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영역 확장과 복속지역 지배방식
3장 영역 확장과 복속지역 지배방식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 고구려전에는 3세기 중엽 고구려의 영역이 사방 2,000리였고, 인구는 3만 호였다고 나온다. 고구려는 왕실인 계루부(桂婁部), 이전 왕실이었던 연노부(涓奴部), 왕비를 배출하던 절노부(絶奴部), 그리고 관노부(灌奴部)와 순노부(順奴部) 등 압록강 중류 유역의 정치세력인 5개 부가 중심이 되어 건국한 나라였다. 계루부 내부에는 졸본부여계와 부여 유이민계 및 국내 지역 세력 등 몇 개의 정치집단이 존재했다. 연노부는 『후한서(後漢書)』에 소노부(消奴部)로 기재되어 있고,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에는 비류부(沸流部)로 나온다. 이 부에도 구부장(舊部長) 세력과 신부장(新部長) 세력 등 최소 네 개의 세력이 있었다. 또 절노부는 『삼국사기』에 연나부(椽那部)로 나오는데, 여기에도 역시 네 개의 정치집단이 있었다(김현숙, 1993). 이들 세 부보다 규모나 세력면에서 열세였던 관노부와 순노부도 몇 개의 정치집단이 결합하여 성립되었을 것이다. 고대 초기에 독자적으로 운영되는 하나의 정치세력집단이 보통 1만여 명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연노부나 절노부는 3~4만 명 정도였고, 계루부는 이보다 더 상회하는 규모였으며, 관노부나 순노부는 1~2만 명 정도였을 것이다. 따라서 5부의 총인원은 15만 명 정도였으며, 이는 호수(戶數)로 3만 호 정도에 이른다. 당시 평균 인구증가율이 연 0.1%에 못 미친다는 추산에 따르면 1~2세기에도 고구려의 총인구는 3만 호 전후에 달했다고 볼 수 있다(이현혜, 1984). 그러므로 『삼국지』 고구려전의 3만 호는 5부의 주민만 헤아린 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건국 초기에 3만 호였던 고구려의 인구가 정복전쟁을 거치면서 영역이 확장되었던 3세기 중엽에도 여전히 3만 호에 머물러 있었을까? 3만 호에 2,000리라는 것은 244~245년에 있었던 위(魏) 유주자사 관구검(毌丘儉)의 침공 시 고구려에 예속되어 있던 예(濊) 등의 복속민을 모두 떼어낸 상태의, 5부의 인원과 그들의 거주범위를 말하는 것이다. 고구려는 태조왕대 이후 적극적으로 대외정복활동을 벌여 3세기 중엽 무렵에는 그 영역이 이전에 비해 많이 확장된 상태였다. 이에 따라 새로 편입한 지역과 복속민이 상당히 많았다. 그런데 관구검의 침공 당시 동천왕을 추격한 위군이 남·북옥저 지역을 휩쓸었고, 별도로 낙랑태수 유무(劉茂)와 대방태수 궁준(弓遵)의 군대를 보내 예를 정벌한 후 이들이 고구려의 지배권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나게 되었다. 『삼국지』의 고구려 범위와 호수는 이런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동천왕이 피난지에서 돌아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탈한 복속민의 상당 부분을 다시 회복했다.
사실 이 시기까지는 영토와 민(民)에 대한 인식이 후대만큼 확고하지 않았다. 4세기 이후의 ‘민’과는 개념 자체에 차이가 있었다. 법적으로 규정되어 보호를 받으면서 국가에 조세를 납부하고 병사로 복무하는, 국가의 근간인 민으로서의 지위가 아직까지 정립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5부의 하호(下戶)들도 전쟁 시 전투원이 되지 못하고 보급부대 역할만 했다. 이는 5부의 일반민조차도 수탈의 대상으로만 간주할 뿐 나라를 구성하는 근간으로서 그 존재를 인정할 만큼 의식이 성장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이었으므로 복속민은 고구려민이 아닌 집단예민(隸民)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하나의 공동체로 운영된다는 점에서 고구려의 지배권이 미치는 범위는 모두 고구려로 간주하는 것이 옳다. 따라서 5부 주민뿐 아니라 정치, 군사, 경제적으로 고구려의 주요 기반이 되는 복속민도 모두 넓은 의미에서 고구려민이라 볼 수 있다. 즉 당시 고구려민은 복속민까지 포괄하는 ‘광의의 민’과 본래 고구려민인 ‘협의의 민’으로 구분할 수 있다(김현숙, 1989).
5부의 지역범위는 적석총(積石塚) 집중 분포지로 유추할 수 있다. 초기 적석총의 최대 밀집지는 압록강 중류 유역과 그 지류인 혼강(渾江) 일대, 독로강(禿魯江) 유역 일대이다(지병목, 1987; 여호규, 1992). 이보다는 밀집도가 떨어지지만 압록강 상류의 임강(臨江), 장백(長白) 일대와 청천강 상류와 대동강 상류 일대에도 초기 적석총이 분포해 있다(여호규, 2014). 이 가운데 환인(桓仁), 집안(集安), 통화(通化), 만포, 중강, 자성, 시중, 위원, 초산, 송원, 희천을 포함한 주변 일대의 지역 주민이 바로 5부민이며, 이들이 3세기까지 같은 고구려인이란 공동체의식을 확고하게 보유한 협의의 민, 즉 원고구려민이다.
그런데 태조왕대 고구려의 영역은 남쪽으로 살수, 즉 청천강 이북까지 확장되었고, 3세기 중엽에는 동쪽으로 함흥 일대, 서쪽으로 태자하 유역, 북쪽으로 길림(吉林) 이남 지역까지 이르렀다. 그러므로 원고구려민을 제외한 그 외 주민들도 영역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고구려에 새로 편입된 지역민으로서 아직까지 고구려민이란 인식을 확고히 갖지도, 사회적 위상이 확정되지도 못했다. 이들 가운데 집단성을 유지하면서 고구려에 예속되어 있던 사람들은 고구려에 조세가 아닌 공납을 바치고 있었다. 고구려는 집단예민인 이들을 간접지배방식으로 통치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론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고구려 중앙 정부에서 이들을 직접 지배했다고 보는 설도 있다. 초기 고구려의 영역 범위와 복속민에 대한 지배방식은 당시 고구려의 국가 성격을 규정하는 데 관건이 되는 중요한 사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