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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2. 제의의 종류와 특징

2. 제의의 종류와 특징

1) 제천대회 동맹(東盟)
(1) 의례의 실체와 과정
『위략』 일문이나 『삼국지』 동이전은 3세기 중·후반에 편찬되었으므로(世界書局編輯部, 1984; 윤용구, 1998), 그즈음의 사정을 보여준다. 이에 따르면 고구려에서는 10월에 ‘동맹’이라는 이름의 제천의례를 치렀다. 이때의 공회에서는 대가와 소가가 차림새에 차이를 둔 채 참여하였고, 도읍 동쪽에 자리한 수혈(隧穴)이라는 굴에 있는 수신(隧神) 혹은 수혈신(穟穴神)을 맞이하여 물가에서 제사하였는데, 그 신상(神像)은 목제였다.
연구 초창기에는 이 의례를 곡령(穀靈)신앙과 관련된 수확제로 보았다(三品彰英, 1973; 井上秀雄, 1978). 고구려가 기본적으로 농경사회였기에 그렇게 보는 것은 타당하다(금장태, 1992; 노태돈, 1999; 전덕재, 2003; 최광식, 2003). 물론 당시 고구려의 도읍지였던 집안(集安) 지역의 경우 음력 10월이면 입동이라(이정빈, 2006a) 재고의 여지가 있다. 다만 집안과 마찬가지로 기후가 한랭한 풍산 등지에서도 10월에 곡령 제사가 이루어졌고, 이즈음 추수가 완전히 끝나기에 한 해의 수확을 완결한다는 의미에서 행해진 ‘2차 수확의례’였을 가능성이 있다(강진원, 2021).
그런데 앞서 거론하였던 것처럼 제천대회는 수확제 여부와 무관하게 대가와 소가가 참여하는 공회로 행해져 단순한 민속의례로만 보기 어렵다(최광식, 1994). 다시 말해 국가권력과의 연관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는 오늘날 연구자 대부분이 동의하는 바이다. 다만 의례의 실상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어 왔다.
먼저 제천과 국중대회(國中大會) 동맹, 그리고 수신 관련 제의, 즉 수신제(隧神祭)의 관계이다. 『삼국지』 고구려전에서는 하늘에 제사하는 국중대회의 이름이 동맹이라고 한 데 이어 공회 시의 복장을 기술한 뒤, 물가에서 이루어진 수신 관련 제의를 전한다. 따라서 각각이 가리키는 바에 대한 검토가 행해졌다.
제천과 국중대회 동맹의 경우, 일반적으로 제천의례가 곧 동맹이라 불린 국중대회라 본다(井上秀雄, 1978; 최광식, 1994; 서영대, 2003; 박승범, 2001; 윤성용, 2005; 이재성, 2008; 강진원, 2021). 하지만 제천이 국중대회 동맹을 이루는 여러 행사 중 하나라고 여기기도 한다(류현희, 2000; 이준성, 2013). 『삼국지』 및 『후한서』 동이전에서는 부여의 제천의례가 국중대회로 치러졌으며 이름을 영고(迎鼓)라 한다고 하는데, 기본적인 문장 구성이 고구려의 사례와 크게 다르지 않기에 참조된다.
아울러 대·소가가 참여한 공회의 경우 대개 제천의례, 즉 국중대회로 이해하지만, 이를 제천과 구별되는 정치집회로 보기도 한다(이정빈, 2006a). 『삼국지』 고구려전에서는 국중대회 동맹에 관한 서술에 연이어 공회 시의 차림새가 나오는 데 반해, 『위략』 일문 및 『후한서』 고구려전에서는 두 기술이 떨어져 있다는 점에 주목한 결과이다. 이에 대하여 공회를 설명할 때 ‘그 공회(其公會)’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국중대회를 가리킨다고 여기기도 한다(강진원, 2021).
이때 국중대회의 이름인 동맹의 경우, 종래는 고구려 시조 동명이나 주몽(최광식, 1994; 류현희, 2000; 김기흥, 2002; 김열규, 2003; 서영대, 2007), 혹은 부여 시조 동명(강경구, 2004; 박승범, 2004; 여호규, 2014)을 음차(音借)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았다. 하지만 부여의 영고 및 동예의 무천(舞天)이 한문식 표현이라는 점을 들어 ‘나라 동쪽에서 치른 맹회(盟會)’를 뜻한다거나(조우연, 2019), ‘국도(도읍) 동쪽에서 이루어진 회합’을 의미한다는 견해(강진원, 2021)가 제기되었으며, ‘동(東)’에 으뜸(首), ‘맹(盟)’에 희생례라는 뜻이 있다 하여 ‘나라에서 으뜸가는 희생제’로도 이해하였다(이춘우, 2015).
제천과 수신 관련 제의의 경우, 제천의례 자체가 물가에서 수신을 제사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고 보기도 하나(三品彰英, 1973; 井上秀雄, 1978; 최광식, 1994; 서영대, 2003; 윤성용, 2005), 양자를 별개의 제의로 여기기도 한다(김두진, 1999; 이재성, 2008; 이준성, 2013; 이춘우, 2015). 『삼국지』 고구려전에서 제천과 수신 관련 제의 사이에 공회 시의 차림새에 관한 기사가 나오기에 그렇게 생각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한원』 번이부 고려전에 “동맹의 사당에서 천제를 대접하였고, 수혈의 제사에서 신령을 영접하였다(響帝列東盟之祠 延神宗穟穴之醮)”고 한 데 주목하여, 동맹과 수혈에 관련된 제사가 양립했다고 이해하기도 한다(이정빈, 2006a; 조우연, 2019).
다만 『한원』의 기술은 사료적 가치가 떨어지는 『후한서』 동이전에 근거했을 뿐 아니라, 제천과 수신 관련 제의를 별개로 본다면 수신에 관한 의례는 비교적 상세히 과정이 전해진 데 비해, 더욱 중요한 제천의례 관련 서술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되어 문제라는 지적도 제기되었다(강진원, 2021). 어떻게 보든 해당 의례가 왕권의 주도로 행해진 이상, 당시 고구려에서 거국적인 규모의 제사가 성대히 치러졌다는 점은 인정하여도 좋을 것이다.
다음으로 제천의례의 제사 대상인 ‘천(天)’의 성격이다. 지금까지는 대개 왕실과 직접 연결된 존재, 즉 조상신의 범주에서 파악하였다. 이는 중국에서 서주 이후 천신과 조상신의 연결고리가 약해졌던 것과 달리, 고대 한국을 비롯한 북방 종족의 신화에서 시조가 천신의 직계존속으로 언급된 데 기인한다. 즉 고구려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 왕은 혈연계보로 천과 연결되었고, 천은 시조의 직계존속이었기에 천신을 시조신의 연장선에서 파악했다는 것이다(노태돈, 1999; 서영대, 2003).
그런데 이처럼 천과 왕실의 혈연적 관계가 직접적인 공동체에서는 제천의례 또한 조상 제사로서의 색채가 뚜렷하였다. 예컨대 신라의 시조 제사는 제천의례적 성격을 지녔고(나희라, 2003), 고대 일본에서는 황실 조상이 천신이었기에 그 제사에 제천의 의미도 함께하였으며(나희라, 2004), 백제 또한 중국식 제천의례인 교사(郊祀) 방식을 수용하되 천신을 조상신으로 여기는 재래의 천 관념 아래 운영하였다(강진원, 2016; 강진원, 2017b). 같은 맥락에서 고구려의 제천의례 또한 그러한 관념에 토대하여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견해(강진원, 2021)가 제기되었다.
반면 이때의 천은 조상신으로서의 인격신이 아니라 천도(天道)의 상징인 자연신, 즉 서주 이래 중국의 천 관념에 근접한 존재이며, 인격신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는 것은 4~5세기 이후의 일로 여기기도 한다(이춘우, 2015; 조우연, 2019).주 005
각주 005)
인격신과 자연신을 구별하는 요인은 그 신격이 인간의 조상이 되는지의 여부이다(諸戶素純,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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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후대에 왕실 시조의 영향력이 강화된 점을 주목하는데, 논의가 더욱 타당성을 얻기 위해서는 고구려 초기의 천 관념이 다른 인접 공동체의 사례와 달리 자연신적 측면에 토대한 배경에 대하여 면밀하게 검토가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한다.
다음으로 이목을 끈 것은 수신의 실체이다. 관련 제의가 제천의례의 하나든 그와 다른 것이든, 수신에 다가가는 것은 제사의 실상을 밝히는 데 필수적인 사안이었기에 꽤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수신의 성격을 지모신으로 보는 데 큰 이견은 없다(김철준, 1971; 三品彰英, 1973; 노태돈, 1999; 장지훈, 1999; 서대석, 2002; 서영대, 2003; 조영광, 2006; 채미하, 2006). 다만 구체적인 부분에서는 의견이 갈린다. 수신 관련 제의는 왕실 시조 전승, 즉 유폐된 시조 모친이 일광에 감응하여 주몽을 낳았다는 이야기를 재연한 것으로 보아 수신은 곧 시조 모친이라 하는 견해가 다수를 점하여 왔다(三品彰英, 1973; 大林太良, 1984; 장지훈, 1999; 김기흥, 2002; 나희라, 2003; 서영대, 2003; 전덕재, 2003; 운성용, 2005; 조영광, 2006; 채미하, 2006; 김창석, 2007; 강진원, 2021).주 006
각주 006)
주몽의 모친을 유화로 칭한 것이 고려시대의 산물이라는 지적(조영광, 2006)도 있거니와, 현재 전하는 고구려 당대의 기록에서 시조 모친을 유화로 명명한 사례가 없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시조(의) 모친으로 표현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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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가 의례화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大林太良, 1996)이나, 졸본과 국내를 오가는 시조묘 친사가 행해졌고, 흉노의 농성대제(蘢城大祭)가 선우(單于) 배출 집단의 족조(族祖)를 대상으로 했기에(박원길, 2001), 일정한 타당성을 지닌다.
이와는 달리, 수신을 특정 조상신이 아니라 모든 지배집단에서 공유된 지모계(地母系) 여신으로 여기기도 한다(이준성, 2013; 이춘우, 2015; 조우연, 2019). 만일 그렇다면 수신이 국동대혈에 모셔졌다가 햇빛과 마주한 이상, 압록강 중류 고구려 지역 전체에 동굴이나 일광과 관련된 전승이 폭넓게 침투해 있었다고 볼 만한 근거가 뒷받침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아울러 7세기의 상황을 전하는 『구당서』 고려전 및 『신당서』 고려전에도 수신의 존재가 확인되기에, 그에 대한 검토도 함께해야 할 것이다. 또 수신 관련 제의에서 부여 시조 동명의 설화가 재연되었으리라고도 추정하는데(여호규, 2014; 장병진, 2016), 그렇게 본다면 수신은 부여 동명의 모친이 된다. 이외에 소노부가 단군과 관련되었다는 전제 아래 수신을 웅녀로도 여긴다(최일례, 2010). 이에 대해서 부여나 탁발선비의 사례를 들어, 최소한 소박한 형태의 시조 탄생담은 마련되었을 것이라는 설도 제기되었다(강진원, 2021).
그런데 수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제천대회에서 이 신격은 두드러지는 위상을 점한다. 관련 기록에서 중점적으로 언급된 것은 다름 아닌 수신이기 때문이다. 이는 수신 관련 제의를 제천의례와 별개로 본다 하여도 다르지 않다. 따라서 그 이유를 생각할 필요가 있는데, 기본적으로 수확제로서 행해졌던 것과 관련된다. 즉 수확제에서는 작물의 생장과 풍요를 초래한 모신(母神)에 대한 숭배가 이루어졌던 데 기인한다(김철준, 1971; 三品彰英, 1973; 서대석, 1988; 김열규, 1991).
아울러 수신 관련 제의에서 부신(父神)의 존재가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는 사실도 유념해야 한다. 이를 모자신(母子神)신앙의 흔적으로 여기기도 한다(강진원, 2021). 모자신신앙은 각지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있으며, 고구려의 경우 시조와 그 모친의 관계가 이에 해당하는데(三品彰英, 1973), 이때 남신(男神)은 부차적인 존재로서 태양신이나 그 아들로 나타난다(松前健, 1998). 다만 이 경우 모신이 중시된 이유는 자신(子神)을 낳았기 때문으로,주 007
각주 007)
대표적인 사례가 천주교의 성모(聖母, the Virgin Mary)신앙으로(松前健, 1998), 성모에 대한 강고한 믿음은 예수의 탄생에 그의 역할이 있었기 때문이며, 그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존재하였다(강진원,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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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신 관련 제의의 절정이 수신과 일광의 감응이라는 점에서 보자면, 제천대회에서 수신의 위상이 확고했던 것 또한 양자의 결합으로 탄생한 신격을 기리는 데 초점이 맞추어졌던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강진원, 2021). 이 점은 수신을 시조 모친이 아니라 공동의 지모계 여신으로 보아도 다르지 않다. 햇빛과 마주한 이상, 어떠한 존재가 탄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제천대회의 실체와 의례 과정에 관한 입장은 연구자마다 다르다. 특히 제천과 수신 관련 제의를 별개로 보아야 하는지, 그리고 수신 관련 제의가 왕실 시조 전승을 반영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추후 검토가 이어져야 한다. 다만 어떻게 보든 이 의례가 왕권을 중심에 두고 이루어졌다는 점은 부인하기 힘들다. 『삼국지』 동이전에서 여러 공동체의 제사의례를 전하면서도 국중대회라 칭한 사례는 고구려와 부여밖에 없는데, 이는 그들의 제의체계가 왕권을 중심으로 통합되었다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여호규, 2014). 따라서 제천대회를 왕권의례이자 국가제사로 보는 데 큰 이견은 없다.
 
(2) 성립 시기와 회합의 역할
이미 언급했듯이, 『삼국지』나 『위략』의 기록은 대략 3세기 중·후반의 사정을 전한다. 이 무렵 고구려 왕권이 강화되기는 했으나 아직 중앙집권체제가 수립되었다고 보기에는 섣부른 감이 있다(노태돈, 1999; 임기환, 2004; 여호규, 2014). 더욱이 두 사서의 제천대회 기록은 그 존재를 알려주는 시기적 하한이기에 이 의례는 그 이전에도 행해졌다고 여겨진다. 이와 관련하여 성립 시기를 태조왕 이후(서영대, 2003), 혹은 2세기 후반 신대왕 이후(강진원, 2021)로 보기도 하였는데, 제천대회가 이루어지려면 어느 정도의 왕권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데 착안한 결과이다. 어찌 되었든 제천대회는 왕권이 일정 수준의 구심력을 발휘하고 있었음에도, 중앙집권력이 궤도에 오르지 못했을 때 성립되었으리라 여겨진다.주 008
각주 008)
왕권이 제천대회를 주관하는 것과 별개로 여타 지배집단은 자체적으로 수확제를 행하며 자신들의 조상을 기렸으리라 추정된다(노태돈, 1999; 서영대, 2003). 왕실 또한 거국적인 제천대회가 성립하기 전에는 자신들 집단(계루부)을 중심으로 한 의례를 행하였을 것이다(강진원,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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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연장선에서 관련된 면모를 찾으려는 논의가 이루어졌다.
일단 왕권은 의례 과정에서 구심력을 발휘했다고 여겨진다. 『삼국지』 고구려전이나 『위략』 일문에 나타난 것처럼 제천대회에서는 대·소가를 비롯한 지배층 대개가 참여하였다. 이들의 행동이 순연히 자발적이었다고 생각되지는 않기에, 불참할 경우 왕의 권위에 반하는 것으로 여겨 응징이 이루어졌으리라고 보았다(노태돈, 1999). 신라의 시조묘 제사가 상당한 강제력을 가진 구조 속에 운영되었다거나(전덕재, 2003), 탁발선비나 유연에서도 제천의례 시 여타 지배세력에 대해 강제력을 행사했다는 점(박원길, 2001)을 고려하면 수긍할 만하다.
다만 이때는 여타 지배집단 또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고 이해된다. 즉 고구려왕은 지나치게 무리한 요구를 할 순 없었으며, 지배세력은 제천의례에 참여하여 지지기반을 인정받으며 왕권의 주도 아래에서 적정 수준의 기득권을 추구하려 했다고 생각된다(강진원, 2021).
그렇다면 제천대회에서는 전승의 재연 외에 어떠한 일이 일어났을까. 우선 중대한 정치행위가 결정되었으리라 여겨진다. 구체적인 사례를 엿볼 수 있는 것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정치행위 기사, 즉 왕실 인물의 승격 및 관리 임명과 하교 등에 관한 조치이다. 『삼국지』와 『위략』이 대상으로 한 3세기 중·후반을 시기적 하한으로 하여 관련 기사를 살펴보면, 전직자의 죽음이나 퇴임으로 인하여 불가피하게 인사가 처리된 경우를 제외하고, 가장 많은 정치행위가 이루어진 달은 제천대회가 치러진 10월이다. 따라서 왕권은 이때 치러진 거국적인 회합에서 정치적 조치를 함으로써 지배집단을 향하여 정당성을 내보였고, 지배집단 또한 동석하여 중요 사안에 대한 왕의 독단에 일정 정도의 제약을 가하거나, 자신들의 의사가 완전히 배제되지 않도록 했을 것이다(강진원, 2021).
다음으로 공납 물품의 분배행위 또한 이루어졌을 것이다. 본디 의례에는 경제적 교환행위가 뒤따르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중국에서는 선진시대부터 원회(元會) 등에서 군주가 지방이나 국외의 종족집단으로부터 받은 물품을 지배층에 재분배했으며(渡邊信一郞, 1996; 岡村秀典, 2005), 고대 일본에서도 니나메사이(新嘗祭)나 다이조사이(大嘗祭)를 통하여 거둔 수확물을 다시 나누는 반폐(班幣)가 행해졌다(井上光貞, 1984; 岡田精司, 1993). 고구려의 경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복속지나 주변국에서 서물(瑞物) 혹은 공물을 보낸 기사가 있는데, 이들 가운데 10월의 일은 제천대회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이정빈, 2006a). 중국이나 일본의 사례를 고려하면, 이렇게 받은 물품은 다시 지배집단에게 적절히 배분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이는 왕권의 경제권 장악이라는 측면 외에 그들의 기득권을 인정한다는 의미도 지녔을 것이다(강진원, 2021).
요컨대 제천대회는 거국적인 행사를 치를 정도의 왕권 수립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각 지배집단 또한 이때 이루어진 정치적 결정에 참여하고 공납 물품을 분배받는 등 상당한 세력을 보전하였다. 이로써 당시 제천대회는 고구려인을 통합하는 기능을 했다(노태돈, 1999; 전덕재, 2003).
다만 이러한 양상이 그 뒤, 즉 고구려 중·후기에도 줄곧 유지되었던 것 같지는 않다. 이에 대하여 평양 천도 이후 성격과 기능에 많은 변화가 왔을 것으로 보기도 하고(서영대, 2003), 여러 행사에 가감이 있었다거나(이준성, 2013), 규모가 줄어들어 국중대회로서의 위상을 상실하였으리라고도 추정한다(여호규, 2013). 또 제천대회가 퇴조한 대신 신묘(神廟)가 부상했다거나(이춘우, 2015), 수렵행사의 일부로 축소되었다고 이해하기도 한다(조우연, 2019). 회합적 측면이 감소하고 정치적 기능의 비중이 경감되었을 것이라는 견해(강진원, 2021) 또한 같은 범주에 속한다. 그렇다면 『삼국지』 고구려전과 『위략』 일문에 실린 제천대회의 모습은 중앙집권체제가 확립되기 이전의 시대적 정황이 반영된 것이라 하겠다.
 
2) 시조묘(始祖廟) 제사
중국 문헌에 전하는 고구려의 대표적 제사가 제천대회라면, 국내 문헌인 『삼국사기』에는 시조묘 제사가 전한다. 독자 전승 기사가 적은 와중에도 관련 기록이 계속 나오는 것은 당시에 그것이 지녔던 무게를 알려 준다. 시조묘 제사에 관한 기본적인 사항은 고구려 중기를 다룰 때 상세히 언급되었다(정호섭, 2020). 따라서 이 글에서는 중복되지 않는 선에서 유의미하게 살펴볼 바를 짚어보고자 한다.
먼저 주신(主神), 즉 제사 대상의 경우 부여 시조 동명(이도학, 2005)이나 태조왕의 부친으로 전하는 고추가 재사(再思)를 대상으로 했다고도 하나(강경구, 2001) 대개는 시조 주몽을 제사했다고 본다. 다만, 고구려에서 시조로 공인된 인물은 주몽뿐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외양은 종묘와 같은 건축물이라기보다 시조왕릉 주변에 조성된 사당, 이를테면 능묘(陵廟)로 보는 견해가 많다(최광식, 1994; 박승범, 2002; 耿鐵華, 2004; 서영대, 2007; 최일례, 2015). 『삼국사기』에 전하는 고구려의 유화나 태자 해명 등의 전승을 보면, 매장지에 종묘와 구별되는 사당(廟)을 세웠음을 알 수 있기에 타당한 논의라 여겨진다. 그 점에 동의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넓게는 시조왕릉 전체를 아우르는 개념으로도 이해하는데, 이는 『삼국유사』에서 가야 수로왕과 신라 미추이사금의 무덤을 각기 수로왕묘(首露王廟), 대묘(大廟)라 하였고, 『삼국사기』에서 미천왕릉을 미천왕묘(美川王廟)라 한 데 기인한다(강진원, 2021).
한편 소재지의 경우, 환인(桓仁)의 미창구(米倉溝)장군묘로 여기기도 하지만(김기흥, 2002) 시조묘가 시조왕릉과 연계되었다는 점에서 주몽의 매장지를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광개토왕비〉에 따르면 주몽(추모왕)은 홀본(忽本) 동쪽 산등성이에 묻혔다고 한다. 이에 홀본, 즉 졸본을 고력묘자(高力墓子) 고분군 일대로 보아, 주몽이 인근 산지에 매장되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양시은, 2014; 최일례, 2015; 강진원, 2021).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시조묘 제사 기사는 모두 왕의 친사에 관한 것이다. 그 첫 사례는 신대왕 3년(167년)의 일이다. 그런데 대무신왕이 세웠다는 동명왕묘는 시조묘로 이해된다(정호섭, 2020 참조). 따라서 시조묘는 건립 이후 한동안 흔적을 전하지 않은 셈이다. 그에 대하여 당시는 왕권의 구심력이 약했던 관계로 시조묘 제사가 국가제사로서 위상을 확립하지 못한 채 계루부 중심의 족조제(族祖祭)로 치러졌을 뿐 아니라, 시행 사례가 주로 구두로 전해졌으며, 그나마 있던 기록도 태조왕계의 집권 과정에서 분실되었던 결과로 여기는 견해(강진원, 2021)가 제기되었다.
아울러 신대왕 시기에 졸본과 국내를 오가는 거국적인 시조묘 친사가 행해진 배경으로, 태조왕 집권 후반기부터 신대왕 즉위까지 이어진 동요를 무마하고 피지배층에게 왕권의 신성함을 드러내고자, 계루부의 조상신인 주몽의 위상을 강화하여 국가 공동체의 시조로 자리매김케 한 조치라 파악하기도 한다(강진원, 2021). 대략 이즈음 시조묘 제사는 국가제사가 되었다고 본 셈이다.
전반기 시조묘 제사는 2월과 9월에 행해졌다. 이를 각기 한 해의 풍요를 기원하는 예축제(預祝祭)와 수확제로 이해하는 데(井上秀雄, 1978) 큰 이견은 없다. 이 논의를 보강하여 9월 제사의 경우, 이때 주몽이 죽었다고 전하는 데 주목하여 주몽을 농경신으로 여기는 측면이 강하여 그의 죽음이 풍작을 초래한다는 믿음에서 의례가 치러졌다는 설(강진원, 2021)도 제기되었다. 나아가 동천왕 2년(228년) 및 중천왕 원년(248년)에 왕실 여성을 태후나 왕후로 삼은 일을 시조묘 제사와 연동된 조치로 보아, 시조의 권위에 힘입어 정치적 결정이 이루어졌다고 여기기도 한다(강진원, 2021).
 
3) 종묘·사직 제사와 묘제(墓祭)
종묘와 사직은 전통시대 대표적인 의례의 장이었고, 고구려 또한 관련 기록이 단편적으로나마 남아 있다. 따라서 그간 일정 정도의 논의가 이루어졌는데, 초기로 시기적 범주를 한정할 때 이목을 끈 것은 『삼국지』 고구려전에서 왕실(계루부) 외에 연노부(비류나부)도 종묘와 사직을 둘 수 있었다고 한 바이다. 이를 통하여 관련 의례를 왕실 중심으로 통합하여 치르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정호섭, 2020). 따라서 이 글에서는 그 밖의 사안을 중심으로 짚어보고자 한다.
종묘의 경우, 『위략』 일문이나 『삼국지』 및 『후한서』 고구려전에서 존재가 확인되고, 『삼국사기』에 따르면 동천왕 21년(247년) 묘사(廟社), 즉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 하므로 3세기에는 실재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그 상한에 대해서는 중국 전한 초기부터 존재했다고 보기도 하고(강경구, 2001), 나부체제가 형성된 태조왕 시기에 주목하기도 하며(조우연, 2019; 강진원, 2021), 산상왕 시기라는 설(이승호, 2016)도 있다.
당시 운영 양상의 경우, 태조왕의 ‘태조’라는 칭호를 통하여 묘호제(廟號制)의 실시 가능성이 제기되었고(김효진, 2017), 소목제(昭穆制)라 할 신주 배열 원리가 존재했다거나(조우연, 2019), 신대왕 시기 이후 칠묘제(七廟制)가 행해졌다는 논의(최일례, 2019)도 있다. 이는 유교적 색채가 상당했을 것이라는 입장이다. 반면 재래적 토대가 강했고, 신주 자체도 전통에 입각한 조소상일 것이라 유추하기도 한다(강진원, 2021). 그즈음 중국 문물의 수용 및 이해 정도에 관한 면밀한 검토가 요청된다.
사직의 경우 사주(社主)는 목제이며 외양이 부경(桴京)과 비슷했을 것으로 보는데(조우연, 2019), 왕실 이외 집단의 사직은 3세기 중엽 조위의 침공 이후 재건되지 못했다고도 하고(서영대, 2005), 위상이 약해졌어도 존재 자체가 사라졌다고 보기는 힘들다고 여기기도 한다(강진원, 2021). 다만 양자 모두 당시 중앙집권화의 한계로 지배집단이 종묘나 사직을 둘 수 있었다고 보는 데서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 무렵 묘제도 치러졌는데, 이는 능묘(陵墓)에서 항구적으로 지내는 제사를 의미한다(來村多加史, 2001). 『삼국유사』에서는 신라 미추왕릉과 가야 수로왕릉에서 제사가 행해졌음을 전하기에 한국 고대에 묘제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경우 『삼국사기』에서 대무신왕이 괴유를 매장하고 제사하게 했으므로 그 흔적이 확인된다. 더욱 확실한 사례는 〈집안고구려비〉에 나타나는데, 수묘인이 주기적으로 제사하였음을 전한다(강진원, 2017a). 이에 따라 관련 논의도 어느 정도 진전되었다.
제의공간의 경우 왕릉급 적석총 가까이에 조성된 석대(石臺)를 제대(祭臺)로 보거나(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 거리를 두고 세워진 건축지(조우연, 2019) 혹은 묘상건축에 주목하기도 한다(강진원, 2021). 또 제사 시기의 경우 춘하추동 사계(孫仁杰, 2013), 시조묘 제사와 같은 달(조우연, 2013), 묘주의 기일 및 전통 절기(강진원, 2021) 등으로 추정하였다.
종묘와 무덤(왕릉)은 조상제사의 무대이다. 그렇다면 이 둘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이에 대하여 내세에도 생전의 공과와 무관하게 현세의 삶이 이어진다는 계세사상(繼世思想)의 영향 아래 무덤을 죽은 이의 거처로 여기는 관념이 강했던 결과, 무덤에서의 의례가 종묘에서의 의례보다 중시되었으며, 이때 묘제는 왕실 일족을 규합하여 혈연적 유대감을 재확인하며 왕권의 위상을 다지는 데 이바지했다는 견해(강진원, 2021)가 제기되었다.
 
4) 제의의 특징
지금까지 제천대회 동맹, 시조묘 제사, 종묘·사직 제사, 그리고 묘제를 살펴보았다. 각 제의의 구체적인 양상에는 차이가 있으나, 총체적으로 볼 때 특징적인 면모 또한 엿볼 수 있다.
첫째, 왕실 혹은 계루부 차원에서 치르던 제사 가운데 거국적인 위상을 갖는 국가제사가 된 사례가 나타났다. 예컨대 애초 각 지배집단이 자체적으로 수확제를 진행했으나, 어느 순간 왕권이 이를 주관하며 지배층의 참여를 종용하는 제천대회가 성립하였고, 종래 계루부의 족조제로 치르던 시조묘 제사 또한 2세기 후반 무렵 졸본과 국내를 오가며 왕의 친사로 이루어졌다.
둘째, 그럼에도 중앙집권화가 궤도가 오른 것은 아니었기에 지배집단은 독립적 성격을 일정하게 유지했다. 이들은 제천대회에 함께하며 왕권의 정당성을 인정했으나, 대규모 회합을 통하여 여러 정치적 결정에 참여하고 수확물을 분배받았다. 또 이들이 자체적인 종묘와 사직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중앙권력이 그들의 중추적 성소(聖所)까지 간섭할 수 없었음을 보여 준다.
셋째, 왕권이 제사를 매개로 원하는 바를 이루어내려는 정도가 강하였다. 즉 제의에서의 정치적 비중이 후대보다 컸다. 제천대회 과정을 왕권이 주관하고 지배층을 차등화함으로써 국가 공동체의 중추를 장악하고 있음을 각인시켰으며, 시조묘 제사와 정치행위를 연계하여 왕권의 결정이 초월적 정당성을 확보케 하였다. 또 묘제를 통하여 왕가 일원의 혈연적 유대를 공고히 하며 체제의 미숙함을 보완하였다.
요컨대 초기의 제의 양상은 당시 정치체제와 일정한 상관성을 갖는다. 중앙권력과 여타 지배집단의 기득권이 적정한 균형을 이루되, 왕권이 나름의 세력 규합을 도모하며 구심력을 확대해 나가려던 움직임이 제사에서도 드러나는 것이다. 의례가 시대와 동떨어질 수 없다는 점에서 보자면 이는 당연한 결과인데. 중앙집권체제가 성립되어가는 과도기의 모습에 대해서는 더욱 면밀한 검토가 행해져야 한다.주 009
각주 009)
『삼국지』 고구려전에 연노부의 종묘·사직만 언급된 것을 통하여 여타 지배집단의 해당 제장이 실질적 기능을 상당 부분 상실하였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 3세기 후반 이후 10월에 정치적 결정이 이루어진 기사를 전하지 않는 것은 제천대회에서 회합의 기능이 축소된 결과라 여기는 견해(강진원, 2021)가 참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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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인격신과 자연신을 구별하는 요인은 그 신격이 인간의 조상이 되는지의 여부이다(諸戶素純, 1972). 바로가기
  • 각주 006)
    주몽의 모친을 유화로 칭한 것이 고려시대의 산물이라는 지적(조영광, 2006)도 있거니와, 현재 전하는 고구려 당대의 기록에서 시조 모친을 유화로 명명한 사례가 없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시조(의) 모친으로 표현해 둔다. 바로가기
  • 각주 007)
    대표적인 사례가 천주교의 성모(聖母, the Virgin Mary)신앙으로(松前健, 1998), 성모에 대한 강고한 믿음은 예수의 탄생에 그의 역할이 있었기 때문이며, 그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존재하였다(강진원, 2021). 바로가기
  • 각주 008)
    왕권이 제천대회를 주관하는 것과 별개로 여타 지배집단은 자체적으로 수확제를 행하며 자신들의 조상을 기렸으리라 추정된다(노태돈, 1999; 서영대, 2003). 왕실 또한 거국적인 제천대회가 성립하기 전에는 자신들 집단(계루부)을 중심으로 한 의례를 행하였을 것이다(강진원, 2021). 바로가기
  • 각주 009)
    『삼국지』 고구려전에 연노부의 종묘·사직만 언급된 것을 통하여 여타 지배집단의 해당 제장이 실질적 기능을 상당 부분 상실하였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 3세기 후반 이후 10월에 정치적 결정이 이루어진 기사를 전하지 않는 것은 제천대회에서 회합의 기능이 축소된 결과라 여기는 견해(강진원, 2021)가 참조된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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