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고구려 ‘태왕’호의 등장과 유형
2. 고구려 ‘태왕’호의 등장과 유형
전근대 왕조국가에서 군주에 대한 호칭은 왕권의 대내적·대외적 위상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고대 동아시아에서는 한족 왕조의 황제(천자), 흉노의 선우(單于), 돌궐의 가한(可汗)과 같은 군주호를 사용한 사례가 있으며, 신라에서도 거서간·차차웅·이사금·마립간 등 다양한 군주호를 사용했다. 반면 고구려의 군주호는 『삼국사기』·『삼국유사』와 중국 측 문헌 자료, 그리고 금석문 자료에서도 (앞에 수식어가 있든 없든) ‘왕(王)’호로만 표현되는 점이 눈에 띈다.
고구려에서 사용한 군주호에 대해서는 주로 4세기~5세기에 고구려인들이 직접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금석문을 통해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태왕이라는 호칭이 보이는 대표적인 금석문 자료로는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를 들 수 있으며, 이외에도 태왕릉출토동령(太王陵出土銅鈴), 〈집안고구려비(集安高句麗碑)〉, 호우총출토호우명(壺衧塚出土壺衧銘), 〈모두루묘지〉, 〈충주고구려비(忠州高句麗碑)〉, 서봉총출토은합우명(瑞鳳冢出土銀合杅銘), 태왕릉출토전명(太王陵出土塼銘)이 있다. 그 구체적인 표현 사례를 정리하면 표1과 같다.
표1 | 고구려 ‘태왕’호 관련 금석문
| 자료명 | 작성 연대 | 명문(銘文) | 해당 인물 |
| 태왕릉출토동령 | 391년(추정) | 辛卯年/好太王/敎造鈴/九十六 | (불분명) |
| 집안고구려비 | 광개토왕대 (391~412년) | 國岡上太王 | 고국원왕 |
| 丁□□好太□王 | 광개토왕 | ||
| 광개토왕비 | 414년 |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永樂太王 太王 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 | 광개토왕 |
| 호우총출토호우명 | 415년 | 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 | 광개토왕 |
| 모두루묘지 | 5세기 전반 | 國岡上聖太王 | 고국원왕 |
| 國岡上大開土地好太聖王 | 광개토왕 | ||
| 충주고구려비 | 449~450년, 481년, 문자명왕대 | 高麗太王 太王國土 | 장수왕, 문자명왕 |
| 서봉총출토은합우명 | 451년 | 太王敎造合杅 | 장수왕 |
| 태왕릉출토전명 | 4세기~5세기 |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 | (불분명) |
이 자료들의 제작 시기는 대체로 4세기~5세기에 해당하는데, 고구려의 군주호로서 호태왕, 호태성왕, 태왕 등의 표현이 보인다. 우선 ‘태왕’호로 표기된 사례를 살펴보면, 태왕릉출토동령의 경우에 호태왕이라는 호칭이 나오며, 태왕릉출토전명에도 태왕이라는 호칭이 등장한다. 집안 지역의 가장 마지막 단계 왕릉인 장군총의 묘주를 광개토왕으로 비정하는 다수설에 따른다면, 그 이전 단계의 왕릉인 태왕릉에서 출토된 태왕릉출토전명의 태왕은 분명 광개토왕보다 이전인 고국양왕(384~391년) 혹은 그 이전의 왕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한편, 〈모두루묘지〉에는 시조를 추모성왕, 광개토왕을 국강상대개토지호태성왕으로 표기하였다. 〈광개토왕비〉에서 광개토왕을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라고 표기한 것과 비교한다면, 광개토왕의 훈적을 표기한 문구가 의미상 통하며, ‘성(聖)’이라는 존칭이 부가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같은 묘지에 국강상성태왕이라는 또 다른 왕의 호칭이 나타난다. 이는 고구려 시조인 추모성왕보다는 이후 시기, 묘주인 모두루가 섬겼던 광개토왕보다는 이전 시기의 왕이었으며, 모두루 일족을 중흥시킨 조상인 염모가 군사적으로 활약했던 330~340년대에 재위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집안고구려비〉에서 추모왕과 광개토왕 사이에 재위했던 것으로 보이는 국강상태왕, 그리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분주에 등장하는 국강상왕(國岡上王)과도 동일한 인물로 판단되는데, 그렇다면 이 국강상성태왕은 제16대 고국원왕대(331~371년)에 해당할 것이다(여호규, 2014).
위에서 살핀 바에 따르면 고구려에서 국왕에게 ‘태왕’호를 붙이는 전통이 있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다만 이 호칭은 국왕의 사망 직후에 시호(諡號)로 붙였거나, 혹은 사망한 지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추존된 결과일 수도 있다. 예컨대 여러 금석문에서 광개토왕을 태왕으로 호칭한 사례가 있는데, 이 가운데 국강상이라는 장지(葬地) 이름, 그리고 광개토경, 대개토지 등 왕의 살아 생전 훈적을 표현한 호칭이 보인다. 〈광개토왕비〉의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과 ‘평안’을 생략한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 그리고 호우총출토호우명의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 〈모두루묘지〉의 국강상대개토지호태성왕을 그 사례로 들 수 있다. 당시 고구려는 국내성(집안) 주변에 능묘를 만들고 그 소재지를 죽은 왕의 시호에 관칭하는 전통이 있었으므로 위 호칭은 모두 국왕 사후에 붙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국왕의 재위 시에 태왕이라는 호칭을 붙인 사례도 논의된 바 있다. 우선 태왕으로 호칭된 가장 이른 사례는 〈집안고구려비〉와 〈모두루묘지〉에서 고국원왕을 각각 국강상태왕, 국강상성태왕으로 호칭한 것이다. 만약 이때의 ‘태왕’호가 후대에 추존한 것이라고 가정할 경우, 그것은 대체로 종전의 왕계나 ‘왕’호를 정리했다고 보이는 시점, 즉 『유기(留記)』의 편찬 시기인 소수림왕대, 혹은 종묘를 수건한 고국양왕대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414년에 만들어진 〈광개토왕비〉에서는 추모왕·유류왕(유리명왕)·대주류왕(대무신왕) 등 신성한 왕실의 권위를 이어온 초기 국왕들이 여전히 ‘왕’으로 호칭되어 있다.
4세기 중・후반인 소수림왕·고국양왕대에 왕계를 재정립하면서 전왕들을 태왕으로 추존하는 과정이 있었다면, 위의 초기 세 왕들만 ‘왕’호로 두고 이후의 고국원왕만 태왕으로 격상했다고 볼 이유는 없다고 생각된다. 게다가 고국원왕이 재위기에는 ‘왕’호로 부르다가 사후에 갑자기 시호로 ‘태왕’호를 붙였다고 보는 것도 어색하다. 국강상(성)태왕이라는 호칭은 고국원왕이 재위 시부터 ‘태왕’호로 불렸고, 그것이 사후의 시호로 이어진 결과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사료상으로 재위 시에 ‘태왕’으로 불렸다고 볼 수 있는 가장 이른 시기의 국왕은 고국원왕이라고 할 수 있다(武田幸男, 1989; 여호규, 2014).
한편, 〈광개토왕비〉에는 광개토왕을 영락태왕(永樂太王) 혹은 태왕이라고 호칭한 사례가 보인다. 이 가운데 영락태왕의 경우 ‘영락’이라는 고구려 연호가 광개토왕의 재위 시에 존재했다면 그의 생존 시에 붙여진 호칭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덕흥리벽화고분의 묘주 진(鎭)에 대한 묘지에서 “영락(永樂) 18년(무신년) 초하루가 신유일인 12월 25일(을유)에 (무덤을) 완성해서”라고 기록된 사실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이때 영락 18년(무신년)은 408년으로 광개토왕 재위 18년에 해당하므로 〈광개토왕비〉의 영락 연호가 전하는 연대와 일치한다. 따라서 〈광개토왕비〉의 영락태왕은 광개토왕이 재위기에 독자적으로 건원해 사용했던 영락 연호에 기반하여 붙인 ‘태왕’호였을 것이다.
광개토왕이 재위기에 태왕으로 불린 사실은 〈집안고구려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비의 건립 시기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그런데 대체로 7행 4~8자를 “호태□왕왈(好太□王曰)”로 판독하는 가운데, 여기에 비의 건립에 대한 교령을 내린 주체가 광개토왕으로 보인다는 점, 〈집안고구려비〉의 수묘제 규정이 〈광개토왕비〉보다 상세하지 않으므로 더 이전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보이는 점 등을 근거로 하여 광개토왕대에 건립되었다고 보는 설이 일반적이다. 이 비에 보이는 ‘호태□왕’은 〈모두루묘지〉의 국강상대개토지호태성왕이라는 표현을 감안할 때 ‘호태성왕’으로 볼 수 있으며, 이 역시 광개토왕 재위 시의 ‘태왕’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여호규, 2013).
광개토왕 이후인 장수왕대에도 재위기에 ‘태왕’호로 호칭한 사례가 있다. 서봉총출토은합우명은 은합우의 덮개와 몸에 각각 ‘태왕’이 라는 명문이 있고, 양쪽의 명문을 합쳐보면 제작 연월이 “연수 원년 신묘 3월”이 된다. 이것이 출토된 서봉총은 신라 왕릉 수준의 고분이므로, 은합우에 보이는 ‘연수’라는 연호 역시 지증왕 22년(511년), 눌지왕 35년(451년), 나물왕 36년(391년) 등 신라 연호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신라 연호의 시작을 법흥왕 23년(536년)의 건원(建元)으로 전하며, 그 이후 첫 번째 신묘년에 해당하는 571년(진흥왕 32년)에는 태창(太昌)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고 전한다. 따라서 은합우 명문의 연수를 신라의 연호로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고구려에서는 〈광개토왕비〉의 영락 연호로 인해 4세기 이후 연호가 사용되었음이 분명해졌고, 경주 호우총에서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명의 고구려 호우가 발굴되어 4세기~5세기대의 고구려와 신라의 긴밀한 관계가 알려지면서 ‘연수’ 역시 고구려 연호로 보는 설이 유력해졌다. 즉 연수 1년은 신묘년에 해당하는 391년, 451년, 511년 가운데 451년(장수왕 39년)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서봉총출토은합우명의 ‘태왕’은 곧 장수왕이 재위 시에 태왕으로 불렸던 하나의 근거가 될 수 있다(여호규, 2014).
또한 〈충주고구려비〉에도 ‘고려태왕’과 ‘태왕국토’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것은 이 비의 건립 당시에 재위 중이던 고구려 국왕을 호칭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비의 건립 연대에 대해서는 기존에 장수왕대(5세기 중·후반)로 보는 설과 문자명왕대로 보는 설 등이 제기되어 왔다.주 001
각주 001)

건립 시기에 대한 논란과 더불어 비문에 기록된 사건이 비의 건립 시점보다 훨씬 과거의 일일 수도 있는 만큼 태왕으로 호칭된 명확한 대상을 확정하기는 어려우나, 대체로 고려태왕은 장수왕 혹은 문자명왕에 해당한다고 보는 설이 다수이다. 이처럼 금석문에 보이는 ‘태왕’호를 검토해볼 때, 고구려에서는 고국원왕·광개토왕·장수왕의 재위기에 태왕으로 호칭되었을 가능성이 있다.〈충주고구려비〉의 건립 연대와 관련해서 전면의 “12월 23일 갑인(甲寅)”과 좌측면의 “신유(辛酉)”라는 표현에 주목해왔다. 그런데 2019년에 동북아역사재단 등의 주도로 3차원 스캐닝 기술을 통해 비문에 대한 정밀한 판독이 이루어지면서 위 표현의 판독에 대한 이견도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고광의, 2020, 「충주고구려비의 판독문 재검토」, 『한국고대사연구』98, 88~92쪽). 또한 비문 내에 서술된 사건들의 시점과 비문을 최종적으로 작성한 연대 사이에 큰 격차가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김현숙, 2002, 「4~6세기 소백산맥 이동지역의 영역 향배」, 『한국고대사연구』 26, 98~99쪽; 여호규, 2020, 「충주고구려비의 단락구성과 건립시기」, 『한국고대사연구』 98, 131쪽). 따라서 현재로서는 분명한 건립 연대를 설정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한편, 장수왕 이후인 문자명왕·양원왕·평원왕 등도 『삼국사기』에서 각각 명치호왕(明治好王)·양강상호왕(陽崗上好王)·평강상호왕(平岡上好王) 등 호왕으로 불린 기록이 나타난다. 그런데 이는 광개토왕의 공식 명칭에 보이는 호태왕에서 ‘태’자를 생략한 줄임말일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6세기에 재위했던 고구려왕들 역시 본래 태왕으로 명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처럼 4세기 이후에 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고구려의 ‘태왕’호는 정치적 지위와 위상 면에서 종전과 구별되는 군주호였을 가능성이 높다. 앞서 언급한 대로 〈광개토왕비〉에서는 시조 추모왕, 2대 유류왕(유리명왕), 3대 대주류왕(대무신왕)에 이르는 계보가 제시되어 있는데, 이들은 그냥 ‘왕’호로 표기한 반면, 광개토왕은 ‘태왕’으로 호칭하고 있다. 또한 〈모두루묘지〉에서도 시조 주몽은 추모성왕, 고국원왕은 국강상성태왕, 광개토왕은 국강상대개토지호태성왕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여기서 ‘성(聖)’이라는 존칭만 제거하면 〈광개토왕비〉처럼 추모왕은 ‘왕’호, 고국원왕과 광개토왕은 ‘태왕’호로 구분하여 호칭한 것이 된다.
또한 2013년에 소개된 〈집안고구려비〉에서도 주몽왕을 추모왕, 광개토왕을 호태왕으로 칭하고 있다. 여기서 ‘→’을 존칭인 ‘성(聖)’으로 본다면, 광개토왕의 재위 시에 ‘태왕’호에 미칭인 ‘호(好)’와 존칭인 ‘성(聖)’을 결합시킨 ‘호태성왕’이라는 왕호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광개토왕·장수왕대의 재위 시에 사용된 공식 군주호인 ‘태왕’은 초기 왕들의 ‘왕’호와 정치적 위상면에서 구분되는 호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요컨대 5세기 금석문에 보이는 ‘태왕’호는 초기 왕들의 ‘왕’호와 명확히 구분되는 권위의 새로운 군주호로 등장한 것이며, 그것은 고국원왕 이래로 평원왕대까지 적어도 2세기 이상 유지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시노하라 히로카타, 2005; 여호규,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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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1)
〈충주고구려비〉의 건립 연대와 관련해서 전면의 “12월 23일 갑인(甲寅)”과 좌측면의 “신유(辛酉)”라는 표현에 주목해왔다. 그런데 2019년에 동북아역사재단 등의 주도로 3차원 스캐닝 기술을 통해 비문에 대한 정밀한 판독이 이루어지면서 위 표현의 판독에 대한 이견도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고광의, 2020, 「충주고구려비의 판독문 재검토」, 『한국고대사연구』98, 88~92쪽). 또한 비문 내에 서술된 사건들의 시점과 비문을 최종적으로 작성한 연대 사이에 큰 격차가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김현숙, 2002, 「4~6세기 소백산맥 이동지역의 영역 향배」, 『한국고대사연구』 26, 98~99쪽; 여호규, 2020, 「충주고구려비의 단락구성과 건립시기」, 『한국고대사연구』 98, 131쪽). 따라서 현재로서는 분명한 건립 연대를 설정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