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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2. 공손씨 정권의 등장과 고구려

2. 공손씨 정권의 등장과 고구려

공손씨 정권은 후한 말에서 삼국시대에 이르는 시기에 요동을 중심으로 ‘자립’했던 지방정권이다. 형식상 한의 군현 체제 아래 놓여 있기는 했지만, 정권 내부에서는 천자에 준하는 위상과 관료조직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에서 요동국 혹은 요동왕국으로 불리기도 한다(정면, 2009; 권오중, 2012).
공손씨 정권은 3세 4대(공손도 189~204년, 공손강 204~220년, 공손공 220~228년, 공손연 228~238년) 50년 가까이 요동태수 지위를 세습하며 독립정권으로 세력을 유지하였다.
공손씨 정권의 등장은 고구려의 대외관계에도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였다. 첫째, 공손씨 정권이 자립하여 중국 내지와 격절(隔絶)되면서, 그 배후에 자리한 고구려와 중원 왕조와의 교섭이 방해를 받는 형세가 되었다(권오중, 2012). 둘째, 공손씨 정권이 고구려 등 동이 제족을 삼국 분립의 시대상황 속에서 생존을 위한 배후기지로 여기고 전례 없이 압박했다는 점이다(여호규, 2007; 2019). 그동안 한의 변군과 교섭을 이어왔던 고구려로서는 엄청난 변화가 요구되는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1) 공손도의 자립과 영토 확장
공손도(公孫度)는 189년 같은 현도군 출신으로 동탁(董卓)의 중랑장(中郞將)이었던 서영(徐榮)의 추천에 따라 요동태수가 되었으며, 이듬해(190년) ‘자립’을 선언하였다. 자립한 공손도의 요동군은 종래와 판이하였다.
① 공손도는 요동군을 나누어 요서군(遼西郡)과 중요군(中遼郡)을 세우고 그곳에 태수를 두었다. 바다 건너 동래군(東萊郡)의 여러 현을 정복하여 영주자사를 두었다. 자신을 요동후(遼東侯)·평주목(平州牧)으로 봉하고, 부친 공손연(公孫延)을 건의후(建義侯)로 봉했다. 한나라 두 선조(고조와 광무제)의 제묘(帝廟)를 세우고 단선(壇墠)을 양평성 남쪽에 세워 하늘과 땅에 교사(郊祀) 하였으며, 적전(藉田)과 열병(治兵) 의식을 행하였다. … 조조(曹操)가 상주하여 공손도를 무위장군(武威將軍)에 임명하고 영녕향후(永寧鄕侯)로 봉하자, 공손도는 “나는 요동에서 왕 노릇을 할 뿐인데, 무엇 때문에 영녕향후가 되겠는가!”라 말하며, [영녕향후] 인장은 무고(武庫)에 두었다. _ 『삼국지』 공손도전
② 공손연(公孫淵)은 아비와 조부 대까지 3세대 동안 요동을 소유하였는데, 천자는 그곳을 절역(絶域)이라 여기고 해외(海外)의 일을 맡겼다. 끝내 동이를 격리 단절시켜 제하(諸夏)에 통할 수 없게 하였다. _ 『삼국지』 동이전 서문  
사료 ①은 공손도의 자립에 대하여 후한의 중앙정부가 묵인한 내용을 담고 있다. 곧, 공손도는 요동태수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요동후·평주목의 자리에 올랐으며, 행하는 모습은 천자나 그에 준하는 의례에 따랐고 ‘요동의 왕’을 자부하였다. 조조는 황제의 이름으로 무위장군·영녕향후의 관작을 사여하여 사실상 공손도의 자립만이 아니라, 이후 공손강·공손연에게 요동태수직이 세습되는 것을 묵인하는 계기를 만들었다(정면, 2009). 공손씨 정권의 자립과 묵인의 결과 요동과 그 배후의 동이 제국은 중국과 단절되었다.
사료 ②는 공손씨 정권이 다스리는 요동을 ‘절역’과 ‘해외’로 표현하고 있다. ‘절역’이란 중국과 지리적으로 격절되어 있는 지역을 말하며, ‘해외’는 중국을 상징하는 ‘해내(海內)’의 상대어로, 중국을 둘러싸고 있는 ‘관념적 바다(四海)’의 바깥을 의미하였다. 곧, 요동군은 중국의 일부였지만, ‘자립’한 공손씨 정권의 요동은 중국의 일부로 받아들여지지 못하였다(정면, 2009).
이처럼 공손도는 요동후·평주목의 자리에 올랐으나, 실제로는 요동태수라는 법적 권한을 수단으로 삼아 군 안의 전소(田韶) 등 명호대성(名豪大姓) 100여 가(家)를 제압하고 정권의 안정을 마련하였다.
① 초평(初平) 원년 … 공손도는 동쪽으로 고구려를 치고 서쪽으로 오환을 공격했으므로 그 위세가 해외까지 이르렀다. … [공손]도가 죽은 후 아들 공손강(公孫康)이 자리를 이었으며, 동생 공손공(公孫恭)은 영녕향후에 임명되었다. 그해가 건안 9년이었다. _ 『삼국지』 공손도전
② 공손도가 해동(海東)에 웅거하자, 백고(伯固)는 대가 우거(優居)와 주부 연인(然人) 등을 파견하여 [공손]도를 도와 부산(富山)의 도적을 격파하였다. 백고가 죽고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아들은 발기(拔奇), 작은아들은 이이모(伊夷模)였다. 발기는 어질지 못하여, 국인(國人)들이 함께 이이모를 옹립하여 왕으로 삼았다. 백고 때부터 자주 요동을 노략질하였고, 또 유망한 호(胡) 500여 호를 받아들였다. 건안 연간에 공손강이 군대를 보내 고구려를 공격하여 격파하고 읍락을 불태웠다. 발기는 형이면서도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연노부의 [대]가와 함께 각기 하호 3만 명을 이끌고 [공손]강에게 투항하였다가 돌아와서 비류수(沸流水) 유역에 옮겨 살았다. [지난날] 항복했던 호(胡)도 이이모를 배반하였으므로 이이모는 새로 나라를 세웠는데, 오늘날 [고구려가] 있는 곳이 그곳이다. _ 『삼국지』 고구려전
③ 공손도가 해동에서 웅거하자, 백고가 그와 더불어 통호(通好)하였다. 백고가 죽고 그의 아들 이이모가 왕위에 올랐다. 이이모는 백고 때부터 이미 요동을 자주 노략질하였고, 또 유망한 호 500여 호를 받아들였다. 건안 연간에 공손강이 군대를 출동시켜 그들을 공격하여 그 나라를 격파하고 읍락을 불살랐다. 항복한 호 또한 이이모를 배반하니, 이이모는 새로운 나라를 다시 만들었다. 그 후 이이모가 다시 현도를 공격하자, 현도는 요동과 힘을 합쳐 반격하여 크게 쳐부수었다. _ 『양서』 고구려전  
위 사료 ①은 공손도 시기에 고구려를 정벌하였음을 전해준다. 고구려를 정벌한 내용은 초평 원년(190년)에서 건안 9년(204년) 사이에 들어 있다. 이 사료는 발기와 이이모가 왕위계승을 두고 분쟁을 겪던 시기에 고구려 정벌이 발생하였다는 점을 기록하고 있다. 이이모가 왕(산상왕)으로 즉위한 197년 무렵 고구려 정벌이 있었다고 보인다(여호규, 2007b).
그런데 사료 ②는 고구려 정벌에 앞서 공손도의 부산적(富山賊) 토벌에 고구려가 군사적 조력을 하였던 사실도 전해 준다. 사료 ③은 공손도가 자립 이후 고구려왕 백고와 서로 잘 통했다고 하고, 뒷날 왕이 된 이이모가 백고 때부터 이미 요동을 자주 공략하였음을 전한다. 이에 따라 197년 공손도의 고구려 정벌을 이이모가 자주 요동을 공격한 데 따른 대응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松田徹, 1994). 다른 견해로는 189년 고구려가 유망해온 망호(亡胡) 500여 가를 받아들인 것이 공손씨 공격을 받은 직접 원인이라는 지적도 있다(孫煒冉, 2015).
위 기록에 보이는 백고는 고구려 신대왕의 다른 이름이다. 공손도 정권 시기(189~204년)의 고구려왕은 고국천왕과 산상왕이었다. 따라서 공손도 자립 후에 ‘통호’했던 고구려왕 백고는 고국천왕을 가리킨다(여호규, 2007b). 그렇다면 공손도 침략의 빌미가 된 이이모의 잦은 요동 공략은 실제로는 197년 이전에 진행되었다고 하겠다.
이처럼 공손도 정권과 고구려 간에는 협력과 군사적 충돌이 교차하였다. 고국천왕은 처음에 공손도의 부산적 토벌을 지원할 정도로 우호관계를 유지하였지만, 뒤에는 이이모로 하여금 요동을 자주 공격하였다. 공손도는 고국천왕 사후에 벌어진 계승분쟁의 혼란을 틈타서 고구려 정벌을 감행한 것이다. 고구려 정벌은 공손도의 지시에 따라 아들 공손강이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기경량, 2017).
 
2) 공손강의 적극적 외교정책
건안 9년(204년) 공손씨 정권을 수립한 공손도가 죽자 그의 아들 공손강이 요동태수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삼국지』에는 공손강 정권의 초기 상황을 전하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① 조조는 삼군(三郡)의 오환족을 정벌하고 유성(柳城)을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원상(袁尙) 등은 요동으로 도망갔지만, 공손강이 원상의 머리를 베어 조조에게 보냈다. _ 『삼국지』 공손도전
② [건안 12년(207년)] 8월 … 요동의 선우 속복환(速僕丸)을 비롯한 요서와 북평의 거수들은 동족을 버리고 원상·원희(袁熙)와 함께 요동으로 도망갔다. 그들은 여전히 수천 기병을 보유했다. 본래 요동태수 공손강은 자신의 근거지가 편벽되고 먼 것을 믿고서 조조에게 복종하지 않았다. 조조가 오환을 무찌르자, 요동을 정벌한다면 원상 형제를 잡을 수 있다고 말하는 자가 있었다. 이에 조조가 “나는 지금 공손강에게 원상과 원희의 머리를 베어 보내도록 할 것이니, 다시 번거롭게 군사를 움직이지 마시오”라고 말했다. 9월, 조조가 병사를 이끌고 유성으로 돌아왔다. 공손강은 즉시 원상과 원희, 속복환 등을 참수하여 그 머리를 보내 왔다. 장수들은 의아해서 “명공께서 돌아왔는데도 공손강이 원상과 원희의 머리를 베어 보낸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라고 물었다. 조조는 “공손강은 평소 원상 등을 두려워했다. 내가 급박하게 공세를 퍼부으면 그들은 서로 힘을 합쳤고, 잠시 늦추면 서로 싸웠다. 이런 형세는 당연한 것이다”라고 답했다. _ 『삼국지』 무제기  
위 사료 ①은 207년 조조가 유성의 삼군오환을 토벌할 때 오환으로 피신해 있던 원소(袁紹)의 두 아들(원상·원희)이 다시 요동으로 도망가 있었는데, 공손강이 이들의 목을 베어 조조에게 보낸 사실을 전하고 있다. ②는 같은 내용을 전하는 『삼국지』 무제기의 기록이다. 이에 따르면 207년 오환 토벌 원정군 안에서 요동까지 정복하자는 논의가 있었지만, 조조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사실을 전하고 있다. 조조의 생각은, 삼군오환의 토벌 목적이 그곳에 숨어든 원상·원희 등 원소의 잔당에 대한 소탕에 있었으니 요동에서 그들의 수급을 베어 보내온 이상 또다시 군사를 움직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삼국지』 공손도전 배송지주에 인용된 「위명신주(魏名臣奏)」에 “무황제(武皇帝) 때 … 공손강이 드디어 신첩(臣妾)을 칭하였다”는 구절이 보인다. 207년 조조가 요서의 삼군오환을 제압하면서 공손씨 정권은 조조 세력과 국경을 마주하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사실상 공손강이 굴복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松田徹, 1994). 아무튼 공손강의 우호적 태도에 따라 조조는 그를 양평후·좌장군에 봉하였다. 공손씨 정권과 조조 사이에 화친관계가 성립된 셈이었다. 조조 또한 삼국 정립기 중원에서의 세력경쟁이 심한데다 208년 적벽(赤壁)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함에 따라 요동으로 관심을 돌릴 여력이 없었다. 그러므로 요동 정벌이 다시 본격적으로 논의되는 228년까지 20년간 안정적인 관계가 유지되었다.
조조의 세력이 요서 지역에 진출해 있고, 동쪽으로는 고구려와 적대적 관계에 놓인 공손강이었지만, 요동을 중심으로 한 공손씨 정권의 세력권 내 위치는 변함이 없었던 듯하다.
① 천하가 큰 혼란에 휩싸이자 공손도의 위엄 있는 명령이 나라 밖까지 전해졌으며, 병원(邴原)과 평원(平原)현의 왕열(王㤠) 등이 요동으로 왔다. … 조조가 사공으로 있을 때 관녕(管寧)을 불러 관리로 삼으려 했는데, 공손도의 아들 공손강이 조조가 보내온 임명서를 중간에 가로채고는 전하지 않았다. _ 『삼국지』 관녕전
② 공손도의 서자 공손강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군을 지배하면서 겉으로는 장군·태수의 직책으로 불리지만, 속으로는 왕이 되려는 마음을 품었다. 이 때문에 자기를 낮추어 높은 예우를 나타내면서 관녕이 자신을 신중히 보필하기를 바랐지만, 끝내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_ 『삼국지』 관녕전, 배송지주 인용 「부자(傅子)」  
위 사료 ①은 공손씨의 자립 이후에도 중원과 요동 사이에 주민의 이동이나 군현 운영에 따른 문서 전달이 지속되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한편, 공손도 생존 시 공손강이 실권을 행사하고 있었던 점을 알려준다. 사료 ②에서 아버지(공손도)를 대신하여 군을 지배하면서 겉으로는 장군·태수로 불리지만, 속으로는 왕이 되려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표현에서 공손강의 야심이 드러난다. 그것은 공손도와 마찬가지로 요동을 넘어 중원으로 진출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① 양무(涼茂)는 … 낙랑태수로 전임되었지만, 요동에 있는 공손도가 양무를 멋대로 억류하여 부임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양무는 끝까지 굴하지 않았다. 공손도가 양무와 여러 장수에게 “조공께서 멀리 정벌을 나가시고 업성은 수비하는 자가 없다고 들었소. 지금 내가 보병 3만과 기병 1만을 이끌고 곧바로 업성에 이르면 누가 막을 수 있겠소?”라고 말했다. … 여러 장수가 모두 “예, 그렇습니다”라고 했다. 공손도는 양무를 돌아보고 “그대 생각은 어떠하오?”라고 다시 물었다. 양무는 “최근에 천하에 큰 난리가 나서 장차 사직이 쓰러지려고 할 때, 장군께서는 10만의 무리를 끼고서 편안히 앉아서 성공과 실패를 관망하고 있었습니다. 무릇 다른 사람의 신하 된 자가 진실로 이와 같을 수 있습니까? 조공은 국가의 위기와 패망은 근심하고, 백성의 고통과 원한을 위로해 주었으며, 의병을 이끌고 천하를 위하여 잔적(殘賊)을 주살했으니, 공은 높고 덕망은 넓어 가히 독보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천하가 비로소 안정되었으며, 백성은 편안히 정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장군의 죄상을 아직 책망하지 않은 것입니다. 장군께서 곧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향하여 침공한다면, 살고 죽는 결과는 하루아침도 못 되어 결정될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스스로를 돌보십시오”라고 대답했다. 여러 장수가 양무의 말을 듣자 모두 술렁거렸다. 한참 있다가 공손도가 “양군의 말이 옳다”고 말했다. _ 『삼국지』 양무전
② 조조가 [원소의 장남] 원담(袁潭)을 토벌하려 하자 유성의 오환이 기병을 내어 원담을 도우려 했다. 견초(牽招)가 일찍이 오환돌기(烏桓突騎)를 거느린 적이 있었으므로 조조는 그를 유성으로 보냈다. 견초가 유성에 도착했을 때, 마침 [오환] 초왕(峭王)이 원담에게 기병 5,000명을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때 요동태수 공손강은 스스로 평주목이라 칭하고 사자 한충(韓忠)을 파견하여 선우(單于)의 인수(印綬)를 갖고 사사로이 초왕에게 주도록 하였다. 초왕이 부족의 장들을 여럿 모았는데, 한충도 그 자리에 있었다. 초왕이 견초에게 “옛날에 원공(袁公)은 천자의 명령을 받아 내가 선우가 되게 하였습니다. 지금 조공이 또다시 천자에게 말하여 내가 진짜 선우가 되게 하려고 요동에서도 인수를 갖고 왔습니다. 이와 같을 때 응당 누구를 정당하다고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견초가 “ … 조공이 천자에게 말하여 진짜 선우가 되게 함이 옳은 것입니다. 요동은 천자의 관할하에 있는 군인데, 어떻게 멋대로 관직을 줄 수 있습니까?”라고 답했다. 한충이 “우리 요동은 창해 동쪽에 위치하고 백만의 병사가 있으며 또 부여와 예맥을 부리고 있습니다. 지금 천하의 형세는 강대한 사람이 위에 서는 것입니다. 어찌 조조만이 옳다고 하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견초가 한충을 질책하며 “… 당신들의 군신은 … 지세의 험준함과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것에 기대어 왕명을 어기고 제멋대로 임명하려고 하여 신성한 조정을 치욕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응당 주살하여 깨끗하게 해야 하거늘 어찌 감히 조공과 같은 중신을 욕되게 하고 비방합니까?”라고 말했다. 곧바로 한충의 머리를 잡아채어 땅에 처박고는 칼을 뽑아서 그를 베려고 하였다. 초왕은 놀라 떨며 맨발로 달려가 견초를 끌어안으며 한충을 살려달라고 청했고 … 견초는 초왕 등에게 일이 성공하고 실패했을 때의 결과와, 재앙과 복이 생기는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 요동의 사자에게 알려 엄정하게 대기하고 있던 기병을 해산시켰다. _ 『삼국지』 견초전  
위 사료 ①은 공손도의 중원 진출에 대한 의도와 양무에 의해 진출이 포기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②는 공손강이 요서 진출을 위해 보낸 사자 한충이 조조가 보낸 견초에게 막히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양무의 간언에 따라 중원 진출을 중지한 점으로 볼 때, 공손도는 조조와의 대결에서 역량 부족을 절감하고 현실적인 판단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공손강 또한 요서를 중원 진출의 교두보로 삼을 생각이었지만, 조조의 강력한 세력에 밀려 저지되었다. ②는 공손강이 집권을 시작한 204년의 일이다. 『삼국지』 장료전에 의하면, 이듬해 발해 서안에서는 공손강이 보낸 군대가 또다시 조조가 보낸 장군 장료(張遼)에 의해 격파되었다. 아버지 공손도가 이루지 못한 중원 진출을 위해 집권 초기 요서와 발해 서안에 교두보를 만들려던 공손강의 계획은 하북을 평정하고 요서로 도망한 원소의 잔당(원담·원상·원희)을 제거하고자 북상하던 조조의 세력에 부딪힌 것이다.
비슷한 시기 공손강은 낙랑군 남부의 황무지가 된 지역을 떼어 대방군을 설치하고 삼한 및 바다 건너 왜와 교섭·교역의 네트워크를 구축하였다. 대방군 설치는 공손도가 요동군을 셋으로 나눠 중요군과 요서군을 신설하였던 방식을 낙랑군에도 적용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대방군은 요서와 발해만으로의 진출이 저지된 공손강의 새로운 활로로서 설치된 것이다(松田徹, 1994). 대방군 설치 시기와 관련해서는 공손강이 조조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던 207년 이전으로 추정한 바 있다(권오중, 2012).
공손강 집권 시기 고구려와의 관계는 관련 사료의 부족으로 잘 알기 어렵다. 중국 기록과 『삼국사기』 산상왕의 기록에도 특별한 내용을 찾기 어렵다. 197년 왕위계승분쟁을 전후하여 공손씨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국도(國都)까지 큰 피해를 본 고구려는 198년 환도성을 축조하고 209년에 환도로 도성을 옮겼다. 대외 진출보다는 국내 안정과 체제 정비가 절실한 시기였다고 하겠다. 공손씨 정권은 조조의 중앙정부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상황에서 이미 적대적 관계로 돌아선 고구려와 긴장을 조성할 이유가 없었다.
조조는 삼국 분립 속에서 오·촉과 다투고 있었고, 동서로 적대적 세력에 끼어 있는 공손씨 정권, 그리고 공손씨의 침략으로 국도까지 파괴되어 천도를 준비하던 고구려까지 안정과 체제 정비가 절실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건안 10년(205년) 조조가 장악한 후한에 대한 예맥(濊貊)의 직접 공헌은 주목할 내용이다.
① 건안 10년(205년), 비로소 기주(冀州)를 평정하자 예맥이 양궁(良弓)을, 연대(燕代)에서 명마(名馬)를 바쳤다. _ 『삼국지』 문제기, 배송지주 인용 전론(典論)」
② [황초 원년(220년)] 〈밑줄〉예맥과 부여〈/밑줄〉의 선우, 언기(焉耆)와 우전(于闐)의 왕이 모두 각기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_ 『삼국지』 문제기  
위 사료 ①은 조조의 군대가 기주(하북성 일대)를 평정하자, 그에 인접한 예맥이 양궁을 바치고 연과 대 지역에서 명마를 바치며 교섭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때의 예맥은 고구려 주변의 동예와 소수맥(小水貊)으로 구분하기도 한다(여호규, 2007).
그런데 사료 ②에서 220년에 예맥과 부여의 조공 기록이 보인다. 밑줄 부분주 007
각주 007)
『삼국지』 문제기, “(延康元年三月己卯) 濊貊·扶餘單于, 焉耆·于闐王, 皆各遣使奉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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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예맥의 부여'로 본 견해(伊藤光成, 2020)가 있지만, 대구 형식의 문장으로 보아 ‘예맥과 부여’로 구분하여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더욱이 『삼국지』 부여전에 따르면, 부여는 공손씨 멸망 전에도 해마다 조위의 경도(京都: 낙양)에 공헌하였다. 그러므로 205년과 220년에 조위에 공헌한 예맥은 부여·고구려와 구분되면서 요동군 내외에 존재한 다수의 예맥(혹은 맥인)일 가능성이 높다(권오중, 2015).
 
3) 공손연의 다중외교
공손연(公孫淵)은 공손강의 아들이다. 220년경 공손강이 죽자 정권 내부의 동요가 표면화되었다. 요동태수의 자리에 공손강의 아들이 아니고, 동생인 공손공(公孫恭)이 옹립되었던 것이다.
공손공은 선천적으로 신체에 문제가 있어서 지도자로서의 자질이 모자랐다. 말년에는 “열약(劣弱)하여 나라를 다스릴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마침내 228년 공손연은 형인 공손황(公孫晃)이 낙양에 위질(委質)로 가 있는 사이에 숙부 공손공을 위협하여 정권을 빼앗았다. 조위(曹魏) 조정의 입장에서 보면 공손연은 숙부를 내쫓고 형의 차례까지 가로챈 인물로 여겨졌다.
더구나 공손공은 위 조정에 순종적 자세를 보여왔기 때문에 물리적 방법으로 정권을 가로챈 공손연은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공손연은 조위로부터 양열장군(楊烈將軍)·요동태수에 제수되었다. 이는 공손공이 받은 2품의 거기장군(車騎將軍)에 비해 세 단계가 낮은 것이었다. 공손연의 취임은 조위와 불안정한 관계를 안고 출발한 것이었다(권오중, 2012).
공손연이 정권을 탈취하자마자 조위의 시중 유엽(劉曄)은 바로 요동 정벌을 주장하였다.
공손씨는 한(漢)대에 등용되었으나 마침내 대대로 관직을 서로 잇고 있습니다. 수로는 곧 바다 때문에, 육로는 곧 산으로 막히고, 호리(胡夷)로 인하여 끊어지고 멀어져 제압하기 어려워 권력을 세습한 것이 날로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주살하지 않으면 후에 반드시 걱정거리가 생길 것입니다. _ 『삼국지』 유엽전  
위 사료는 유엽의 요동 정벌 건의가 명제에게 채택되지 않았지만 공손연의 등장을 조위 조정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명제 태화 3년(229년) 손권은 정식으로 황제 자리에 오르며 황무(黃武)를 연호로 삼았다. 『삼국지』 오주전에 따르면, 그해 4월 즉위의례를 하고 다음 달 처음으로 한 일은 교위 장강(張剛)과 관독(管篤)을 사자로 요동의 공손연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이는 손권이 황제 즉위 후 촉한과 맺은 ‘천하를 양분하는 밀약’에 따른 조치의 하나였다. 곧, 촉한은 양주·병주·기주 등 서북방, 손오는 창주와 유주 등 동북방을 분할 점령하기로 맹약했다. ‘중분구주(中分九州)’라 할 이러한 분할 합의는 조위의 배후지 세력과 연계한 협공전략으로 나타났다(최진열, 1999).
손오가 요동에 사신을 파견한 것도 이러한 협공책의 일환이었다(여호규, 2007b). 집권 초기부터 조위와 불편한 관계를 이어오던 공손연에게나 부족한 전마(戰馬)를 수급할 새로운 공급처를 찾는 한편 조위를 외교적으로 압박할 수 있다고 판단한 손오 모두의 이해가 합치한 일이었다(重松俊章, 1937; 여호규, 2007b; 伊藤光成, 2018).
229년 손오가 요동에 파견한 사신에 대하여 공손연이 어떤 대응을 했는지는 기록이 없다. 232년 손오는 말 구입을 명목으로 장군 주하(周賀), 교위 배잠(裵潛)을 다시 요동에 파견하였다. 이에 대해 공손연이 교위 숙서(宿舒)와 제갈직(諸葛直)을 보내 손오의 신하로서 번국(藩國)의 예를 행하면서 양국 간의 제휴가 성사된다. 손권은 공손연을 ‘유청(幽靑) 2주 17군 70현’을 다스리는 연왕(燕王)에 봉하고 구석(九錫)을 더하였다. 이는 손권이 조위 문제(文帝)에게 신하의 예를 행하자 받은 오왕(吳王)·구석과 같은 것이며 내신(內臣)으로서는 최고 대우였다(渡邊義浩, 2016a).
이러한 손오와 공손씨 정권의 연계는 삼국(위·촉·오)의 패권경쟁에서 요동 지역이 새로운 변수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제 조위에게 요동은 더 이상 ‘해외’의 일이 아니었기에 공손씨 정권과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변모하였다(이성제, 2007). 이는 공손강과 공손공 정권 동안 유지된 조위와의 안정적 관계에 균열과 자멸을 초래한 일이었다(松田徹, 1994). 마침내 양자 관계를 관망하던 조위는 요동 정벌을 시작하고, 위협을 느낀 공손연은 손오와 조위 사이에서 이중외교를 펼치게 된다.
한편, 233년 손권이 요동에 군사 1만을 보내 전진기지를 설치하려 하자, 공손연 또한 조위를 의식하여 손오와의 관계를 재고하게 된다(여호규, 2007b; 김효진, 2015).
중령군(中領軍) 하후헌(夏侯獻)의 표에 이르기를, 공손연이 지난날 감히 왕명을 어기고 계공(計貢)을 폐절하고 실로 양쪽 모두가 막힌 셈입니다. [지세가] 험조함에 의지하고 또한 손권을 믿어 이 때문에 감히 발호하여 해외에서 눈을 부라렸습니다. 숙서(宿舒)가 친히 적 손권의 군중(軍衆)과 부고(府庫)를 보고는 그들이 약소하여 의지하기에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니 이로써 적의 사자를 참수할 계책을 결정했습니다. 또한 고구려, 예맥이 공손연과 원수 사이가 되어 함께 노략질하고 있습니다. 이제 밖으로는 오(吳)의 원조를 잃고 안으로는 호(胡)의 침략을 받게 되었으니 필시 국가가 능히 육로를 따라 쳐들어올 것을 알고 형편상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없습니다. _ 『삼국지』 공손도전 배송지주 인용 「위명신주」  
위 사료는 공손연이 파견한 사신 숙서를 통해 손오가 조위를 견제할 수 없다는 것을 간파했다는 점, 조위에서도 고구려와 예맥이 요동 공손씨 정권을 공격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마침내 233년 공손연이 오의 사신 장미(張彌)의 머리를 베어 조위에 보내면서 229년에 시작된 손오와의 관계는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때 오의 사신 일부가 고구려로 도망쳤는데, 고구려가 이들을 다시 오로 호송하면서 손오와 교섭을 시작하였다. 이 교섭은 고구려 입장에서는 손오로부터 수군의 항해와 선진기술을 배우고자 하였고, 손오 입장에서는 고구려를 새로운 전마(戰馬) 공급처로 기대하여 성사될 수 있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김효진, 2015). 어찌됐든 이로써 고구려는 중국 내 삼국 분립의 치열한 다자외교전에 뛰어든 셈이었다(김미경, 2010).
234년 북벌을 주도하던 촉한의 제갈량(諸葛亮)이 오장원(五丈原) 진 중에서 병사하자 조위는 요동 정벌에 나설 여력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공손씨와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고구려에 사신을 파견하여 화친을 도모하였다.
1년이 지나(235년) [손권은] 사자 사굉(謝宏)과 중서 진순(陳恂)을 보내어 [고구려왕] 궁을 선우로 삼고, 의물과 진보(珍寶)를 더하였다. 진순 등이 안평구(安平口)에 이르러 우선 교위 진봉(陳奉)을 보내어 궁을 만나게 하였다. 그러나 궁은 이미 유주자사의 풍지(諷旨)를 받은 터라 오의 사절에 대해서는 자진해서 알려야 한다고 하였다. 진봉은 그것을 듣고서 되돌아왔다. [이에] 궁은 주부 착자(笮咨)와 대고(帶固) 등을 안평에 보내어 사굉과 만나게 하였다. 굉은 즉시 30여 명을 포박하여 인질로 삼으니, 궁이 사죄하며 말 수백 필을 받쳤다. 사굉이 착자와 대고에게 조서와 사물(賜物)을 받들게 하고 궁에게 보냈다. 이때 배가 작아 말 80필만을 싣고서 돌아왔다. _ 『삼국지』 오주전 황룡 2년 인용 「오서(吳書)」  
235년 오에서 사신을 보내 고구려왕을 선우에 봉하며 본격적인 협력을 기대했지만, 고구려는 이미 유주자사 왕웅(王雄)으로부터 오의 사신에 관한 정보 전달의 풍지를 요구받은 터였다(권오중, 2012). 이는 손오와의 관계를 단절하라는 뜻이었고, 고구려로서도 조위와 협력하여 공손씨 정권을 타도할 기회로 판단하였다. 이에 따라 이듬해인 236년 2월 고구려는 손오의 사절단을 억류시켰다가 7월에 참수하고 그 머리를 유주자사부로 보냈다. 고구려와 손오는 공손씨 타도라는 공동 목표를 공유하면서 협력했지만, 조위의 등장 아래 고구려가 현실적 판단을 함으로써 손오와의 관계는 파국을 맞게 되었다(여호규, 2007).
237년 조위는 연호를 경초(景初)로 바꾸고 유주자사에 관구검(毌丘儉)을 임명하면서 요동 정벌을 본격화하였다. 기회가 왔다며 즉시 요동 정벌을 주장한 관구검과 달리, 아직 오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는 광록대부 위진(衛臻)의 반대가 있었지만, 명제는 공손씨 정벌을 명하였다. 이에 관구검이 여러 군병과 오환·선비의 기병을 거느리고 요동에 이르렀지만, 여름철 장마와 공손연의 저항으로 철수하였다.
표4 | 공손씨 정권의 멸망 과정과 주변 동향(228~238년)
연도공손씨조위손오고구려
228- 공손연, 숙부 공손공을 축출하고 요동태수 계승.- 시중 유엽, 요동 정벌 주장, 수용되지 않음.
- 공손연에게 양열장군·요동태수 제수.
229 - 손권, 제위에 오르자, 요동에 사신 파견.
- 산월(山越) 정벌 개시.
230 - 공손연에게 거기장군 제수.- 손권, 갑사를 바다로 보내 이주(夷州), 단주(亶州)를 찾게 함.
232- 숙서 등을 손오에 사신으로 보내 번병을 자청, 군마 제공.- 공손연과 손오 간의 잦은 통호 인지.
- 유주자사 왕웅과 여남태수 전예의 요동 정벌, 철수.
- 전마 구입을 명분 삼아 사신을 요동으로 보냄.
- 귀로에 매복한 조위의 습격으로 사신 주하 사망.
- 예맥과 더불어 요동 침범.
233- 요동 해안에서 오의 군대 습격.
- 오 사신의 머리를 베어 위로 보냄.
- 공손연을 대사마·지절·낙랑공에 봉함.
- 요동·현도 군민 회유.
- 공손연을 연왕에 봉하고, 구석을 더함.
- 요동에 군대 1만을 보내 교두보 구축 시도.
- 공손씨로부터 탈출한 오 사신의 귀국을 호송하며 오에 칭신, 통교 개시.
234 - 오장원에서 제갈량 전사, 동방 진출 가속화 계기.
- 유주자사 왕웅, 고구려에 오사에 대한 정보 제공 풍지.
235 - 고구려에 사신 파견, 고구려왕을 선우에 봉함.- 오사를 홀대하다가 사죄하고 말 수백 필을 바침.
236 - 고구려에 사신 파견.- 오사의 머리를 베어 유주자사부에 보냄.
237- 위군을 요수에서 격퇴.
- 관구검이 철수하자 황제국 연왕 자칭.
- 선비로 하여금 조위 변경을 공략케 함.
- 유주자사 관구검, 요동 정벌 건의, 장마로 철수.
- 요동·현도 군민 회유.
- 조위에 공헌.
238- 양평성 함락, 공손씨 멸망.
- 상국(相國) 이하 천여 명 처형.
- 사마의, 공손연 정벌
- 공손연의 머리를 베어 낙양으로 보냄.
- 군사를 몰래 보내 낙랑군·대방군 평정.
- 조위의 요동 정벌에 군사 수천 명을 보내 지원.
* 권오중, 2012, 『요동왕국과 동아시아』, 영남대학교출판부, 266~276쪽, 요동왕국 연표 수정.
이듬해인 238년 오는 마침내 사마의(司馬懿)을 주축으로 공손씨의 수부(首府) 양평성(襄平城)을 함락시켰다. 공손도가 189년 요동태수로 임명된 지 3세 4대 50년 만의 일이었다. 『삼국지』 고구려전에 의하면, 이때 고구려는 수천 명의 군대를 보내 지원하였다.

  • 각주 007)
    『삼국지』 문제기, “(延康元年三月己卯) 濊貊·扶餘單于, 焉耆·于闐王, 皆各遣使奉獻.”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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