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방통치체제 성립과 수취체제 정비
1. 지방통치체제 성립과 수취체제 정비
1) 지방통치조직의 형성 과정
주몽에 의한 건국 직후 고구려 왕권은 주변의 소국(나국)을 복속시킨 후 해당 소국의 지배세력에게 기존의 지배권을 인정해 주고 대외교섭권 양도와 중앙의 군사동원에 대한 복종, 공납 등의 의무만 부과하였으므로, 고구려는 연맹체의 성격을 띠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보이는 비류국(沸流國)의 복속 기사는 이러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 부여에서 남하해 원고구려 지역에 정착한 주몽은 현지세력의 리더였던 비류국 송양왕(松讓王)과의 경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하며 고구려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비류국 복속 이후 주몽의 처분인데, 주몽은 비류국을 다물도(多勿都)로, 송양을 국주로 삼았다.주 001 이것은 기원전 1세기경 고구려 왕권이 주변세력 복속 후 직접지배를 단행하기보다는 피복속 집단 수장층의 기득권을 인정해 주는 방식으로 일종의 강화된 연맹체적 지배를 하였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상황은 고구려가 국가로 성장하고 점차 국왕권을 중심으로 결집하는 구심력이 발휘되면서 해소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고구려에 복속된 주변 소국은 왕권에 의해 보다 강한 구속력과 통제를 받는 나부로 재편되어 갔고 고구려 중앙의 응집력은 더욱 커져 갔다. 하지만 나부가 핵심 정치기제로 역할하던 고구려 초기에는 여전히 중앙과 지방이라는 개념이 성립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태조왕대의 조나(澡那), 주나(朱那) 정벌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1세기 후반까지도 고구려는 나부가 중심이 되어 대외정벌을 수행했음이 확인되며, 2세기 무렵에도 나부를 단위로 한 반란이나 중앙에서 이탈하는 사건 등이 빈번하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당시까지도 고구려는 중앙의 왕권과 이를 둘러싼 자체적 운동력을 갖는 나부로 정치공간적 구분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국왕 주도로 지방관이 파견되거나 중앙에 대응하는 지방의 개념이 성립되었을 개연성은 매우 약하다.
초기 고구려의 영역은 5나부로 편제된 직접지배권과 공납을 통한 간접지배지역으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보여주는 사료가 『삼국지』 동이전의 기록이다. 이 사료에는 고구려가 직접지배한 약 3만 호에 이르는 영역과, 간접통치가 시행된 동예와 옥저 등에 대한 서술이 있다. 직접통치 지역은 중앙과 나부 수장을 통한 직접적인 수취와 군사, 역역 동원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반면 간접지배를 받은 지역은 중앙에서 파견된 대가(大加)와 현지 수장세력인 사자(使者)를 두어 수취를 총괄하게 하였다.주 002
이러한 상황은 3세기 무렵까지 지속되었으나 나부체제가 해소되고 고구려의 집권체제가 강화되어감에 따라 직접지배체제로 전환되어 갔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변화는 공납을 통한 간접통치가 시행되었던 외곽지역뿐만 아니라 핵심인 5나부의 권역에서도 일어났는데, 나부 수장의 통치권은 제한되고 국왕권에 의한 통제는 강화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변화를 보여주는 증거가 지방관의 파견이다.
나부체제가 작동하던 고구려 초기는 엄밀한 의미의 중앙과 지방의 관계보다는 국왕권에 대한 연계 및 복속 정도와 그에 따른 정치적 위상과 수취의 강도 등에 차이가 있는 중앙과 외곽으로 구분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아직 본격적인 지방관 파견이나 제도적인 지방 재편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구려 초기 기록에도 지방관 관련 사료가 산견되므로 국왕권의 입장에서는 직접지배 혹은 지방 개념으로서의 편제를 염두에 둔 외곽 지역에 대한 통제 시도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고구려의 지방관으로 볼 수 있는 관직에 대한 가장 이른 기록은 태조왕이 책성(柵城)에 수(守)와 리(吏)를 두었다는 기사이다.주 003 그리고 태조왕 55년에는 동해곡(東海谷)의 수(守)가 붉은색 표범을 헌상하였다는 기록도 있어 태조왕대부터 고구려가 지방관을 운용하였을 것이라는 추정을 하기도 한다(최희수, 2013). 그러나 이 사료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삼국지』 동옥저전의 기록처럼 고구려가 복속시킨 지역에 대한 간접지배를 명목상 지방제도의 형식으로 기록한 것일 개연성이 매우 높다. 고구려는 물론 한반도 동해안의 옥저, 동예도 중국 군현세력의 통치를 받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관련 중국식 지방제도에 비교적 익숙하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해당 지역 세력들이 중국식 지방관명을 모칭하였음을 보여주는 기록도 존재한다.주 004 고구려 역시 현지세력이 모방하거나 자칭한 지방관명을 그대로 인정해 주고 공납을 받는 통치방 식을 취하였을 공산이 크다.
그러다가 고구려 중앙의 집권력 강화로 2세기 말 방위부가 등장하고 나부는 점차 약화되면서 3세기 무렵부터는 일부 지역에 대한 지방 지배 개념의 직접통치가 시도된 것으로 파악된다. 서천왕 19년(288년)에 신성에 행차한 왕에게 고래의 눈을 바친 해곡태수(海谷太守)와 봉상왕 재위기(292~300년)에 핍박을 받았던 을불(乙弗)에게 태형을 내린 압록재(鴨綠宰)의 존재가 그 사례이다.
봉상왕대 선비 모용외(慕容廆)의 침공을 방어했던 고노자(高奴子)가 역임한 관직도 태수와 재로 나타난다. 고노자는 모용외가 침공한 봉상왕 2년(293년) 신성재(新城宰)의 신분으로 그들을 격퇴하였다. 그리고 동왕 5년(296년) 모용외가 다시 침공하자 그는 신성태수로 임명되어 방어 임무를 맡았다. 이 기록은 매우 구체적이고 모용외의 침입이라는 국가적 위기에서 활약한 고노자가 신성의 재와 태수가 되어 방어전에 나선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 기록에 등장하는 신성은 동북 신성과 서북 신성으로 구분된다. 봉상왕 5년 고노자가 태수가 되어 선비족의 침공을 막아낸 신성은 서북 신성으로, 그 위치는 제3현도군의 치소가 있던 오늘날 중국 요령성 무순(撫順)의 고이산성(高爾山城)으로 비정된다. 고구려 서북 경략의 중요한 거점이 된 곳이다. 동북 신성은 서북 신성보다 먼저 사료에 보이는데, 서천왕 19년조의 동해안으로 추정되는 해곡(海谷)과 가까운 지역으로 비정된다. 그 구체적인 위치에 대해서는 책성이 위치한 두만강 방면(김영하, 1985; 임기환, 1987), 함경북도 청진 일원(여호규, 2008),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도문(圖們)의 성자산산성 등으로 비정된다(임기환, 2012a). 견해가 나뉘는 것은 봉상왕 2년조의 신성인데, 이를 동북 신성으로 파악하는 설(김영하, 1985; 임기환, 1995, 여호규, 1995a)과 동왕 5년조와 동일하게 서북 신성으로 파악하는 설(김현숙, 1997)로 대별된다. 이처럼 3세기에 이르면 고구려 동북과 서북의 중요한 거점 지역에 고구려 국왕권의 의지로 지방관 파견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사료에서 확인되는 바는 고구려 초기의 지방관인 태수(수)와 재는 모두 성(城) 혹은 곡(谷)으로 불린 행정단위에 파견되었다. 성과 곡은 상하관계보다는 병렬관계에 가까우므로 수와 재의 관계도 상·하위직으로 보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김현숙, 1997). 그러나 고노자의 사례에서 확인되듯이 소형 관등을 지닌 고노자는 신성재였다가 대형 관등으로 승급된 이후 신성태수가 되었다는 것은 양자가 상하통할관계였을 가능성이 큼을 보여주기도 한다(임기환, 1995; 여호규, 1995a).
고구려 초기의 성과 곡은 상하관계에 있는 행정단위였다기 보다는 당시 해당 지역의 정치·경제·지리적 상황에 따라 편제된 동급의 행정 단위였다고 보는 것이 옳다. 곡은 초기 고구려의 지리와 지형 입지조건을 반영한 행정단위였다. 그리고 성은 고구려가 영역을 확대하고 성장해 감에 따라 새로 복속한 지역이나 기존 영역 중에서도 인구밀집도와 중요도 등을 고려하여 지칭한 단위였을 것이다. 다만 고구려 중·후기의 지방제도를 기준으로 대성급에 해당되는 중요한 성이나 곡에는 ‘수(태수)’가 파견되어 휘하의 성이나 곡을 통할하였을 가능성은 있다.
이들 성, 곡의 아래에는 촌(村)이라는 하부 단위가 존재하였다. 이것은 고국천왕 13년(191년) 국상(國相)으로 등용된 을파소(乙巴素)의 출신지를 서압록곡(西鴨綠谷) 좌물촌(左勿村)으로 표기한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처럼 3세기 중반 이후 지리적·군사적 중요성이 큰 특정지역을 대상으로 마련된 태수-재 2등급 체제의 초보적 지방제도는 고구려의 영역이 더욱 확대되고 집권체제가 완성되는 4세기가 되면 광역 지방관으로 상정되는 수사(守事)의 등장과 함께 전국 단위의 지방제도로 발전하게 된다.
2) 수취체제의 수립과 정비
고구려는 초기 연맹체적 성격에서 점차 집권력이 강화되어 가면서 나부체제로 변화되었다가 3세기 무렵 본격적인 지방제도의 틀을 마련한다. 이와 같은 지방 개념의 확립과 지방통치체제의 성립과 더불어 국가 운영의 필수요소인 수취체제도 수립, 정비하게 된다.
고구려 초기의 수취체제에 대한 사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한국 고대국가의 경우 집권체제가 확립되기 전 단계까지는 공납을 통한 간접지배방식으로 주변세력을 통제하다가 점차 구심력을 강화하며 직접 지배방식으로 통치 형태를 발전시켜 나가게 된다. 관련 사료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고구려 또한 연맹체 혹은 나부체제기까지는 직접통치가 관철되던 영역의 외곽에 위치한 복속세력들에게 공납이라는 수취방식을 통해 간접지배를 행하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초기 고구려의 공납지배방식에 대하여 『삼국지』 동옥저전에는 “[동옥저는] 나라가 작고, 큰 나라의 틈바구니에서 핍박을 받다가 결국 구려에 신속케 되었다. 구려는 그 [지역 인물] 중에서 대인을 두고 사자로 삼아 함께 통치하게 하였다. 또 대가(大加)로 하여금 조세를 통괄 수납케 하여 맥포(貊布), 소금, 수산물 등을 천리나 되는 거리에서 져 나르게 하고, 또 동옥저의 미인을 보내게 하여 종이나 첩으로 삼았으니, 그들을 노복(奴僕)처럼 대우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는 3세기 초반 당시 5나부를 제외한 고구려에 복속된 모든 지역과 세력에게 적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공납체제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수취의 대상은 물자와 인력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
『삼국지』 동이전에 의하면, 고구려의 세력권이 3세기 초까지 직할지인 5나부 영역과 주변의 복속지로 구분되어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옥저와 동예 같은 복속지는 당시까지도 공납지배라는 간접지배방식을 취하였던 것이 확인된다. 5나부 지역은 국왕권의 주도로 수장층을 통해 어떠한 형태로든 물자를 수취하고 인력을 동원하는 체계가 갖추어져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직접적으로 전해주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간접 자료와 중·후기의 관련 자료를 참고로 초기의 수취체제에 대하여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
고대국가에서 수취와 인력 동원의 대상이 된 계층은 주로 생산을 직접 부담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예컨대 농민, 상인, 수공업 장인 등이 그에 해당할 것이다. 이 외 목축 종사자, 수렵민 등도 수취의 대상으로 볼 수 있다. 사료에는 이들의 명칭이 하호(下戶)로 나온다. 하호의 위 이 자영농민이었는지, 농노와 같은 위치였는지, 혹은 생산노예의 성격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쉽게 결론 내리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한국 고대사회의 특성상 아마도 복합적인 성격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이들 내부에서 어느 정도 분화가 이루어져 『삼국지』 부여전에는 3세기 무렵에 읍락 내부의 구성원이 호민(豪民), 하호 등으로 구분되었다고 한다.주 005
고구려 역시 부여와 유사하게 생산 담당층이 호민과 하호로 분화되어 있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3세기 무렵에 고구려에는 1만 명에 달하는 전문 무사단인 ‘좌식자’ 계층이 존재하였으므로 이들을 경제적으로 부양하기 위한 효율적 시스템을 갖추는 것은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을 것이다. 고구려의 좌식자 계층이 부여의 호민에 해당하는지 아니면 고구려 지배층인 제가(諸加)의 하층을 구성한 소가(小加)인지는 더 따져보아야 할 문제이지만, 이들의 호칭을 통해 볼 때 생산을 담당한 계층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초기 고구려의 주 생산계층은 하호로 간주하여도 무방할 듯하다.
3세기 초반 하호의 역할에 대해 『삼국지』 동이전은 각 국가별로 묘사하고 있다. 우선 고구려의 경우 농사를 짓지 않는 좌식자들을 부양하기 위해 먼 곳에서 양식, 고기, 소금 등을 운반해 와 이들에게 공급하였다고 전한다.주 006 부여에서도 하호는 이와 유사한 역할을 한 것으로 나오는데, 적의 침입이 있을 때 제가(諸加)들이 전투를 수행하면 하호는 식량을 갖고 와 음식을 만들어 주는 보급업무를 담당한 것으로 나온다. 고구려와 부여 모두 하호는 생산의 직접 담당자이자 보급 실무자로서 자영농민에 가깝지만 가혹한 착취에 놓여 있고 운송에까지 강제로 동원되어야 했던 상황은 농노 혹은 생산노예적 성격도 일부 보인다. 이처럼 계층에 따른 확실한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고, 하호로부터 물자를 수취하여 대규모 비생산계층을 부양해야만 했던 고구려는 분명한 품목, 수량, 시기, 담당자 등이 정해진 규율체계가 존재하였을 것이다.주 007
공납을 통한 간접지배방식은 국왕을 중심으로 한 구심력의 강화와 집권체제의 형성 과정에서 점차 직접적 영역지배와 수취체제로 전화되어 가게 된다. 고구려사에서 3~4세기는 이러한 변화와 전환의 시기였다. 집권체제 강화라는 정치적 변화와 맞물려 정비된 고구려 초기의 수취체제에 대한 직접적 기록은 거의 없다. 다만 고구려 후기 수취제도를 묘사한 사료가 있어 주목이 되는데, 『수서(隋書)』 고려전은 “인두세(人稅)는 베 5필에 곡식 5석이다. 유인(遊人)은 3년에 한 번을 내되, 열사람이 어울러서 세포(細布) 1필을 낸다. 조(租)는 [상등]호(戶)는 1석, 다음은 7두, 하등[호]는 5두이다”라고 전한다.주 008 이 사료가 고구려 초기의 상황을 전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고대국가의 특성상 집권체제가 확 립되어 가던 초·중기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기록을 토대로 초기 지배체제가 해체되고 집권력이 강화되어 가던 3~4세기 무렵 고구려의 수취제도를 복원해 보면 역역(力役) 동원을 제외한 부세는 크게 인정마다 부과된 인두세와 가호를 기준으로 한 호조(戶租)로 구분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초기에도 『수서』의 기록과 동일하게 삼등호(三等戶)제가 시행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피복속지가 지방으로 전환되고, 민 또한 공민(公民)으로서의 의식이 신장되면서 초보적인 수취제도가 마련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준은 당연히 인정과 가호일 수밖에 없으며, 이를 기준으로 역역과 인두세, 호조 등을 수취하다가 점차 그 부과 대상을 세분화하여 후기에는 삼등호제의 시행으로 귀결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물론 이것은 후기의 상황을 전한 것이라 초기로 소급하여 이해하기는 어렵겠지만, 6세기 말~7세기 초 무렵 고구려가 이러한 수취기준을 설정하고 운영하였다는 사실은 그 이전에도 관련 규정이 존재하였을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 준다.
고구려는 4세기 후반에 율령을 반포하며 공식적으로 법전체계를 갖춘 국가로 도약한다. 율령은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형법체계인 율(律)과 국가의 원활한 통치를 위한 여러 행정규칙을 정리한 영(令)이 근간이 된다. 영 안에는 분명 수취를 위한 각종 조항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러한 수취 규정이 4세기 국가법전체계가 마련되면서 정해진 것이라고 상정하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이미 그 전부터 전통적으로 혹은 관행적으로 정해져 행해지던 것을 율령체제 안으로 들여와 공식화한 것에 불과하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따라서 4세기 후반 마련되는 고구려 율령의 수취 관련 규정은 늦어도 3세기에는 그 원형이 갖추어졌을 것이다.
물론 고구려 초기의 수취 기준은 후기의 그것보다 가혹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국왕권이 직접 수취하기보다는 중앙으로 납부할 총량을 정해주고 그 권한과 책임을 각 나부의 대가들에게 위임한 형태였을 것이다. 이러한 구조는 고구려가 중앙집권적 영역국가로 성장하고 집권체제가 강화되면서 점차 국왕이 선임한 조세징수관이 담당하는 방식으로 전환되어 갔을 것으로 보인다. 그와 더불어 공민의식의 성장으로 초기 하호에게 부과되었던 과도한 징수량은 중기 이후 민들에게 다소 완화되어 갔을 것이다.
이와 같은 수취체제를 기반으로 군역이나 역역의 징발도 이루어졌다. 고구려 초기 그 주된 대상은 물자 수취와 마찬가지로 하호였다. 앞에서 살펴본 『삼국지』 고구려전에서 하호가 식량 운송 역을 하였다는 기록이 이를 방증한다. 군역은 기본적으로 국왕이 나부의 군사를 동원할 때 나부 수장층을 통해 시행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역역 역시 국가 차원의 대규모 인력 동원이 필요한 경우 국왕은 나부의 수장들에게 인원을 할당하고, 이를 직접 동원하고 수도로 입역시키는 실무는 나부 차원에서 행해졌을 것이다. 이처럼 초기 나부를 매개로 이루어졌던 인력동원체계는 3세기 중반 이후 나부체제의 해체 및 집권체제의 강화와 더불어 지방제도, 군사조직 등이 국왕 중심으로 재편되며 국왕권이 직접 징발하는 형태로 바뀌었을 것이다. 그 증거로 3세기까지만 하더라도 2만 명을 넘어서지 못하던 병력 동원 규모가 4세기 이후에는 5만 명대로 급증한 사실을 들 수 있다. 이는 종전의 하호나 복속민을 공민으로 편성해 징병하는 병력동원체계가 확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여호규, 1998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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