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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1. 후한의 변군 운용과 고구려의 제2현도군 축출

1. 후한의 변군 운용과 고구려의 제2현도군 축출

1) 후한의 변경 지배
고구려를 비롯한 동이(東夷) 제국(諸國)과 후한의 교섭에 대해서 『후한서』 동이전 서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왕망(王莽)이 찬탈하여 황제가 되자, 맥인(貊人)이 변경에 쳐들어와서 노략질하였다. 건무(建武) 초에는 다시 와서 조공하였다. 이때 요동태수 채융(祭肜)의 위세가 북방을 떨게 하고 명성이 해외에까지 진동하니, 이에 예맥(濊貊)·왜(倭)·한(韓) 등이 만 리 밖에서 조공하였다. 그리하여 장제(章帝)·화제(和帝) 시대 이후로 사절이 왕래하다가 영초(永初) 연간에 다난(多難)하게 되자 드디어 중국을 침입하여 노략질하였으며, 환제(桓帝)·영제(靈帝)가 실정(失政)하여 국내가 어지럽게 되니 그런 일이 점점 잦아지게 되었다. 
위 사료는 왕망대부터 후한 말까지 ‘동이’ 교섭에 대한 통사적 서술을 시도하고 있다(吉本道雅, 2010). 여기에는 상투적이거나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내용이 들어 있지만, 두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후한 광무제(光武帝) 건무 초부터 화제까지의 기간이다. 후한 건무 8년(32년) 고구려왕의 통교로 시작된 교섭은 비교적 평온한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반면, 안제(安帝) 영초 연간부터 공손씨 정권이 요동에서 자립하던 영제 말까지는 고구려가 후한과 치열한 공방을 벌인 기간이었다.
후한 전반기인 광무제부터 화제까지(25~104년) 고구려를 비롯한 주변의 동향을 관련 사료를 통해 정리하면 표 1과 같다. 이를 통해 볼 때, 광무제에서 화제에 이르는 시기 후한과 고구려는 직접적인 전쟁이나 분쟁 기록이 확인되지 않는다. 고구려와의 교섭 기록은 건무 8년(32년)에 이르러서야 처음 나타난다. 이때 왕망에 의해 강등되었던 고구려의 왕호를 광무제가 회복한 것을 『후한서』에서는 특별히 강조하였지만, 이후로도 교섭 기록이 이어지지 않고 있다. 앞서 살펴본 『후한서』 동이전 서문에 기록된 대로 평온한 통교와 교섭이 지속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건무 원년(25년) 적미(赤眉)의 잔당이 요동으로 들어오자 맥인(貊人)에 의해 전멸되었고, 그림1에서 보는 대로 건무 5년(29년)에는 현도군과 낙랑군에 대사조서(大赦詔書)가 내려졌다(張德芳, 2021). 낙랑군에 사면령을 내린 것은 토인(土人) 왕조(王調)의 반란과 할거가 수년간 지속되다가 진압한 후의 일로, 실제 집행은 조서를 내린 이듬해(30년)에 이루어졌다.주 001
각주 001)
『후한서』 광무제기, “(建武六年) 初, 樂浪人王調據郡不服, 秋, 遣樂浪太守王遵擊之, 郡吏殺調降. 秋九月庚子, 赦樂浪謀反大逆殊死已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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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도군에도 유사한 일이 있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요동군 또한 이 당시 정상적인 군현 운영이 곤란한 시기였다(권오중, 1993). 『후한서』 광무제기에 따르면, 건무 16년(40년)까지도 유주(幽州) 소속 군현에는 대성(大姓)·군도(群盜)가 곳곳에서 일어나 관아를 공격하고 장리(長吏)를 살해하는 일이 빈번하였다.
그림1 | 건무 5년(29년) 대사조서 실행문서(居延新簡 EPF:69·67·68)
- 광무제가 남해(南海) 7군과 장가·월수·익주, 그리고 현도·낙랑 등 16개 변경 군현에 내린 대사조서에 따른 장액군 거연현의 실행 관련 문서이다(張德芳 編, 2015, 『甘肅秦漢簡牘集釋: 居延新簡集釋(7)』, 甘肅文化出版社, 19~20쪽).
표1 | 후한 전반기 고구려와 주변 동향
연호(연도)내용문헌
경시 2(24)유수(劉秀)가 유주(幽州) 10군(요동 … 낙랑·현도)의 군병(郡兵) 동원.『후한서』 경감전
『자치통감』 회양왕 경시2년조
건무 1(25)[적미(赤眉) 등] 적이 요서·요동으로 들어가니, 오환과 맥인(貊人)에 의해 초격(鈔擊)되어 전멸.『후한서』 경감전
건무 5(29)남해 7군과 현도·낙랑 등 12개 변경 군현에 대사조서(大赦詔書)를 내림.거연신간(居延新簡)
EPF22 : 69·67·68
건무 6(30)모든 군의 도위(都尉)를 없애고, 태수가 그 직임을 겸했으며, 도시(都試) 폐지.『후한서』 광무제기
『속한서』 백관지5
낙랑군 동부도위가 폐지되고, 영동 7현은 토착 거수(渠帥)를 후(侯)로 삼아 후국(侯國)이 되자 해마다 조공.『삼국지』 동옥저전, 예전
『후한서』 동옥저전, 예전
경시제(更始帝)가 패한 이래 낙랑군에서 할거하던 왕조(王調)가 신임 낙랑태수와 현지 토착 한인들에 의해 진압되고, 전해 내려진 조서에 따라 사면과 포상이 이어짐.『후한서』 광무제기, 왕경전
건무 8(32)12월, 고구려왕이 사신을 보내 조공.『후한서』 광무제기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므로 왕호(王號)를 회복시킴.『후한서』 고구려전
건무 17(41)요동태수 채융(祭肜)주 002
각주 002)
요동태수 ‘祭肜’은 ‘祭彤’ 혹은 ‘蔡彤’ 등으로 사료마다 다양하게 표기되고, 학자마다 이를 제융·제동·채융·채동 등으로 제각각 읽고 있다. 『후한서』 이현주(李賢注)에 ‘祭音側界反’이라 하였다. 또한 송대 운서(韻書)에 읍명(邑名)과 성씨로 쓸 경우 역시 ‘채’로 발음한다는 기록이 있다(김효진, 2018). 또 ‘肜’과 ‘彤’은 서로 통하는 글자인데, 『후한서』 송본(宋本)과 『한원(翰苑)』에 ‘肜’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祭肜’으로 쓰고 ‘채융’으로 독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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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임.
『후한서』 채융전
건무 20(44)가을, 동이(東夷) 한국인(韓國人)이 무리를 이 끌고 낙랑에 내부함.『후한서』 광무제기
한인(韓人) 염사인(廉斯人) 소마시(蘇馬諟) 등이 낙랑에 와서 공헌하자, 광무제가 ‘한염사읍군(漢廉斯邑君)’에 봉함.『후한서』 한전
건무 22(46)선우의 사망과 기근으로 약해진 흉노가 오환의 공격을 받아 북쪽으로 이동하자, 변경 군현의 정후이졸(亭候吏卒)을 모두 철수시킴.『후한서』 광무제기
건무 23(47)10월, 고구려가 종인(種人)을 거느리고 낙랑에 내속.『후한서』 광무제기
겨울, 구려(句驪) 잠지락(蠶支落) 대가(大加) 대승(戴升) 등 1만여 명이 낙랑에 내속.『후한서』 고구려전
10월, 잠우락부(蠶友落部) 대가(大家) 대승(戴升) 등 1만여 가가 낙랑에 투항.『삼국사기』 민중왕 4년조
건무 25(49)요동요외(遼東徼外) 맥인이 우북평·어양·상곡·태원을 노략질하니 요동태수 채융이 불러 항복시킴.『후한서』 광무제기
구려가 우북평·어양·상곡·태원을 노략질하자 요동태수 채융이 은신(恩信)으로써 부르니, 모두 변경을 두드림.『후한서』 고구려전
요동요외 맥인이 변경을 노략질하니 태수 채융이 이들을 불러서 항복시킴. 또한 선비대도호를 어루만지고, 그로 하여금 다른 종족을 초치하게 하였더니 연이어 변경 요새에 닿게 되었음.『자치통감』 광무제 건무 25년조
선비 이종(異種)인 만리(滿離)와 고구려[에 딸린] 무리가 변경 요새를 두드려 초구(貂裘)·호마(好馬)를 바침.『후한서』 채융전
부여왕이 사신을 보내 봉헌, 광무제가 후하게 답을 하니, 이로부터 해마다 조공이 이어짐.『후한서』 광무제기, 부여전
건무 27(51)장궁(臧宮)이 흉노 제압을 위해 고구려·오환·선비를 동원하자는 상서를 올렸으나, 황제가 받아들이지 않음.『후한서』 장궁전
건무중원 2(57)왜노국(倭奴國) 사승(師升)이 조공하자 광무제가 인수(印綬)를 내림.『후한서』 광무제기, 왜전
영평 1(58)요동태수 채융의 명성에 따라 서쪽 무위(武威)부터 동쪽 현도와 낙랑까지 호이(胡夷)의 내부가 잇따름.『후한서』 채융전
영평 2(59)명당(明堂)의 광무제 제사 때 오환·예맥이 함께 받듦.『후한서』 명제기
영원 16(104)요동군 동부도위와 서부도위를 다시 설치함.『후한서』 화제기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 유리왕은 부여와 선비, 그리고 양맥(梁貊)에 대한 정복전쟁을 시도했으며, 대무신왕은 낙랑과 옥저를 복속시켰다(여호규, 2015). 변경 군현의 운영이 혼란한 후한 건국기를 이용해 고구려가 주변지역으로 지배력을 확장해 나간 것이다. 특히 건무 6년(30년) 후한은 낙랑군 동부도위를 폐지하고 관할하던 영동 7현을 토착 거수가 다스리는 후국으로 전환하였다. 이는 고구려 대무신왕대 옥저 방면으로의 세력 확대에 따른 불가피한 조치로 보인다(이종록, 2022).
하지만 채융이 건무 17년(41년) 요동태수로 부임하면서 고구려의 세력 확대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채융은 3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요동태수로 있으면서 흉노·오한·선비의 결집을 방지하는 한편 회유와 정벌로 그들을 제압하였다(蘇衛國, 2017). 『후한서』 채융전에 따르면, 건무 21년(45년) 선비 1만여 기병이 요동을 침략하자, 수천 명의 적은 병력을 이끌고 3,000여 명을 참수하고 수천 필의 말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는데, 선비가 공포에 떨고 채융을 두려워하여 다시는 새(塞)를 넘보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전술한 대로 이 시기 후한과 고구려는 전쟁 등 물리적인 충돌이 보이지 않는다. 후한의 북변에 흉노와 오환·선비가 있어 방어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때 흉노·선비 및 적산오환(赤山烏桓)은 연화(連和)하여 강성해져서 자주 새(塞)에 침입하여 이인(吏人)을 살해하였다. 조정은 근심하여 변경의 병사를 더욱 늘리니, 변군에 수천 명이 있게 되었고, 또한 여러 장수를 보내어 장새에 분둔(分屯)하게 했다. _  
즉 당시는 흉노·선비·오환이 연합하여 침입하는 것이 문제였기 때문에 채융은 이러한 변환(邊患)을 해결할 적임자로 발탁되었던 것이다(권오중, 1993). 채융의 대책은 이들 간의 연화를 막아내고 이간시키는 한편 선비로 하여금 흉노와 오환을 공격케 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선비대도호 편하(偏何)를 재물로 회유하여 건무 25년(49년)에 흉노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자신이 획득한 흉노의 수급에 따라 상사(賞賜)를 받았다. 편하는 영평 원년(58년) 마침내 적산오환을 격파하기에 이른다.
한편, 비슷한 시기인 건무 23년(47년) 고구려의 잠지락(蠶支落) 대가(大加) 대승(戴升)이 무리를 이끌고 낙랑에 내속했고, 건무 25년(49년)에는 선비 이종(異種) 만리(滿離)와 고구려[에 딸린] 무리가 이탈하였다. 같은 해 부여왕의 조공이 이어졌다.
잠지락은 『삼국사기』에 ‘잠우락부(蠶友落部)’로 되어 있는데, 영동 7현 가운데 하나인 잠태(蠶台)현에 해당한다. 건무 6년(30년) 동부도위 폐지를 전후한 시기부터 고구려의 지배를 받다가 다시 환속한 것이다. ‘만리(滿離)’의 경우, 뒤에 붙은 ‘高句麗之屬’을 수식하는 표현으로 보아 고구려에 예속된 것으로 해석해 왔다. 하지만 이재성의 문제 제기로 이를 ‘선비 이종 만리와 고구려의 무리’로 해석하는 것이 최근 추세이다(이재성, 2002; 김효진, 2018). 이에 동의하지만 ‘고구려의 무리’를 고구려 그 자체로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이병도, 1977).
표1을 보면 고구려는 이미 건무 8년(32년) 고구려왕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면서 왕망에 의해 후로 강등된 작호를 왕으로 회복한 바 있다. 건무 23년(47년) 고구려가 낙랑에 내속하였다 했지만, 실상은 고구려에 예속되어 있던 영동 7현의 하나인 잠지락 대가 대승이 낙랑으로 이탈한 것이다. 또한 건무 25년(49년) 『후한서』 고구려전에는 우북평·어양·상곡·태원을 공격한 구려가 요동태수 채융의 회유로 모두 변경에 조공하였다 했지만, 『후한서』 광무제기에는 ‘요동요외 맥인(遼東徼外貊人)’의 일로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 혹은 구려라 하였지만, 고구려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후한서』 채융전에 기록된 ‘고구려의 무리(高句麗之屬)’라 표현된 집단은 고구려 ‘잠지락 대가가 이끈 종인(種人)’이나 ‘요동요외 맥인’과 같이 고구려처럼 인식되던 고구려의 예속민들로 생각된다. 좀 더 추측한다면 ‘고구려의 무리’는 선비 만리와 지리적으로 인접한 지역의 고구려계 주민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만리 집단과 고구려 무리의 조공이 선비대도호 편하의 주선에 따라 연이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후한서』 부여전은 같은 해(49년) 부여왕이 보낸 사신에 대하여 ‘광무제가 후하게 보답하니, 이에 사절이 해마다 왕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역시 요동태수 채융의 회유에 따른 조공이었지만, 낙양으로 보내 황제의 상사를 이끌어낸 것이다. 이는 전한대 부여왕의 장례에 제후의 옥갑(玉匣)을 내려 후대한 것을 이은 조치라 하겠다(田中俊明, 2021). 선비와 고구려·예맥 사이에 끼어 있는 부여의 역할을 중시한 것이다. 곧, 부여에 대한 후대는 오환·선비 등 유목민족과 고구려·예맥 간의 연결을 차단하려는 후한의 이이제이(以夷制夷)에 따른 조치였다.
이처럼 후한은 고구려의 왕호를 복원하여 정상적인 교섭을 이어가되, 요동 맥인, 선비 만리와 그 주변 고구려 무리, 구려 잠지락, 부여 등을 회유하여 고구려와의 결속과 지배력을 무력화시키고자 하였다. 나아가 요동군을 중심으로 선비와 동이 제족 등 이민족에 대한 지배가 효과를 발휘하자 고구려에까지 군사 동원을 계획하였다.
[건무 27년 5월 낭릉후 장]궁(臧宮)이 양허후 마무(馬武)와 함께 편지를 올려 말하였다. 흉노는 이익을 탐하며 예의와 신의를 갖고 있지 않으니, 궁색하게 되면 머리를 조아리고 편안하면 침략하여 도적질을 합니다. … 지금 장군들에게 요새지역으로 나아가도록 명령하고 현상금을 후하게 내걸고, 고구려·오환·선비에게 그 왼쪽을 공격하도록 타이르십시오. 하서(河西) 4군과 천수(天水)와 농서(隴西)의 강족(羌族)과 호족(胡族)을 발동하여 그 오른쪽을 치십시오. 이와 같이 한다면 북쪽 오랑캐가 멸망하는 데 불과 몇 년밖에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_ 『후한서』 장궁전  
건무 27년(51년) 장궁과 마무는 오환·선비와 함께 고구려를 동원하여 흉노를 공격할 것을 건의하였다. 당시 흉노는 건무 23년(47년)부터 시작된 계승분쟁에서 패배한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가 무리를 이끌고 장성(長城) 부근으로 내려와 남흉노를 칭하면서, 건무 25년(49년) 북흉노를 공격해 멀리 물러나게 한 다음 후한에 투항하여 번병(藩屛) 역할을 하던 시기였다(이재성, 2002; 吉本道雅, 2009).
결국 장궁과 마무의 계획은 남흉노의 공격으로 쇠약해진 북흉노를 완전히 소멸시키자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흉노의 좌비(左臂)에 해당하는 동역(東域)의 선비·오환과 더불어 고구려병을 동원하자는 것이라 하겠다. 이 계획은 광무제의 반대로 무산되었지만, 당시 후한의 고구려에 대한 이해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전한 이래 흉노의 좌방(左方)은 대체로 대흥안령을 기준으로 그 남부의 시라무렌하·노합하·요하 상류 유역으로, 그 동쪽은 조선·예맥에 접하였다(王海·劉俊, 2017). 『후한서』 오환선비전에 의하면, 166년 선비 단석괴(檀石槐)가 흉노 고지(故地)를 차지하면서 좌방에 해당하는 곳을 동부(東部)라 부르고 역시 부여·예맥과 접하였다. 흉노의 좌방과 선비의 동부는 조선·부여·예맥 등 동이계 세력이 유목국가와 접촉하던 경계라 하겠다.
따라서 장궁과 마무의 계획은, 전한 무제가 고조선을 정복하고 낙랑군·현도군을 개설한 것을 가리켜 흉노의 ‘왼팔(左臂)’을 잘랐다고 일컫고,주 003
각주 003)
『한서』 위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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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망대 흉노 정벌의 동역에 해당하는 정벌군으로 고구려병을 동원하여주 004
각주 004)
『한서』 왕망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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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의 왼쪽 겨드랑이(左掖)를 자른다는 것도 같은 인식 아래 나온 것이다. 고구려 등 동이 지역은 흉노·선비와 결속할 수도 있으며, 반대로 그를 이용해 흉노를 측면에서 공략하게 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건무 27년(51년) 장궁·마무의 고구려병을 동원한 북흉노 정벌 계획은 고구려에게 이이벌이(以夷伐夷)의 역할을 기대한 것이었다. 이는 이적불신론(夷狄不信論)에 기반한 기미정책(羈靡政策)이었다(김한규, 1988; 保科季子, 2007; 홍승현, 2011).
이처럼 왕망대에 이어 광무제 시기에도 흉노 정벌과 적미와 같은 반란세력의 진압을 위해 고구려 병사의 동원이 강제되고 있었다. 표1을 보면 경시 2년(24년) 광무제는 대장군 경감(耿弇)으로 하여금 유주 10군의 군병(突騎)을 동원하고 있다. 유주 10군에 포함된 요동군·현도군도 동원 대상이었다. 『자치통감』의 해당 기록에는 이것이 강행된 것으로 나타난다. 실제 이듬해 요동에 들어온 적미의 잔당이 맥인에 의해 전멸된 것은 이에 따른 것으로 이해된다. 동원된 맥인은 기록에 따라 ‘고구려’로 표현되기도 하였지만, 요동군과 현도군 내(塞內)의 예맥 집단이 대상이었다. 물론 새외(혹은 徼外) 예맥의 경우도 군현의 회유에 따라 참가하였을 것이다. 이는 제2현도군의 변경 방비와 이민족 지배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였다.
 
2) 고구려의 제2현도군 축출과 세력 확장
앞서 인용한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광무제부터 화제대까지 고구려와 후한 간의 교섭은 비교적 평온한 것처럼 서술한 반면, 안제부터 영제 말까지는 치열한 공방이 오간 기간이었다.
표2는 화제 원흥 원년(105년)부터 영제 희평 3년(174년)에 이르는 시기 고구려와 후한의 교섭 및 그 주변세력(부여·예맥·선비 등)의 동향을 정리한 것이다. 전반기와 달리 후반기에는 고구려와 후한의 요동군·현도군과 대규모 전쟁이 계속되었다.
먼저 『후한서』 고구려전에 따르면, 원흥 원년(105년)에 고구려가 요동군의 경계를 넘어 6개 현을 침범하자, 요동태수 경기(耿夔)가 반격에 나서 고구려의 거수를 참수하였다 한다. 106년에는 요동군의 3개 현(고현·후성·요양)을 현도군 관할로 삼았다. 이때의 현도군 개편을 두고, 전해인 105년에 고구려가 요동 공략과 함께 제2현도군을 점령했으며, 이때 소자하 유역에 있던 제2현도군이 혼하 방면으로 축출되었는데, 이를 제3현도군으로 이해해 왔다.
표2 | 후한 후반기 고구려와 주변 동향
연호(연도)내용문헌
원흥 1(105)① 춘정월, 고구려가 [요동]군의 경계를 노략질함. 9월, 요동태수 경기(耿夔)가 맥인을 쳐서 깨트림.『후한서』 화제기
② 맥인이 [요동]군의 경계를 노략질함. 경기가 추격해 거수를 참살함.『후한서』 경기전
③ 요동맥인(遼東貊人)이 반란을 일으켜 [요동의] 6개 현을 노략질하자, 상곡·어양·우북평·요서의 오환을 시켜 토벌함.『속한서』 천문지
④ 봄, [고구려인이] 다시 요동에 들어와 6개 현을 노략질하자, 태수 경기가 격파하고 거수를 참살함.『후한서』 고구려전
⑤ 봄, 고구려왕 궁이 요동새(遼東塞)로 들어와 6개 현을 노략질함. 9월에 요동태수 경기가 고구려를 쳐 깨트림.『자치통감』 화제기
영초 1(107)요동군 소속의 고현(高顯)·후성(侯城)·요양(遼陽)을 현도군으로 분속함.『속한서』 지리지
유소주(劉昭注)주 005
각주 005)
(東漢)劉珍 等 撰, 2008, 『東觀漢記校注』 上, 中華書局, 1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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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초 3(109)고구려가 사신을 보내 공헌함.『후한서』 안제기
영초 5(111)해적 장백로(張伯路)의 무리가 요동으로 도망쳐 오자, 요동인(遼東人) 이구(李久) 등이 참수하고 해적을 평정함.『후한서』 법웅전
부여이(夫餘夷)가 새(塞)를 침범하고 이인(吏人)을 살상함.『후한서』 안제기
부여왕 시(始)가 보기(步騎) 7,000~8,000명을 거느리고 낙랑을 노략질하고 이민(吏民)을 살상함.『후한서』 부여전
3월, 부여왕이 낙랑을 노략질함. 고구려왕 궁이 예맥과 현도를 노략질함.『자치통감』 안제기
[고구려왕] 궁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며, 현도에 속하고자 함.『후한서』 고구려전
원초 1(114)고구려왕 궁이 자주 유부(幽部)를 노략질함.『자치통감』 안제기
원초 5(118)고구려가 예맥과 함께 현도를 노략질함.『후한서』 안제기
예맥과 함께 현도를 노략질하고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함.『후한서』 고구려전
건광 1(121)① 유주자사 풍환이 2군(현도·요동)태수와 고구려·예맥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함.『후한서』 안제기
② 봄, 유주자사 풍환, 현도태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이 변새를 나와 [고구려를] 치고, 예맥 거수를 잡아 죽이자, 궁이 아들 수성(遂成)을 보내 항복함. 요광이 마음을 놓자 험로를 막아 대군의 발을 묶고 그 사이 현도와 요동을 공격하여 성곽을 불태우고 2,000여 명을 살상함. 이에 광양·어양·우북평·탁군·[요동]속국에서 기병을 모아 구원케 하였으나, 맥인은 이미 철수함.『후한서』 고구려전
③ 4월, 예맥이 다시 선비와 요동을 노략질하자, 요동태수 채풍이 추격하다 전사함.『후한서』 안제기
④ 여름, [고구려는] 요동 선비와 함께 요수 공격, [요동태수] 채풍이 추격하다 신창(新昌)에서 전몰하고, 공조·병조연·병마연 등 100여 명이 전사함.『후한서』 고구려전
⑤ 4월, 요동속국도위 방분(龐奮)이 새서(璽書)를 위조하여 현도태수 요광을 살해함.『후한서』 안제기
⑥ 가을, 궁이 마한·예맥의 수천 기병으로 현도를 에워싸니,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에게 2만여 명을 주어 주군과 함께 격퇴함.『후한서』 고구려전
⑦ 11월, 선비가 현도를 노략질함.『후한서』 안제기
⑧ 겨울 12월, 고구려·마한·예맥이 현도성을 에워싸니, 부여왕이 아들을 보내 주군과 함께 격퇴함.『후한서』 안제기
연광 1(122)봄 2월, 부여왕이 아들을 보내 현도를 구하고, 고구려·마한·예맥을 쳐서 깨트림. 사신을 보내 공헌함.『후한서』 안제기
수성이 한의 생구(生口)를 돌려보내고, 현도에 나와 항복함.『후한서』 고구려전
가을 7월, 고구려가 항복함.『후한서』 안제기
연광 3(124)6월, 선비가 현도를 노략질함.『후한서』 안제기
영건 2(127)2월, 선비가 요동·현도를 노략질하자, 오환교위(烏桓校尉) 경엽(耿曄)이 남선우(南單于)를 이끌고 격파함.『후한서』 순제기
2월, 요동선비가 요동·현도를 노략질하자, 오환교위 경엽이 변경의 여러 군병(郡兵)과 오환을 거느리고 크게 이기니, 선비 3만 명이 요동에 항복함.『자치통감』 순제기
양가 1(132)9월, 선비가 요동을 노략질함.『후한서』 순제기
10월, 선비가 요동을 노략질하고 이민을 살상함.『후한서』 순제기
『속한서』 천문지
겨울, 선비가 또다시 요동속국(遼東屬國)을 노략질하자 경엽이 물리침.『자치통감』 순제기
12월, 현도군에 둔전 6부(屯田六部)를 설치함.『후한서』 순제기
영화 1(136)부여왕이 조공함.『후한서』 순제기
순환지간주 006
각주 006)
순제(順帝)와 환제(桓帝)의 교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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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147)
요동을 침범하여 신안·거향을 노략질하고 서안평을 공격하였는데, 그 길 위에서 대방령을 살해하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납치함.『삼국지』 고구려전
연희 4(161)부여왕이 사신을 보내 공헌함.『후한서』 환제기
영강 1(167)부여왕이 현도를 노략질하자, 현도태수 공손역이 격퇴함.『후한서』 환제기
건녕 1(168)선비와 예맥이 함께 유주·병주를 노략질함.『후한서』 영제기
건녕 2(169)현도태수 경임(耿臨)이 [고구려를] 토벌하니, 백고(伯固)가 항복하여 요동에 속함.『삼국지』 고구려전
희평 연간(173~178)백고가 현도에 속하기를 요청함.『삼국지』 고구려전
희평 3(174)부여국이 사신을 보내 공헌함.『후한서』 영제기
최근 제2현도군이 축출된 구체적 시기와 관련하여 105년보다 앞선 97년을 전후하여 고구려가 점령하였을 것으로 본 견해가 있다(여호규, 2015). 105년 고구려가 요동군의 ‘군계(郡界)’를 넘었는데, 이 군계를 『자치통감』에 표기된 ‘요동새(遼東塞)’와 동일한 것으로 본 데 따른 것이다. 제2현도군의 사정을 전하는 『한서』 지리지에는 현도군이 요동새외에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고구려가 요동군계(요동새)를 넘던 105년 이전에 이미 제2현도군이 점령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97년 선비는 난하(灤河)에서 요서에 이르는 변경 군현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하였는데, 고구려 또한 그 무렵을 전후하여 제2현도군을 점령하였다는 것이다.
제2현도군이 97년 무렵 축출되었다는 새로운 견해에 대해 의문도 있다. 표 2 원흥 원년(105년)의 내용을 보면, ①, ②, ④는 『후한서』 내용인데, ①은 공격의 주체와 반격이 별개의 사건처럼 묘사되어 있으며, ②, ④는 공격과 반격이 동시에 이루어진 것으로 기록되었다. ③은 사마표(司馬彪)가 지은 『속한서(續漢書)』의 내용으로, 공격의 주체가 『후한서』와 다를 뿐 아니라 반격대상 또한 오환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계통이 다른 사료로 보인다.
이처럼 105년 요동군을 공격한 주체에 대해서는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다. 가장 앞선 기록인 『속한서』에는 ‘요동맥인’, 『후한서』 화제기·경기전에는 ‘맥인’이라 하였고, 동이전에는 ‘고구려’의 일로 기록하였다. 『후한서』 고구려전은 고구려 주변 여러 예맥계 집단의 활동을 모두 고구려의 사적으로 수록한 것이 적지 않기에(윤용구, 2022), 쉽사리 판단하기 어렵다. 물론 111년에 고구려와 예맥이 연합하여 현도군을 공격한 것으로 보면, 105년 고구려가 ‘요동맥인’과 연계하여 요동군을 공격했을 가능성도 있다.
표2에서 확인되듯이, 고구려는 109년에 후한에 사신을 보내 공헌하고 있다. 105년 고구려와 맥인의 공략이 반격을 받아 큰 성과를 보지 못한 데다 후한이 제3현도군을 재건하고 요동군에 동부도위와 서부도위를 다시 설치하는 등 방어태세를 강화하자 화친을 모색한 것으로 이해된다(여호규, 2015).
하지만 고구려는 111년에 예맥과 연합하여 현도군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는 한편,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며 현도군에 내속하기를 요구하는 등 양면적 모습을 보였다. 또다시 118년에도 예맥과 연합하여 현도군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는 한편 동해안 방면의 화려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는 화려성을 교두보로 삼아 옛 낙랑군 동부도위 관할하의 영동 7현에 대한 본격적인 공략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여호규, 2015). 그런데 105~111년에 전쟁과 교섭이 반복되는 상황을 두고 고구려가 현실적으로 대응한 결과이며, 111년 부여의 낙랑군 공격은 고구려가 부여와 우호관계를 유지한 가운데 진행된 결과로 보기도 한다(이정빈, 2022b).
121년 봄, 고구려 태조왕은 마침내 예맥과 더불어 요동군과 현도군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전개하였다. 이에 대해 유주자사 풍환, 요동태수 채풍, 현도태수 요광이 병사를 일으켜 반격하였으나, 고구려의 기만전술에 걸려 정벌군의 주력이 험로에 갇혀 발이 묶였고, 그 사이 고구려는 군현 성을 불태우고 2,000여 명을 살상하였다. 그림2에 풍환이 예주자사 재임 시(119년) 받은 조서의 내용 중에 고구려왕 궁을 가리켜 “날래고 교활하다(僄輕狡猾)”고 한 묘사는 화전(和戰) 양면의 능란하고 기민한 전투 능력을 평가한 것으로 생각된다.
121년 고구려의 공세는 연중 계속되었다. 그해 여름, 고구려는 예맥만이 아니라 선비와 연합하여 요동을 공격하였는데, 요동태수가 신창전투에서 전사하는 등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고구려는 가을과 겨울 두 차례 또다시 마한·예맥과 함께 현도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이때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에게 2만여 명의 기병을 주어 현도성을 구원하게 한다.
122년 고구려는 현도군과 내속관계를 맺은 후 한동안 지내다가, 146년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하여 대방현령을 살해하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납치하기에 이른다. 이 사건은 122년 이후 고구려가 요동 산지를 통해 서남해안으로 진출하고, 동해안 방면에 있던 옥저·동예에 대한 지배력을 확장하던 모습으로 여겨지고 있다(여호규, 2015).
그림2 예주자사 풍환에게 내린 조서(119년) (宋)洪适 撰, 1985, 『隸釋』 15, 中華書局, 157쪽.
이처럼 고구려는 양한(兩漢) 교체기의 혼란 속에서 국가적 성장과 대외적 영향력을 확대하였지만, 1세기 중·후반 50여 년간, 곧 요동태수 채융으로 대표되는 동북 변경의 안정기 동안은 대외적 성장이 정체될 수밖에 없었다.
후한의 이민족정책은 기미정책으로 그 구체적인 조치는 이이제이와 이이벌이였다. 이로 인해 고구려와 주변 예맥·선비 등과의 연화는 봉쇄되었고, 전한대와 마찬가지로 흉노 정벌에 동원되었다.
1세기 말 북흉노가 쇠락하면서 서역으로 이주하자, 그 공백을 선비가 대체하면서 국제정세에 변화가 생겼다. 선비와 오환을 활용한 후한의 흉노 정벌은 성공한 듯 보이지만, 흉노가 떠난 지역을 선비가 차지하면서 고구려의 대외관계도 운신의 폭이 넓어졌다. 고구려는 2세기 초 허울뿐이던 현도군을 소자하 유역에서 혼하 유역으로 축출하면서, 중국 군현의 영향력이 줄어든 요동 서남부 산지와 고구려 동남쪽 동해안에 위치한 옥저와 동예 지역으로의 진출을 본격화하였다(김미경, 2007; 여호규, 2015; 장병진, 2019).
표3 | 현도군의 호구(戶口)수 변천
왕조전한후한공손씨서진
연도2년101년140년233년270년
호수45,0061,5241,5942003,200
구수221,845 43,163300~400
호당
구수
4.93 27.081.5~2.0
소속
현수
33(?)6?3
문헌『한서』
지리지
『자치통감』 화제 영원 13년조 호삼성주(胡三省注)『속한서』 지리지 및 유소주(劉昭注) 「동관한기」『삼국지』 손권 가화 2년조 배송지주(裴松之注) 「오서」『진서』
지리지
2세기 초 혼하 유역으로 옮겨진 현도군은 요동군의 3개 현을 내속시키면서 둔전 6부를 설치하는 등 새로운 방어태세를 만드는 듯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장성 북쪽 멀리 있던 선비가 요동 근방까지 남하함에 따라 현도군 또한 선비의 공격대상이 되어 위상이 더욱 줄었다.
표3에서 보듯이 전한 말 현도군은 호구수에 비해 극히 적은 소속 현을 지니고 있었지만, 안정적인 호당 구수를 지니고 있었다. 후한대를 보면, 107년 안제 즉위년에 요동의 세 현을 현도군으로 내속시켰음에도 불구하고 호수에는 변화가 거의 없다. 호수 급감은 이미 후한 초부터 지속되어온 국가적 현안이었으며(최진열, 2022), 이에 따른 재정 수입 격감으로 현도군과 같은 변경 군현은 유지하기 어려웠다. 140년 호당 구수 27명이라는 비정상적인 수치는 당시 현도군이 정상적인 호구 편제가 불가능한 상황이었음을 보여준다.

  • 각주 001)
    『후한서』 광무제기, “(建武六年) 初, 樂浪人王調據郡不服, 秋, 遣樂浪太守王遵擊之, 郡吏殺調降. 秋九月庚子, 赦樂浪謀反大逆殊死已下.” 바로가기
  • 각주 002)
    요동태수 ‘祭肜’은 ‘祭彤’ 혹은 ‘蔡彤’ 등으로 사료마다 다양하게 표기되고, 학자마다 이를 제융·제동·채융·채동 등으로 제각각 읽고 있다. 『후한서』 이현주(李賢注)에 ‘祭音側界反’이라 하였다. 또한 송대 운서(韻書)에 읍명(邑名)과 성씨로 쓸 경우 역시 ‘채’로 발음한다는 기록이 있다(김효진, 2018). 또 ‘肜’과 ‘彤’은 서로 통하는 글자인데, 『후한서』 송본(宋本)과 『한원(翰苑)』에 ‘肜’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祭肜’으로 쓰고 ‘채융’으로 독음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3)
    『한서』 위현전. 바로가기
  • 각주 004)
    『한서』 왕망전(중). 바로가기
  • 각주 005)
    (東漢)劉珍 等 撰, 2008, 『東觀漢記校注』 上, 中華書局, 178쪽. 바로가기
  • 각주 006)
    순제(順帝)와 환제(桓帝)의 교체기.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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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후한의 변군 운용과 고구려의 제2현도군 축출 자료번호 : gt.d_0002_0020_002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