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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3. 고구려 태왕의 대내적·대외적 기반

3. 고구려 태왕의 대내적·대외적 기반

보통 중국에서는 태왕이 군주의 호칭으로 사용된 사례가 드물다. 반면에 고구려·백제·신라와 왜에서는 금석문 등을 통해 태왕 혹은 대왕(大王)이 사용되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예컨대 왜의 경우 471년으로 비정되는 도하산고분출토철검명(稻荷山古墳出土鐵劍銘)과 강전선산고분출토태도명(江田船山古墳出土太刀銘)에서 ‘대왕’이라는 호칭이 등장하며, 신라의 경우 535년(법흥왕 22)에 작성된 울주천전리각석을묘명(川前里書石乙卯銘)에 “성법흥태왕(聖法興太王)”이라는 호칭이 보인다. 백제에서도 『송서(宋書)』·『남제서(南齊書)』 백제전에서 예하에 ‘왕’호를 수여받은 신하들의 존재가 보임에 따라 백제국왕의 지위가 이들의 상위에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으며, 639년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익산미륵사지석탑 사리봉영기 뒷면에는 백제국왕을 “대왕폐하(大王陛下)”로 표현한 것이 보인다.
이러한 ‘태왕’호의 성격에 대해서 동아시아의 태왕은 모두 중국의 ‘왕’호에 기초하며 그것에서 파생된 존칭・경칭에 불과하다고 보는 의견도 있었다. 즉 고구려의 경우에도 제도적 형태로서 태왕제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한자문화의 확산과 더불어 한대 이래로 외이(外夷) 군장에게 내려준 책봉호(왕호)를 근간으로 해서 만든 일종의 미칭(美稱)이었다는 것이다(宮崎市定, 1978; 武田幸男, 1989). 그러나 고구려 ‘태왕’호는 광개토왕대의 영토 확대, 주변 여러 나라의 복속, 독자 연호 제정 등의 계기를 중시하여 만든 제도적 기반 위에서 탄생했다는 입장도 있다(坂元義種, 1978). 최근에는 주로 후자의 견해를 기반으로 하여 ‘태왕’호의 성립이 갖는 대내적·대외적 기반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우선 고구려 ‘태왕’호의 대내적 의미를 살펴보면, 고구려는 4세기 이래로 일원적 관등제를 기반으로 한 집권적 관료제의 운영이 이루어졌으며, 소수림왕 이후 율령의 반포와 중앙집권적 지배체제의 구축이 진행되면서 그 정점에 있던 존재인 고구려왕의 위상과 권한이 점차 강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국원왕 재위기부터 태왕(太王)으로 상징되는 절대적 권력과 지위를 누린 고구려 국왕과 예하 관료적 성격을 지닌 지배층과의 관계는 철저한 상하관계에 있었고, 양자 관계는 이념적·상징적으로나마 인격적 예속관계로도 인식된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5세기 초・중반에 중상층의 귀족가문이 남긴 〈모두루묘지〉에 따르면, 모두루 일가는 시조 추모왕 때부터 고구려 왕가와 인연이 닿았으며, 이후 본격적으로 국강상성태왕(고국원왕), 국강상대개토지호태성왕(광개토왕)을 거쳐 장수왕까지 섬겼다고 기록하였다. 여기서 고구려의 왕가는 건국설화에 나오는 하백(河伯)과 일월(日月)의 자손으로 상징되는 신성한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그런데 이 묘지에서 중시조격인 대형(大兄) 염모를 비롯해 모두루 일족이 고구려 태왕의 휘하에서 복무했음을 서술하면서 종종 쓰인 표현이 바로 ‘노객(奴客)’이다.
노객이란 중국의 삼국시대 즈음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여 남북조시대까지 노비와 양인의 중간적 존재인 사적(私的) 예속인을 가리키는 단어로 널리 쓰였다. 따라서 고구려의 귀족가문이었던 모두루 일족의 신분적 지위를 객관적으로 표현한 단어는 아니다. 다만 〈모두루묘지〉에서 노객조선(奴客祖先)(제7행), 노객모두루(奴客牟頭婁)(제46행), 노객재원(奴客在遠)(제50행), 교노노객(敎老奴客)(제57행) 등의 형태로 표현된 ‘노객’은 고구려 국왕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일족을 표현할 때 수식어 혹은 대칭(代稱)으로 쓰였다. 즉 성왕 내지 태왕에 대비되는 존재로서의 모두루 일가를 노객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성왕(태왕)과 노객의 관계는 4세기 이후 일정하게 성장한 고구려 왕권과 관료적 성격의 고구려 귀족가문 사이에 형성된 ‘충(忠)’과 ‘절(節)’로 상징되는 인격적 군신 관계를 드러낸 것이다. 묘지에 따르면 모두루 일족은 태왕과의 긴밀한 상호관계에 기인한 관은(官恩)을 통해 정치적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했다고 한다. 국왕의 정치적 우위에 대해 이 귀족가문은 스스로를 노객으로 칭함으로써 태왕에게 인격적인 지배·예속 관계에 있는 것처럼 표현했던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단순히 상징적인 호칭으로만 표현된 것이 아니라, 모두루 일족의 구체적인 사적과 사상에 입각해 강조되었다. 즉 묘지에서 모두루 일족의 국왕에 대한 종속성은 태왕의 ‘교(敎)’에 의거해 수행했던 정치 활동 속에서 구체적으로 구현되었으며, 그 충성심은 광개토왕(성왕)의 죽음에 대한 슬픔의 감정으로 뒷받침되고 있었던 것이다(武田幸男, 1989).
요컨대 태왕과 노객으로 상징되는 국왕과 신료 사이의 군신 관계는 4세기~5세기에 이르러 고구려왕의 위상이 종전보다 크게 격상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왕은 다른 지배세력과 함께 제가회의의 구성원으로 활약했던 초기와 달리 귀족세력을 초월한 존재로 크게 부각되었으며, 왕권의 초월화에 따라 귀족세력은 점차 국왕 아래의 관료적 성격을 띠면서 그에 인격적 예속관계를 자처하는 데 이르렀을 것이다(여호규, 2014).
한편, 태왕의 정치적 기반은 지방관을 파견해서 통치하는 영토와 주민을 근간으로 한 것이기도 했다. 태왕권을 뒷받침하는 고구려 영토에 대한 표현은 〈충주고구려비〉에 잘 나타난다. 이 비문에는 고려태왕(高麗太王), 태왕국토(太王國土)라는 표현이 각각 ‘신라 매금(新羅寐錦)’과 ‘동이매금토(東夷寐錦土)’라는 표현과 대비되어 서술되어 있다.
본래 동이라는 것은 중원 왕조의 입장에서 화(華)와 이(夷)를 구분하는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화(華)는 정치·사회·문화·지리적으로 여타의 집단과 구별되는 우월한 가치를 지닌 실체를 의미하는 중국적 천하관의 근간으로서, 고구려가 이를 자기중심의 천하관에 습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5세기 고구려의 경우 신라와 사회·문화적으로 뚜렷하게 구분될 만큼 존재 양태상에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고 보기 어려우므로 〈충주고구려비〉에서 신라를 동이로 지칭한 것은 주민 사이의 실질적인 존재 양태 혹은 종족적 차이에 의거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아마도 이 비에서 태왕국토와 동이매금토를 구분한 기준은 고구려 국왕의 직접 통치가 미치는 영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의 구분이었을 것이다. 즉 5세기 당시 고구려는 그 영토를 성(城)·곡(谷) 단위로 구획하고 중앙의 지방관을 파견해 다스리는 일원적 지배체제를 구축해가고 있었다. 〈충주고구려비〉에서는 바로 그러한 태왕의 직접적인 통치 영역을 태왕국토라고 지칭하였고, 그 외부인 신라 영역은 ‘이(夷)’로서 동이매금토라고 지칭하여 조공 관계를 통한 고구려 태왕의 간적접인 영향력이 미치는 공간으로 인식했던 것이다(노태돈, 1999).
한편, 태왕의 지배가 미치는 영토의 백성(民)도 태왕권이 성립하는 기반이 되었다. 본래 3세기대까지 고구려의 지방 지배 형태는 대체로 나부 연맹체 지역과 연맹체에 예속된 지역(피정복지)의 주민집단에 대한 지배로 크게 구분하였으며, 양자 모두 간접적인 통치 대상이었다고 보아왔다. 그러나 4세기 중반 이후 고구려의 국가체제 및 지방통치방식이 질적으로 큰 변화를 맞았다. 제가의 예속민 성격이었던 나부의 주민들은 나부체제의 붕괴와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로의 변화에 따라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는 새롭게 영역화된 지역의 주민(피정복민)에게도 확대되었다. 3세기 중반까지도 예·옥저 지역의 주민은 일종의 집단예속민 형태(간접지배)였으나, 나부 해체와 더불어 국왕 아래에 일원적으로 재편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에 제가에 의해 집단적으로 부용된 상태가 아닌, 지방관의 파악하에 개별 민호가 조세를 부담하고 각종 부역과 군역에 참여하는 형태로 전환되었을 것이다. 이로써 4세기 이후에는 고구려 영역의 주민들이 대부분 국왕의 통치를 받는 존재라는 인식이 분명하게 정립되었다. 373년(소수림왕 3)의 율령 반포는 고구려 영토 내에 거주하는 민의 존재를 법적으로 규정한 절차였을 것이다. 즉 국가의 모든 구성원을 일원적인 공법질서체계하에 편입시킴으로써 태왕의 통치하에 있는 공민(公民)으로서의 위치를 법제적으로 확정했던 것이다. 이러한 대민관의 발전은 곧 국가 발전과 왕권강화의 결과로 성립된 태왕권을 뒷받침하는 현실적 기반이었다고 할 수 있다(김현숙, 2005).
예컨대 5세기 초에 작성된 〈광개토왕비〉에서는 영락태왕(광개토왕)에 의해 “나라가 부유하고 백성은 윤택하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國富民殷五穀豊熟)”라고 서술하였다. 이는 고구려의 태왕이 민에 대해 선정을 베풀고 군사적 역할을 하는 등 현실적인 과제를 짊어졌던 존재였으며, 그 과제의 실행은 곧 ‘영락’이라고 하는 치세와 관련되었음을 보여준다(武田幸男, 1989).
태왕권의 대외적 기반, 즉 군사적 정복과 주변 복속국의 조공(朝貢) 등을 바탕으로 성립한 국제적 지위에 대한 논의도 진행되었다. 고구려는 4세기 이래로 활발한 대외정복전쟁을 통해 영토를 넓히고 세력을 확대하였다. 4세기 초에 낙랑군과 대방군을 차례로 축출하여 현재의 대동강과 재령강 유역으로 영역을 넓혔으며, 400년경에는 후연(後燕)을 서쪽으로 몰아내고 요동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4세기~5세기 고구려는 주변국에 대한 세력 우위를 바탕으로 〈광개토왕비〉에서 영락태왕(광개토왕)의 위무(威武)가 사해(四海)에 떨쳤다고 기록했다. 이는 자국이 사방, 사해라는 넓은 공간의 중심국이라는 인식을 드러낸 것이다. 또한 이어지는 무훈 기사에서는 백제·신라·동부여 등의 국가를 태왕의 지배하에 조공(朝貢)을 바치는 속민(屬民)으로 설정하였다. 이에 영락 9~10년조에서는 신라왕인 ‘매금(寐錦)’의 구원 요청에 태왕이 5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내려가 왜군을 응징하기도 했으며, 영락 20년조에서는 중도에 배반하여 조공을 바치지 않는 동부여에 군대를 이끌고 가서 정벌하기도 하였다고 서술했다. 즉 고구려의 태왕은 고구려 중심 천하 질서의 정점에 있는 존재로서 주변의 여러 세력들 위에 군림하는 가운데 일정한 통치 권한을 지닌 것처럼 인식되었던 것이다.
예컨대 〈모두루묘지〉에서는 모두루 일족과 고구려 왕실 사이의 인격적 예속관계를 드러내기 위해 노객이라는 표현이 사용된 바 있는데, 〈광개토왕비〉과 〈충주고구려비〉에서도 고구려의 태왕에 대한 백제왕(백잔주)과 신라왕(매금)의 예속적 처지를 드러내는 데 동일한 표현이 사용되었다. 즉 고구려 국내의 군신 관계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주변국의 국제적 관계도 태왕과 노객의 관계가 적용되기도 했다. 이를 통해 고구려는 주변국들에 대한 세력 우위를 통해 확립한 국제적 권위를 태왕권의 또 다른 기반으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태왕의 태생적 기원에 대해 〈광개토왕비〉에서는 고구려 왕가가 “천제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딸인 추모왕의 자손”이라고 기록하였다. 이를 통해 볼 때 고구려는 태왕을 중심으로 하는 천하관의 기저를 전통적인 주몽설화에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고구려의 태왕은 하늘의 자손으로서 정치적으로는 자국 영토뿐만 아니라, 주변의 여러 나라를 지배하는 최고 권력자였다. 이러한 인식은 대내적으로는 왕권의 강대함과 중앙 집권적 지배체제에 의해서, 대외적으로는 고구려의 주변국들에 대한 현실적인 힘의 우위에 의해서 뒷받침되었다고 할 수 있다(노태돈,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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