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복속지역에 대한 지배방식
2. 복속지역에 대한 지배방식
고구려가 5부 지역 외 새로 편입한 지역의 민, 즉 광의의 민을 어떤 방식으로 통치했는지에 대해서는 크게 원래의 지역 질서를 유지시켜 자치를 해나가게 하면서 고구려에 대한 복속의 표시로 공납을 바치도록 하는 간접적인 집단지배를 시행했다고 보는 설과 직접지배를 했다고 보는 설로 나눠져 있다. 이처럼 견해차가 발생한 것은 초기 고구려의 정치운영체제와 영역지배방식, 정치적 발전 정도에 대해 다른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건국 초부터 국왕 중심으로 집권체제가 구축되어 있었다고 보는 경우, 처음부터 지방통치가 이루어졌고 각 지역은 국왕이 지방관을 파견하여 직접통치를 했다고 본다. 반면 5부가 중심이 되어 일종의 연맹체국가를 형성한 후 계루부 왕실 중심으로 힘을 결집해나갔다고 보는 경우, 복속된 지역에는 그 지역 수장을 통한 간접통치가 실시되었고, 3세기 말에 비로소 시원적인 성격의 지방관이 전략요충지에 파견되기 시작했으며, 4세기 이후가 되어서야 전체 영역에 왕의 명을 대행하는 지방관을 보내 직접통치를 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고 본다.
『삼국사기』, 『삼국지』, 『후한서』를 통해 당시 권력양상을 보면 초기 단계에는 국왕권이 절대적이라 보기 힘들다. 초기 고구려의 통치체제는 중앙집권체제가 완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고구려 건국 주체 세력인 5부에는 각각 자체 관인조직과 병력이 있어서 국왕 아래 일원적으로 편제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대외전쟁 시에도 부의 대가들이 각각 자신의 병력을 동원하여 공동 출병하는 형태를 띠었다. 국왕은 최고 통수권자로 전쟁 과정에서 명령권과 통제권을 가졌고, 전쟁 종료 후 전리품 분배 과정에서 주도권을 행사했지만 자신의 병력을 거느리고 참여한 대가(大加)에게 그에 상당하는 대가를 줄 수밖에 없었다.
3세기 중엽까지의 고구려 영역은 원고구려민 거주지역과 집단예민 거주지역으로 구분되었다. 이 중 집단예민은 전쟁에 패배하여 고구려의 지배권 아래 편입되었는데, 이때 정복전쟁은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예컨대 규모가 크고 정치적 역량이 큰 지역일 경우 여러 부의 군대가 공동으로 출병했지만, 규모가 작은 경우 계루부와 한두 개의 다른 부 병력이 동원될 때도 있었다. 계루부 병력이 공동 출병하지 않고 부 하나만 단독 출병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이른 시기의 정복 기사 가운데에는 5부체제가 완성되기 전에 소국 단계에서 개별적으로 수행한 전쟁도 있었다.
이 가운데 하나의 부가 자체 병력만을 동원해 복속한 지역은 그 부에만 예속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 부의 병력이 공동 출병했을 경우에는 복속지에 대한 수취권도 서로 분배했을 것이므로 동일한 정치체가 여러 부에 예속되어 공납물을 바쳤을 수 있다. 복속지의 경제적 가치나 정치세력의 규모, 군사전략적 가치 유무, 복속지 주민의 생활방식과 문화적 성장 정도 등 여러 요인에 따라 수취권 분배의 내용도 달라졌다.
이러한 다양한 면모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나오는 기사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행인국, 선비, 양맥에 관한 내용은 부체제가 성립되기 이전에 원계루부가 단독으로 정복한 지역과 주민에 관한 것이다. 행인국은 백두산으로 보이는 태백산의 동남쪽에 있으므로 5부의 외곽에 있었다. 선비는 소국이라 표현되어 있지만 선비족 전체라기보다는 그 일부 부락을 복속시킨 것이다. 또 양맥은 태자하 상류 유역에 거주하던 맥족의 일파다. 이들은 모두 부체제가 성립되기 전에 이미 계루부에 정복되어 고구려에 부족한 물산을 공납으로 바치고 또 노동력도 제공해야 했던 집단예민이었다.
이들에 대한 지배방식을 속민-공납지배 혹은 이종족집단-공납지배라 부른다. 어느 쪽이든 틀린 건 아니다. 하지만 속민은 〈광개토왕비문〉에 나오는 존재로 동부여, 신라, 백제, 숙신 등을 지칭하는 용어다. 이들은 고구려 호적에 등재되어 직접통치를 받는 대상은 아니지만 고구려왕의 은덕을 받으며 그 천하 안에 들어있는 존재였다. 속민은 3세기까지 고구려에 집단적으로 예속되어 있으면서 고구려인들에 비해 차별 대우를 받으며 고구려민으로서의 위상도 갖지 못하고 수탈에 가까운 조부를 부담해야 했던 집단예민과 성격이 달랐다.
이종족집단이라는 용어도 재고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들은 맥, 예맥처럼 문화적, 종족적 유사성을 가지고 공통의 역사 경험을 같이함으로써 공동체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는 달랐지만, 종족적으로 차이가 난다고 해서 반드시 차별대우를 받지는 않았다. 이런 점에서 원고구려민 외 집단적으로 고구려에 예속된 존재에 대해서는 집단예민 혹은 집단예속민이란 용어가 더 적절하다.
『삼국지』에 나오는 것처럼 고구려는 자체에서 나는 생산물만으로는 자급자족이 어려웠기 때문에 대외정복전쟁을 통해 복속지를 늘리고 그곳의 산물과 인력을 이용해야 했다. 그래서 외부인들에게 인성(人性)이 흉급(凶急)하고 침략과 노략질을 좋아하는 민족으로 인식되었으며, 나라 사람들이 모두 기력이 있고 전투에 능하다는 평을 들었다. 이는 정복전쟁을 하나의 생산활동처럼 활발하게 전개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계루부뿐 아니라 다른 부들 역시 부로 편제되기 이전이나 그 이후에도 자체 병력을 동원해 단독 혹은 공동으로 정복전쟁을 치러 복속지역을 늘리고 집단예민을 보유하여 그를 통해 부족한 물자를 공급받을 수밖에 없었다.
계루부 외의 부가 수행한 전쟁과 그 결과 복속한 집단예민도 있다. 조나(藻那)와 주나(朱那)는 압록강 중류 유역에 있던 정치집단임을 알 수 있다. 강이나 계곡 등 물가에 형성된 평지를 근거로 독립적인 정치체를 이루고 있던 소국 또는 지역정치집단을 지칭하는 용어인 ‘나(那)’를 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구려의 건국 주체가 되지 못했으므로 ‘부’로 지칭되지는 않았다. 환나부가 정벌한 주나의 경우, 그 왕자 을음(乙音)이 고추가(古鄒加)에 봉해졌다. 고추가는 전 맹주국인 연노부의 대가, 대대로 왕비를 배출한 절노부의 대가, 계루부의 대가에게만 주어진 관등이었다. 이런 점에서 이를 5부가 성립되는 과정으로 보고 조나와 주나의 주민들도 역시 5부원이 되었다고 이해해 왔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관나부와 환나부가 이미 부로 편제되고 난 후 중앙정부의 명령을 받아 각각 조나와 주나를 정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조나와 주나의 주민도 압록강 중류 유역에 있는 지역정치집단 가운데 하나이긴 하지만, 5부민들과 사회, 경제적 처지가 동일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주나의 왕자는 중앙정부에 의해 고추가가 될 수 있었지만, 그 주민들은 관나부와 환나부에 예속되어 공납을 바치는 집단예민이 된 것으로 보인다.
발기(拔奇)와 이이모(伊夷模)의 왕위쟁탈전 과정에서 이이모에게 반기를 들었다는 항호(降胡) 500가도 집단예민의 한 예다. 이들은 계루부에 속해 있던 집단예민으로 지역 자체가 편입된 것이 아니었으므로 농업생산물이나 지역특산물, 포(布) 등의 공납물을 바치지는 못하고 주로 노동력을 제공하거나 군사적으로 동원되었다. 차대왕을 제거하고 신대왕을 옹립한 명림답부(明臨荅夫)는 그 대가로 국상(國相)이 되면서 패자(沛者)로 관등이 올라갔다. 그리고 내외병마(內外兵馬)를 관장하면서 양맥부락을 통치하는 권리를 갖게 되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그는 국상으로 재임하면서 한의 침략을 물리치는 공을 세움으로써 좌원(坐原)과 질산(質山)을 식읍으로 받았다. 이때 명림답부에게 주어진 양맥부락, 좌원, 질산은 곧 그가 소속된 연나부의 관할지역이 되었다. 이 중 좌원과 질산은 고구려 서부 변경지역이었다. 양맥은 계루부가 단독으로 정복하여 집단예민으로 관리하고 있던 태자하 유역의 정치세력이었는데, 명림답부에게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부여한 이후로는 그가 이 지역에서 생산물과 노동력을 수취했다. 이는 연나부의 세력강화에 필요한 기반이 되었다. 따라서 명림답부의 입신 과정은 곧 연나부의 세력 강화 과정을 보여주는 일면도 있다.
그런데 이때 한 가지 주목되는 점이 있다. 양맥에 대한 지배권의 소속이다. 양맥은 유리왕대에 정복된 정치집단으로 계루부의 정치·경제·군사적 기반이 되었다. 이후에도 양맥은 집단을 온존하면서 부락별로 생활했지만, 일부 부락의 경우 공을 세운 귀족에게 식읍으로 사여되기도 했다. 명림답부에게 양맥을 겸하여 다스리게 했다는 것과 서천왕 11년(280년) 숙신을 정벌하는 데 공을 세운 달가(達賈)에게 양맥과 숙신의 여러 부락을 겸하여 다스리게 했다는 것은 곧 이 지역의 민과 토지에 대한 수취권과 지배권을 주었다는 의미다. 즉 계루부의 집단예민인 양맥의 여러 부락 가운데 일부 부락에 대한 권리를, 왕을 옹립하거나 외적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운 명림답부와 달가에게 포상으로 준 것이다.
이들에게 주어진 지배권이 명림답부와 달가 당대에 한정된 것인지, 세습적으로 보유할 수 있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양맥의 여러 부락 가운데 일부를 떼어 각각 두 사람에게 주었다고 볼 수 있으므로, 명림답부에게 주었던 권리를 회수하여 달가에게 주었다고 볼 필요는 없다. 이런 점으로 보아 비교적 단위가 큰 복속민의 경우 부락별, 단위지역별로 공납을 바치는 대상이 다른 경우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한 복속민 집단의 여러 부락들이 각각 다른 정치세력에게 예속되어 있는 경우는 다른 원인을 통해서 발생할 수도 있다. 예컨대 독자적인 실체로 기록이 남을 만큼 넓은 영토와 인구를 보유한 정치세력에 대한 정복은 국왕의 군대뿐 아니라 여러 부의 병력이 공동으로 출병했을 것이다. 그럴 때에는 병력을 낸 부세력에게 전후 복속지 재편 과정에서부터 공납 수취권을 나누어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때 전리품과 복속지 분배를 총괄했던 국왕이 복속지 지배 과정에서 일정 부분 간여했을 수도 있지만, 분여받은 부의 대가에게 그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주기도 했다. 대가는 그곳에서 공납을 받았고 자신이 통치하는 부의 경제기반으로 삼았다. 그런 예는 동옥저 지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동옥저에 대한 지배방식은 고구려의 집단예민 지배방식의 전형으로 간주되고 있다. 따라서 『삼국지』 동옥저전에 나오는 기사를 두고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동옥저전에는 동옥저가 나라가 작아 큰 나라 사이에서 핍박을 받다가 마침내 고구려에 복속되었다며, 그에 대한 고구려의 지배방식에 대해 서술해놓았는데, 내용상 세 단락으로 나눠진다.
① 구려는 그중 대인을 사자로 삼아 서로 다스리게 했다(句麗復置其中大人爲使者 使相主領).
② 대가로 하여금 그 조세를 책임지고 통괄토록 하였다. 맥포와 생선, 소금, 해초류 등을 천리나 떨어진 곳에 져나르게 하였다(又使大加統責其租賦 貊布魚鹽海中食物 千里擔負致之).
③ 또 미녀를 보내게 하여 노비나 첩으로 삼았는데, [고구려 사람들이] 그들을 노복처럼 대우했다(又送其美女以爲婢妾 遇之如奴僕).
② 대가로 하여금 그 조세를 책임지고 통괄토록 하였다. 맥포와 생선, 소금, 해초류 등을 천리나 떨어진 곳에 져나르게 하였다(又使大加統責其租賦 貊布魚鹽海中食物 千里擔負致之).
③ 또 미녀를 보내게 하여 노비나 첩으로 삼았는데, [고구려 사람들이] 그들을 노복처럼 대우했다(又送其美女以爲婢妾 遇之如奴僕).
이 가운데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내용은 ①이다. ①에 대한 이해는 크게 둘로 나눠진다. 하나는 고구려에서 옥저의 대인을 고구려의 사자로 삼아 서로 다스리게 했다고 해석하는 설이다. 고구려에서 옥저를 차지한 후 그곳의 재지수장들을 사자로 삼고 함께 다스리게 했다는 것으로 복수의 기존 지배자들을 사자로 삼아 반자치적으로 옥저를 통치하도록 하되, 서로 견제하게 한 것으로 이해했다. 즉 고구려가 옥저를 집단예민으로 삼고 토착유력층을 통해 간접지배했다고 본 것이다(武田幸男, 1967; 하일식, 1991; 김현숙, 1992; 임기환, 1995). 다른 하나는 옥저의 대인, 즉 거수(渠帥)들을 사자(使者)로 삼고, 고구려 중앙에서 파견한 상이 그들을 다스렸다고 보았다. 이것은 고구려 중앙정부가 옥저 토착지배층들의 도움을 받아 직접통치를 실시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 설은 다시 상(相)을 왕의 대리자인 국상(國相)으로 본 설(김미경, 2000), 행정조직을 통괄하는 중앙정부의 상이라고 본 설(서의식, 1990),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으로 본 설(김남중, 2013; 장병진, 2017)로 나눠진다.
전자의 경우, ①을 “구려는 다시 그중 대인을 두고 사자로 삼아 서로 다스리게 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에는 “구려는 다시 그중 대인을 사자로 삼고, 상으로 하여금 주령(主領)하게 하였다”로 해석한다. 상을 ‘서로’로 보느냐, ‘국상’ 혹은 ‘지방관’으로 보느냐에 따라 고구려의 동옥저 지배방식뿐 아니라 전체 지방통치방식에 대한 이해가 달라진다. 상이 고구려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이라고 본다면, 3세기까지 고구려의 영역지배방식이 주로 간접지배, 집단지배였다가 3세기 말 부의 반독립적 위상이 소멸되고 전국에 국왕을 대신하는 지방관이 파견되면서 직접통치체제로 전환되었다고 본 기존의 이해(임기환, 1995; 김현숙, 1996, 2005)를 전면 수정해야 한다.
현재까지는 두 가지 설 가운데 전자가 더 다수설에 해당하지만 후자의 해석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상을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으로 보는 입장은 한사군이 생각보다 훨씬 정치하게 군현지배를 직접 실현했다고 보는 연구성과(김병준, 2013; 2015)에 힘입은 바 크다. 또 동옥저의 사자가 〈포항중성리신라비〉, 〈울진봉평리신라비〉, 〈영천청제비〉, 〈단양신라적성비〉 등 6세기 신라 금석문에 나오는 사인(使人)과 역할이나 성격이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는 데 의거했다. 즉 신라가 현지유력자인 촌주(村主)를 사인으로 삼아 중앙에서 파견된 도사(道使)를 도와 지역지배를 하게 한 것처럼(하일식, 2009), 고구려도 동옥저의 재지유력층을 사자로 삼고 중앙에서 파견한 상이 그들을 통괄하면서 직접지역지배를 수행했다고 본 것이다.
낙랑군의 통치 내용이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비교가 불가능하지만, 낙랑군의 영동지역 지배와 고구려의 동옥저 지배가 반드시 유사했다고 볼 수는 없다. 또 신라의 경우와 고구려의 경우는 400년 가까운 시간차가 있어 정치, 사회 발전을 고려할 때 유사성이 발견된다고 해서 동일한 성격이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또한 중앙에서 파견된 상이 재지유력층을 사자로 삼고 그들의 협조를 받아 옥저 지역민들을 통치한다고 그것을 직접통치라고 볼 수는 없다. 중앙에 상대되는 의미로서의 명실상부한 지방이 성립하고, 그 지방민들을 모두 호적에 등재한 후 인두세와 호세, 부역 등의 조세를 개별적으로 수취할 수 있어야 직접통치라 할 수 있다. 물론 중앙집권적 통치체제가 완비된 후 전국에 지방관을 파견해 직접통치를 실시한 이후에도 주민의 존재양상, 생활유형, 환경 등에 따라서 특수한 집단지배를 용인하는 것이 고구려의 영역지배방식이었다(김현숙, 2005). 그러나 1~3세기 동옥저와 예는 그러한 경우에 해당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이 시기까지는 공민(公民)이란 개념도 정립되지 않은 시기였다. 따라서 압록강 중류 유역의 원고구려 지역민들도 국왕의 백성으로서 보호받으며 조세를 납부하는 공민이 되지 못했다(김현숙, 1999).
그러므로 동옥저에 대한 고구려의 지배방식에 대해서는 한 구절만 잘라서 해석하기보다는 관련 사료 전체를 종합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다음 구절인 기사 ②를 살펴보기로 하자. 이 구절은 동옥저에 대한 고구려의 경제적 수취 내용에 해당한다. 동옥저는 고구려에 맥포와 어염, 그리고 해중식물을 천리나 지고 가서 바쳤는데, 그것을 대가가 책임졌다. 기사에는 동옥저가 바치는 것을 ‘조부(租賦)’라고 표현했지만, 내용상으로 볼 때 특산물에 가깝다. 즉 동옥저의 경제 상황, 환경적 요인을 고려하여 일반적인 조용조의 내용과 달리 주로 특산물을 고구려에 납부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조부 납부의 책임자는 대가였다. 상을 ‘서로’가 아닌 ‘관직자’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경우, 정치·행정적 통치를 담당한 상과 경제적 통치를 담당한 대가로 나눠져 있었다고 보았다(서의식, 1990). 이렇게 본다면 앞에 인용된 사료의 ①, ②와 병렬적으로 서술된 ③에서 “또 미녀를 보내 비첩으로 삼았는데 그를 노복과 같이 대우했다”고 했는데, 이 업무는 지방관인 상과 대가 중 누가 담당한 것인지 궁금하다. 또 미녀를 보내는 것도 지방관이 파견된 지역의 주민들이 국가에 지고 있던 일반적인 조부의 내용으로 보아야 되는지 의문이 생긴다.
동옥저는 지역특산물인 맥포와 물고기, 소금 등 해중식물을 짊어지고 천리 길이나 되는 고구려로 갖다 바치고, 또 미녀를 보내 비첩으로 삼게 했다. 그런데 고구려에서는 그 미녀를 노복과 같이 대우했다고 한다. 이것은 중앙에서 왕명을 대행하는 지방관을 파견하여 지역주민들로부터 조세를 거두고 지역 방위를 맡아 지역민을 보호하고 지역의 안정된 통치를 도모하는 중앙집권체제하의 지방통치와 성격이 다르다. 이런 의무를 지닌 동옥저는 고구려의 민, 즉 공민으로서의 위상을 갖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고구려왕은 아직 이들을 자신이 돌봐야할 민이자 국가의 근간인 공민으로 인식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때 동옥저에 왕명을 대행한 지방관인 상을 파견하여 통치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낙랑군 호구부’의 발견으로 인해 한의 군현통치가 기존의 이해보다 훨씬 더 정치하고 직접적인 통치였다는 것이 밝혀졌다(윤용구 외, 2010). 그리고 동부도위가 설치된 것도 한의 지배 강도가 약화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낙랑군의 지배에 군사적 지배가 더해진 것이라는 연구도 나왔다(김병준, 2015). 현재로서는 ①에 대한 해석 가운데 다수설인 전자가 여전히 더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동옥저와 예에 대한 지배 내용을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향에서 정밀하게 더 살펴봐야 한다는 필요성은 충분히 인정된다.
한편 앞에 인용된 사료의 ②에서 대가(大加)가 공납물 수취를 책임졌다는 내용에 대한 이해에도 약간 다른 해석이 있다. 일반적으로 고구려의 대가가 이를 책임졌다고 이해하는데,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보는 경우 계루부와 다른 부의 대가들이 동옥저 정복에 기여한 대가로 수취권을 받아 공납물을 수취한 것으로 이해했다(김현숙, 1996).
『삼국지』 고구려전에는 대가(大加), 대인(大人), 대가(大家)와 같이 조금씩 달리 표현된 존재들이 나온다.
① 왕의 종족(宗族)으로 그 대가(大加)는 모두 고추가를 칭한다.
② 이전 국주였던 연노부의 적통대인(適統大人)이 고추가를 칭했다. 종묘를 세우고 영성사직에 제사를 지낼 수 있다.
③ 여러 대가(大加)는 스스로 사자(使者), 조의(皁衣), 선인(先人)을 두었는데, 그 명단은 모두 왕에게 보고한다. [사자, 조의, 선인은] 경대부(卿大夫) 가신과 같은데 회동할 때 좌석 차례에서 왕가의 사자, 조의, 선인과 같은 열에 설 수 없었다.
④ 그 나라의 대가(大家)는 농사를 짓지 않는다. 좌식자(坐食者)가 만여 명으로 하호(下戶)가 먼 곳에서 식량과 물고기 및 소금을 짊어지고 와서 그들에게 공급한다.
② 이전 국주였던 연노부의 적통대인(適統大人)이 고추가를 칭했다. 종묘를 세우고 영성사직에 제사를 지낼 수 있다.
③ 여러 대가(大加)는 스스로 사자(使者), 조의(皁衣), 선인(先人)을 두었는데, 그 명단은 모두 왕에게 보고한다. [사자, 조의, 선인은] 경대부(卿大夫) 가신과 같은데 회동할 때 좌석 차례에서 왕가의 사자, 조의, 선인과 같은 열에 설 수 없었다.
④ 그 나라의 대가(大家)는 농사를 짓지 않는다. 좌식자(坐食者)가 만여 명으로 하호(下戶)가 먼 곳에서 식량과 물고기 및 소금을 짊어지고 와서 그들에게 공급한다.
①, ②는 고추가를 칭할 수 있는 대상에 대해 서술했다. 왕의 종족인 대가, 연노부의 적통대인이 그 대상이 된다. 여기서 대인은 큰 사람, 최고 어른, 제일 높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아마도 연노부의 장(長)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위 인용에서는 생략했으나, 이 기사 뒤에는 절노부에 대한 내용도 나오는데, 절노부는 대대로 왕실과 혼인을 하였으므로 고추의 칭호를 더하였다고 한다. 즉 왕족인 대가와 전 국주였던 연노부, 대대로 왕비를 배출한 절노부의 최고 어른이 고추가를 칭할 수 있었다. ③에 나오는 대가는 자체 관인을 휘하에 둘 수 있었지만 그 명단을 왕에게 보고했고, 경대부 가신과 같지만 회동 시 같은 열에 서지 못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계루부 왕실이 아닌 다른 부의 대가로 볼 수 있다. 연노부, 절노부, 관노부, 순노부의 장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대가다. ④에 나오는 대가(大家)는 좌식자로서 만여 명이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계루부와 4부의 장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고 부와 권력을 가진 세력자를 의미한다.
이렇게 보면, 대인(大人)과 대가(大家)는 높은 사람, 최고 어른, 혹은 세력가를 의미하는 일종의 보통명사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대가(大加)는 좀 다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왕의 종족인 대가와 자체 관인을 둘 수 있는 대가는 모두 고구려 왕권과 공적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다. ①에 나오는 대가의 경우, 단순히 왕의 종족으로만 나오므로 공적 관계가 아닌 사적 관계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왕의 형제, 자손, 친인척이 왕조의 통치체계 안에서 공적 역할을 수행하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볼 때, 왕족이라고 하여 혈연으로 인한 사적관계일 뿐이라고 보는 것은 맞지 않다. 대인(大人), 대가(大家)와 달리 대가(大加)가 국왕의 통치권과 관계가 있는 존재라고 본다면 앞의 동옥저 지배 관련 기사에 나오는 대가도 다른 방향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동옥저에서 식량, 어염 등을 거두어 고구려로 가져오는 임무를 맡았던 대가(大加)는 분명 고구려 왕의 통치권 아래에서 역할을 수행하는 존재였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대가는 계루부의 대가일 수도 있고, 각 부의 대가일 수도 있다. 3세기 중엽 당시의 고구려 통치체계를 함께 고려하면 동옥저에 대한 수취권을 계루부 왕실과 전쟁에 참여한 여타 부에서 나누어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삼국지』 고구려전에 의하면 대외전쟁 시에 고구려는 대가와 주부가 함께 군사를 이끌고 출정했다. 이는 부의 장인 대가와 국왕의 직속 관인인 주부가 각각 병사를 이끌고 공동 출정한 것이다. 따라서 인용한 『삼국지』 동옥저전 기사에서 조부의 수취를 책임진 대가는 계루부의 대가일 수도 있고, 다른 부의 대가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보다 중요한 점은 이 공납물이 고구려 중앙정부로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대가들에게로 귀속된다는 점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이들이 동옥저로부터 공납물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동옥저를 정복할 때 그들도 자신의 병력을 거느리고 출정함으로써 전리품의 일종으로 수취권을 이양받았기 때문이다. 대가는 계루부와 다른 4부에 모두 존재할 수 있다. 동옥저 자체가 독자적인 운동성을 가진 다수 읍락의 결합체였으며, 다른 읍락에 대한 국읍의 지배권이 고구려나 부여만큼 강력하지 못한 상태였음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김현숙, 1996).
이런 점들을 모두 염두에 두면, 동옥저에 대한 지배방식을 보다 다면적으로 분석해 볼 수 있다. 즉 동옥저의 여러 읍락 가운데 어떤 읍락은 계루부에, 어떤 읍락은 연노부, 절노부, 관노부, 순노부에 각각 공납을 바쳤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때에도 동옥저에 대한 전체적인 통치는 중앙정부에서 관장했지만, 그 지역을 할당받은 각 부의 대가가 개별 읍락에서의 공납물 수취에 대한 권리와 책임을 전적으로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김현숙, 1996; 임기환, 2012).
이상과 같이 본다면, 고구려의 동옥저 지배는 재지지배층을 통해 간접적으로 집단지배를 하면서 특산물과 미녀를 상납받는 일종의 공납 지배를 시행했다고 볼 수 있다. 즉, 동옥저 자체가 고구려에 집단적으로 예속된 것이므로 이들을 집단예민이라 할 수 있다. 아마도 중앙집권체제가 구축되고 중앙에서 본격적으로 지방관을 지역에 파견하여 직접통치를 하는 단계로 가기 전에는 새로 편입된 지역민에 대해 주로 이런 방식의 지배를 적용했을 것이다.
동옥저에 대한 이런 지배방식을 통해 부체제기 권력의 성격, 기본적인 정치운영원리, 그리고 국왕과 대가 양자의 역학관계 등을 엿볼 수 있다. 동시에 동옥저가 한의 지배에서 벗어난 후 바로 고구려에 예속되었고, 또 관구검의 침략을 받은 후 고구려의 지배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났으면서도, 끝내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얼마 있지 않아 다시 고구려에 편입된 이유도 짐작할 수 있다. 요컨대 한이나 고구려가 동옥저를 지배할 때 읍락별, 종족별로 분리하여 통치했으므로 그 여파로 독립 후에도 정치적 통합을 이루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런 지배방식과 그로 인해 나타난 현상은 예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지금까지 계루부를 비롯한 여러 부에 각각 예속된 집단예민이 있었다는 것과 그 원인에 대해 살펴보았다. 어떤 부에 속해 있는 복속민이건 그 내부의 지배는 기존의 재지지배층이 여전히 담당했으며, 그 위에 고구려의 통치권이 설정되는 집단적이고 간접적인 통치가 주를 이루었다. 기존의 집단성을 해체하지 않고 또 각 공동체의 자체 운동성을 해체하지 않는 상태에서의 지배권 설정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3세기 말까지는 5부민과 복속민 모두 고구려 중앙정부로부터 기존 공동체를 온존한 위에서 간접통치를 받는다는 점에서는 같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간접통치 또는 공납지배라고 일컬어지는 복속민 통치도 단일한 내용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구체적인 지배 내용을 보면 의외로 다양한 측면이 발견되고 있다. 지금까지의 서술 과정에서 부분적으로 언급한 바 있지만, 3세기 말까지의 복속민에 대한 지배방식도 몇 가지로 유형화할 수 있다.
첫 번째 유형으로는, 지역 전체와 재지지배층을 온존시킨 상태에서 복속의 의미로 공납물만 바치게 할 뿐 지역사회를 전혀 재편하지 않고 거의 완전하게 자치를 보장하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구체적인 사료가 나오지는 않지만 이런 식의 지배가 행해졌으리란 것은 신라의 예를 통해서 충분히 상정할 수 있다(朱甫暾, 1995; 1998). 물론 이때도 외부세력과의 접촉이나 고구려 영향권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행동에 대해서는 감시할 필요가 있으므로 수시로 국왕이 순수를 하러 가거나 감찰관을 파견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부 통치에서의 제제는 거의 하지 않았다.
두 번째 유형으로는, 지역을 부분적으로 재편해 지배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이는 첫 번째 방식보다 더 적극적인 지배 의도가 엿보이는 경우다. 고구려는 행인국, 북옥저, 개마국, 동옥저를 정복한 후 그 땅을 성읍이나 군현으로 만들었다. 이때 성읍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지역의 기존 질서를 완전히 파괴하여 전체적으로 재편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군현으로 삼았다는 것도 실제 군이나 현 등의 행정단위로 편제했다는 의미가 아님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성읍이나 군현으로 만들었다 함은 곧 재지(在地)질서를 전혀 변경시키지 않았던 첫 번째 경우와 달리 부분적으로라도 지역을 재편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경우 지역 정치체의 자치를 완전히 보장해 주지는 않았다.
이처럼 직접통치를 시행하지 않으면서 지역을 부분적으로 재편한 것은 소기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목적은 두 번째 유형의 복속민 지역들이 가진 공통점에서 찾을 수 있다. 즉 그 주변에 있는 정치체를 정복하기 위해 필요한 전략거점이라는 것이다. 행인국은 백두산의 동남쪽이므로 혼춘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4년 뒤 북옥저를 침략한 것으로 보아 행인국 정복 이후 부분적으로 재편하여 행인국에 대한 감시 체계를 구축함과 동시에, 북옥저와 가까운 전략요충지에 군대를 주둔시켜 북옥저 정찰과 지형 파악 등 침략을 위한 사전작업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 개마국을 정복하자 그 인근에 있던 구다국이 자진 투항한 것으로 보아 개마국 정복이 곧 주변 소국들을 편입하기 위한 포석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북옥저는 북쪽으로 읍루, 서북쪽으로 부여, 남쪽으로 동옥저와 접해 있는 주요 지역이다. 동옥저는 북옥저와 접해 있으므로 남옥저라고도 불리었으며, 그 남쪽에 동예가 있었다. 동옥저가 태조왕대에 정복된 것에 비해 북옥저는 동명왕대에 이미 복속되었다. 동옥저보다 북옥저로 먼저 진출한 것은 왜일까? 옥저의 정복과 예속은 경제적 목적과 정치, 군사적 목적이 모두 있었을 것이나, 동옥저는 이 가운데서도 전자가 더 우선했고, 북옥저는 후자가 더 컸다. 건국 초 고구려의 최대 강적은 부여였으므로 그에 대한 견제를 위해 부여와 접하는 지역집단을 우선적으로 장악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북옥저는 남쪽에 있는 동옥저 정복을 위한 전진기지로서의 의미도 컸다. 반면 동옥저는 고구려의 부족한 식량과 해산물을 충당키 위한 경제적 기반으로서의 의미가 무엇보다 큰 곳이다. 물론 동옥저 정복에 예로 진출하기 위한 전략기지 확보란 목적도 있었다.
『삼국지』 예전과 고구려전에 의하면, 예 역시 태조왕대에 고구려에 예속되었지만 동옥저와 달리 구체적인 지배 내용이 사료상에 나타나지 않는다. 예는 동해안을 따라 길게 퍼져 거주하고 있었다. 영동 7현 가운데 6현으로 지칭되었던 주요 세력들이 터전을 잡고 있었는데, 이들 가운데 가장 큰 세력이 불내예였다. 불내의 대표자는 불내예후를 칭하다가 위(魏)에 항복한 후 불내예왕에 봉해지기도 했다. 예는 낙랑군 예하에 있다가 동부도위 지배 아래 들어갔고 다시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예 전체가 하나로 통합되지 못했기에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고대 국가로 성장하지 못했지만, 군현체계를 경험하였으므로 행정체계에는 어느 정도 익숙한 집단이었다.
예 지역민들은 전작(田作) 중심의 농업을 생산기반으로 삼았지만 어업과 제염업도 상당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이곳에서 나는 어피(魚皮), 반어(班魚), 반어피(班魚皮) 등의 해산물은 한군현에 공물로 납입됨으로써 예의 특산물로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고구려에 복속된 이후에도 동옥저와 함께 해산물과 소금, 농산물 등을 공납함으로써 중요한 경제적 기반으로 기능했다. 예와 옥저는 모두 어로생활을 영위하여 중국을 비롯한 이웃 나라에 널리 해산물을 공급했다.
평안북도의 위원이나 강계, 자강도의 전천 등에서는 연(燕)의 명도전(明刀錢)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명도전의 출토는 이곳이 압록강 중류 유역으로부터 영동 해안 방면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였음을 보여주며, 전국시대부터 중국과 연결되는 고대상업로였음을 증명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나오는 동해안 지역에서의 특산물 진상 기사는 곧 공납물을 수취했던 상황을 보여준다. 따라서 예 지역으로 진출한 것은 농산물과 해산물 등 고구려에 부족한 물자를 지속적으로 안정되게 확보하려는 목적이 강했다. 물론 중국과의 무역품을 확보하려는 의도도 컸고, 한반도 남부지역 정치세력과의 교역권에도 관심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군사적인 면에서도 중요했다. 그 남쪽에 진한이 있었으므로 예 지역도 인접한 곳에 있는 정치세력을 정복하기 위한 전진기지였다.
이와 같이 정치·군사적 전진기지로서 비중이 큰 주요 지역에는 단순히 재지지배층을 통한 간접지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역을 재편한 후 고구려 군대를 일정 기간 주둔시키기도 했다. 이런 지배방식의 가장 전형적인 예로 군사적 의미가 다른 곳보다 특히 강했던 북옥저의 중심지인 책성을 들 수 있다.
북옥저는 남옥저로부터 800리 떨어져 있었다. 그 중심 국읍은 치구루, 즉 책성이었다. 관구검의 침입 시 동천왕이 남옥저를 거쳐 북옥저로 도망갔기 때문에 그를 추격한 위나라 군대는 남·북옥저의 읍락을 모두 파괴했다. 이는 남·북옥저가 모두 상당 기간 고구려의 중요한 정치·경제·군사적 기반으로 기능해 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위의 침략 후 영동의 정치세력들을 후국으로 삼아 기미정책을 실시했을 때에도 북옥저에 대해서는 위가 통치권을 행사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여전히 고구려의 예속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에 대해 부여가 북옥저에 진출하여 그 세력권 아래 넣었고, 그에 기반하여 모용세력의 침략을 받은 부여 왕실의 일부가 이곳으로 도망 와 동부여를 건국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日野開三郞, 1988). 그러나 3세기 말경에는 고구려가 북부여 지역으로의 진출을 기도하고 있었고 이미 세력을 부식시킨 지역도 있었다. 또 위의 침략 이후 북옥저 지역이 고구려로부터 독립해 부여에 예속되었다는 직접적인 증거도 없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북부여 지역의 중심지인 길림에서 혼춘까지의 긴 행로 도중에 고구려의 제제가 전혀 없었다고 보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
따라서 동부여가 북옥저의 중심지인 책성 인근 지역에 건국할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의 양해와 적극적인 주선이 있었기 때문이라 보는 쪽이 더 타당하다. 즉 고구려로서는 일종의 통치책의 하나로 이전부터의 복속지역에 부여의 지배집단들을 안치시켜 독립적으로 생활할 수 있게 한 것이다(김현숙, 2000). 이때 북옥저로 망명한 것은 지배집단과 피지배층 일부일 뿐 부여의 구성원 전체가 이주해 온 것은 아니었으므로, 동부여의 피지배민은 이전부터 고구려의 복속민이었던 북옥저민이었다. 〈광개토왕비문〉에서 동부여가 원래 고구려의 ‘속민’이었다고 하는 것은 바로 건국 당시의 이런 상황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런데 북옥저 지역에 북부여의 망명집단을 안치해 동부여를 건국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은 고구려가 이 지역을 확고하게 지배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전제되어야 한다. 지역 내부를 고구려의 통치 목적에 맞게 적절하게 재편한 이후라야 하고, 주민들에 대해서도 밀착지배가 행해졌어야 가능한 일이다. 단순히 재지지배층을 통한 간접적인 집단통치, 공납통치의 수준이었다면 불가능할 것이다.
실제로 책성 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관심은 지대했으며, 일찍부터 적극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여러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빈번하게 국왕의 순수가 이루어졌으며, 왕의 체류 기간도 상당히 길었다. 그리고 한의 평주인(平州人) 하요(夏瑤) 일행을 집단안치하여 지역 개발을 도모하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책성수리(柵城守吏)를 두고 지키게 했으며 그들의 노고를 위로하는 연회를 베풀기도 했다.
이때의 책성수리는 중앙에서 파견한 수(守)와 재지지배층 가운데에서 임명한 이(吏)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이 책성수를 지방관으로 보기는 어렵다. 책성수는 이 지역에 상주하는 소규모 군대를 지휘하는 장수로서 북옥저의 재지지배층과 주민의 동향을 감시하는 역할도 했지만, 주된 임무는 인접한 미복속 소국에 대한 정찰과 방어였다. 그러므로 지방관의 고유 업무를 수행하는 3세기 말 이후의 태수(太守)나 재(宰)와는 성격이 달랐다. 책성수리가 북옥저에 주둔한 군대의 지휘관이었다면 다른 전략요충지에도 고구려 군대를 주둔시켰을 가능성이 있다.
초기 고구려의 복속민 통치방식 세 번째 유형으로는, 정복 지역을 고구려 관인에게 식읍(食邑)으로 주어 관할케 한 지배방식을 들 수 있다. 식읍주는 자신의 식읍으로부터 토지세와 호세, 부역 등을 모두 거두었는데, 그런 수취를 지속하기 위해 식읍민들을 자신의 힘으로 관리했다. 따라서 식읍 사여도 지방지배의 한 방식으로 볼 수 있다.
식읍의 내용에 대해서는 그 지역의 주민과 토지 등 전반적인 면에 대한 권리를 주었다는 설(강진철, 1965)과 그 지역에 대한 수취권만을 주었다는 설(李景植, 1988)로 나뉘어져 있다. 고구려 초기에는 토지 소유보다는 노동력 보유가 더 중요했을 것이므로 앞의 설이 더 타당해보인다. 시간이 흐를수록 중앙정부에서는 가혹한 수탈을 감시하고 제제를 가하는 등 식읍주의 권한을 점차 축소시켜 나갔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수조권만을 부여하고 경제 외적인 지배권은 모두 차단했으므로 식읍 자체가 경제적 의미만을 지니게 되었다.
식읍은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을 때 전투 결과 획득한 지역이나 종족의 부락 집단 전체를 공훈자에게 주는 예가 많지만, 국왕의 특별 은사품이 필요하다거나 할 때 국왕이 보유하고 있던 지역을 주는 경우도 있었다. 명림답부나 차대왕의 태자 추안(鄒安) 등에게 주어진 지역과 부락 등은 계루부가 관할하고 있던 지역이다.
식읍을 보유하게 되면 식읍주는 그 지역 주민과 토지에 대한 제반 관할권을 모두 가지게 되어 식읍민으로부터 조용조에 해당하는 각종 물자를 수취하고 부역을 강제할 수 있었다. 이것은 부의 대가가 자체 관인을 두고 반독자적으로 부민을 통치했던 것과 유사하다. 이런 점에서 다물후(多勿侯) 송양(松讓)에게 비류국(沸流國)이었던 다물도(多勿都)를 계속 다스리게 한 것을 식읍의 시원으로 볼 수 있다. 즉 식읍은 정복지나 계루부 관할지역을 공훈에 대한 포상으로 받는 경우도 있지만, 자신이 통치하던 소국이나 부에 대한 지배권리를 국왕에게 재인정받아 그대로 보유하는 형식을 취하는 경우도 있었다.
식읍주의 식읍지 관리는 재지지배층을 통해 수취를 하되 수시로 자신의 가신(家臣)을 파견해 감시, 감독하는 방식이 가장 보편적이었다. 그러나 식읍으로 하사하기 전에 그 지역의 지배층 일부를 제거하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키는 경우도 있고, 중앙관직을 주어 왕도(王都)로 옮겨 가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숙신은 계절성 이동을 하며 부락생활을 하는 등 예맥이나 한(韓)과는 생활방식이 달랐지만, 고구려와 일찍부터 접촉이 있었으며 말기까지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산림족이었다. 『후한서』와 『삼국지』 읍루전과 『진서(晉書)』 숙신씨전에 의하면 이들은 지상가옥을 짓지 않고 지하주거를 했다. 그런데 서천왕 11년인 280년 10월에 고구려에 쳐들어와 변방의 백성을 살해한 숙신은 그 중심 근거지가 단로성(檀盧城)이었다. 이들에 대해 송화강(松花江) 유역에 분포해 있던 종족으로서 예맥족과 빈번하게 접촉하며 생활하는 과정에서 성을 구축하는 등 문화적인 변화를 부분적으로 겪은 사람들이라고 보는 설(김현숙, 1992)과 연해주 중부 및 삼강평원에 거주한 종족집단으로 봉림(鳳林)문화와 관련지어 볼 수 있다는 설(이정빈, 2019)이 있다.
북부여와 고구려의 인접지역에 거주하던 숙신에 대한 정복은 고구려가 북부여 지역으로 진출해 들어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고구려는 단로성을 공략한 후 그 추장을 죽이고 600여 가를 부여의 남쪽지역에 있던 오천(烏川)으로 옮기는 한편, 항복한 부락 6~7개소는 부용(附庸)으로 삼았으며, 가장 공을 세운 달가에게 숙신 부락에 대한 지배권을 주었다. 무공이 뛰어났던 달가에게 항복한 숙신 부락을 식읍으로 주어 숙신의 이탈을 방지하고 저항을 막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부여 남쪽으로 옮겨진 사람들은 주로 단로성과 그 주변에 거주했던 주민들로서 지배층이 많았을 것이다. 그 추장을 죽이고 600여 가를 부여의 남쪽으로 옮긴 일차 목적은 재지지배층을 제거함으로써 숙신 부락 자체에 대한 지배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와 동시에 부여에 대한 방파제이자 공격거점으로 삼기 위해 부여와의 경계지점으로 사민했다고 볼 수도 있다. 즉 고구려 중앙정부에서는 달가에게 숙신 부락에 대한 경제적 권리와 함께 변경 방어와 복속민 관리라는 의무도 함께 부과했던 것이다. 요컨대 복속지를 식읍으로 사여함으로써 경제적 수취권을 주는 동시에 지역지배를 맡기는 것도 고구려의 영역지배방식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이 외 고구려의 복속민 지배방식으로는 복속민의 대표자에게 고구려 관직을 주어 지역통치를 일임하거나, 구 지배자를 제거한 후 새로운 지배자를 선임하여 그를 통해 간접통치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개별적으로 포로화한 경우에는 그들만으로 특수천민부락을 조성해 수탈하는 경우도 있었고 노비로 만든 다음 개별적으로 귀족들에게 분여하기도 했다. 이것은 다른 나라의 복속민 지배방식에서도 나타나는 보편적인 방법으로 고구려에서도 많이 사용했을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온 바와 같이 고구려는 건국 이후 편입한 집단예민과 포로 등 복속민에 대해 재지지배층을 통한 간접통치, 집단지배를 일반적으로 실시했다. 그 내부를 면밀히 검토하면 상당히 다양한 지배방식이 적용되고 있었으며, 재지지배층에게 전적으로 지배권을 일임하지는 않았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때의 기본적인 지배 형태는 다원적이고 간접적인 통치였지만, 중앙정부에서 궁극적으로 지향한 것은 국왕에 의한 일원적이고 직접적인 지배였다. 간접지배에서 직접지배로의 전환은 3세기 말에 이루어졌다. 영토 확장과 내부 생산력의 발전으로 인한 국력의 성장, 문화적 성장, 이런 여러 방면에서의 성장을 제도적으로 반영한 체제 정비 등이 영역지배방식의 변화를 이끌어낸 동인(動因)이었다. 왕권 강화와 함께 국왕의 대민관(對民觀)이 변화됨으로써 민의 사회적 위상이 정립되었고, 그와 동시에 복속민도 민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