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위·진의 동방 진출과 고구려의 대응
3. 위·진의 동방 진출과 고구려의 대응
3세기 중엽 고구려는 동방으로 진출하려는 위(魏)·진(晉) 중국 두 왕조와 전쟁 또는 교섭을 경험해야 했다. 조위와 고구려가 직접 교섭한 것은 238년 이후라 할 수 있다. 후한 말에 요동에 공손도가 자립한 이후 50년간 공손씨 정권이 자리하였기 때문이다.
서진의 시작은 265년이지만, 사마의가 239년 이른바 ‘고평릉(高平陵)의 변란’을 통해 정권을 탈취한 후부터 사실상 시작되었다고 하겠다. 서진은 263년 촉한의 항복을 받고 280년 손오를 평정하기 전에는 고구려 등 동방에 대해 적극적인 영향력을 미치기 어려웠다. 더욱이 서진은 280년 삼국 통일 후부터 쇠망의 기운을 보이다가 291년 팔왕의 난을 시작으로 멸망의 내리막길을 걸었다.
238년 공손씨 멸망 이후 위·진의 왕조 교체와 서진의 급격한 쇠망 과정에서 고구려의 대외관계도 종전과 다른 대응이 요구되었다. 하지만 관련 기록은 고구려의 서안평 공격(242년)이 발단이 된 조위의 대대적인 고구려 침략(244~246년)과 평오(平吳, 280년) 이후 대외정책을 본격화한 무제대 외에는 특별한 교섭이 나타나지 않는다.
1) 관구검의 침공과 고구려의 대응
조위는 238년 공손씨 세력을 정복하면서 동이와 접촉하였으며, 244년 고구려 정벌 이후 동이 경략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다. 경략의 배경과 목적은 조위의 배후 안정과 오·촉과의 전쟁에 소요되는 물력 조달에 있었음이 명백하다(윤용구, 1999). 그러나 동이는 북방의 부여·읍루·고구려부터 한반도에 자리잡은 옥저·예·한, 바다 너머 왜에 이르기까지 광역에 걸쳐 있었다. 이들은 『삼국지』 동이전에 서술된 것처럼 생활환경과 사회발전 정도에서 차이가 있었다. 더구나 이들 사회는 동이전에 입전된 명칭처럼 단일한 정치체가 아니라 다수의 세력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조위가 동이를 지배한 구체적 양상은 해당 지역(종족)의 특성과 경략 목적에 따라 달랐을 것이다.
한대 이래로 중국 왕조는 이민족과의 접촉을 통상 근접한 주군(州郡)에서 맡아 보았다. 때로 이민족의 내속, 곧 집단적으로 투항해 온 경우 이들을 일정 지역에 정착시키고 이른바 ‘영호지절관부(領護持節官府)’를 두어 통치하였다. 『삼국지』에 입전된 동이 제족은 유주부 관할의 4개 변군(현도·요동·낙랑·대방)과 접촉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민족을 주변에 두었던 변군이 대개 그러하듯이 이들 동이족은 각기 접촉하던 군현이 정해져 있었다. 부여는 현도군에서, 한은 낙랑군이 본래 통할하였다거나, 항상 현도군에 나와 조복의책을 받아가기 위해 왕래하던 고구려인의 명적(名籍)을 고구려현의 현령이 주관했으며, 진한인 염사치(廉斯鑡)가 낙랑군에 투항할 때 함자현(含資縣)에서 접수하고 군에 보고한 것을 보면 각기 소속된 군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체로 부여·고구려는 현도군, 한과 왜인은 대방군, 동옥저와 예는 낙랑군이 담당하였다.
평상시 중국 군현의 이민족 지배는, 조공을 주선하고 이에 맞추어 개설된 호시(互市)에서의 교역을 감독하는 것이었다. 조공이란 황제의 덕화에 감읍하여 신하의 예를 행하는 의식이다. 따라서 조공을 바치는 자는 신하로서의 의무가 따른다. 곧 신속한 조공자는 정해진 기일에 자신 또는 대리인을 입시시켜 통솔하고 있는 호구의 수와 영토를 그린 도적(圖籍)을 제출하고, 세금의 형태로 토산 방물을 바쳐야 했다. 이에 대해 황제는 원로의 수고를 위로하고 은덕을 베푸는 회사(回賜)를 한다. 이러한 조공의 대부분은 해당 변경 군현이나 영호관부에서 이루어졌다. 그런데 예군(詣郡, 혹은 詣府)의 경우도 상징적으로는 예궐(詣闕)하여 천자를 알현하는 것이므로 이에도 회사가 뒤따랐다. 이때 이루어진 회사가 인수의책의 사여를 통한 군부(郡府) 내에서의 교역 허가였다. 호시는 이를 위해 개설한 임시시장이라 하겠다.
그러나 조공과 그에 의해 개설된 호시는 본래 이민족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것이고, 이민족의 조공은 중상(重賞)과 같은 교역상의 이익을 꾀하는 데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경우 군현에서는 호시를 폐쇄하였으며 이민족도 상응한 조치를 취하였다.
부여의 경우 요동의 공손씨가 세력을 넓힘에 따라 현도군에서 요동군으로 이속되었고, 고구려는 현도군에 조공하는 것을 거부하고 호시 위치를 자의로 변경하였으며, 한(韓)에서는 다른 군현으로 강제 배속한 것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다.
그러나 조공과 호시교역에 의한 동이 지배는 한계가 있었다. 앞서 본 대로 양측의 이해가 어긋나면 쉽게 중단되었다. 설사 운영이 원활하더라도, 조공과 같은 의례적인 교섭을 통해서는 동이 경략의 목적, 곧 배후 안정과 전쟁에 소용되는 물력을 조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조위는 동이를 지배하기 위해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곧, 전담 군현에서 동이사회의 조공과 교역을 관장하는 지배방식을 취하였다. 그런데 『삼국지』 동이전에는 이와 다른 모습도 보인다. 곧 조위가 동이사회를 하나의 단위로 보고 지배하려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는 두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첫째, 예(혹은 옥저)를 경계 삼아 남북으로 분할하여 지배한 것이다. 먼저 남부권역의 경우를 살펴보자. 진(변)한에서 산출되던 철의 유통범위는 왜가 행한 대외교섭의 대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에 의하면 예·삼한·왜가 낙랑군·대방군과 하나의 교역망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동이 경략이 본격화되면서 낙랑군·대방군의 교섭범위도 변화되었다. 낙랑군은 예를 비롯한 동남부 육로교역권을, 대방군은 서남 해안과 왜로 이어지는 연안교역망을 담당하도록 조정된 듯하다.
부여·고구려·동옥저·읍루로 구성된 북부권역의 경우 남부와 같은 명시적인 사료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민족지적 기록으로 보아, 동이사회는 종족은 물론 지리적 환경과 언어·풍속에서 친연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모두 요동군·현도군과 교섭한 데서 알 수 있듯이, 하나의 교역권을 이루었다고 여겨진다. 관구검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 부여·옥저·읍루 지역까지 작전구역에 포함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림3 〈관구검기공비〉 비편(요령성박물관 소장, 이승호 촬영)
- 조위가 고구려를 1차 침공했을 당시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회군하였던 전황을 수록한 것이다(이승호, 2015).
- 조위가 고구려를 1차 침공했을 당시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회군하였던 전황을 수록한 것이다(이승호, 2015).
조위는 동이사회를 교역권에 의해 남북으로 구분하고, 각기 낙랑군·대방군과 요동군·현도군을 통하여 지배하였다. 교역권은 지리·종족·문화 등의 민족지적 요인에 따라 오랜 기간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교역권에 의한 동이 지배는 그로부터의 경제적 수익 증대를 고려한 것이다. 요컨대 이는 조위가 고구려를 비롯한 동이사회 경략으로 이루려던 물력 조달이라는 목적에 따라 시행된 지배방식이라 하겠다.
둘째, 동이사회를 우호·적대·회유·방치 대상으로 나누고 지배를 달리하여 분열과 대립을 조장한 것이다. 이는 배후 안정을 위한 지배방식으로 이해된다. 『삼국지』 동이전에는 조위 입장에서 호오(好惡)를 나타낸 서술이 적지 않다.
부여와 고구려의 인성·조공·상속에 관한 기록은 우호와 적대에 따른 기술의 차이를 보여준다. 곧, 부여에 대한 서술은 시종 우호적인 반면, 고구려는 분쟁 기사로 채워져 있다. 그런데 이 같은 상반된 인식은 두 동이사회에 대한 지배방식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즉, 후한 말 요동의 군벌 공손씨가 부여와 ‘결혼동맹’을 맺은 데서도 보듯이, 부여를 내세워 고구려 등 예맥계 여러 정치체에 대한 통할을 도모하려 했던 것이다.
부여가 북부지역에서 조위에 포섭된 우호적 상대라면, 남부지역에서는 왜가 이에 해당한다. 왜에는 대방군에서 파견된 사절이 상주하여 조위와의 교섭을 주선하였으며, 왜 여왕 비미호(卑彌呼)의 공헌에 대해 ‘친위왜왕(親魏倭王)’을 제수하기도 했다. 이는 왜에 대한 돈돈한 우의를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조위는 부여와 왜를 포섭하여 고구려·손오 등 적대세력의 확장을 견제하는 한편, 주변 이민족에 대한 통할자의 역할을 기대하였다. 이러한 연장선에서 우호 또는 적대 세력에 예속된 집단에 대한 처리도 결정되었다. 한대 이래 부여에 신속되어온 읍루가 220~226년에 과중한 수탈에 반란을 일으켜도 방관하던 조위는, 고구려에 복속한 동옥저와 예의 경우 철저히 토벌하였다. 이러한 사례는 왜의 여러 소국에 대한 왜 여왕국의 지배권을 인정하고, 구노국(狗奴國)과의 분쟁이 일어나자 즉각 사절을 파견하여 여왕국에 대한 지지를 과시한 데서도 볼 수 있다. 조위는 우호적 상대에 예속된 집단에 대해 방치한 반면 적대세력에 예속된 집단의 경우 예처럼 일단 토벌한 뒤에 회유하였다. 조위는 예가 낙랑군·대방군의 동변에 접한 까닭에 토벌하여 고구려와의 연계를 차단하려 한 것이다. 회유한 뒤에는 군현 편호민처럼 인력과 물자를 징발하여 군현의 안전을 도모하였다. 토벌과 회유를 겸용한 점에서 한에 대한 조위의 지배는 예와 같았다.
2) 서진의 동이교위부 운용
서진은 조위의 권신 사마의가 쿠데타를 일으켜 세운 왕조였다. 조위대 고구려를 비롯한 동이 제족에 대한 대대적인 공략을 사마의가 주도했다는 점에서 서진의 대외관은 조위대와 변화가 없었다. 그런데 280년 손오의 멸망을 계기로 후한 초와 마찬가지로 군비를 축소하고 자사(刺史)의 군권을 없애 감찰 기능만 부여하는 등 변경 지배에 큰 변화가 생겼다(윤용구, 2014).
『진서』 지리지에 의하면 고구려 등 동이 제족은 평주(平州) 아래 편제된 군현과 접해 있었다. 고구려는 이들 군현과 호동이교위부(護東夷校尉府)를 매개로 교섭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평주: 『우공(禹貢)』의 기주(冀州) 땅을 살펴보면, 주대에는 유주(幽州)의 경내였고, 한대에는 우북평군에 속하였다. 후한 말기에 공손도가 스스로 평주목이라 칭하였으며, 그의 아들 공손강과 강의 아들 공손문의(公孫文懿)가 요동을 점거하니 동이 9종이 모두 복종하여 섬겼다. 위나라에서 동이교위를 두어 양평에 있게 하고, 요동·창려·현도·대방·낙랑의 5군을 나누어 평주로 삼았으며, 뒤에 다시 이를 합하여 유주로 만들었다. [공손]문의가 멸망한 후 호동이교위를 설치하고 양평에 [치소를] 두었다. [진 무제] 함녕(咸寧) 2년 10월에 창려·요동·현도·대방·낙랑 등 다섯 군국을 나누어 평주를 두었다. [평주에서] 26개 현 1만 8,100호를 통솔하였다. _ 『진서』 지리지
위 기록에 의하면, 평주가 유주에서 떨어져 나온 것은 함녕 2년(276년)이다. 그런데 『진서』 본기에는 태시 10년(274년)으로 나온다. 어느 하나를 택하는 경우도 있지만, 274년 결정되고 276년 시행되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현재로선 무리가 없다고 여겨진다. 아무튼 『진서』 지리지 평주조의 내용은 276년 이후의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데, 실제 지리지의 지리 구분은 무제 태강 4년(283년)의 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윤용구, 2014).
지리지의 내용을 좀 더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곧 평주자사가 있는 치소는 창려군 창려이고, 동이교위는 요동군 양평에 자리해 있다는 점이다. 유주의 경우도 자사부는 범양국 탁현에 있었고 오환교위를 겸한 유주도독은 연국 계현에 있었다. 흔히 유주자사가 오환교위를, 평주자사가 동이교위를 겸한 사실로 보면 의아한 내용이다.
결론부터 속히 말한다면, 무제 태강 3년(282년) 주군의 군정과 민정을 구분하고 자사에게는 도독과 교위 같은 영병(領兵)을 금지한 조치에 따른 결과이다. 그리고 평주에 도독이 없는 것은 유주도독이 겸임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이 조공과 그 담당 관부의 소재를 알기 위해서는 진 무제 태강 연간(280~289년)에 이루어진 이른바 ‘罷州郡兵’과 ‘軍主分治’의 변화와 뒤 이은 혜제대 ‘郡州分治’의 파행상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자사를 대신하여 도독이 군권을 장악했으나, 전반적인 군비 축소 과정에서 변경 관리는 크게 후퇴하였다. 여기에 황실 내부의 혼란을 틈타 지방의 군벌과 중국 내지에 다수 거주하던 오환·선비 등 새외에서 5호의 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결국 팔왕의 난을 계기로 서진은 혼란에 휩싸이면서 동북에서도 동이교위의 역할을 선비 모용외가 담당하는 등 난맥상을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진서』 동이전에 고구려의 입전은 물론 본기 어디에도 고구려와의 교섭 기사가 전무하다. 이처럼 『진서』는 동서 양진(兩晉)을 서술한 단대사이지만, 정작 동이전의 내용은 빈약하기 그지없다. 서문에 따른다면 『진서』 사이전의 구성은 무제대에 입공한 23국이 대상이었다. 일찍이 『진서각주(晉書斠注)』에서 지적한 대로 사이전 서문의 입공국 수에는 의문이 있다. 숙신과 그 주변 비리 등 10국에 관한 내용을 제외하면 『진서』 무제기와 동이전에 수록된 조공 기사가 새로운 기록의 전부라 하겠다. ‘동이’로 표현된 다수의 ‘국’ 가운데 고구려 교섭 기사가 들어있는지도 명확치 않다. 동이전에는 부여국, 마한, 진한, 숙신씨, 왜인, 비리 등 10국의 15개 종족(혹은 국가)이 입전되어 있다. 입전된 내용을 보면 서진대 동이 제국을 서술한 것이다. 변한(변진)은 진한전에 부기되어 있으나, 고구려, 예맥은 열전은 물론 본기에도 빠져 있다. 서진이 주변 이민족에 사여한 인장 가운데 ‘진고구려솔선읍장(晉高句驪率善邑長)’, ‘진솔선맥백장(晉率善貊佰長)’, ‘진솔선예백장(晉率善穢佰長)’ 등이 전존(傳存)되고 있음을 보더라도, 『진서』 동이전에 이들이 누락된 것은 의문이다(윤용구, 1998; 이승호, 2012). 고구려와 예맥의 기록이 빠진 것은 『진서』가 편찬되던 당 태종대 고구려와의 관계에 원인이 있다. 요컨대 수·당 군신들이 고구려를 한대 이래 중국 군현의 고지(故地)로 이해하여 조공이 아닌 회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기 때문이다(윤용구, 1998).
표5 | 서진대 동이교위의 활동
| 임관자 | 역임 관명 | 주요 활동 |
| - 한의 동이교위 설치, 선비 위무. | ||
| 선우영(鮮于嬰) | 익주군사(益州軍司), 영주자사(寧州刺史), 평주자사(平州刺史), 후장군(後將軍) | - 요서에 침입한 선비 격퇴. - 부여에 침략한 선비 모용부에 패배. |
| 하감(何龕) | - 독우 가탐(賈沈)을 보내 선비 모용부를 격퇴하고 부여를 다시 세움. - 마한의 조공 관리. - 숙신 서북의 비리(裨離)·모노(牟奴) 등 10국 조공. - 자립 전, 선비도독 모용외의 조공. | |
| 문숙(文俶) | - 부임 전 동이교위 사직. | |
| 이진(李臻) | 평로장군(平虜護軍) | - 요동태수 방본(龐本)에게 피살. 선비 소련(素連)·목진(木津) 두 부가 이진의 복수를 빌미로 반란을 일으킴. |
| 봉석(封釋) | - 소련·목진 두 부에 연이어 패배. 화의 실패. - 선비 모용외에게 자손을 유언으로 부탁. | |
| 최비(崔毖) | - 선비 모용외의 회유가 실패하자, 고구려·우문(宇文)·단국(叚國)을 결집하여 모용외를 도모하려다 고구려로 도주. |
표5는 서진대 동이교위의 활동을 정리한 것이다. 동이교위는 앞서 본 대로 한위대의 존재를 부인하기는 어렵지만, 제도로서 정착되어 실질적으로 기능한 것은 서진대 들어서였다. 특히 이민족통어관을 일제히 신설한 무제 태강 초(282~285년)에 설치되었다. 그러므로 동이교위는 동이족의 영호를 전담한 관직이라고 하겠다(윤용구, 2005).
최초의 동이교위라 할 선우영은 평주자사를 겸하고 있었는데, 요서를 침략한 선비는 격퇴하였지만, 선비 모용외의 부여 침탈을 막지 못한 책임으로 동이교위직은 하감에게 인계하였다. 하감은 먼저 가탐을 보내 모용외 세력을 격퇴하고 부여를 회복시키고, 숙신 서북의 비리·모노 등 10국의 조공을 이끌어냈으며, 멀리 마한도 조공케 하였다. 이진은 304년부터 요동태수 방본에게 살해당한 309년까지 동위교위를 역임하였다. 그의 활동과 관련하여 다음 기록이 주목된다.
영가(307~313년) 초, [모용]외는 선비대선우를 자칭했다. 요동태수 방본(龐本)이 사적인 원한으로 동이교위 이진을 죽이자, 변경 가까이 있는 선비족인 소련·목진 등이 [이]진의 원수를 갚는다고 겉으로 칭탁하며 실제로는 이를 틈타 난을 일으키고자 하여 마침내 [요동군의] 여러 현들을 공격해 함락하고 사족과 백성들을 죽이거나 잡아갔다. [요동]태수 원겸이 여러 번 싸웠으나 여의치 못하니 [동이]교위 봉석이 두려워하여 화친을 청했다. 해마다 침범해 노략질하니 백성들이 생업을 잃고 떠돌다가 [모용외에게] 귀부하는 자가 잇달았다. _ 『진서』 모용외재기
위 사료에 따르면 ‘변경 가까이 있는 선비족(附塞鮮卑)’으로 표현된 소련부·목진부가 요동태수에게 살해된 동이교위 이진의 복수를 하겠다는 명분으로 난을 일으켰다고 한다. 이는 그동안 요동군의 새외에 거주하면서 동이교위의 통어를 받아온 사정을 반영한다고 하겠다. 또한 이진을 이어 동이교위가 된 봉석은 소련·목진 선비의 계속된 요동 침탈로 고전하였음을 전한다. 뒤를 이은 최비는 유주를 장악한 왕준의 지원하에 있었으나, 314년 석륵에게 왕준 정권이 붕괴하자 입지가 좁아들었다. 이를 회복하려고 고구려와 우문부 및 단요(段遼)를 결집하여 모용외를 도모하려다 실패하자 고구려로 망명하였다.
이상에서 서진대 동이교위의 행적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동이교위가 영호(領護)하던 주 대상은 의외로 선비의 여러 부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속한서』 백관지 유소주에 인용된 『진서』에 “동이교위를 두어 선비를 위무”한다는 기록에 부합한다.
물론 동이교위가 선비의 영호만을 대상으로 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감의 경우, 부여를 비롯하여 숙신 서북의 모노 등 10국, 그리고 멀리 마한에서도 조공하는 등 동이교위의 이름에 걸맞는 활동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여와의 관계는 모용외가 이끄는 선비에 대한 통어의 연장으로 볼 측면이 많다. 동이교위는 부여를 회유하여 선비와 고구려 등의 연계를 차단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당 태종의 주도로 편찬한 『진서』는 고구려의 대외관계를 온전하게 복원하기 어렵다. 서진 무제대(265〜290년)에 활발했던 동이 제국과의 교섭 속에서도 고구려의 모습은 찾을 수 없다. 서진의 동북 방면에서의 변경 방비는 요동과 요서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선비 모용부를 막는 데 중점이 두어졌다. 그와 아울러 부여·숙신·모노 등 10국을 회유하여 선비와의 연계는 물론 고구려의 진출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삼국사기』 서천왕 10년조(280년)에 의하면, 숙신의 침입을 격퇴하고 그 본거인 단로성(檀盧城)을 정벌하는 한편 양맥(梁貊)의 여러 읍락을 지배 아래 두었다고 한다. 고구려의 숙신 정벌과 양맥의 귀속은 서진의 동방정책 속에서 고구려가 대응하던 모습으로 이해된다(이정빈, 2019). 서진이 요동 산지를 넘어 고구려의 중심지에 대해 직접적인 위협을 가한 적은 없었다고 생각된다.
292년 일어난 팔왕의 난 이후 서진은 급격히 멸망의 길로 들어섰으며, 311년 낙양이 함락되면서 사실상 멸망하였다. 서진의 멸망 이전부터 변경 방비와 군현 운영은 중단되었다. 302년 고구려 미천왕의 서안평 공격을 시작으로 요동군과 현도군, 그리고 낙랑군과 대방군은 차례로 고구려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4세기에 걸친 중국의 동방 지배가 종식되었다.
고구려의 공격에 맞서서 요동군과 낙랑군을 지키던 것은 토착 한인호족(漢人豪族)이었다. 이들은 한 군현 설치 이후 들어온 이주 한인(漢人)과 예맥 등 토착 주민 가운데 군현 운영에 참여하면서 세력을 키워온 주민집단이었다. 미천왕의 공격에 맞서 수년간 요동군과 낙랑군의 최후를 지킨 요동의 장통(張統)과 낙랑의 왕준(王遵)의 존재는 공권력을 대신한 토착 한인호족세력의 사회적 규제력을 잘 보여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