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왕권의 위상과 제가회의의 변천
3. 왕권의 위상과 제가회의의 변천
고구려 초기 정치체제와 관련하여 일찍부터 회의체인 제가회의, 최고위 관직인 좌보, 우보, 국상 등이 많은 주목을 받았다. 다만 전술했듯이 초기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정치체제의 운영양상도 다르게 이해했다. 나부체제론자는 나부의 자치권을 중시하며 제가회의를 가장 중요한 정치기구로 설정하고, 좌·우보나 국상 등은 이를 보완하는 제도로 이해했다.주 051
이에 비해 집권체제론자는 왕권의 확립과 집권화를 강조하며 국왕 중심의 행정적·관료적 정치기구가 일찍부터 정비되었다고 이해했다. 이에 제가회의는 설정하지 않거나 제한된 기능만 수행한 것으로 이해했다. 핵심 정치기구는 제가회의가 아니라 왕 직속의 군신회의나 최고위 관직인 좌·우보, 국상 등이었다는 것이다.주 052
그런데 앞서 검토했듯이 초기 정치체제는 계루부 왕권의 집권력과 나부의 자치권을 두 축으로 삼아 성립되었다. 초기 정치체제의 운영양상은 계루부 왕권의 집권력과 각 나부의 자치권을 동시에 고려하면서 고찰할 필요가 있다. 특히 계루부 왕권의 집권력이 강화됨과 더불어 주요 정치기구의 성격도 변화했을 것이다. 초기 정치체제의 운영이나 주요 정치기구의 성격을 보다 역동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전근대 왕조국가에서 국가체제의 성립은 일반적으로 왕권의 확립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전근대 국가체제의 성격이나 정치운영 양상을 이해하려면 먼저 왕권의 위상을 검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왕권의 위상과 그 성격은 왕위계승원리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종래 한국 고대의 왕위계승은 형제계승에서 부자계승으로 전환한 것으로 이해했으며, 부자계승의 확립을 고대국가의 중요한 지표로 삼았다(이기백, 1959; 1996).
그런데 현전하는 사료만 놓고 본다면 고구려 초기의 왕위계승원리가 형제계승에서 부자계승으로 전환했다고 단정하기 쉽지 않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기사를 종합하면, 1~5대(동명성왕~모본왕)는 부자 계승, 6~10대(태조왕~산상왕)는 형제계승, 11대(동천왕) 이후는 부자 계승의 면모가 확인되기 때문이다. 이에 따른다면 고구려 초기 왕위계승원리는 당초 부자계승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고대의 왕위계승이 형제계승에서 부자계승으로 전환했다는 일반론과 상충되는 것이다.
이에 일본 학자들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초기 기사를 불신하며 9대 고국천왕까지는 실재한 왕계가 아니라고 보기도 했다(津田左右吉, 1922; 白鳥庫吉, 1936; 池內宏, 1940; 1941; 三品彰英, 1951). 그렇지만 6~8대 태조왕·차대왕·신대왕의 존재는 중국 측 사서에서도 확인되며, 1~5대 왕계도 늦어도 4세기 후반에는 정립된 것으로 파악된다(鄭早苗, 1979; 조인성, 1991; 노태돈, 1994; 高寬敏, 1996; 임기환, 2002; 김기흥, 2005). 『삼국사기』의 초기 왕계는 실재한 것이며, 사료적 근거도 있는 것이다.
이에 고구려의 왕위계승원리가 처음부터 부자계승이었다고 보기도 한다(김광수, 1986; 최재석, 1987; 박노석, 2005). 그런데 이렇게 볼 경우, 6~10대의 왕위계승원리가 형제계승이라는 사실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고구려 초기 왕계는 6대 이후의 태조왕계가 먼저 성립된 다음, 1~5대 왕계는 4세기 후반에 정립된 것으로 이해한다(조인성, 1991; 노태돈, 1994).주 053 『위서(魏書)』 고구려전에는 『삼국사기』의 1~5대 왕계와 조금 다른 초기 왕계가 전하는데, 5세기 초에도 고구려 내부에 여러 가지 초기 왕계가 전승된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1~5대 왕위계승에 나타난 부자계승의 면모는 4세기 후반에 초기 왕계를 정립하면서 윤색된 결과로 보인다. 다만 1~5대 왕계가 자체 전승을 바탕으로 정립되었다고 파악되므로 아무 근거 없이 윤색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1~5대 왕들의 계보 관계 기사를 종합하면, 각 왕 사이에는 혈연적인 부자 관계로 보기 힘든 요소가 다수 확인된다.주 054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1~5대의 왕위계승이 부자계승으로 기술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다른 방식으로 왕위계승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고대 일본에서는 부계적 계보 관념이 확립되기 이전에는 부계와 모계 쌍방을 균등하게 표시했고, 비혈연자가 수장권(왕위)을 계승한 경우에도 전임자와의 관계를 ‘아들(子, 兒)’ 곧 부자 관계로 기술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義江明子, 2000). 고구려도 혈연적 계승원리가 확립되기 이전에는 비혈연적인 방식으로 수장권(왕위)을 계승했을 텐데, 이들의 계보는 고대 일본의 사례처럼 마치 부자 관계인 것처럼 기술했을 것이다. 『위서』 고구려전에 주몽, 시려해(始閭諧: 閭達), 여율(如栗), 막래(莫來) 등이 모두 전왕의 ‘아들(子)’로 기술된 사실은 이러한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로 보아 1~5대 왕의 부자계승적 면모는 비혈연적인 지위 계승 계보를 부계적 계보 관념에 입각하여 재정리한 결과로 파악된다. 초기 다섯 왕의 왕위계승은 부자계승이 아니라 비혈연적 계승원리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이와 관련해 2대 유리명왕이나 3대 대무신왕이 태자 책봉 이전에 신이한 능력이나 군사지휘력 등 왕자(王者)로서의 자질을 발휘한 사실이 주목된다. 초창기 왕위계승에서는 전왕과의 혈연관계보다 왕자로서의 자질이 더 중시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초창기의 왕위계승원리는 영웅적 왕자관에 입각한 비혈연적 계승원리였다고 파악된다(여호규, 2010; 2014).
비혈연적 계승원리는 계루집단이 국가체제를 확립하기 이전에 다른 정치체와의 각축전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탁월한 능력을 소지한 영웅적인 존재를 수장(왕)으로 옹립하는 과정에서 성립했다고 추정된다. 이로 인해 초기 왕들은 왕자로서의 자질을 상실하면 쫓겨날 수 있었고, 왕위계승 후보자로 선정되었더라도 자질이 불충분한 것으로 판명되면 그 지위를 박탈당하기도 했다. 제5대 모본왕이 신하에 의해 시해되거나 제2대 유리명왕 시기에 태자 여러 명이 죽임을 당한 사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
다음으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6대 태조대왕, 7대 차대왕, 8대 신대왕은 친형제 관계로 기술되어 있다. 그렇지만 세 왕의 재위 기간을 합치면 127년이나 되고, 태조대왕과 신대왕의 나이 차는 42세에 이른다. 이들 세 왕을 친형제로 보기는 힘든 것이다. 이에 중국 측 사서에 입각하여 세 왕을 부자 관계로 설정하거나(이도학, 1992; 朴燦奎, 2000) 수명을 줄여서 조정하기도 한다(김기흥, 2005). 또 태조왕과 차대왕은 친형제이지만, 차대왕과 신대왕은 친형제가 아닌 가까운 친척이라고 보기도 한다(노태돈, 1994; 1999).
물론 이들 세 왕의 계보나 나이는 완전히 신빙하기 힘들다. 다만 일정한 기준이나 원칙 없이 계보, 재위 기간, 연령 등을 임의로 재조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들의 왕위계승과 관련한 제반 기록을 현전하는 그대로 믿기는 힘들지만, 전승하는 핵심 내용과 주요 특징을 존중하면서 논의를 진행할 필요가 있다. 전후 왕들과 비교했을 때 세 왕의 가장 큰 특징은 모두 장수했고, 형제 관계로 설정된 점이다. 특히 차대왕과 신대왕은 고령에 즉위했다는 점이 중요한 특징이다.
세 왕의 재위 기간이나 나이를 종합하면 친형제로 보기는 힘들다. 다만 ‘형제’라는 계보상의 핵심 내용은 무시할 수 없다. 이러한 형제 관계는 자체 전승을 토대로 설정된 것인 만큼(鄭早苗, 1979), 친형제는 아니어도 적어도 방계 형제 관계였기 때문에 이러한 전승이 생겨났다고 추정된다. 세 왕이 방계 형제였다면 태조왕이 50여 년 이상 재위한 다음, 차대왕과 신대왕이 순차적으로 즉위했으므로 모두 고령에 즉위한 ‘할아버지 왕’이었다고 파악된다(이도학, 1992; 김기흥, 2005).
특히 세 왕의 즉위년조에는 모두 연령이 기재되어 있는데, 시조 동명성왕을 제외하면 이러한 사례가 없다는 점에서 매우 이례적이다. 이는 세 왕이 즉위할 때는 연령이 중시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즉위 시의 연령을 중시하는 양상은 주로 연령을 기준으로 특정 세대가 왕위를 계승하다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는 세대계승원리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차대왕이나 신대왕이 고령에 즉위한 것은 세대계승원리와 연관된다고 파악된다. 다음 세대가 일정 연령에 도달할 때까지 그전 세대가 왕위를 계승한 결과, 또는 한 세대의 왕위계승 후보자가 모두 사라질 때까지 특정 세대가 왕위를 계승한 결과 차대왕이나 신대왕이 고령의 나이에 즉위했다고 파악된다.
따라서 태조왕, 차대왕, 신대왕은 동일 세대에 속한 방계 형제로 세대 계승원리에 입각하여 왕위를 승계했다고 파악된다. 이러한 세대계승원리는 방계라 할지라도 형제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혈족 사이에 이루어졌다. 혈연관계를 설정할 수 있는 특정한 집단 내부에서 왕위가 계승되었다는 점에서 종전의 비혈연적 계승원리와 구별되며, 왕위계승 후보자의 범위도 크게 축소되었을 것이다. 세대계승원리는 기본적으로 혈연적 계승원리로서 계루부 내에서도 특정 혈연집단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고 추정된다.
이러한 세대계승원리는 국가체제의 확립과 더불어 계루부의 여러 소혈연집단을 포괄하여 왕위를 계승하는 과정에서 성립되었다. 이에 따라 각 소혈연집단 대표자(大加)의 정치적 역량이 중요해졌다. 이들은 정치적 기반을 확장하고 왕위계승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각 나부의 지배세력과 다양한 관계를 맺었다. 그리하여 실제 왕위계승은 계루부의 소혈연집단이 특정 나부와 결탁하는 복잡한 정쟁의 양상을 띠었다. 차대왕이 관나부, 환나부, 비류나부 등과 결탁해 왕위에 오르고, 신대왕이 연나부의 도움을 받아 즉위한 사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여호규, 2010; 2014).
6~8대 왕의 세대계승원리는 9대 고국천왕, 10대 산상왕대에 동일 세대의 횡적 폭을 축소하면서 형제계승으로 변형되었다가, 11대 동천왕 이후에는 부자계승으로 전환되었다. 부자계승으로의 전환은 나부 체제가 점차 해체되고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로 전환되는 양상과 맞물려 진행되었다. 다만 3세기 중·후반에는 나부체제가 완전히 해체되지 않았고, 세대계승이나 형제계승의 전통도 잔존했기 때문에 현왕의 형제나 숙부를 살해해 직계 후손의 왕위계승을 위협할 만한 요소를 제거했다(여호규, 2010; 2014).
이처럼 고구려 초기의 왕위계승은 비혈연적 계승원리에서 세대계승 원리를 거쳐 부자계승원리로 전환되었다. 왕위계승원리가 자주 바뀐 것인데, 초기 정치체제의 전개양상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가령 비혈연적 계승원리가 계루집단이 맹주권을 장악하며 국가체제를 확립하던 과정과 연관된다면, 세대계승원리는 나부체제의 운영, 부자계승원리로의 전환은 중앙집권체제의 성립 등과 각기 연관되어 있다.
전반적으로 왕위계승원리가 비혈연적 계승에서 부자계승으로 전환하며, 게루부 왕권의 위상이 더욱 안정되고 강화된 것이다. 비혈연적 계승원리 단계에서는 왕위계승 후보자를 예측하기 힘들고 왕권의 위상도 불안정했다.주 055 이에 비해 나부체제의 확립과 더불어 세대계승원리로 전환하면서 왕위계승 후보자가 계루부 내부의 특정 혈연집단으로 한정되었다. 또 현왕은 각 나부에 대한 통제력을 확실하게 확보하면 왕권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행사할 수 있었다.
다만 차기 왕위계승권자가 계루부의 여러 소혈연집단의 역관계 특히 각 나부와의 정치적 결탁에 의해 결정되었기 때문에 현왕이 속한 소혈연집단의 정치적 기반이 약화되면 왕권도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왕권이 강화될수록 왕위계승 후보자의 범위를 축소하는 방향으로 왕위계승원리가 변화했다. 그리하여 2세기 말 이후 세대계승원리가 형제계승원리로 축소되었다가, 최종적으로 부자계승원리로 전환되었다.
이처럼 고구려 초기에는 왕위계승원리의 전환과 더불어 왕권의 위상이 크게 변화했다. 왕권의 위상 변화는 정치체제의 운영이나 주요 정치기구의 성격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로 인해 같은 정치기구라 하더라도 그 성격이나 운영양상이 여러 차례 변모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사료 2에 제시한 『삼국지』 고구려전의 10개 관명 가운데 가장 서두에 기재된 상가는 이러한 면모를 잘 보여준다.
지금까지 상가의 성격에 대해서는 아주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1960년대까지는 상가의 ‘상(相)’을 ‘이끌다(導·贊)’로 풀이해 ‘여러 족장(諸加)’을 이끄는 부족장으로 파악했다(김철준, 1956; 1975). 1970년대 이후 이 견해를 바탕으로 상가를 ‘가를 이끄는 자’로 풀이하면서도 제가회의의 의장이자 최고위 관직인 국상(國相)으로 파악한 견해가 제기되었다(노중국, 1979a; 1979b). 상가를 최고위 관직인 국상으로 파악하면서 제가회의 의장으로 보아 ‘가(加)’라는 재지적(족장적) 기반을 강조한 것인데, 나부체제론자들이 널리 수용했다(임기환, 1995a; 김현숙, 1995; 윤성룡, 1997).주 056
이에 대해 집권체제론자들이 다양한 반론을 제기했다. 먼저 상가라는 단어를 ‘상(相)’과 ‘가(加)’로 분리하여 ‘상(相)’은 군신회의의 장인 국상, ‘가(加)’는 토착적 지배세력으로 파악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국상은 군신회의의 의장으로 ‘왕권 수호에 앞장선 백관지상(百官之上)’이라는 것이다(이종욱, 1982a). 또 상가와 국상을 별개의 관명으로 파악한 다음, 국상을 국정을 총괄하는 수상(김광수, 1983a; 1991)이나 최고위 관직(금경숙, 1994; 2004)으로 보기도 했다. 국상을 군신회의의 의장이나 국정 총괄직으로 보아 왕권 강화와 집권체제의 확립을 강조한 것이다.
그럼 상가의 성격은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까? 전술했듯이 『삼국지』고구려전의 관명은 서열순으로 기재되었으므로 가장 서두의 상가는 최고위 관명으로 보아야 한다. 10개 관명 가운데 상가, 고추가, 승을 제외하면 모두 관등이며, 상가 다음의 대로·패자와 (대)주부는 최고위 관등으로 확인된다. 상가가 관등일 가능성은 희박한 것이다. 3세기의 최고위 관직은 국상이었는데, 모두 패자·대주부 등 최고위 관등을 소지했다(표 6). 그러므로 상가는 최고위 관직인 국상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종래 집권체제론자들은 상가와 국상을 구별한 다음, 상가는 재지적 기반을 가진 ‘가(加)’적 존재이므로 왕권을 뒷받침한 국상과 동일시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런데 3세기 중반에 고구려 지배층은 나부의 지배세력, 도성에 거주하는 방위부 세력, 중앙귀족으로 전환하던 세력 등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었는데(여호규, 1995), 『삼국지』 고구려전에서는 이들을 ‘가(加)’라고 통칭했다. ‘가’는 본래 재지적 기반을 지닌 수장층(족장층)을 일컫는 용어였지만, 3세기 중반에는 중앙귀족을 포함해 지배세력 일반에 대한 범칭으로 사용된 것이다.
그런데 ‘국상=상가’설은 ‘가(加)’가 족장적 기반을 반영한다는 점에 주목하여 상가를 ‘가(加)를 이끄는(相) 자’ 곧 제가회의 의장으로 파악했다. 그렇지만 상가의 가는 3세기 중반에 지배세력에 대한 범칭으로 사용되었으므로 수장층(족장층)만 의미한다고 볼 수 없다. 특히 고추가, 대가, 소가, 제가의 용례에서 ‘고추(古鄒), 대(大), 소(小), 제(諸)’는 모두 ‘가(加)’를 수식하는 역할을 한다. 상가의 ‘상(相)’도 ‘이끌다’는 동사적 용법보다 ‘가’를 수식하는 형용사적 용법으로 쓰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상가는 ‘상(相)이라는 관직을 지닌 가(加)’ 즉 ‘국상인 가(加)’로 풀이할 수 있다.
3세기 중반에 최고위 관등을 소지한 인물은 여럿 존재했겠지만, 최고위 관직인 국상은 한 명이었을 것이다. 이에 중국인들이 관직과 관등을 구분하지 않고, 국상을 대로·패자보다 상위 관명으로 파악해 가장 서두에 기재했다고 생각된다. 이처럼 상가를 ‘국상인 가’로 풀이하면 종전의 ‘상가=국상’설처럼 국상을 곧바로 제가회의의 의장으로 상정하기 힘들다. 더욱이 후술하듯이 제가회의의 운영양상을 서술한 사료4에는 제가평의(諸加評議)의 주재자가 별도로 나오지 않는다. 만약 3세기 중반에 제가평의의 주재자가 상가였다면, 『삼국지』 찬자가 패자·대로·고추가를 상세하게 기술한 것처럼 상가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서술했을 것이다.
이처럼 상가는 3세기 중반에 최고위 관직이었던 국상으로 파악되지만, 제가회의의 의장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상가라는 관명에 ‘가(加)’라는 표현이 포함되어 있지만, 이를 근거로 족장적 기반을 반영한다고 단정할 수 없다. 상가라는 관명은 초기 정치기구의 가(加)적인 기반 및 왕권과의 관계가 시기에 따라 변화했음을 잘 보여준다. 이는 각 나부의 자치권과 계루부 왕권의 집권력 가운데 특정 측면을 중심으로 초기 정치체제를 이해하던 기존 견해를 재검토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그러므로 나부체제론자가 가장 중시하는 제가회의의 성격도 시기에 따라 변모했을 것이다. 다음 사료는 3세기 중반경 제가회의의 존재양태를 잘 보여준다.
사료 4
10월에 하늘에 제사지내며 도성에서 큰 대회를 여는데(國中大會) 이름을 ‘동맹(東盟)’이라 부른다. 그 공회(公會) 시의 복장은 모두 화려하고 수놓은 비단과 금은으로 스스로 장식한다. 대가(大加)와 주부는 머리에 책을 착용하는데 [중국의] 책과 같지만 드리운 부분이 없다. 소가(小加)는 절풍을 착용하는데 모양이 고깔과 같다. 도성 동쪽에 큰 동굴이 있는데, 수혈(隧穴)이라고 부른다. 10월 국중대회 때에 수신(隧神)을 맞이하여 도성 동쪽으로 돌아와 제사 지내는데, 신주의 자리에 나무로 만든 수신의 신상(木隧)을 둔다. 감옥(牢獄)이 없어서 죄수가 발생하면 여러 가(諸加)가 잘잘못을 논의하여 곧 죽이고, 처자의 호적을 몰수하여 노비로 삼는다. _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전
10월에 하늘에 제사지내며 도성에서 큰 대회를 여는데(國中大會) 이름을 ‘동맹(東盟)’이라 부른다. 그 공회(公會) 시의 복장은 모두 화려하고 수놓은 비단과 금은으로 스스로 장식한다. 대가(大加)와 주부는 머리에 책을 착용하는데 [중국의] 책과 같지만 드리운 부분이 없다. 소가(小加)는 절풍을 착용하는데 모양이 고깔과 같다. 도성 동쪽에 큰 동굴이 있는데, 수혈(隧穴)이라고 부른다. 10월 국중대회 때에 수신(隧神)을 맞이하여 도성 동쪽으로 돌아와 제사 지내는데, 신주의 자리에 나무로 만든 수신의 신상(木隧)을 둔다. 감옥(牢獄)이 없어서 죄수가 발생하면 여러 가(諸加)가 잘잘못을 논의하여 곧 죽이고, 처자의 호적을 몰수하여 노비로 삼는다. _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전
위 사료는 매년 10월 도성에서 개최하는 국중대회를 서술한 다음,주 057 그에 이어 죄수가 발생하면 여러 가(諸加)가 잘잘못을 논의하여 처결한다고 기술했다. 문맥상 제가회의는 국중대회 시기가 아니라 죄인이 발생할 때마다 수시로 개최했다는 것이다. 3세기 중반경 죄수의 죄를 평결하는 제가회의는 국중대회 때에만 열린 정기회의가 아니라, 상설 회의적 면모가 강했던 것이다. 상기 기사만 놓고 본다면 제가회의와 국중대회는 별다른 관계가 없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삼국지』 찬자는 왜 제가회의를 국중대회 다음에 기술했을까? 이와 관련하여 3세기 중반경 부여의 국중대회에서 형옥 관련 안건을 처리한 사실이 주목된다.주 058 당시 부여의 지배세력도 제가(諸加)였는데, 국중대회의 주요 참가층으로 제가회의를 개최해 형옥 관련 안건을 처결했다(이기백, 1997). 이로 보아 고구려도 본래 국중대회 시기에 제가회의를 개최하여 형옥 관련 안건을 처리했다고 추정된다. 이에 『삼국지』 찬자가 국중대회 말미에 제가회의를 기술했다고 파악된다. 고구려의 제가회의는 본래 정기회의였는데, 3세기 중반에 상설회의로 변모한 것이다.
부여의 경우, 왕권이 확립되기 이전에는 한 해의 풍흉에 따라 왕을 교체하거나 살해했다고 한다.주 059 풍흉이 결정되는 시기에 왕의 치폐를 결정했다면, 제천행사 때 회의를 통해 의결했다고 추정된다. 이때 회의체의 구성원은 제천행사에 참가한 지배세력 곧 후대의 제가(諸加)였을 것이다. 왕권이 확립되기 이전 부여에서는 제천행사 시의 회의체를 통해 왕의 치폐 등 중대사를 의결한 것인데, 이는 국가체제 성립 이후에도 상당 기간 지속되었다. 실제 부여는 3세기 중반에도 제천행사 시의 제가회의에서 형옥 등 국가 중대사를 처리했다. 특히 3세기 전반 제가들이 마여(麻余)를 왕으로 공립(共立)한 데서 보듯이주 060 제가회의를 통해 국가 중대사를 의결했다.
이러한 양상은 고구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앞서 검토한 것처럼 국가체제 확립 이전에 계루집단의 왕위(수장위)는 영웅적 왕자관에 입각한 비혈연적 계승원리로 승계되었다. 이에 따라 차기 왕위계승 후보자는 주요 집단구성원이 참여하는 회의체를 통해 결정했을 것이다. 이때 영웅적 왕자(王者)로서의 자질을 상실한 현왕이나 왕위계승 후보자에 대한 치폐를 결정하기도 했을 것이다.
부여와 마찬가지로 제천행사 시의 회의체에서 중대사를 의결하는 전통은 국가체제 확립 이후에도 지속되었을 것이다. 다만 국가체제 확립에 따라 제천행사는 점차 계루부 왕권을 중심으로 재편되었을 것이다. 국중대회의 ‘국(國)’은 계루부의 정치적 중심지인 국도(國都)를 일컫는데, ‘도성에서 열린 큰 모임’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국중대회라는 용어는 고구려를 구성하는 각 집단의 제의체계가 계루부 왕권을 중심으로 통합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에 따라 10월 제천행사는 점차 계루부 왕권의 영도력을 인정하는 대회로 전환되었다.
한편 흉노의 경우 1년에 제천행사를 3회 개최했는데, 5월과 9월의 집회는 전통적인 종교의례에서 유래했지만, 정월 집회는 중국 왕조의 정월 조회(朝會)제도를 받아들인 것이라고 한다(江上波夫, 1948). 신라도 6부 대표자들이 정월에 회의를 개최하여 국가 중대사를 의결하던 양상이 확인된다(李文基, 1989; 나희라, 1990). 이로 보아 고구려도 국중대회 이외에 정월에도 회의체를 개최하여 국가 중대사를 의결했을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삼국지』 고구려전의 책구루 관련 기사가 주목된다. 그에 따르면 고구려가 제2현도군에 오지 않자, 현도군이 “동쪽 경계에 책구루라 불린 작은 성곽을 쌓아 조복과 의책을 두면 고구려가 세시(歲時)에 가져 갔다”고 한다. 이 기사는 계루부 왕권이 여러 정치체의 대외교섭권을 일원화하여 국가체제를 확립했음을 보여주는데(노태돈, 1975), ‘세시’는 사시(四時)를 뜻한다. 한나라가 주변국과 하정월(賀正月)의 형태로 외교관계를 맺었으므로 사시 가운데 적어도 정월에는 조복과 의책을 두었을 것이다.
이에 고구려는 책구루에서 조복과 의책을 가져온 다음, 각 나부의 대표를 비롯한 제가(諸加)에게 나누어 주었을 것이다. 이때 계루부 출신 왕이 주재하는 의식을 거행하고, 각 나부의 대표를 비롯한 제가들이 참여하는 제가회의를 개최했을 것이다. 10월의 제천행사에서 분리된 제가회의가 연초(年初)를 비롯한 사시(四時)에 개최된 것이다. 이 제가회의는 책구루로 일원화된 대외교섭권을 바탕으로 개최되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계루부 왕권의 영도력을 확인하는 성격을 띠었을 것이다.
이로써 10월 국중대회의 제가회의는 연초를 비롯한 사시의 제가회의와 함께 계루부 왕권의 주도 아래 국가중대사를 논의·결정하는 의결기구로 전환되었다. 다만 국가체제의 확립과 더불어 왕위계승원리가 세대계승원리로 전환되었기 때문에 현왕의 치폐나 차기 왕위계승 후보자를 결정하던 권한은 행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국가 중대사는 정기적인 제가회의를 통해 의결했을 것이다. 제가회의가 국가 중대사를 의결하는 가장 중요한 정치기구로 성립된 것이다.
신라의 경우 6부의 우열이 심화되기 이전에는 각 부의 대표자인 간지(干支)들이 국왕과 함께 회의체에 참여하여 국가 중대사를 의결했다고 파악된다(전덕재, 1996). 이로 보아 고구려의 제가회의도 본래 각 나부의 대표들이 고르게 참여하는 형태로 운영되었다고 생각된다. 2세기 중반경 차대왕의 즉위나 시해 과정에는 관나부, 환나부, 비류나부, 연나부 등의 인물이 고르게 참여하고 있는데,주 061 각 나부가 비교적 고르게 중앙정치에 참여했음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제가회의에도 각 나부의 대표들이 고르게 참여하여 동등한 발언권과 의결권을 행사했다고 파악된다.
이처럼 제가회의는 각 나부의 대표자들이 고르게 참여하여 비교적 동등한 발언권과 의결권을 행사한 정기회의체였다. 계루부 왕권이 회의를 주재하였지만, 각 나부의 대표들은 제가회의를 통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할 수 있었다. 계루부 왕권도 제가회의에서 각 나부의 이해관계를 수렴하고 동의를 얻는 형태로 국가 중대사를 결정함으로써 영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제가회의는 계루부 왕권의 주도 아래 각 나부의 이해관계를 수렴하고 국가 중대사를 의결하던 최고의결기구였던 것이다.
이처럼 각 나부의 대표자들은 정기 제가회의에 참여하는 형태로 중앙정치에 간여했다. 그 밖에 긴급한 국가 중대사가 발생했을 경우, 임시 제가회의를 개최하여 안건을 처리했겠지만, 평상시의 일상 업무는 다른 방식으로 처리했을 것이다. 표 4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회의 관련 기사를 정리한 것이다. 왕이 참석하기 힘든 경우를 제외하면 회의 주재자는 왕, 참여자는 군신(群臣)으로 기재되었는데, 좌·우보(e)나 국상(i·k·m)을 제외하면 회의 참석자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힘든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만 f·g는 태조왕의 동생인 수성이 주도하여 개최한 비공식 모임이지만, 참석자가 구체적으로 나와 주목된다. 당시 수성이 군국사(軍國事)를 총괄했으므로 군사훈련의 성격을 지닌 이 전렵행사에는 중앙정치에 일상적으로 관여하던 인물이 대부분 참석했을 것이다. 4나부 가운데 연나부를 제외한 관나부, 환나부, 비류나부 출신 인물이 모두 확인된다는 사실은 이를 반영한다.
표4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초기 회의 관련 기사
| 순번 | 연대 | 주재자 | 참석자 | 기사 내용 | 비고 |
| a | 유리왕 11.4(기원전 9) | 왕 | 군신(群臣), 부분노 | 선비(鮮卑)의 위협에 대한 대비책 논의. 부분노(扶芬奴)의 계책에 따라 선비를 공파하여 속국화함. | |
| b | 유리왕 28.8(9) | 왕 | 군신 | 부여에 대한 보복 논의. | |
| c | 대무신왕 3.10(20) | 왕 | 군신 | 부여에서 보낸 일두이신(一豆二身)인 붉은색 까마귀의 징조 논의. | |
| d | 대무신왕 5.2(22) | 왕 | 군신 | 부여 정벌 실패에 따른 왕의 위로. | |
| e | 대무신왕 11.7(28) | 왕 | 군신, 우보, 좌보 | 요동태수의 침입에 따른 방어책 논의. 우보 송옥구(松屋句)는 기습공격, 좌보 을두지(乙頭智)는 지구전 주장. 을두지의 주장에 따라 지구전 전개. | |
| f | 태조왕 80.7(132) | 수성 | 좌우(左右) | 관나 우태 미유(彌儒), 환나 우태 어지류(菸支留), 비류나 조의 양신(陽神) 등이 왕제(王弟) 수성(遂成)에게 왕위 찬탈 건의. | 비공식 모임 |
| g | 태조왕 94.7(146) | 수성 | 좌우 | 왕제 수성이 왕위 찬탈 음모 획책. | 비공식 모임 |
| h | 신대왕 1.10(165) | 좌보 어지류 | 군공 | 차대왕이 시해된 뒤, 좌보 어지류가 군공(群公)과 논의하여 신대왕 옹립. | 왕 부재 |
| i | 신대왕 8.11(172) | 왕 | 군신, 국상 | 한의 침입에 대한 대비책 논의, 대다수가 지형조건을 이용한 맞대결을 주장했으나, 국상(國相) 명림답부가 지구전 주장. 명림 답부의 주장대로 지구전 폄. | |
| j | 고국천왕 13.4(191) | 왕 | 4부 | 4부(部)에 인재를 추천하라고 명함. 이에 4부는 동부 안류(晏留) 천거. | 하령 형태 |
| k | 산상왕 7.3(203) | 왕 | 군신, 국상 | 왕이 후사와 관련된 꿈 이야기를 하자, 을파소(乙巴素)가 천명의 불가측성 아룀. | |
| l | 서천왕 11.10(280) | 왕 | 군신 | 숙신(肅愼)의 침입에 대한 대비책 논의. 군신이 왕제 달고(達賈) 천거. | |
| m | 봉상왕 5.8(296) | 왕 | 군신, 국상 | 모용외(慕容廆)의 침입에 대한 대책 논의. 국상 창조리(倉助利)가 북부 대형 고노자 (高奴子) 천거. | |
| n | 미천왕 1.9(300) | 국상 창조리 | 중인, 군신 | 왕의 실정을 직간했다가 신변의 위협을 받게 된 국상 창조리가 뜻을 같이하는 중인(衆人, 群臣)과 함께 봉상왕을 폐위시키고, 왕제 돌고(咄固)의 아들 을불(乙弗)을 미천왕으로 옹립. | 왕 폐위 |
그런데 이 행사에 참여한 나부 출신 인물들은 최고위 관등인 패자나 (대)주부보다 낮은 우태, 조의 등을 보유하였다. 이들은 정기 제가회의의 구성원인 나부의 대표자들보다 하위의 인물들로 대체로 나부체제 운영과 관련한 일상적인 업무를 담당했다고 추정된다. 이들은 일상적인 회의기구를 통해 각 나부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한편, 계루부 왕권의 의지를 나부에 전달하는 역할도 수행했을 것이다. 특히 차대왕을 시해한 연나부 조의 명림답부는 국왕 근위업무에 종사했을 가능성이 있다.
계루부 왕권은 이들을 통해 나부의 동향을 파악하고 나부의 여러 세력을 통제하는 한편, 국왕 근위에도 종사시킨 것이다. 이들은 계루부와 나부를 연결하는 창구인 동시에, 계루부가 각 나부를 통제하기 위한 질자(質子)적 성격도 지녔다. 그러므로 이들은 각 나부의 대표자와 밀접한 관계에 있으면서 실무능력을 갖춘 인물로 상정된다. 각 나부의 대표자들은 정기 제가회의에 참여하여 국가 중대사를 의결하는 한편, 평상시에는 대리인을 중앙에 파견하여 일상업무를 처리했던 것이다.
그런데 국가체제 확립 이후, 국가 중대사가 증가함에 따라 임시 제가회의의 개최 횟수도 늘어났을 것이다. 임시 제가회의에는 나부의 대표자가 참석하기도 했겠지만, 표 4의 f·g처럼 대리인을 참석시키기도 했을 것이다. 이에 따라 정기 제가회의의 기능은 점차 축소되고, 임시 제가회의에서 안건을 처리하는 회수가 늘어나는 등 제가회의 운영상에 변화가 일어났다. 이러한 변화는 3세기 전반에 더욱 가속화되었다.
3세기 전반에는 초기의 나부체제가 점차 변질하며 각 나부 사이의 우열이 심화되었다(여호규, 1995). 이에 따라 제가회의 구성원도 6세기 초반 신라처럼 나부의 우열에 따라 상당히 차이가 나게 되었을 것이다. 왕실인 계루부나 뚜렷한 세력을 유지한 연나부·비류나부의 제가(諸加)는 다수를 점하였지만, 세력이 미미해진 환나부·관나부의 제가는 극소수거나 한 명도 참석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욱이 3세기 중반경 나부의 지배세력은 점차 도성에 거주하는 중앙 귀족으로 전환하며 방위부를 관칭하게 된다. 동천왕대에 활약한 방위부 출신 인물이 『북사』 고려전에 제가(諸加)로 표기된 것으로 보아주 062 이들도 제가회의의 구성원으로 참여했다고 여겨진다. 그리하여 3세기 중반경 제가회의의 구성원은 나부의 지배세력을 비롯하여 중앙귀족으로 전환하던 세력, 도성에 거주하는 중앙귀족 등 매우 다양해졌다. 제가회의의 주요 구성원이 점차 중앙귀족으로 전환되어 나간 것이다. 이에 따라 제가회의의 성격도 점차 중앙귀족의 회의체로 변질되었을 것이다(윤성룡, 1997; 이정빈, 2006b).
『삼국지』 찬자가 제가회의의 모습을 사료 4처럼 기술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제가회의의 주요 구성원이 중앙귀족으로 변모함에 따라 회의의 성격도 죄인이 발생할 때마다 수시로 개최하는 상설회의로 바뀌어나간 것이다. 사료 4는 제가회의가 정기회의체에서 상설회의기구로 변화하던 양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제가회의의 이러한 변화는 최고위 관직이 좌·우보에서 국상으로 전환하는 것과도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 각주 051)
- 각주 052)
- 각주 053)
- 각주 054)
- 각주 055)
- 각주 056)
- 각주 057)
- 각주 058)
- 각주 059)
- 각주 060)
- 각주 061)
- 각주 06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