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1~3세기 국제정세와 대외교섭
4장 1~3세기 국제정세와 대외교섭
고구려는 1세기 말 제2현도군을 축출하여 중국 군현세력의 직접적인 압박을 막아내고, 4세기 초에는 중국의 동방 지배거점인 요동군·현도군과 낙랑군·대방군을 점령하여 그 지역을 영역화하였다. 중국 군현의 설치와 소멸은 연(燕)·진(秦)·한(漢)으로 이어진 고대 중국에 있어서 동방 진출의 성쇠를 상징한다.
고구려의 국가적 성장은 전한 후기부터 서진대까지 지속되었다. 이 시기에는 고구려뿐만 아니라 중국 주변 이민족이 변경 요새 안으로 이주와 진출을 본격화하였다. 전한 무제(武帝)대와 같은 중국의 영토적 팽창은 정체되었으며, 이민족에 의한 대분열의 시대로 가는 과도기였다(谷川道雄, 1989).
물론 후한 초기, 요동에서의 공손씨(公孫氏) 정권 등장과 자립, 그리고 조위(曹魏)와 서진(西晉)으로 이어진 중국 왕조의 교체마다 고구려에 대한 압박과 대외관계의 파동은 계속되었다. 고구려는 중국 왕조 및 유목민족과의 관계 설정에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대외관계의 방향을 체득하였다.
이 글에서는 1~3세기 고구려의 대외관계 추이를 다음과 같은 순서로 서술하였다.
1절에서는 전한 무제대와 달라진 후한의 방어적 대외정책 속에서 고구려가 제2현도군을 무순(撫順) 방면으로 몰아내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는 후한이 흉노·오환·선비 등 유목민족을 정벌하고 회유하는 과정에서 고구려가 능동적으로 대처한 결과였다.
2절에서는 후한 말 50년간 지속된 공손씨 정권과의 관계 속에서 고구려의 대외관계 변화상을 살펴보았다. 이 시기 고구려는 요동을 중심으로 자립한 공손씨 정권이 조위와 손오(孫吳)의 대립을 이용하여 벌인 외교교섭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3절에서는 북중국을 통일한 조위와 이어 삼국을 재통일한 서진이 팔왕(八王)의 난을 계기로 멸망하기 전까지 고구려와의 대외관계를 살펴보았다. 특히 240년대 조위의 고구려 침략 의도와 서진 무제대 동방정책에 대한 고구려의 대응을 살펴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