족에 대한 범칭(윤성룡, 1997; 장병진, 2019) 등으로 이해하기도 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패자와 대로의 관계를 직접 나타내는 자료가 거의 없다. 특히 고구려본기 초기 기사에서는 대로의 사례가 나오지 않아 그 성격을 명확하게 파악하기 힘들다. 반면 패자의 사례는 총 8회 확인되며, 『삼국지』 고구려전에도 패자 득래(得來)가 나온다. 이러한 사례를 종합하면 패자는 좌보나 국상 등 최고위 관직에 상응한 최고위 관등으로 파악된다.
한편 표 1의 c·d 기사는 패자의 최초 사례로 그 연원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이 기사에서 관나부와 환나부의 패자는 계루부 왕권의 명령을 받아 각기 조나와 주나를 정벌하고 있다. 3세기 중반경 부여에서는 적이 침입할 경우 사출도(四出道)를 거느린 제가(諸加)가 독자적으로 전투를 수행했다고 한다.주 026
각주 026)
『삼국지』 권30 동이전 부여전, “諸加別主四出道, 大者數千家, 小者數百家. … 有敵, 諸加自戰, 下戶俱擔糧飮食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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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 보아 관나부와 환나부의 패자가 조나와 주나를 정벌하기 위해 동원한 병력은 각 나부가 보유한 군사력으로 파악된다(이종욱, 1982b; 임기환, 1987). 패자라는 관등은 본래 독자적인 군사력을 보유하고, 이를 동원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나부의 지배세력에게 수여되었다고 추정되는 것이다.
이에 나부체제론자뿐 아니라 집권체제론자도 패자가 최고위 관등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각 나부의 최상층 세력가인 대가급으로 상정하고,주 027
각주 027)
각 나부의 장(長)이나 대가(大加)는 세습직이기 때문에 별도의 관등을 수여받지 않았다고 보기도 하는데, 이 경우 패자는 대가보다 낮은 실무자가 수여받던 관등으로 주로 군사업무에 종사했다고 파악한다(노태돈,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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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성격은 군사적 기능을 전제로 한 나부의 최고위직(김광수, 1983a), 나부의 수장이나 대표자(임기환, 1995b; 2004; 금경숙, 2004; 이규호, 2021), 고구려에 흡수된 소국의 족장이나 수장(김두진, 2009), 나부를 구성한 부내부(部內部)의 장(조영광, 2015)에게 수여한 관등으로 이해한다. 또 본래 세력집단의 우두머리를 상징하는 위호(位號)였다고 보기도 한다(장병진, 2019).
이처럼 패자가 최고위 관직에 상응하는 최고위 관등이고, 독자적인 군사력도 보유한 사실을 고려하면 본래 나부의 최고위 지배세력에게 수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나부에 해당하는 단위정치체가 나국 사이의 복속과 통합을 통해 형성된 사실을 상기하면, 패자는 나부 형성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중심 나국 세력에게 수여한 관등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리하여 패자는 표 1의 c·d에서 보듯이 계루부 왕권이 압록강 중상류 일대의 독자적인 단위정치체를 나부로 편제한 이후에도 그 통제를 받으며 별도의 군사력을 통솔했다고 파악된다(여호규, 1992; 2014).주 028
각주 028)
패자의 사례는 서천왕 2년(271년)이 마지막이고, 중·후기 금석문에도 나오지 않는다. 이에 비해 대로는 중·후기에도 다수 확인되며, 대대로는 후기의 최고위 관등이었다. 이로 보아 패자와 대로를 교치했다는 『삼국지』 고구려전의 기사는 패자가 대로로 전환하던 양상을 반영한다고 파악된다. 중·후기에 대로는 주로 군사지휘관이나 군사고문관 역할을 수행했는데, 패자의 군사지휘관적 성격을 계승했을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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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자와 성격이 가장 유사한 관등은 여섯 번째 ‘우태(優台)’이다. 일찍이 ‘우태’는 언어학적으로 풀이하여 연장자라는 뜻의 ‘웃치’로 읽혔다고 본 견해가 제기되었다. 이에 따르면 중·후기 형계 관등의 접미어인 ‘형(兄)’은 ‘우태’의 뜻을 한역(漢譯)한 것으로 형계 관등의 고유 명칭인 막하하라지(莫何何羅支: 태대형)나 힐지(襭支: 대형) 등의 ‘지(支)’는 ‘우태’ 곧 ‘웃치’의 잔존 형태라는 것이다(김철준, 1956; 1975). 이에 우태는 본래 연장자나 친족집단의 장, 수장층을 가리키는 명칭이었는데, 족장세력을 통합해 지배체제를 마련하면서 관명으로 수용되었다가 형계 관등으로 분화되었다고 보았다(김철준, 1975; 노중국, 1979a; 김광수, 1983a).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우태’가 ‘于台’로 표기되었는데, 좌보, 중외대부(中畏大夫), 국상에 취임한 인물이 우태를 소지한 사례가 다수 확인된다. 이 가운데 조의가 우태로 승진하는 사례도 있지만, 우태에서 패자나 대주부로 승진한 사례도 있다. 우태의 순위는 『삼국지』 고구려전의 기재 순서처럼 조의보다는 상위지만 패자나 (대)주부보다는 하위였던 것이다. 이에 우태의 성격은 대체로 패자 다음가는 수장층에게 수여한 관등(임기환, 1995; 2004) 또는 독자적인 세력을 갖춘 집단의 수장에게 수여된 관명(이규호, 2021)으로 파악한다.
우태의 첫 번째 사례는 “갈사국왕(曷思王)의 손자인 도두(都頭)가 나라를 들어 내항하니, 도두를 우태로 삼았다”는 태조왕 16년 기사인데,주 029
각주 029)
『삼국사기』 고구려본기3 태조왕 16년 3월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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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태의 연원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갈사국은 대무신왕 5년 부여왕 대소의 동생이 갈사수에 이르러 압록곡 해두왕(海頭王)을 살해하고 세운 국(國)이다.주 030
각주 030)
『삼국사기』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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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곡’이라는 지명으로 보아 압록강 유역에 위치했고, 비록 나(那)와 관련된 명칭을 띠고 있지 않지만, ‘국(國)’ 즉 나국 단계의 세력집단으로 파악된다. 다만 부여왕 대소의 동생이 이끈 종자(從者)는 100여 명으로 같은 시기에 고구려에 내투한 부여왕 사촌 동생이 거느린 만여 명과 비교하면 소규모이다.
더욱이 도두가 스스로 나라를 들어 내항했다고 하므로 갈사국은 독자적 운동력이나 군사력도 많이 상실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계루부에 내투할 당시의 갈사국은 본래 독자적 군사력을 지녔다가 상실한 나부 내부의 피복속 나국에 상응한다고 파악할 수 있다. 우태는 본래 중심 나국에 통합된 피복속 나국세력에게 수여한 관등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태는 패자보다 낮은 나부의 지배세력을 편제하던 관등으로 파악되는데,주 031
각주 031)
가장 이른 시기의 우태 사례가 부여계 인물과 연관된 점에 주목하여 본래 부여계 집단의 위호(位號)였다고 파악하기도 한다(장병진,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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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나부 미유(彌儒)가 우태에서 패자로 승진한 사례주 032
각주 032)
『삼국사기』 고구려본기3 차대왕 2년 2월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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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이를 반영한다(여호규, 1992; 2014). 우태는 동천왕 4년(254년)을 마지막으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 더 이상 확인되지 않고 중·후기 금석문에도 나오지 않는데, 형계 관등으로 전환된 것으로 보인다(조영광, 2015).
패자나 우태와 유사한 성격을 가진 관등으로 조의를 들 수 있다. 『삼국지』 고구려전에는 아홉 번째로 기술될 정도로 하위의 관등이다. 조의라는 명칭은 검은색 옷을 입은 사람에서 유래했는데, 『후한서』 여복지(輿服志)에서는 ‘조의’가 흑색 조복(朝服)을 입는 신분이 낮은 관리에 대한 통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더욱이 사료 2에서 보듯이 왕뿐만 아니라 대가들도 조의를 두었다고 한다. 이에 조의의 성격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예속성과 실무적 기능을 강조하는 견해가 다수 제기되었다.
사회적 신분관계상 비천한 자(백남운, 1933), 족장의 심부름을 하는 자(김철준, 1956; 1975), 전문적인 실무행정요원(노중국, 1979a), 국왕이나 수장 예하의 근위무사(김광수, 1983a; 장병진, 2019)로 이해하는 견해가 그것이다. 또 조의가 본래 나부 내에 설치된 관직이었다가, 국왕 중심의 초기 관등제가 성립함과 더불어 제가(諸加) 세력을 왕권 아래로 수렴하는 기능을 담당했다고 보기도 한다(임기환, 1999; 2004).
그런데 표 1의 e·f에서 보듯이 차대왕의 즉위에 큰 공을 세운 비류나부 조의 양신은 차대왕 2년 중외대부에 임명되면서 우태로 승진했다. 신대왕의 즉위에 결정적인 공훈을 세운 연나부 조의 명림답부(明臨荅夫)도 신대왕 2년에 좌·우보를 개편하여 신설한 국상에 임명되면서 패자로 승격했다.주 033
각주 033)
『삼국사기』 고구려본기3 차대왕 20년 및 제4 신대왕 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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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기만 하더라도 조의는 대가에 예속된 관원이 아니라, 우태나 패자로 승진할 수 있는 관등이었다. 그러므로 조의는 본래 우태나 패자를 수여받은 자와 동질적이면서 최하위인 세력집단에게 수여되었다고 추정된다.
이러한 점에서 조의는 본래 패자나 우태를 수여받던 나부의 나국 단계의 세력집단과 동질적이면서 가장 소규모인 개별 나집단에게 수여된 관등이었을 것으로 파악된다.주 034
각주 034)
주몽이 남하하다가 만난 모둔곡(毛屯谷) 세 명은 마의(麻衣), 납의(衲衣), 수조의(水藻衣) 등 ‘의(衣)’ 종류에 따라 표현되고 있다. 이는 곡 내부의 세력집단을 ‘의(衣)’ 종류에 따라 지칭한 관습이 있었음을 시사하는데, ‘조의(皂衣)’라는 명칭은 이러한 관습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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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전술했듯이 개별 나집단은 나국 단계의 세력집단에게 복속되어 독자적 단위정치체로 성장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조의를 수여받은 세력은 나부체제 단계에서 이미 독자성을 상당히 상실하고 나국 단계의 세력에게 예속되었다고 추정한다. 이러한 예속성은 나부체제의 운영과정에서 더욱 심화되다가, 3세기 중반 무렵에는 대가의 예속적인 관원으로 격하된 것으로 파악된다(여호규, 1992; 2014).주 035
각주 035)
조의는 4세기 이후 일원적 관등제의 정비와 함께 독자적 기능을 상실하고, 제5위인 위두대형(位頭大兄)의 별명인 조의두대형(皂衣頭大兄)에 그 흔적만 남게 되었다. 이에 일원적 관등제 성립 이후 조의가 곧바로 소멸하지 않고, 일정 기간 유지되다가 형계 관등에 흡수되었다고 보기도 한다(조영광,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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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같이 사료 2에 나오는 패자, 우태, 조의는 본래 나부를 구성한 여러 세력집단을 편제한 관등이다. 계루부 왕권은 압록강 중상류 일대의 여러 세력집단에게 패자, 우태, 조의 관등을 수여함으로써 이들을 일정한 기준 아래 편제하는 한편, 각 지역의 독자적 단위정치체를 나부라는 하부단위정치체로 편제했던 것이다.
다음으로 고추가의 성격은 다른 관등과 다소 차이가 난다. 고추가는 10개 관명 가운데 네 번째로 기술되어 있는데, 왕족인 계루부의 대가(大加)를 비롯하여 본래 국주(國主)였던 소노부의 적통대인, 대대로 왕실과 혼인한 절노부의 대인이 칭했다고 한다(사료 1 참조). 고추가는 다른 관등과 달리 왕족, 구 왕족, 왕비족 등 특정 세력가만 칭했다는 것이다. 실제 고구려 초기에는 태조왕의 부친으로 전하는 재사(再思),주 036
각주 036)
『삼국사기』 고구려본기3 태조왕 즉위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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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천왕의 동생인 발기의 아들 박위거(駮位居),주 037
각주 037)
『삼국지』 권30 동이전 고구려전, “拔奇遂往遼東, 有子留句麗國, 今古鄒加駮位居, 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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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천왕의 부친인 돌고(咄固)주 038
각주 038)
『삼국사기』 고구려본기5 미천왕 즉위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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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계루부 출신 왕족이 고추가를 칭한 사례가 다수 확인된다. 또 계루부에 복속된 나국의 왕족에게 수여한 사례도 확인된다.주 039
각주 039)
『삼국사기』 고구려본기3 태조왕 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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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 보아 고추가는 관등보다는 예우 차원에서 수여한 봉작(封爵)(리지린·강인숙, 1976) 또는 존호(尊號)(노태돈, 1999)의 성격이 강했다고 생각된다. 또 계루부의 대가를 비롯해 소노부의 적통대인이나 절노부의 대인 등이 고추가를 칭했다는 것을 통해 각 계보 집단의 적통을 계승한 대가들이 칭하거나 이들에게 수여했다고 파악할 수 있다(여호규, 2010).주 040
각주 040)
고추가의 성격을 씨족장(이기백, 1974), 대부족장이 귀족화한 것(김철준, 1975), 특권적 집단의 족장(노중국, 1979a), 왕에 해당하는 원고구려 지역의 고유어(조영광, 2015), 중앙귀족화한 국읍(國邑) 주수(主帥)를 우대하며 사여한 칭호(장병진, 2019)로 이해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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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가는 관등보다는 작호(爵號)의 성격이 강했던 것이다.주 041
각주 041)
3세기 이후 고추가는 왕실의 구성원에게 사여한 사례만 확인되는데, 왕족이지만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에 고추가의 성격을 왕족을 예우하기 위한 관위로 보거나(금경숙, 1995a; 2004), 집권체제 정비와 더불어 고추가의 수여 대상이 왕실 구성원으로 한정되었고(임기환, 1995b; 2004; 장병진, 2019), 특히 계루부 내의 유력세력을 편제하기 위해 근친 왕족에 대한 봉작으로 그 성격이 변했다고 보기도 한다(조영광, 2015). 다만 고구려 후기에는 발고추가(拔古鄒加)가 빈객(賓客)을 담당하는 관직인데, 태대사자(太大使者, 大夫使者)가 맡았다고 한다. 이는 3세기 중반 이후에도 고추가의 수여 대상이 왕족으로 한정되지 않았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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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패자, 우태, 조의가 나부를 구성한 지배세력을 편제하기 위한 관등이었고, 고추가가 나부의 특정 세력에게 수여된 작호였다면, 계루부 왕권의 통치력을 뒷받침하기 위해 설치한 관등도 있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다섯 번째로 기재된 주부가 주목된다. 주부는 중국 관제에서 기원했는데, 한대(漢代)에는 중앙이나 지방 관청의 실무직인 연사(掾史) 가운데 수석관리로, 문서 관장과 인신(印信) 감수(監守) 등을 담당했다. 이에 고구려 초기의 주부가 현도군 시기의 속리직에서 유래했다고 보기도 한다(盧重國, 1979a; 權五重, 1992). 주부가 관직적 성격이 강했다는 것인데, 이와 관련하여 다음 사료가 주목된다.
사료 3
① 공손탁(公孫度)이 해동에 웅거하자 백고(伯固)가 대가(大加) 우거(優居)와 주부(主簿) 연인(然人) 등을 파견하여 공손탁이 부산적(富山賊)을 공격하는 것을 도와 격파했다. … 경초(景初) 2년(238년)에 대위(大尉) 사마선왕(司馬宣王)이 무리를 이끌고 공손연(公孫淵)을 토벌하자, 궁(宮)이 주부와 대가를 파견하여 수천 명을 거느리고 [조위의] 군대를 도왔다. _ 『삼국지』 권30 동이전 고구려전
② [손오의 주가] 구려왕 궁(宮)과 그 주부(主簿)에게 조서를 내렸는데, 조서에 ‘요동에게 공탈(攻奪)되었던 것을 하사한다’는 말이 있었다. 궁 등이 크게 기뻐하며 조서를 받았다. … 궁이 주부 착자(笮咨)와 대고(帶固) 등을 안평(安平)에 보내어 굉(宏) 등과 서로 만났다. _ 『삼국지』 권47 오주전 가화2년조  
위 사료에서 ‘궁’은 3세기 중엽의 동천왕을 지칭한다. ②에 따르면 주부가 손오의 조서를 왕과 연명으로 받고 외교업무를 처리하는 등 왕의 측근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부가 중국 관제에서처럼 외교업무 등 행정실무를 처리하는 관직의 성격을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면모는 ①에서도 확인된다. 이 기사에는 주부가 대가와 함께 군사활동을 수행한 것처럼 기술했지만, 실제 군사활동은 대가가 담당했고, 주부는 주로 외교 업무를 처리했을 것이다.
계루부 왕권의 입장에서 본다면, 대가의 군사력 동원과 지휘 등을 통제할 필요가 있었을 텐데, 주부가 왕의 측근으로서 이러한 임무를 수행했다고 파악된다. 주부는 각급 관청의 행정실무를 총괄하던 중국의 관직에서 기원한 관명으로 관직적 성격이 강했고, 외교업무를 수행하고 대가의 군사활동을 감시하는 등 계루부 왕권의 통치력을 뒷받침했다고 볼 수 있다(김철준, 1975; 노중국, 1979a; 이종욱, 1982a; 임기환, 2004; 금경숙, 2004; 장병진, 2019).
그런데 주부는 〈충주고구려비〉나 『한원』 고려전 등 중·후기의 사료뿐 아니라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초기 기사에서도 관등으로 확인된다. 『삼국사기』에는 주부가 대주부(大主簿)로 기재되어 있는데,주 042
각주 042)
주부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초기 기사에서는 ‘대주부’, 5세기 중·후반의 〈충주고구려비〉에서는 ‘주부’로 나온다. 이에 대주부를 주부에서 분화한 상위 관등으로 상정하거나(임기환, 2004; 琴京淑, 2004), 대주부와 대로를 같은 관등으로 보기도 한다(조영광, 2015; 이준성, 2019). 또 최근에는 『삼국사기』의 대주부와 『삼국지』의 주부는 동일한 것이지만, 〈충주고구려비〉가 세워진 5세기에는 대주부와 주부로 분화되었다고 보기도 한다(이규호, 2021). 그렇지만 주부가 주부와 대주부로 분화했다고 보기는 힘들며, 양자는 같은 관등을 사서에 따라 다르게 표현한 것으로 파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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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대왕 즉위에 공을 세운 환나부 우태 어지류는 좌보에 임명되면서 대주부, 봉상왕대의 남부 대사자 창조리(倉助利)는 국상 취임과 함께 대주부로 각기 승진했다.주 043
각주 043)
『삼국사기』 고구려본기3 태조대왕 80년 및 차대왕 2년, 제5 봉상왕 3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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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주부는 우태나 대사자보다 상위 관등인 것이다.
특히 차대왕 즉위 이후 환나부 우태 어지류가 좌보 임명과 함께 대주부로 승진한 반면, 관나부 우태 미유는 좌보 임명과 함께 패자로 승진했다.주 044
각주 044)
어지류와 미유는 모두 좌보에 임명되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각각 좌보와 우보에 임명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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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주부는 패자와 동격의 관등이었던 것이다. 실제 사료 2에서 주부는 공식 모임 때에 대가와 같이 책(幘)을 착용했는데, 절풍(折風)을 착용하던 소가(小加)보다 신분적으로 높았다. 주부(대주부)는 대가와 함께 최상위 신분층을 이루었지만, 독자적 세력기반을 지녔던 대가와는 그 성격이 달랐던 것이다(노태돈, 1999).
당시 독자적 군사력을 보유한 나부의 지배세력은 패자를 수여받은 중심 나국 단계의 세력이었다. 사료 3에서 ①의 대가는 나부의 중심 나국 세력인 패자일 가능성이 높은데, 이는 대주부가 패자와 동격의 관등이라는 검토 결과와 부합한다(盧重國, 1979a). 그러므로 주부는 관직적 성격을 강하게 지녔지만, 본래 나부의 지배세력인 대가·패자와 뚜렷이 대비될 정도로 계루부 왕권의 통치력을 뒷받침하기 위한 관등으로 설치되었다고 파악된다(여호규, 2014).
계루부 왕권의 통치력을 뒷받침하던 관등과 관련하여 여덟 번째로 기재된 사자(使者)도 주목된다. 사자는 그 의미상 본디 사절이나 심부름 하는 이를 일컬었고, 조세 수취 등의 실무를 담당했을 것으로 보인다(金哲埈, 1975).주 045
각주 045)
『삼국지』 부여전에 대사(大使)·대사자(大使者)·사자 (使者) 등이 나오는 것을 근거로 고구려가 부여의 영향을 받아 사자를 설치했다고 보기도 한다(武田幸男,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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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에는 비류국(消奴集團)이 주몽집단을 견제하기 위해 사자를 파견한 사례가 나온다. 표 1의 a에서 보듯이 계루집단도 과도한 수탈을 일삼던 비류나부의 지배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추발소를 사자로 파견했다. 이로 보아 사자는 나국의 지배세력이 다른 나집단이나 나국을 통제하는 기능도 담당했다고 파악된다.
그러므로 나부체제 확립 이후에는 계루부뿐 아니라 각 나부의 중심 세력도 나부 내부의 다른 세력집단을 통제하기 위해 사자를 설치했다고 예상된다. 사료 2의 ‘대가가 사자를 자치(自置)한 사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 사자는 계루부 왕권의 통치력뿐 아니라 각 나부의 자치권을 뒷받침하기 위해 설치한 직책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본래 사자는 주부처럼 특정한 직임을 맡은 관직적 성격이 강했다고 파악된다.
그런데 계루부 왕권의 집권력이 강화됨에 따라 사자의 역할이 증대되었다. 사자는 2세기 말 이후 대사자나 구사자(九使者) 등으로 분화하면서 왕권 강화를 뒷받침하는 관등의 색채를 강하게 띠었다. 2세기 말 이후 사자계 관등을 가진 자들이 대체로 도성의 방위별 행정구역인 방위부 출신이라는 사실은 이를 반증한다(여호규, 2014).주 046
각주 046)
고국천왕 13년에 대사자를 수여받은 안유(晏留), 동천왕 20년 구사자와 대사자를 수여받은 유유(紐由)·다우 (多優) 부자, 서천왕 2년 왕의 장인이 된 우수(于漱), 봉상왕 3년 국상에 임명된 창조리 등은 모두 방위부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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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각 나부가 자치권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자체의 관원조직을 갖출 필요가 있었는데, 사료 2에서 ‘여러 대가(大加)도 또한 독자적으로 사자, 조의, 선인을 두었다’는 기사는 이를 잘 보여준다. 앞서 언급했듯이 사자는 나국의 중심세력이 다른 나집단이나 나국을 통제하기 위해 설치한 직책이었다. 이에 따라 나부체제 확립 이후에도 계루부뿐 아니라 각 나부의 중심 나국세력도 다른 세력집단을 통제하기 위해 사자를 설치했다고 예상된다.
조의(皂衣)는 본래 개별 나집단 단계의 세력을 편제하기 위해 설치했던 관등인데, 일찍부터 나부의 중심 나국세력에게 예속되었다. 마지막으로 선인(先人)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초기 기사에는 사례가 없다. 후기 관등제에서 최하위 관등으로 나오는데, 나집단으로 성장하지 못한 개별 지역집단을 편제한 관등이 아니었을까라는 억측을 해본다. 사자, 조의, 선인 등 대가의 관원조직은 나부의 중심 나국세력이 나집단 단계 이하의 세력을 편제하고, 나부 내부의 다른 세력집단을 통제하는 과정에서 성립한 관원조직인 것이다. 각 나부는 이러한 관원조직을 바탕으로 자치권을 행사했을 것이다.주 047
각주 047)
왕권 아래의 중앙관등으로 두어진 사자·조의·선인은 대가가 자치한 사자·조의·선인과 달리 고위 지배층이었다고 보기도 한다(임기환,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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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같이 고구려 초기 관등제는, 계루부 왕권이 나부의 다양한 지배세력을 편제하기 위해 설치한 관등, 계루부 왕권의 집권력을 뒷받침한 관등, 나부의 자치권을 뒷받침한 관등 등과 같이 다원적인 구성 양상을 보인다.주 048
각주 048)
최근 고구려 초기 관제가 다원적으로 구성되었다고 보면서 통치를 위한 조직인 ‘관(官)’과 세습이나 포상의 성격으로 주어지는 ‘작(爵)’으로 대별한 다음, 관을 다시 하위단위인 ‘부(部)’를 담당하는 사자, 조의, 선인 및 상위단위인 고구려를 담당하는 패자, 주부, 우태로 구분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다(이규호,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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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주부나 사자의 사례에서 보듯이 관등과 관직의 성격이 미분화되어 혼재된 면모도 나타난다. 초기 관등제를 집권체제론자처럼 국왕을 중심으로 분화된 직능을 담당하던 집권적 관제(김광수, 1983a)나 관등과 관직이 엄격히 분리된 것(이종욱, 1982a; 금경숙, 2004)으로 보기는 힘든 것이다.
초기 관등제는 계루부 왕권이 각 나부의 자치권을 인정하면서 이들을 통제하는 측면과 함께 각 나부가 계루부 왕권의 통제를 받으면서 자치권을 수행하던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초기 관등제는 계루부 왕권이 나부를 매개로 통치력을 관철시키고, 각 나부는 계루부 왕권의 통제를 받으며 자치권을 행사하던 초기 정치체제의 구조를 잘 보여준다. 계루부 왕권과 나부의 지배세력은 관등의 수수(授受)를 통해 상호 역관계를 조정하고 압록강 중상류의 원고구려사회 전체에 통치력을 행사한 것이다.
그런데 국가체제 확립 이후 계루부 왕권이 강화되는 가운데 나부의 자치권은 점차 약화되었을 것이다. 특히 나부의 지배세력이 좌·우보나 국상 등 중앙관직에 진출하면서 중앙정계에서의 정치적 지위에 따라 관등이 승진되기도 했다. 이에 따라 각 관등의 연원적 차별성이 약화되고 점차 왕권을 중심으로 서열화되었을 것이다. 실제 3세기 중반에는 관등이 (상가), 대로·패자, (고추가), 주부, 우태, (승), 사자, 조의, 선인으로 서열화하고, 대가와 주부는 책을 착용한 반면, 소가는 절풍을 착용하는 형태로 관등 소지자 간에 신분적 차별이 고착화되었다(사료2).
그렇지만 3세기 중반에도 대가와 주부는 명확히 구별되었다. 그리고 나부 출신 인물이 주로 패자, 우태, 조의 등을 보유한 반면,주 049
각주 049)
표 1에서 보듯이 나부를 관칭하면서 사자계 관등이나 주부를 보유한 인물은 차대왕 2년 우태에서 대주부로 승격한 환나부 어지류가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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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위부 출신 인물은 사자계 관등이나 주부를 보유했다. 3세기 중반에도 각 관등의 연원적 차별성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은 가운데 점차 관등제의 서열화가 이루어져 나간 것이다. 그러므로 대가와 소가라는 신분적 차별도 여전히 중앙정계에서의 정치적 지위보다는 나부 내부의 세력기반이 더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했다고 여겨진다. 3세기 전반에 사출도를 별도로 거느린 부여의 제가(諸加)가 수천 가(家)를 거느린 대가(大加)와 수백 가를 거느린 소가(小加)로 구분된 사실은 이를 반영한다.
다만 계루부 왕권이 강화되는 가운데 나부의 우열이 심화됨에 따라 나부 지배세력의 신분적 지위도 새롭게 재조정되었다. 계루부 왕실을 비롯하여 세력을 꾸준히 확대한 연나부나 비류나부 등의 대가는 고추가를 계속 칭하면서 종래의 신분을 유지했지만, 세력이 미미해진 관나부나 환나부의 대가들은 고추가를 칭하지 못할 정도로 최상위 신분층에서 탈락했다(사료1) . 이러한 추세 속에서 왕권을 뒷받침하면서 성장한 주부 계통의 인물이 대가(大加)와 동일한 책을 착용할 정도로 최상위 신분층으로 격상되었다. 초기 관등제를 구성하던 각 관등의 연원적 차별성이 소멸하면서 초기의 다원적 관등제가 점차 국왕 중심의 일원적 관등제로 전환되어 나간 것이다.주 050
각주 050)
이에 3세기 관등제를 나부계와 방위부계로 재분류하고 이들의 분화양상 및 서열화 과정을 검토한 연구성과가 제시되었다(林起煥, 1995a; 2004). 또 고구려 초기사의 전개에 따라 각 관등의 성격이나 위상이 변모하는 양상을 다각도로 검토한 연구도 제시되었다(김두진, 2009; 조영광,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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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같이 초기 관등제는 나부의 내부구조 및 계루부 왕권과 나부의 역관계를 바탕으로 성립되었다. 이로 인해 초기 관등제는 다원적인 구성양상을 띠었고, 관직적 성격이 혼재되어 있었는데, 계루부 왕권의 집권력과 나부의 자치권을 중심으로 운영되던 초기 정치체제의 구조를 잘 보여준다. 그럼 다음에서는 계루부 출신 국왕과 각 나부의 지배 세력이 정치체제를 운영하던 양상을 주요 정치기구를 통해 살펴보도록 하자.

  • 각주 020)
    『삼국사기』 고구려본기1 동명왕 2년 6월조. 바로가기
  • 각주 021)
    『삼국사기』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5년 7월조. 바로가기
  • 각주 022)
    김광수, 1983b, 962쪽의 도표 및 여호규, 2014, 205쪽의 표 4-1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23)
    귀족의 성씨록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상정하기도 한다(김기흥, 1996). 바로가기
  • 각주 024)
    승(丞)은 제1현도군 시기의 군현 속리에서 연원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權五重, 1992), 오기라고 파악하기도 한다(金哲埈, 1975). 바로가기
  • 각주 025)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3 차대왕 2년조, 제4 신대왕 2년조, 제5 봉상왕 3년조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26)
    『삼국지』 권30 동이전 부여전, “諸加別主四出道, 大者數千家, 小者數百家. … 有敵, 諸加自戰, 下戶俱擔糧飮食之.” 바로가기
  • 각주 027)
    각 나부의 장(長)이나 대가(大加)는 세습직이기 때문에 별도의 관등을 수여받지 않았다고 보기도 하는데, 이 경우 패자는 대가보다 낮은 실무자가 수여받던 관등으로 주로 군사업무에 종사했다고 파악한다(노태돈, 1999). 바로가기
  • 각주 028)
    패자의 사례는 서천왕 2년(271년)이 마지막이고, 중·후기 금석문에도 나오지 않는다. 이에 비해 대로는 중·후기에도 다수 확인되며, 대대로는 후기의 최고위 관등이었다. 이로 보아 패자와 대로를 교치했다는 『삼국지』 고구려전의 기사는 패자가 대로로 전환하던 양상을 반영한다고 파악된다. 중·후기에 대로는 주로 군사지휘관이나 군사고문관 역할을 수행했는데, 패자의 군사지휘관적 성격을 계승했을 가능성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29)
    『삼국사기』 고구려본기3 태조왕 16년 3월조. 바로가기
  • 각주 030)
    『삼국사기』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5년. 바로가기
  • 각주 031)
    가장 이른 시기의 우태 사례가 부여계 인물과 연관된 점에 주목하여 본래 부여계 집단의 위호(位號)였다고 파악하기도 한다(장병진, 2019). 바로가기
  • 각주 032)
    『삼국사기』 고구려본기3 차대왕 2년 2월조. 바로가기
  • 각주 033)
    『삼국사기』 고구려본기3 차대왕 20년 및 제4 신대왕 2년. 바로가기
  • 각주 034)
    주몽이 남하하다가 만난 모둔곡(毛屯谷) 세 명은 마의(麻衣), 납의(衲衣), 수조의(水藻衣) 등 ‘의(衣)’ 종류에 따라 표현되고 있다. 이는 곡 내부의 세력집단을 ‘의(衣)’ 종류에 따라 지칭한 관습이 있었음을 시사하는데, ‘조의(皂衣)’라는 명칭은 이러한 관습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35)
    조의는 4세기 이후 일원적 관등제의 정비와 함께 독자적 기능을 상실하고, 제5위인 위두대형(位頭大兄)의 별명인 조의두대형(皂衣頭大兄)에 그 흔적만 남게 되었다. 이에 일원적 관등제 성립 이후 조의가 곧바로 소멸하지 않고, 일정 기간 유지되다가 형계 관등에 흡수되었다고 보기도 한다(조영광, 2015). 바로가기
  • 각주 036)
    『삼국사기』 고구려본기3 태조왕 즉위년조. 바로가기
  • 각주 037)
    『삼국지』 권30 동이전 고구려전, “拔奇遂往遼東, 有子留句麗國, 今古鄒加駮位居, 是也.” 바로가기
  • 각주 038)
    『삼국사기』 고구려본기5 미천왕 즉위년조. 바로가기
  • 각주 039)
    『삼국사기』 고구려본기3 태조왕 22년. 바로가기
  • 각주 040)
    고추가의 성격을 씨족장(이기백, 1974), 대부족장이 귀족화한 것(김철준, 1975), 특권적 집단의 족장(노중국, 1979a), 왕에 해당하는 원고구려 지역의 고유어(조영광, 2015), 중앙귀족화한 국읍(國邑) 주수(主帥)를 우대하며 사여한 칭호(장병진, 2019)로 이해하기도 한다. 바로가기
  • 각주 041)
    3세기 이후 고추가는 왕실의 구성원에게 사여한 사례만 확인되는데, 왕족이지만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에 고추가의 성격을 왕족을 예우하기 위한 관위로 보거나(금경숙, 1995a; 2004), 집권체제 정비와 더불어 고추가의 수여 대상이 왕실 구성원으로 한정되었고(임기환, 1995b; 2004; 장병진, 2019), 특히 계루부 내의 유력세력을 편제하기 위해 근친 왕족에 대한 봉작으로 그 성격이 변했다고 보기도 한다(조영광, 2015). 다만 고구려 후기에는 발고추가(拔古鄒加)가 빈객(賓客)을 담당하는 관직인데, 태대사자(太大使者, 大夫使者)가 맡았다고 한다. 이는 3세기 중반 이후에도 고추가의 수여 대상이 왕족으로 한정되지 않았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바로가기
  • 각주 042)
    주부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초기 기사에서는 ‘대주부’, 5세기 중·후반의 〈충주고구려비〉에서는 ‘주부’로 나온다. 이에 대주부를 주부에서 분화한 상위 관등으로 상정하거나(임기환, 2004; 琴京淑, 2004), 대주부와 대로를 같은 관등으로 보기도 한다(조영광, 2015; 이준성, 2019). 또 최근에는 『삼국사기』의 대주부와 『삼국지』의 주부는 동일한 것이지만, 〈충주고구려비〉가 세워진 5세기에는 대주부와 주부로 분화되었다고 보기도 한다(이규호, 2021). 그렇지만 주부가 주부와 대주부로 분화했다고 보기는 힘들며, 양자는 같은 관등을 사서에 따라 다르게 표현한 것으로 파악된다. 바로가기
  • 각주 043)
    『삼국사기』 고구려본기3 태조대왕 80년 및 차대왕 2년, 제5 봉상왕 3년조. 바로가기
  • 각주 044)
    어지류와 미유는 모두 좌보에 임명되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각각 좌보와 우보에 임명되었을 것이다. 바로가기
  • 각주 045)
    『삼국지』 부여전에 대사(大使)·대사자(大使者)·사자 (使者) 등이 나오는 것을 근거로 고구려가 부여의 영향을 받아 사자를 설치했다고 보기도 한다(武田幸男, 1989). 바로가기
  • 각주 046)
    고국천왕 13년에 대사자를 수여받은 안유(晏留), 동천왕 20년 구사자와 대사자를 수여받은 유유(紐由)·다우 (多優) 부자, 서천왕 2년 왕의 장인이 된 우수(于漱), 봉상왕 3년 국상에 임명된 창조리 등은 모두 방위부 출신이다. 바로가기
  • 각주 047)
    왕권 아래의 중앙관등으로 두어진 사자·조의·선인은 대가가 자치한 사자·조의·선인과 달리 고위 지배층이었다고 보기도 한다(임기환, 2004). 바로가기
  • 각주 048)
    최근 고구려 초기 관제가 다원적으로 구성되었다고 보면서 통치를 위한 조직인 ‘관(官)’과 세습이나 포상의 성격으로 주어지는 ‘작(爵)’으로 대별한 다음, 관을 다시 하위단위인 ‘부(部)’를 담당하는 사자, 조의, 선인 및 상위단위인 고구려를 담당하는 패자, 주부, 우태로 구분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다(이규호, 2021). 바로가기
  • 각주 049)
    표 1에서 보듯이 나부를 관칭하면서 사자계 관등이나 주부를 보유한 인물은 차대왕 2년 우태에서 대주부로 승격한 환나부 어지류가 유일하다. 바로가기
  • 각주 050)
    이에 3세기 관등제를 나부계와 방위부계로 재분류하고 이들의 분화양상 및 서열화 과정을 검토한 연구성과가 제시되었다(林起煥, 1995a; 2004). 또 고구려 초기사의 전개에 따라 각 관등의 성격이나 위상이 변모하는 양상을 다각도로 검토한 연구도 제시되었다(김두진, 2009; 조영광, 2011).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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