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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4. 왕계의 일원화와 유학교육

4. 왕계의 일원화와 유학교육

〈집안고구려비〉, 〈광개토왕비〉 등에서는 고구려의 건국 시조를 추모왕(주몽·동명왕)으로 전하고 있다. 이것은 늦어도 4세기 후반~5세기 초에는 고구려 왕실이 주몽을 기원으로 하는 건국설화를 공식화했음을 보여 준다. 또한 이때 공식화된 건국설화의 내용은 시조 주몽으로부터 이어지는 고구려의 초기 왕계가 확립된 것과도 깊은 관련성을 갖는다. 이것은 건국 시조로부터 당대의 왕까지 이어지는 일원적 계보로서 왕권의 역사적 정통성을 드러냄과 동시에 정치권력의 이념적 기반을 보장하는 핵심적인 표상이다. 따라서 고구려 중기의 태왕권 확립과 관련해 건국 시조 및 왕실의 시조가 일치화되는 시점이 언제인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고구려의 건국설화 계통은 주몽의 출신지 서술을 중심으로 크게 세 계통으로 분류한다. 첫째는 〈광개토왕비〉과 〈모두루묘지〉에 전하는 북부여출자설이며, 둘째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에 전하는 동부여출자설, 그리고 『위서(魏書)』 고구려전과 『주서(周書)』·『수서(隋書)』 고려전 등에 전하는 부여출자설이다. 이 가운데 부여출자설은 곧 길림 중심의 부여국 출자를 말하는 것으로 북부여출자설과 동일한 것으로 본다(노태돈, 1999). 이처럼 (북)부여출자설과 동부여출자설로 대별할 수 있는 건국 설화의 두 유형 가운데 5세기 초반의 인식을 반영한 것으로 보이는 〈광개토왕비〉과 〈모두루묘지〉, 『위서』 고구려전 등의 기록에 공통적으로 보이는 (북)부여출자설을 현전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건국설화로 볼 수 있다.
한편, 5세기 초반을 전후한 시기에 확립된 고구려 건국설화의 내용에는 고구려 초기에 (북)부여와의 관계를 담은 기사들이 보이는데, 여기에 서술된 왕들을 통해 초기 왕계에 대한 인식에도 접근이 가능하다. 우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 고구려 초기에 (북)부여와의 관계를 담은 기사들이 내용상 크게 3단계의 구성을 보인다. 첫째는 주몽이 부여에서 태어나 박해를 받다가 졸본 지역에 내려와서 건국한 과정, 둘째는 주몽의 아들인 유리가 부여로부터 와서 왕위를 계승한 과정, 셋째는 대무신왕대에 이르러 줄곧 고구려를 압도했던 부여를 격파한 뒤 강한 나라로 발돋움했던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광개토왕비〉에서도 앞부분에 시조 추모왕이 북부여에서 태어나 남쪽으로 내려가 나라를 세운 과정을 언급하고, 이어서 세자인 유류왕과 대주류왕으로 이어지는 3대를 언급하고 있다. 즉 시조 추모왕에 의한 고구려의 건국 및 그의 계보를 잇는 유류왕의 ‘이도흥치(以道興治)’, 그리고 대주류왕의 ‘소승기업(紹承基業)’을 강조한 뒤 이어서 17세손인 광개토왕의 업적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와 〈광개토왕비〉에 나오는 초기 세 왕을 각각 비교하면 시조 추모왕은 1대 동명성왕인 주몽, 유류왕은 2대 유리명왕(유리), 대주류왕은 3대 대무신왕(분주명: 대해주류왕)에 각각 대응시킬 수 있다. 더욱이 〈광개토왕비〉의 유류왕과 『삼국사기』의 유리명왕은 모두 시조 추모왕(주몽)의 세자이며, 『삼국사기』의 대무신왕이 부여를 정벌했다는 내용은 왕업을 계승하여 발전시켰다는 〈광개토왕비〉의 대주류왕이 행한 업적에 상응한다. 이렇듯 초기 세 왕만 두고 본다면 〈광개토왕비〉과 『삼국사기』는 동일한 왕계를 전하고 있다(노태돈, 1999; 여호규, 2014).
위와 같이 〈광개토왕비〉과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등장하는 초기 세 왕 중심의 설화는 비슷한 시점에 성립되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여기에는 대무신왕대에 (북)부여가 고구려에 정벌 내지 종속되었다는 인식이 나타난다. 그런데 길림 일대의 부여는 4세기 초까지도 고구려에 정치적으로 종속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다면 3왕 전승이 고구려 조정의 공식 전승으로 굳어진 것은 적어도 부여가 현실적으로 고구려와 적대하거나 경쟁했던 시기가 아닌, 고구려에 복속된 이후였을 가능성이 높다.
길림 일대의 부여는 4세기 전반에 고구려의 침공으로 중심지를 농안 지역으로 옮겼다가 346년 모용선비에 의해 큰 타격을 입고 이후 고구려에 종속되는 과정을 밟았다.주 002
각주 002)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에 따르면 부여는 2세기 말~3세기 초까지도 외침으로 인해 파괴된 적이 없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부여는 285년경에 모용선비에게 침공을 당해 왕실이 일시 북옥저 방면으로 갔다가 다시 복국(復國)한 적이 있었고, 4세기 전반에는 고구려의 압박으로 농안 지역으로 옮겼으나 346년 모용선비에 의해 큰 타격을 입었다. 이후 농안 일대에 중심지를 둔 부여는 고구려에 종속된 채 5세기 말까지 명맥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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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감안할 때, 고구려 조정에서 부여를 종속시킨 역사상을 담은 건국설화를 공식화한 것은 빨라야 4세기 전·중반 이후에나 가능했을 것이다. 〈광개토왕비〉가 414년에 만들어졌음을 감안할 때, 대략 4세기 전반~5세기 초반의 어느 시기에 북부여출자설에 입각한 주몽·유리왕·대무신왕의 3왕 중심 건국설화가 고구려에서 공식화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주 003
각주 003)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등장하는 국왕의 귀족세력에 대한 사성(賜姓) 관계 기사는 모두 동명왕기에서 대무신왕기까지의 건국 과정과 부여 관계 기사에서 보이는데, 이는 4세기 후반에 북부여출자 계통의 건국설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포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동명왕(주몽)-유리명왕-대무신왕에 대한 전승들을 취합하여 건국설화를 체계화하면서 당시까지 전해지던 일부 귀족들의 가계전승을 ‘사성’을 매개고리로 해서 왕실 가계 전승의 하위 파트로 흡수한 결과로 보인다. 이는 곧 소수림왕대에 추모왕계와 태조왕계의 결합을 통한 일원적 왕계의 확립과 동반하여, 고구려를 구성하고 있던 여러 귀족가문이나 지배층의 전승을 결집시켜 국가적 단결을 도모하기 위한 방편으로 생각된다(노태돈, 1999, 28~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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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시조부터 대무신왕에 이르는 건국설화가 성립된 것은 시조 주몽 이래의 왕계가 정립된 시점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광개토왕비〉에 의하면 추모왕·유리왕·대무신왕으로 이어지는 3왕의 세계는 광개토왕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기록되었다. 구체적으로 “17세손(世孫)에 이르러(遝至)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광개토왕)이 18세에 왕위에 올랐다”고 표현되었는데, 이때 ‘17세손’의 기준은 바로 앞에서 언급된 대주류왕(대무신왕)부터라고 파악된다.
‘17세손’은 표현 자체로는 혈연상의 세대수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삼국사기』에서 대무신왕을 기준으로 볼 때 광개토왕은 11세손에 해당하므로 혈연적 세대수로 보기 어렵다. 광개토왕대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집안고구려비〉에서도 고구려의 왕위 계승을 ‘계윤상승(繼胤相承)’이라고 압축적으로 표현하였는데, ‘윤(胤)’은 보통 부조의 뒤를 잇는 후사 혹은 적장자로 책립한 태자 등을 지칭한다. 그러나 고구려 왕위의 부자 계승 원칙이 3세기에도 명확하게 확립되었다고 보기 어렵다면, 이때의 ‘윤(胤)’은 혈연관계에 입각한 후사를 지칭한다기보다는 단순히 선왕과 차기 왕과의 관계를 ‘사자(嗣子)’로 파악하는 인식에 근거한 표현일 가능성이 높다. 〈광개토왕비〉의 ‘17세손’ 역시 찬자가 각 왕을 선왕의 왕위계승자(嗣子)로 상정한 결과로 실제로는 대무신왕을 기준으로 한 왕대수를 표현한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여호규, 2014).
그렇다면, 광개토왕은 시조 추모왕을 기준으로 19대가 되는데, 이는 동일하게 광개토왕을 19대로 기록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왕계 순서와 기본적으로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능비가 세워지던 5세기 초반에는 이미 『삼국사기』에 보이는 일계적(一系的) 왕통의식(王統意識)이 성립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종합할 때 능비가 제작된 5세기 초반에는 공식적으로 시조 추모왕으로부터 광개토왕까지를 19대로 보는 왕계가 일원적으로 정리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보이는 19대까지의 왕호와 휘(諱)·장지명을 제시하면 표2와 같다.
표2에 따르면 9대 고국천왕과 16대 고국원왕의 본문 왕호에는 평양 천도(427년) 이후의 국내성을 지칭한 것으로 보이는 ‘고국(故國)’이라는 용어가 붙었다. 따라서 본문 왕명은 평양 천도 이후의 어느 시점에 재정리된 계통으로 보인다. 반면에 두 왕의 분주 왕명은 각각 국양왕과 국강상왕으로서 국내성에 수도를 뒀던 시기에 붙여진 왕호로 볼 수 있다. 특히 분주 왕호들의 경우 대무신왕의 ‘대해주류왕’이 〈광개토왕비〉의 ‘대주류왕’과 비슷하고, 16대 고국원왕의 ‘국강상왕’이 〈집안고구려비〉와 〈모두루묘지〉에 각각 등장하는 ‘국강상태왕’·‘국강상성태왕’과 상통하여 대략 4세기 말~5세기 초의 시점에는 이미 성립돼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高寬敏, 1996; 임기환, 2002).
표2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왕호와 장지명
대수왕호휘(諱)장지명(葬地名)
본문(本文)분주(分注)본문분주
1東明聖王 晝夢鄒牟·衆解龍山
2瑠璃明王 類利孺留豆谷 東原
3大武神王大解朱留王無恤 大獸村[林]原
4閔中王 解色朱 閔中原 石窟
5慕本王 解憂解愛婁慕本原
6太祖大王國祖王於漱[少名]
7次大王 遂成
8新大王 伯固伯句故國谷
9故國川王國襄男武伊夷模[誤記]故國川原, 國川
10山上王 延優位宮[誤記]山上陵
11東川王東襄憂位居郊彘[少名]柴原
12中川王中壤然弗若友中川之原
13西川王西壤藥盧歃矢婁西川之原
14烽上王雉葛相夫憂弗烽山之原
15美川王好壤王乙弗 美川之原
16故國原王國岡上王斯由故國之原
17小獸林王小解朱留王丘夫於只支小獸林
18故國壤王 伊連 故國壤
19廣開土王 談德
그렇다면 『삼국사기』와 〈광개토왕비〉처럼 시조 동명왕(주몽)부터 광개토왕까지의 왕계를 일원적으로 정리한 시점은 언제부터일까. 본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와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고구려의 초기 왕계가 동명(성)왕-유리(명)왕-대무신왕-민중왕-모본왕으로 이어지는데, 이들의 이름과 왕호에 ‘해(解)’자가 많이 붙으며, 특히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동명왕의 아버지가 해모수(解慕漱)라고 하였다는 점, 『삼국유사』에서 유리왕·대무신왕·민중왕의 성씨를 해씨로 기록하였던 점이 주목된다. 즉 1대 동명왕(주몽)부터 5대 모본왕까지의 성씨가 해씨였고, 6대 태조대왕부터 고씨(高氏)의 왕계가 이어진 것으로 보이므로, 초기 5대 모본왕과 6대 태조대왕 이후의 왕계는 실제로는 단절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金龍善, 1980, 61쪽; 金哲埈, 1990).
그런데 단절적이었던 두 왕계의 일원화 시점과 관련해 부여를 복속시켰다고 전하는 대무신왕의 왕호가 분주의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으로 전해진다는 점이 주목된다. 〈광개토왕비〉의 ‘대주류왕’도 형태가 비슷하여 같은 계통으로 생각되며 양자는 모두 4세기 말~5세기 초 시점에 이미 정리된 분주 왕호 계통으로 볼 수 있다. 이때 ‘대해주류’는 소수림왕의 분주왕호인 ‘소해주류(小解朱留)’와 대소의 수식어 차이가 있을 뿐 명칭이 동일하다. 추측컨대 본래 대무신왕의 왕호가 주류왕(朱留王)이었는데, 4세기 후반 소수림왕이 대무신왕에 대한 존숭과 계승을 표방하는 과정에서 소주류왕이라고 칭하였고, 이 과정에서 주류왕도 ‘대’주류왕으로 다시 명명한 결과라고 생각된다(조인성, 1990; 임기환, 2002).
이처럼 소수림왕대에 대무신왕에 대한 계승의식이 만들어졌다면, 이는 단순히 대무신왕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닌, 초기 왕계인 동명왕(주몽)부터 소수림왕대까지의 왕계를 일원적으로 정립하는 과정에서 나타났을 가능성이 높다. 371년 즉위한 소수림왕은 고구려가 대외적인 위기에 빠졌던 고국원왕대의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국가체제를 정비하는 데 주력했다. 그 과정에서 왕권의 존엄성을 강조하여 왕실을 중심으로 한 국가적 단결을 도모하는 이데올로기로서 시조 주몽을 중심으로 한 공식적인 건국 설화와 더불어 초기 이래의 왕계를 일원적으로 정립하는 작업을 진행했던 것으로 보인다(노태돈, 1999).
또한 소수림왕을 이은 고국양왕은 재위 8년(391)에 국사(國社)를 건립하고 종묘를 수리하였다. 국사의 건립은 종래의 이원적인 사직체계가 국왕을 중심으로 일원화되었음을 의미하며, 이어지는 고국양왕대의 종묘 수리는 소수림왕대 이래로 확립된 시조 동명왕(주몽), 대무신왕 등 초기 왕들을 종묘에 모신 것과 관련 있을 것이다. 즉 고국양왕의 종묘 수리는 왕실 세계의 정립이 확고하게 정착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조인성, 1990). 또한, 〈집안고구려비〉의 5행에 보이는 □□□□□王□, 岡上太王, □平安□王을 순서대로 미천왕과 고국원왕, 그리고 소수림왕(고국양왕이나 광개토왕으로 보는 설도 있다)으로 보고, 이들이 시조 추모왕의 종묘 배향을 핵심으로 하는 국가적 차원의 새로운 종묘를 세우고 제도적으로 확립한 것으로 보기도 했다. 특히 광개토왕대의 수묘제 정비는 국가의 유일한 종묘를 마련하는 동시에 이에 동반한 왕실 계보(추모왕-광개토왕) 정리의 최종적 조치였다고 파악하였다(공석구, 2013, 46쪽; 이성제, 2013; 여호규, 2013).
한편, 고구려는 나부체제시기의 국왕과 제가들의 관계를 군신 관계로 질적 전환을 꾀하고, 초월적 존재로서의 태왕의 존재를 드러내는 보다 확대된 정치 기준의 확립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에 중국에서 들어온 유학(儒學)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는데, 국왕과 신하 사이의 덕목으로서 ‘인’과 ‘충’이라고 하는 유교사상을 정치이념으로서 받아들여서 결과적으로 국왕의 권위를 합리화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소수림왕대에는 유학교육기관인 태학(太學)이 공식적으로 설립되고 거기에서 귀족 자제의 교육이 행해졌다. 태학의 설치는 바로 국왕의 권위를 유교적으로 합리화하는 동시에 국가적 차원에서의 유학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과 관리 등용을 위한 제도적 장치라고 할 수 있다. 태학에 대한 기록은 후대인 7세기 중반의 사정을 전하는 『한원(翰苑)』에 인용된 『고려기(高麗記)』에 보이는데, 여기에는 국자박사(國子博士)·태학사(太學士) 등 태학과 관련된 교수의 관명이 보인다. 이로 미루어볼 때 태학은 372년에 설립되어 후기까지 지속적으로 운영되었을 것이다.
소수림왕대에 만들어져 장기간 유지된 유학교육기관인 태학과 국자학은 중앙집권적 지배체제에 적합한 관리를 양성하여 확대된 영토와 다양한 내부 구성원을 체계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만든 기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4세기 중반 이래로 고구려가 당면해 있었던 지배질서의 확립과 국가체제의 정비라는 시대적 과제 속에서 나타났던 것이다(盧重國, 1979; 金賢淑, 1996).

  • 각주 002)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에 따르면 부여는 2세기 말~3세기 초까지도 외침으로 인해 파괴된 적이 없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부여는 285년경에 모용선비에게 침공을 당해 왕실이 일시 북옥저 방면으로 갔다가 다시 복국(復國)한 적이 있었고, 4세기 전반에는 고구려의 압박으로 농안 지역으로 옮겼으나 346년 모용선비에 의해 큰 타격을 입었다. 이후 농안 일대에 중심지를 둔 부여는 고구려에 종속된 채 5세기 말까지 명맥을 유지했다. 바로가기
  • 각주 003)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등장하는 국왕의 귀족세력에 대한 사성(賜姓) 관계 기사는 모두 동명왕기에서 대무신왕기까지의 건국 과정과 부여 관계 기사에서 보이는데, 이는 4세기 후반에 북부여출자 계통의 건국설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포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동명왕(주몽)-유리명왕-대무신왕에 대한 전승들을 취합하여 건국설화를 체계화하면서 당시까지 전해지던 일부 귀족들의 가계전승을 ‘사성’을 매개고리로 해서 왕실 가계 전승의 하위 파트로 흡수한 결과로 보인다. 이는 곧 소수림왕대에 추모왕계와 태조왕계의 결합을 통한 일원적 왕계의 확립과 동반하여, 고구려를 구성하고 있던 여러 귀족가문이나 지배층의 전승을 결집시켜 국가적 단결을 도모하기 위한 방편으로 생각된다(노태돈, 1999, 28~52쪽).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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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왕계의 일원화와 유학교육 자료번호 : gt.d_0003_0010_0010_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