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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1. 나부통치체제 해체와 방위부 변천

1. 나부통치체제 해체와 방위부 변천

먼저 초기 정치체제가 해체되고 중앙집권체제로 전환하는 양상을 지배세력의 존재 형태 즉 나부의 소멸과 방위부의 등장을 중심으로 서술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기사의 양상에서 나부명의 소멸 과정이 곧 나부를 기초로 하는 초기 통치체제의 해체를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달리 고구려본기 기사에서 방위부는 고국천왕대에 등장하여 동천왕 이후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이때부터 미천왕대까지 나부와 방위부는 병존하는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 시기를 지배세력이 나부에서 방위명부로 재편되는 과도기로 파악한다.
방위부는 본래 계루부 내부 지배세력의 편제방식인데, 나부의 지배세력이 점차 수도 국내성(國內城)으로 이주하여 방위부로 편제되었고, 이 과정에서 방위부가 확대 개편되었다고 파악된다. 이러한 방위부의 개편 과정에서 방위부의 성격 자체가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동천왕대 방위부 출신 인물들이 왕권의 친위적 성격을 보여주었다면, 이후 점차 중앙정치 운영의 주체로서 방위부 출신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으며, 봉상왕대에는 최고 관직인 국상(國相)의 지위에도 오르는 양상을 보여준다. 이러한 양상을 중심으로 나부통치체제의 해체와 방위부의 변천 과정을 살펴보겠다.
 
1) 방위부의 등장과 성격
나부통치체제의 변화와 해체는 같은 시기에 등장하는 방위부의 성격과도 관련된다. 우선 방위부가 처음 등장하는 고국천왕대의 정치 상황과 관련된 자료를 살펴보는 것이 방위부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와 관련된 중요 사료인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기사를 인용 하여 살펴보겠다.
[고국천왕] 12년(190년) 가을 9월, 중외대부(中畏大夫)인 패자(沛者) 어비류(於畀留), 평자(評者)인 좌가려(左可慮) 등이 모두 왕후의 친척으로서 나라의 권력을 장악하였는데, 그 자제들이 모두 권세를 믿고 무례하고 거만하였으며, 남의 자녀를 노략질하고 남의 전택을 빼앗았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원망하고 분통해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화를 내며 죽이려 하니 좌가려 등이 4연나(椽那)와 더불어 반란을 도모하였다.주 002
각주 002)
『삼국사기』 권16 고구려본기4 고국천왕 12년, “秋九月 京都雪六尺 中畏大夫沛者於畀留·評者左可慮 皆以王后親戚 執國權柄 其子弟幷恃勢驕侈 掠人子女 奪人田宅 國人怨憤 王聞之 怒欲誅之 左可慮等與四椽那謀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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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천왕] 13년(191년) 여름 4월에 [좌가려 등이] 무리를 모아 왕도(王都)를 공격하였다. 왕이 기내(畿內)의 병마를 동원하여 이를 평정하였다. 마침내 명령을 내리기를 “… 이제 너희 4부는 각기 현명하고 어질면서도 낮은 데 있는 자를 천거하여라”고 하였다. 이에 4부가 함께 동부(東部) 안류(晏留)를 천거하였다. 왕은 그를 불러 국정을 맡겼는데, 안류가 왕에게 말하였다. “… 서압록곡(西鴨淥谷) 좌물촌(左勿村)의 을파소(乙巴素)란 사람은 유리왕 때의 대신 을소(乙素)의 손자로서, 성질이 굳세고 지혜와 사려가 깊으나, 세상에서 쓰이지 못하고 힘들여 농사지어 자급합니다. …” 왕은 [을파소에게] 사신을 보내 겸손한 말과 두터운 예로써 모셔, 중외대부로 임명하고 작위를 더하여 우태(于台)로 삼고 말하였다. … 겨울 10월에 왕은 [안류를] 대사자(大使者)로 삼았다.주 003
각주 003)
『삼국사기』 권16 고구려본기4 고국천왕 13년, “夏四月 左可慮等聚衆 攻王都 王徵畿內兵馬平之 遂下令曰 “近者 官以寵授 位非德進 毒流百姓 動我王家 此寡人不明所致也 令汝四部 各擧賢良在下者” 於是 四部共擧東部晏留 王徵之 委以國政 晏留言於王曰 “微臣庸愚固不足以參大政 西鴨淥谷左勿村乙巴素者 琉璃王大臣乙素之孫也 性質剛毅 智慮淵深 不見用於世 力田自給 大王若欲理國 非此人則不可” 王遣使 以卑辭重禮聘之 拜中畏大夫 加爵爲于台 謂曰 “孤叨承先業 處臣民之上 德薄才短 未濟於理 先生藏用晦明 窮處草澤者久矣 今不我棄 幡然而來 非獨孤之喜幸 社稷生民之福也 請安承敎 公其盡心” 巴素意雖許國謂所受職不足以濟事 乃對曰 “臣之駑蹇 不敢當嚴命 願大王選賢良 授高官 以成大業” 王知其意 乃除爲國相 令知政事 於是 朝臣國戚 謂素以新間舊 疾之 王有敎曰 “無貴賤 苟不從國相者族之” 素退而告人曰 “不逢時則隱 逢時則仕 士之常也 今上待我以厚意 其可復念舊隱乎” 乃以至誠奉國 明政敎 愼賞罰 人民以安 內外無事 冬十月 王謂晏留曰 “若無子之一言 孤不能得巴素以共理 今庶績之凝 子之功也” 乃拜爲大使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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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에서 보듯이 연나부의 반란을 진압한 고국천왕이 ‘4부에 각기 현량자를 천거하라’고 명령을 내렸는데, 이때 ‘4부’가 어떤 부를 가리키는지에 대해 논란이 있다. 이 4부가 계루부를 제외한 4나부라는 견해(이병도, 1977), 연나부를 제외한 4나부라는 견해가 있다(노중국, 1979; 손영종, 1990; 이정빈, 2006). 그러나 4부가 천거한 안류가 동부 출신임을 볼 때, 이때의 4부는 방위명을 갖는 4부, 즉 방위부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이종욱, 1982b; 노태돈, 1999a; 임기환, 2004; 여호규, 2014).
그런데 고구려본기 기사에서는 대무신왕대에 남부(南部) 사자(使者) 추발소(鄒勃素)의 존재가 보인다. 그래서 이를 근거로 방위부가 대무신왕대나 그 직후에 설치되었다고 보기도 하지만(이종욱, 1982b; 조영광, 2016b), 이 대무신왕대의 방위부 기사는 앞뒤 시기로 방위부의 존재를 보여주는 맥락이 없이 고립되어 나타나는 기사이기 때문에, 대무신왕대의 상황을 반영한다고 보기 어렵다. 방위부의 등장 시기는 자료상으로는 고국천왕대가 처음이지만, 대체로 2세기 후반에 중앙집권력의 강화와 함께 방위부가 설치되었을 것으로 이해함이 타당하겠다(노태돈, 1999a).
그러면 이 4방위부의 실체는 무엇일까? 이와 관련하여 당시 연나부의 반란군이 ‘왕도’를 공격하였을 때, 고국천왕은 ‘기내’의 병마를 동원하여 이를 평정하였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여기서 ‘왕도(王都)’란 곧 국내성 일대로 볼 수 있다. 문제는 ‘기내’의 공간적 범위를 어떻게 볼 것인가이다. ‘기내(畿內)’란 본래 왕도 주위의 500리 이내 지역을 지칭하는 용어이지만, 진·한(秦·漢) 이후 중국 왕조에서는 지방제도를 정비하면서 왕도 주변지역을 지방행정구역과 구별하여 기내로 편제하였다. 따라서 ‘기내’의 범위를 왕도 주위의 일정 지역(이종욱, 1982b), 또는 계루부 지역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임기환, 2004). 그 범위를 좁혀 왕성 주변의 수도 일대라고 보기도 한다(노태돈, 1999a). 또한 지방제도로서 왕기(王畿)제가 시행되지는 않았을지라도 국내도성 주변, 즉 현재의 집안 일대를 왕기와 같은 성격의 구역으로 편제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조영광, 2016b).
제시한 사료에서 ‘기내’가 고국천왕으로 대표되는 계루부 왕권의 정치적·군사적 세력기반임을 알 수 있다. 고국천왕 당시는 아직 수도 국내지역에 도성 성곽조차 축조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제도상 왕기제가 시행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이 기록의 ‘기내’라는 표현은 왕도 주변이라는 본래적 의미보다는 계루부 왕권이 군사를 동원할 수 있는 지역적 범위, 즉 왕권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지역에 대한 관념적 표현으로 이해된다. 즉 기내는 계루부 지역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함이 타당하겠다. 이렇게 보면 나부통치체제가 운영되고 있는 이 시기 상황에서 연나부 등 다른 4나부는 지방에 해당되고, 고구려왕의 세력기반인 계루부가 ‘왕기’ 혹은 ‘기내’라는 관념으로 받아들여졌으리라 추정된다.
그러면 기내 세력을 동원하여 연나부의 반란을 진압한 후 고국천왕의 하명을 받든 4방위부의 공간적 범위는 ‘왕도’일까, 아니면 ‘기내’일까, 아니면 이와 또다른 지역범위일까?
4방위부의 공간적 범주와 관련하여 제시한 사료에서 동부 안류가 추천한 인물인 을파소가 서압록곡 좌물촌 출신임이 고려된다. 그의 선조 을소가 유리왕대의 대신으로 일컬어진 것은, 곧 국내 지역의 토착세력으로서 유리왕의 국내 천도를 계기로 계루부에 편입된 존재임을 시사한다. 그리고 연나부의 반란을 진압하고 고국천왕이 왕실의 세력기반인 계루부 내의 4부에 인재를 천거하라고 내린 하명이기 때문에, 안류가 천거한 을파소 역시 계루부 내 인물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을파소의 출신이 서압록곡 좌물촌으로 나타남은 그가 아직 방위부로 편제되지 않았던 인물임을 뜻한다. 서압록곡의 ‘곡(谷)’은 일종의 지역집단 혹은 지역집단을 포함하는 행정적 단위이며 지리적 공간에 대한 표현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앞 사료에서 계루부의 공간범위에 방위부로서 4부의 범위도 있고, 또 4부와 구분되는 서압록곡과 같은 지역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을파소의 출신지인 서압록곡이 계루부 내의 읍락임에도 불구하고 을파소의 출신이 부(部)가 아닌 곡-촌으로 파악됨은, 방위부가 계루부 전체를 지역 구분한 편제가 아님을 방증한다. 이 점을 고려하면 4방위부는 계루부 전체 영역보다는 좁은 범위인 기내 혹은 왕도라는 공간 내에 위치하고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러면 방위부의 성격은 어떠했을까? 계루부 내 4부의 성격과 관련하여 방위부에 대응하는 나부 즉 연나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앞 사료에서 고국천왕의 왕후 우씨(于氏)의 소속부인 연나부(椽那部)는 ‘4연나(椽那)’로 나타난다. 4연나는 연나부를 구성하는 4개의 집단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4개 집단의 성격에 대해 연나부 내부의 지역적 단위정치체로 이해한다. 나부는 단일한 정치조직체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그 역사적 형성 과정에서 다수의 단위정치체가 결합된 것이다. 즉, 부내부(部內部)의 존재가 그것이다.
예컨대 대무신왕 5년에 고구려에 투항한 다음 연나부에 안치된 부여왕 종제의 1만여 명 집단이 연나부를 구성하는 단위정치체의 하나였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4연나를 부여왕 종제집단을 비롯하여 이후 연나부의 성씨로 등장하는 명림씨(明臨氏)·우씨(于氏) 등 부내부 세력집단으로 상정하기도 한다(노태돈, 1975; 1999a). 또는 4연나를 명림씨·우씨·낙씨(絡氏)·연씨(掾氏) 등 네 성씨집단 즉 혈연적 친족집단으로 보기도 한다(김현숙, 1993). 연나부 출신으로서 등장하는 명림씨·우씨 등 성씨집단을 친족집단으로 볼 수 있으며, 또 이러한 성씨집단의 등장이 후술하는 바와 같이 나부 내 제가세력의 분화 과정을 보여주지만, 4연나 자체를 그대로 성씨집단으로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4연나는 부내 부로 파악함이 타당하겠다.
이처럼 연나부가 4개의 단위정치체로 구성되었다면, 계루부 내부에도 역시 여러 단위정치체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고국천왕이 명령을 내린 ‘4부’ 즉 방위부도 ‘4연나’와 동질적인 성격으로 볼 수 있을까? 그런데 ‘4연나’라는 표현에서는 연나부를 구성하는 단위정치체로서의 면모를 추정할 수 있음에 반하여, 동서남북으로 구획되는 방위부의 명칭에서는 단위정치체라기보다는 일종의 행정적인 구분과 편제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렇다면 앞서 검토한 바와 같이 4방위부를 계루부 전체 지역을 대상으로 한 지역구분으로 보기는 어렵겠다. 4방위부를 행정적 성격이 강한 편제방식으로 본다면, 역시 방위부는 왕도 혹은 기내의 지역구분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겠다.
그러면 계루부 내에서 방위부는 어떤 배경에서 성립하였을까? 을파소는 본래 서압록곡 좌물촌에서 “힘써 농사를 지어 자급(力田自給)”하는 인물이었다. 그런 을파소가 고국천왕대에 우태의 관등을 받고 국상으로 임명된 후 수도로 이거하였을 때, 동부 안류와 마찬가지로 방위부로 편제되었을까? 이에 대해서 추정할 수 있는 근거자료는 없다. 다만 4부의 천거를 받은 동부 안류도 애초에 고국천왕이 국상에 임용하고자 했던 인물이다. 그렇다면 안류 역시 계루부 내의 유력한 제가(諸加) 세력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그 역시 본래는 계루부 내 단위집단의 수장으로서 을파소보다 이른 시기에 왕도로 이거하여 방위부에 편제된 인물로 추정함이 타당하겠다.
이렇게 볼 때 방위부는 본래 계루부 내에서 독자적 세력기반을 갖는 지배세력이 왕도를 중심으로 결집하여 새로이 편제된 조직임을 추정할 수 있다. 즉, 방위부는 이전의 단위정치체로서 부내부가 아니라, 왕도로 결집·형성되는 새로운 지배자집단을 편제하는 방식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곧 나부 내 지배세력의 새로운 존재 형태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이와 같이 계루부 내 제가세력이 왕도의 방위부로 결집되어가는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물론 이는 제가세력의 기반인 나(那)집단이나 곡(谷)집단이 단위정치체로서의 성격이 해체되어 가는 과정과 관련된다. 현재로서는 이러한 단위정치체의 해체와 연관되는 사회경제적 요인으로서 이 시기 생산력의 발전상을 충분히 파악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다만 고국천왕대에 진대법(賑貸法)이 실시되는 배경에서 짐작되는 사회분화의 양상을 통하여 당시 단위집단인 읍락 내부의 사회 분화를 예상해 볼 수 있고, 그것이 하나의 동인이 되었으리란 추측 정도는 가능하다. 앞 사료에서 연나부의 어비류, 좌가려 등이 남의 자녀를 노략질하고 남의 전택을 빼앗았다는 사실 역시 나부 내 제가세력들의 세력기반인 읍락의 공동체적 기반이 분화, 해체되어 가는 과정을 반영한다.
한편 나부 내의 제가세력을 방위부로 편제해 나가는 데에는 이들에 대한 체계화된 편제방식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관등 조직이나 식읍(食邑)의 사여 등이 그것이다. 고국천왕대 안류나 을파소에게 관등과 관직을 사여한 사례, 또 관구검의 침입을 받아 동천왕이 위기에 처하였을 때 공훈을 세운 동부 밀우(密友), 하부 유옥구(劉屋句), 동부인(東部人) 유유(紐由) 등에게 식읍을 사여하거나 관등을 수여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사례를 통해서 방위부 내의 지배세력은 독자적 세력기반에 근거하여 존립하기보다는 점차 왕권과의 결합을 기초로 중앙정치권력에 참여함으로써 얻는 보다 풍부한 정치적·경제적 성과를 따라 움직여갔을 것이다. 이에 따라 방위부로 편제된 지배층은 더욱 강고하게 왕권과 결합되어 왕에게 충성하는 근신(近臣) 내지 친위적 성격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 점은 고국천왕 이후 동천왕대에 방위부 출신들의 활동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위(魏)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毋丘儉) 군대와의 전투에서 처음에 동천왕이 거느린 보기(步騎) 2만 군은 아마도 왕의 친위군대인 계루부 병력을 비롯하여 각 나부의 군대들로 구성된 연합군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양곡(梁谷)전투에서 패한 후 압록원으로 도망할 때 국왕을 호위한 1,000여 기 군대는 대개 친위군으로서 계루부의 군대로 추정되며, 이때 국왕을 보호한 동부 밀우, 하부 유옥구, 동부인 유유 등도 친위군의 지휘관으로서 계루부 출신이었을 것이다. 이들 방위부 출신들이 국왕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걸고 결사대를 조직하거나 적장을 살해한 사실은 방위부가 국왕에 충성을 다하는 친위세력임을 말해 준다.
물론 『북사(北史)』 권94 고려전에 “정시 6년에 관구검이 다시 [고구려]를 토벌하자 위궁(位宮, 동천왕)이 제가(諸加)를 거느리고 옥저로 도망하였다”라는 기사를 보면 밀우·유옥구·유유 등의 관등은 보이지 않지만, 이들도 제가에 속하는 존재로 볼 수 있다. 아마도 본래 계루부 내의 제가세력이었지만, 왕권과 상당히 밀접한 연관을 갖고 방위부로 편제된 인물들로 파악하여도 무방하리라 본다.
그러면 방위부의 공간적 범위에 대해 살펴보자.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방위부의 지역적 범위에 대해서는 기내(畿內)로 표현된 계루부 전역을 포괄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이종욱, 1982b), 이렇게 되면 행정적 성격보다는 단위정치체적인 성격으로 파악되기 때문에 따르기 어렵다. 방위부를 수도 국내성 일대로 파악하는 견해(노태돈, 1999a; 임기환, 2015; 조영광, 2016)가 타당하다.
그런데 방위부를 수도 국내성 일대로 파악하는 견해 중에서도 구체적인 방위부의 비정에 있어서는 일정한 차이가 있다. 평상시 거점이나 국내성 내부를 5방위부로 편제하였다는 견해(임기환, 2003; 여호규, 2012; 강진원, 2018), 왕성이 중부(中部)이고 그 주변을 4방위부로 편제하였다는 견해(노태돈, 1999a), 국내성을 포함하여 현재의 집안 지역 전체를 5방위부로 구획하였다는 견해(정호섭, 2015; 조영광, 2016) 등으로 나뉜다. 또한 고국천왕 시기에는 집안 지역 전체를 4방위부로 구획하였다가 3세기 후반에 국내성지를 축조한 다음 그 내부를 중부와 4방위부로 구획하였다고 보기도 한다(임기환, 2015).
 
2) 나부의 성격 변화 및 방위부로의 재편
방위부가 계루부 내의 조직이라면, 여타 나부의 경우도 이와 같은 방위부가 성립하고 있었을까? 계루부를 제외하고 다른 4나부에서도 계루부의 5방위부와 유사한 형태의 통치조직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는 견해도 있지만(이종욱, 1982), 앞 사료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4연나’라는 부내부의 존재를 상정하면, 연나부 내에서 방위부와 유사한 형태의 편제를 갖추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른 나부와는 달리 계루부의 경우에만 방위부를 구성하는 데에는 계루부가 가장 강력한 나부로서 보다 많은 단위집단을 포괄하고 있고, 이러한 세력기반에 기초하여 고구려 왕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즉 고구려 왕권을 구심점으로 하여 계루부 내에서 지배세력의 결집 과정이 다른 나부보다 좀더 일찍부터 전개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나부 내 단위집단의 자치적 성격이 약화되어 가고, 이에 따라 나부 지배세력(제가세력)의 성격 변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은 다른 나부에서도 어느 정도 동일한 방향으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를 지배세력의 족단화(族團化) 과정으로 이해한 연구가 주목된다(여호규, 1992). 즉, 중천왕의 왕비 ‘연씨(椽氏)’와 소후(小后) ‘관나부인(貫那夫人)’이란 표현을 나부 전체를 하나의 ‘씨(氏)’, ‘족성(族姓)’으로 파악하고 있는 예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삼국지』 고구려전의 “본래 5족이 있었다(本有五族)”라는 기사도 ‘씨족적 혹은 부족적’인 혈연관계가 강하게 잔존하였던 모습이 아니라, 나부가 2세기 말을 전후하여 점차 단위정치조직체로서의 성격을 상실하면서 지배세력의 존재 양태인 ‘족(族)’, ‘씨(氏)’, ‘족성(族姓)’으로 변질되었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또한 3세기 초반을 전후하여 왕족이나 나부의 지배족단을 위시하여 일반 기층사회에서까지 친족집단 간의 분화가 진행되었던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노태돈, 1983).
나부의 해체 과정과 지배세력의 족단화 과정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대체로 수긍할 수 있다. 이러한 지배세력의 결집 과정에서 각 지배집단은 축소된 친족집단의 범주를 갖는 가문 단위로 분화하는 과정을 밟았을 것이다. 물론 현재 확인되는 사료에서는 이러한 변화양상을 방증해 줄 기록을 찾기 어려우나, 다음 몇 사례는 검토해 볼 여지가 있다. 대무신왕 5년(22년)에 고구려의 공격으로 해체되기 시작한 부여 집단은 부여왕의 사망 이후 부여 왕제나 부여왕 종제가 그 대표자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곧 형제상속의 측면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모습은 대무신왕 13년(30년)에 매구곡인(買溝谷人) 상수(尙須), 제(弟) 위수(尉須), 당제(堂弟) 우도(于刀)가 한 무리를 지어 내투한 기사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형제상속의 관행은 친족집단의 공동체적 성격이 강하게 잔존하는 사회에서 나타나는 모습이다(노태돈, 1983).
그런데 3세기의 상황을 전하는 『삼국지』 고구려전에 보이는 고추가(古鄒加)를 칭할 수 있는 소노부 적통대인(適統大人)의 존재는 단순히 소노부의 대표자가 아니라, 이미 분화된 친족집단의 계승자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와 관련시켜 볼 수 있는 예로는 동천왕대에 공을 세운 유유의 관등이 그의 아들 다우(多憂)에게 계승된 예를 들 수 있다. 왕위 계승에 있어서도 고국천왕 이후에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 전환되었음은 이미 지적되고 있는 사실이다(이기백, 1959). 대략 이러한 예에서 이미 3세기 단계에는 그 이전과는 달리 가문별로 분화된 나부 지배세력의 존재양식을 엿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나부 지배세력의 변화는 나부가 갖는 단위정치체로서의 성격을 해체시키면서 방위부로의 재편을 용이하게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나부는 본래 지녔던 단위정치체로서의 성격이 변질되어가면서 점차 그 기능과 위상을 잃어갔다.
나부의 해제 및 나부 지배세력의 방위부 편제와 관련된 양상을 짚어 보자. 앞에 제시한 사료에서는 나부세력과 계루부 왕권 혹은 도성인 국내성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내용도 나타나고 있다. 중외대부를 역임하고 있는 어비류는 연나부 출신으로 관등이 패자인 것으로 보아 연나부의 대표자에 해당되는 인물이다. 그런데 4연나의 반란을 주도한 세력은 평자인 좌가려이다. 이는 4연나가 반란을 일으킬 때에 중앙관직인 중외대부에 있는 어비류는 수도에 머물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이종욱, 1982; 임기환, 1988; 2004). 즉 계루부왕이 설치한 중앙의 관료기구에 각 나부의 세력들이 관직을 갖고 수도 국내성에 머무르면서 국정에 참여하였음을 보여주는 자료로 이해된다. 이를 반대로 생각하면 어비류를 제외하고 좌가려를 비롯한 대부분 연나부의 제가세력들은 자기 본거지에 거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좌가려의 직임인 평자는 구체적인 임무나 성격을 알기 어렵지만, 각 나부의 부장(部長)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김광수, 1983a). 다만 ‘평(評)’이 지역집단이나 행정구역을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今西春秋, 1971; 노태돈, 1975). 『양서』 신라전의 “육탁평(六𠸌評)”이 6부를 지칭하는 점, 그리고 『수서(隋書)』 권81 고려전의 “내평외평오부욕살(內評外評五部褥薩)”이라는 기사가 그러한 면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따라서 평자는 연나부를 통솔하는 직임으로 볼 수 있다. 즉 좌가려는 나부를 직접적으로 통솔하는 제가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로 상정할 수 있다.
앞 사료에는 서로 성격을 달리하는 세 그룹의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다. 첫째가 연나부 출신인 어비류와 좌가려이다. 이들은 연나부를 포함하여 이른바 4나부 세력을 대표한다고 파악된다. 둘째, 고국천왕의 명령을 받은 동부 안류로 대표되는 4방위부 인물들이다. 셋째는 서압록곡 좌물촌 출신인 을파소로서, 계루부에 속하는 인물이지만 4방위부에 속하는 안류 등과는 성격을 달리한다고 파악된다. 을파소가 유리왕 때의 대신 을소의 손자라는 점에서 계루부 내의 제가세력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안류와 을파소가 받은 관등의 차이에서도 방증된다. 안류는 대사자를 받았지만, 을파소는 우태를 받았다. 대사자와 우태는 관등의 성격이 다르다. 대사자가 계루부 왕권에 직접 속해 있는 근시적 성격을 갖는다면, 우태는 나부의 제가세력들이 수여받는 관등이라고 할 수 있다. 앞 사료에서 대사자 안류와 우태 을파소로 대표되듯이 같은 계루부 내에서도 왕권과 결속도가 높은 집단과 계루부를 구성하는 나부 제가세력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단위정치체로서 나부의 성격이 변화되는 과정에서, 나부의 제가세력들은 집권체제의 정비에 따라 중앙관계조직의 운영체계 속에 흡수되어 점차 왕경으로 이거하여 방위부로 편제되어 갔다. 제가세력을 중앙귀족관료로 편제하는 중앙정치조직이나 신분제는 태조대왕대에 이미 성립되었으나, 소수의 중앙관직을 가진 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자기 본거지에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앞 사료에서 연나부의 대표자인 중외대부 패자 어비류와 평자 좌가려가 그러한 존재방식의 차이를 대변한다.
그런데 이러한 제가들의 운동양식에 일정한 변화가 나타났다. 예컨대 서천왕 이전에는 연나부에서 왕비를 내었던 것과는 달리 서천왕의 왕비는 서부(西部) 출신인 우수(于漱)의 딸이었다. 그런데 이 우수와 고국천왕 비의 아버지인 연나부 우소(于素)가 동일 부족 출신이라는 견해를 받아들인다면(이기백, 1959), 이 사실은 왕비 출신부의 전환이라는 정치적 변동을 뜻하는 것은 아니고, 본래 연나부인 우수가 서부를 출신 단위로 하였다고 볼 수 있다(이종욱, 1989). 이러한 나부에서 방위부로의 출신 변화는 당시 제가세력의 존재양식에 중대한 변화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방위부는 수도 국내성 일대의 행정구역인바, 그렇다면 우수는 본거지인 연나부를 완전히 떠나 왕경이나 왕기에 거주하면서 중앙귀족관료화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방위부 출신 인물의 중앙정계 등장은 고국천왕대부터 시작되지만, 이때는 주로 왕의 가신적 성격이 강한 계루부 출신이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점차 집권화가 진행되어 나부의 제가세력들도 중앙귀족관료로 흡수되면서, 이들도 점차 방위부 내로 정착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출신지의 변화나 거주지의 이동은 상대적으로 제가세력들의 나부 지배력이 약화되어 갔음을 의미한다.
나부의 제가세력이 방위부로 재편된 것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나부의 성격 변화를 전제로 한다. 이러한 재편이 가능한 것은, 나부가 3세기 단계에 이미 단위정치체라는 본래의 기능과 성격을 잃고 지배자집단으로 성격이 변질되어 갔기 때문이다. 나부 내에서의 이러한 변동 과정은 대체로 고국천왕 이후 봉상왕대에 이르는 기간에 전개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곧 나부체제를 유지하던 기반이 해체되었음을 의미하며, 이러한 변화에 따라 나부의 제가세력이 방위부로 결집하는 과정이 점차 확대되었을 것이다.
이는 당시 정치적으로 중요한 위상에 있던 왕비나 국상(國相)의 자리를 방위부 출신의 인물이 차지하고 있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서천왕의 왕비는 서부 대사자 우수의 딸로서 기록상 처음으로 방위부 출신인 왕비가 등장한 경우이다. 또 봉상왕대에는 대사자(大使者)에서 대주부(大主簿)로 승급한, 남부 출신인 창조리(倉助利)가 국상으로 임명되고 있다. 게다가 봉상왕의 폐위와 미천왕의 즉위에 공을 세운 인물이 창조리를 비롯하여 북부 조불(祖弗), 남부 소우(蕭友)라는 점 등은 이 시기 정계 운영의 주도권이 나부 출신에서 방위부 출신으로 완전히 넘어갔음을 시사한다. 더욱이 고구려본기에서는 미천왕 이후 나부명 자체가 나타나지 않는데, 이는 곧 초기 나부의 지배세력이 왕도로 결집하여 방위부로의 편제가 완료되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방위부 구성원의 성격도 변화되어 갔다. 고국천왕대의 동부 안류, 동천왕대에 왕을 위해 목숨을 바친 동부 밀우와 하부 유옥구, 동부인 유유는 왕의 측근세력으로서 성격을 보여준다. 그런데 서천왕대에 딸을 왕비로 들이는 서부 대사자 우수, 봉상왕대 국상인 남부 대사자 창조리는 정치적 지위나 독자성에서 고국천왕~동천왕대의 5부인들과는 상당한 차별성을 갖고 있다(임기환, 2004).
나부와 방위부는 비록 같이 부(部)로 표현되었으나, 부로서의 기본 성격이 전혀 다르다. 방위부는 왕도를 중심으로 결집된 ‘왕경 지배자집단’이라는 성격을 갖는다. 방위부는 행정적인 편제단위라는 성격이 강하여 독자적인 단위정치체로서의 성격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부와 구분된다. 그리고 그러한 성격 차이는 부의 역사적 단계를 의미한다.

  • 각주 002)
    『삼국사기』 권16 고구려본기4 고국천왕 12년, “秋九月 京都雪六尺 中畏大夫沛者於畀留·評者左可慮 皆以王后親戚 執國權柄 其子弟幷恃勢驕侈 掠人子女 奪人田宅 國人怨憤 王聞之 怒欲誅之 左可慮等與四椽那謀叛.” 바로가기
  • 각주 003)
    『삼국사기』 권16 고구려본기4 고국천왕 13년, “夏四月 左可慮等聚衆 攻王都 王徵畿內兵馬平之 遂下令曰 “近者 官以寵授 位非德進 毒流百姓 動我王家 此寡人不明所致也 令汝四部 各擧賢良在下者” 於是 四部共擧東部晏留 王徵之 委以國政 晏留言於王曰 “微臣庸愚固不足以參大政 西鴨淥谷左勿村乙巴素者 琉璃王大臣乙素之孫也 性質剛毅 智慮淵深 不見用於世 力田自給 大王若欲理國 非此人則不可” 王遣使 以卑辭重禮聘之 拜中畏大夫 加爵爲于台 謂曰 “孤叨承先業 處臣民之上 德薄才短 未濟於理 先生藏用晦明 窮處草澤者久矣 今不我棄 幡然而來 非獨孤之喜幸 社稷生民之福也 請安承敎 公其盡心” 巴素意雖許國謂所受職不足以濟事 乃對曰 “臣之駑蹇 不敢當嚴命 願大王選賢良 授高官 以成大業” 王知其意 乃除爲國相 令知政事 於是 朝臣國戚 謂素以新間舊 疾之 王有敎曰 “無貴賤 苟不從國相者族之” 素退而告人曰 “不逢時則隱 逢時則仕 士之常也 今上待我以厚意 其可復念舊隱乎” 乃以至誠奉國 明政敎 愼賞罰 人民以安 內外無事 冬十月 王謂晏留曰 “若無子之一言 孤不能得巴素以共理 今庶績之凝 子之功也” 乃拜爲大使者.”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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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부통치체제 해체와 방위부 변천 자료번호 : gt.d_0002_0030_001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