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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2. 고구려의 국가 제의

2. 고구려의 국가 제의

1) 시조묘
고구려는 국가체제의 정비와 함께 왕실 권위를 강화하는 측면에서 제의체계도 정비되었다. 국가제의체계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종묘, 사직 등도 정비되었고, 시조 인식과 더불어 왕실의 출자와 계보의 일원화 과정에서 시조묘(始祖廟) 제사도 중요시되었다.
고구려 초기의 조상숭배에 대해서는 동명왕묘, 태후묘, 시조묘 등이 보인다. 이 중 시조묘와 관련해서는 동명왕묘와 시조묘를 주목할 수 있다. 대무신왕대의 기록에 보이는 동명왕묘에 대해서는 부여의 시조인 동명(東明)의 묘(廟)로 간주하기도 하지만(강경구, 2000; 이도학, 2005), 대체로 ‘동명=주몽=시조’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고구려의 시조묘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井上秀雄, 1978; 최광식, 1994; 김기흥, 2002; 박승범, 2002). 다시 말하면 고구려의 시조묘는 시조인 추모(주몽)를 모신 것으로 짐작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대무신왕 3년에 동명왕묘를 세웠다는 기록을 신빙한다면, 시조묘는 대무신왕대에 조영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당시에는 ‘동명’이라는 왕호가 붙여지지 않았다는 점이 문제로 남는데, 이는 후대에 가필된 내용일 것으로 여겨진다(井上秀雄, 1978). 고구려의 동명왕묘, 즉 시조묘는 졸본 지역에 있었고, 후대 왕들도 졸본에 가서 시조묘에 제사를 지낸 기록이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시조묘는 처음부터 멸망할 때까지 졸본 지역에 존재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시조묘 제사는 중천왕 때를 제외하고는 모두 즉위 후에 곧바로 제사를 행하였으므로 즉위의례적 성격을 갖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이해이다. 특히 2월과 4월의 치제는 예축제, 9월의 치제는 수확제적인 성격을 갖는 것으로 여겨진다(井上秀雄, 1978). 왕이 즉위하면 시조묘 제사를 통해 왕권의 정통성을 인정받고 통치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시조묘 제사는 즉위에 따르는 제사의례인 동시에 순행을 통해 사면도 이루어지는 정치적 행위였다고 할 수 있다(최광식, 2007).
문헌기록상으로 시조묘 제사 기록은 동명왕묘를 세운 대무신왕대 기록 이외에 신대왕, 고국천왕, 동천왕, 중천왕, 고국원왕, 안장왕, 평원왕, 영류왕 때에 한정된다. 이에 대해 실제 대부분의 고구려왕은 시조묘 제사를 거행한 것으로 짐작할 수도 있지만, 시조묘 제사의 의미가 사라져 더이상 지낼 필요가 없어졌다고 이해하거나(임기환, 2004), 시조묘가 중시되면서 신왕의 즉위의례는 종묘에서 이루어지다가 후에 다시 재개되었다고 이해하기도 한다(조우연, 2010; 강진원, 2015). 또한 시조묘 제사가 당시 국내외적 상황에 따라 특별하게 이루어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즉, 왕권강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비대해진 집권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을 지지해줄 다른 정치세력과의 제휴를 위해 선택되었다는 측면에서 당대 왕권과 정치세력들의 동향을 반영하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다(최일례, 2015). 최근에는 신대왕의 차대왕 시해로 권위가 실추된 계루부 왕실이 자체적으로 종묘 제사를 지내는 소노부보다 우월함을 드러내기 위해 천자7묘의 외양을 도입해 시조묘 제사를 지냄으로써 추락한 왕실의 권위 회복을 도모했다고 보기도 한다(최일례, 2019). 이처럼 시조묘에 대해서는 기록상 누락되었으나, 전 시기에 존재하였던 즉위의례인지, 종묘에 통합되어 위상이 낮아졌거나 중간에 폐지된 것인지, 특정한 왕대에 이루어진 고도의 정치적 행위였는지 확실하지는 않아, 이를 바라보는 입장에 따라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편, 『주서』에 의하면 고구려에 신묘 두 곳이 있어 부여신과 등고신을 모셨다는 기록도 보인다. 이때 부여신은 하백녀인 유화, 등고신은 주몽으로 상정된다. 이에 대해선 동명왕묘와 별개로 태후묘의 존재를 상정하기도 한다(최광식, 2007). 또한 등고신묘는 평양에 존재하였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서영대, 2007). 현재로선 이것이 시조묘인지, 아니면 별개의 신묘인지 명확하게 알 수 없다.
 
2) 종묘·사직
국가체계의 근본을 이루는 것으로 흔히 종묘와 사직이 거론된다. 종묘와 사직은 국가라는 의미의 대명사로 규정되기도 한다. 종묘는 선대왕들을 모신 사당으로 그들의 신주를 모셨다. 중앙집권체제가 정비되기 이전의 종묘와 사직은 계루부 왕실만이 아니라 전 왕족인 소노부도 세울 수 있었다. 이에 대해 부(部)가 단위정치체로서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던 흔적으로 보거나(노태돈, 1999), 왕가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예외적으로 허락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최광식, 1994). 결국 소노부에서 독자적으로 조상 숭배 종교시설인 종묘를 유지한 것은 고구려 집단 전체 공동의 혈연적 조상이 아직 상정되지 않고 있었음을 의미하며, 왕실 종묘가 고구려 집단 전체를 취합하기 위한 장치로 기능하지 않았음을 시사해준다. 이러한 사실은 제의체계가 왕실 중심으로 통일되지 못한 상태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다가 적어도 중앙집권적 지배체제가 정비되는 고구려 중기에는 종묘체계가 일원화되었다.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조에는 궁실(宮室) 근처에 대옥(大屋)과 거기서 치제된 귀신(鬼神)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종묘와 조상신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최광식, 1994; 강경구, 2001; 서영대, 2005). 적어도 3세기 단계에서부터는 고구려에 종묘가 존재함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으나, 실제 고구려에서 종묘가 건립된 시기에 대해서는 태조대왕 이후 부자상속에 따른 새로운 종법질서의 확립과 함께 종묘체제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조우연, 2010). 종묘체제가 언제 형성되었는지 기록상으로 명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태조왕을 정점으로 하는 직계조상계보가 마련되기 시작했을 때부터는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시점에 대해서는 동천왕대와 신대왕대로 이해하기도 한다. 동천왕대까지만 해도 혈통 인식에 있어서 태조왕과의 혈연적 연관성이 중요시되었다는 점을 주목한 것이고(조인성, 1990), 태조대왕에게 부여된 ‘태조’라는 칭호는 사실상 묘호로 고구려 종묘의 존재를 시사해준다는 측면에서 ‘시조’와 별도로 새로운 시초로서 ‘태조’가 새롭게 정립되었음을 의미하므로 ‘시조묘’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하는 신대왕대를 주목한 것이다. 시조와 태조 개념이 설정된 시기에 대해 다소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2세기 중반 신대왕대 처음으로 확인되는 시조묘 제례 기사를 통해 왕실 조상관념상의 ‘시조’와 ‘태조’ 2조 체계의 확립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조우연, 2010). 한편, 산상왕대와 소수림왕 이후를 모두 주목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산상왕은 왕위계승분쟁을 거쳐 즉위하였기에 왕권의 정당성 확보가 필요했으므로, 선왕에게 장지명 왕호를 추증하고 종묘체계를 확립하여 국조왕(國祖王 = 태조왕)에 대한 숭앙과 혈연의식 강조를 통해 왕실의 정통성과 권위를 확보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국원왕대에 발생한 국가적 위기로 인해 왕실의 권위가 다시 실추되자 소수림왕 이후로 건국기 3왕(동명왕, 유리왕, 대무신왕)에 대한 숭앙의식을 강조하고 선왕의 왕호와 계보, 장지명에 대한 일괄 정리를 진행하였고, 이 과정에서 기존 종묘체계와 다른 새로운 양상이 진전되었다고 보기도 한다(이승호, 2016).
그런데 4세기 이후 왕실계보가 일원화되면서 시조나 태조에 대한 인식은 보다 확고해진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광개토왕비〉이다. 〈광개토왕비〉에는 시조 추모왕에서 시작하는 3대까지의 왕명과 광개토왕이 17세손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광개토왕비〉 단계에서는 시조에 대한 인식은 분명하지만, 태조에 대한 인식 여부는 확인할 수 없어서 이를 확언하기는 어렵다.
고구려 종묘는 시조묘 제사와 별개의 제사체계로 제사 대상 자체가 구별되는데, 시조묘 제사의 대상은 주몽이고, 종묘에 국조(國祖)로 봉사(奉祀)된 의례 대상은 태조대왕으로 보고 있다(신종원, 1984; 노태돈, 1999). 고국원왕대에는 전연의 공격으로 국도가 함락되어 종묘와 사직도 온전하지 못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국양왕 9년의 기록을 보면, 이전부터 존재하였던 종묘를 새로 수리하고, 유교적인 예제에 입각한 국사를 건립한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기존의 종묘를 단순하게 수리(修理)한 것으로 추모왕계가 종묘에 합사된 것으로 보거나(조인성 1990; 노태돈, 1999), 전통적인 종묘에 유교적인 수식을 가미하여 체계화시킨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며(노중국, 1979), 건축물의 규모나 제례법을 높여 정비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강경구, 2001). 또한 계루부의 종묘와 사직 제사가 폐지된 것으로 보거나(박승범, 2001), 7묘(七廟)제가 운영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신종원, 1984). 근래에는 고구려에서 기존의 종묘에 모종의 수정을 거쳐 제도의 틀을 새롭게 갖추었음을 의미한다고 보기도 한다. 고구려에서 4세기~5세기를 기점으로 더이상 능묘(陵廟)를 조성하지 않았기에 선왕의 신위(神位)는 당연히 종묘라는 통일된 제사 장소에 합사(合祀)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조우연, 2010). 또한 4세기 후반 중국에서 능방입묘(陵旁立廟) 묘제가 쇠퇴하게 되면서 고구려 역시 그 영향으로 고국양왕대에 종묘체계 개편과 함께 선왕에 대한 제사의 중심을 앞선 시기의 묘제(墓祭)에서 종묘로 옮긴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강진원, 2015). 더욱이 2012년 발견된 〈집안고구려비〉에 보이는 ‘세실(世室)’을 종묘로 이해하면서 국가제사 정비에 따라 선왕(先王)의 능묘에서 거행하던 조선(祖先)제사가 점차 종묘(宗廟)제사로 전환되었을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공석구, 2013; 여호규, 2013; 강진원, 2014). 이러한 국사와 종묘와 관련한 내용은 고구려가 초기 왕계를 정립하고 역사서를 편찬하는 등 국가체제를 정비하는 일련의 조치와 연결된다고 하겠다.
사직(社稷)은 토지신을 뜻하는 사(社)와 곡물의 신을 뜻하는 직(稷)의 합칭으로 사직제사가 지니는 원초적 의미는 농경과 관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직과 관련해서는 고구려의 수신제를 주목할 수 있다. 수신은 토지신과 조상신으로서의 성격을 갖춘 중국의 원시적 ‘사신(社神)’과 유사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농경과 관련된 신격인 동시에 일종의 여성 조상신으로서의 성격도 갖추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사직제사의 원초적 형태는 지모신(地母神)의 신주(神主)를 ‘국동대혈’로 표현되는 동굴에 안치하였다가 제사일에 강가에 모셔 풍작을 기원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고 하겠다. 이후 고구려가 집권화됨에 따라 농경과 조상신앙이 결합된 원초적인 사직관념 역시 시대상황과 함께 변화되었을 것이다(조우연, 2010).
고구려 사직과 관련한 기록은 『위략』, 『삼국지』 등에 나타나는데, 거처하는 곳의 좌우에 건물을 지어 ‘영성사직(靈星社稷)’에 제사했으며, 전 왕실인 소노부의 장(長) 역시도 그러한 종교의례 권한을 가졌다. 그러다 점차 이것이 통합되어 국가적 의례로 전환되었다. 각 부의 사직이 수신제라는 공동의 사직제사로 대체되면서 각 부 고유의 사직은 없어지고 왕실 내지는 국가가 사직을 유지하였다. 4세기 이후 고구려에서 확인되는 ‘국사(國社)’의 등장은 곧 국가영토의 상징으로 확대되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고국양왕 9년의 국사 건립이 기년상의 문제가 다소 있어, 고국양왕 9년의 사실일지, 광개토왕 2년의 사실일지는 불분명하지만, 그 자체가 허구는 아니다. 이때의 국사 건립은 제후가 공공 복리를 위해 세운 사직으로, 유교적 예제에 입각하여 새로운 사직을 건립한 것으로 이해된다(서영대, 2005). 이와 관련하여 국사를 세운 의미를 다양하게 해석해 왔는데, 소노부와 계루부 이중 사직제사체계의 종말이자 왕권에 의한 사직제사권 독점을 의미한다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조인성, 1990), 계루부의 종묘와 사직제사가 폐지되는 대신 국가 차원의 제사체계가 새롭게 확립되었음을 의미한다고 보기도 한다(박승범, 2001). 한편, 국사(國社)를 시조묘(始祖廟)에 대응하여 도읍인 국내성에 설치한 유화 즉 부여신을 모신 종교 건축물로 보기도 한다(김두진, 1999).
고구려의 사직 위치에 대해서는 국내성시기만을 한정해 놓고 보면 동대자유지로 비정하기도 하고(方起東, 1982), 민주유적의 석주를 사직신의 신체로 비정하기도 하며(王純信, 1994), 환도산성 내부의 8각 건물지에 세운 것으로 보기도 한다(서영대, 2005; 서영대, 2007). 그러나 현재로선 이들 추정지 모두가 일정한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 위치를 확정하기 어렵다. 사직이 중시되었다는 것은 왕궁 가까이에 사직을 모셨고, 수도를 옮길 때 종묘와 함께 사직도 옮겼다는 사실로 유추할 수 있다. 이는 동천왕 때 환도성이 함락된 후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는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하였을 때에도 사직을 종묘와 함께 옮겼을 개연성이 높지만, 평양의 사직도 현재로선 위치를 확인하기 어렵다.
 
3) 왕릉 수묘제
(1) 수묘인 연호의 편성
일반적으로 고대 사람들은 사후세계에 대해 죽기 전과 같은 생활을 한다고 믿는 계세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무덤은 저세상에서 죽은 자가 생활하는 주택으로 여겨, 자신이 죽은 후 그 무덤이 잘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후손들은 조상의 영혼이 자신들을 돌보아 준다는 조상숭배사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조상의 능묘가 오래도록 보존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무덤을 잘 지키고 청소하는 것은 조상을 위하는 일인 동시에 후손을 위하는 길이기도 하였다. 수묘인이 설치된 것은 이와 같은 고대인들의 사상적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수묘제는 능묘를 보호하고 관리한다는 측면에서는 추선의례(追善儀禮)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정호섭, 2011).
고구려에서는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수묘에 대한 기록이 나타난다. 수묘제는 무덤의 보호와 제의에 있어서 중요한 제도였을 것이다. 고구려 수묘제와 관련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신대왕 15년(179년)조에 국상 명림답부가 죽어 수묘 20가(家)를 두었다는 내용이다. 이때부터 수묘제가 시작되었는지, 아니면 이전에도 수묘제가 있었는데 신하에게 특별하게 수묘제가 시행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명림답부의 경우 특별한 사례여서 사서에 기록한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고구려에서 대신에게 수묘 20가를 두었다는 기록을 통해 볼 때, 그 이전 왕릉에도 수묘제가 시행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초기 수묘인은 복속지에서 차출되어 사민된 존재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임기환, 1994). 〈광개토왕비〉를 통해 볼 때 고구려에서 어느 시점 이후부터는 복속지에서 차출하여 사민시킨 존재를 수묘인으로 배치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수묘제와 관련하여 가장 주목되는 것은 〈광개토왕비〉와 〈집안고구려비〉이다. 두 비의 내용은 수묘인 연호(煙戶)나 수묘제와 관련되어 공통점이 많다. 〈광개토왕비〉의 내용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세 번째 부분의 내용이 바로 5세기경 고구려 수묘인 연호의 편성과 수묘제의 개편 등에 대한 기록이다. 〈집안고구려비〉의 내용도 기본적으로는 왕릉 수묘제의 운영과 수묘인 매매금지령을 담고 있다.
〈광개토왕비〉에서는 3면 중간 부분에서 시작하여 4면 중간 부분까지 수묘인 연호의 구성을 나열하였고, 그다음으로 광개토왕대와 장수왕대의 수묘제 운영에 대한 조치가 연이어 기록되어 있다. 〈광개토왕비〉에서 수묘인 연호를 검토해 보면, 수묘인은 가(家) 또는 연호(烟戶)라는 단위로 차출되었고, 구민(舊民)과 신래한예(新來韓穢)의 두 집단으로 편성되었으며, 수묘인 연호를 국연(國烟)과 간연(看烟)으로 구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수묘인 연호 가운데 구민에는 국연이 10가, 간연이 100가이고, 신래한예에는 국연이 20가, 간연이 200가였다. 이를 통해 보면 구민과 신래한예의 비율이 1:2로 편성되고 있고, 국연과 간연의 비율이 1:10임을 확인할 수 있다.
국연과 간연의 성격에 대해서는 그동안 여러 견해가 제기되었으나, 국연이 수묘역(守墓役) 수행에서 주가 되고 간연이 보조적 기능을 수행한 것으로 보는 것이 주된 견해이다(那珂通世, 1979). 여기서 더 나아가 고려나 조선의 국역에서 보이는 호수·봉족과 같은 관계로 규정하기도 하였다(박시형, 1966). 하지만 국연과 간연의 구체적 차이에 대해서는 재산상의 차이, 신분상의 차이, 입역상의 차이 등으로 구분하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국연은 수묘역뿐만 아니라 국가의 공적인 역을 수행하는 연호라는 보편적 의미로 보는 반면에, 간연은 왕릉의 간수(看守)·간시(看視)·간호(看護)를 담당한다고 해석하기도 하며(武田幸男, 1979), 신라의 간옹(看翁)을 근거로 농업생산 등에 종사하여 국연의 경제적 필요를 담보하는 기능을 수행하였다고 보기도 한다(조법종, 1995). 또한 국연은 제사 준비와 간연을 관리하는 역할을, 간연은 능의 보초와 청소 등을 담당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며(이인철, 1997), 국연은 국도의 연, 간연은 지방의 연으로 이해하기도 한다(이도학, 2002). 한편, 국연은 직접적으로 역을 지는 존재이고, 간연은 경제적으로 국연을 뒷받침하는 예비수묘인이거나 결원을 대비한 인원이라는 견해도 있다(권정, 2002; 김락기, 2006; 공석구, 2011). 신분과 관련해서는 국연을 피정복민 가운데 호민(豪民)에 해당하는 지배층 혹은 부유층으로, 간연은 하호(下戶)에 해당하는 피지배층 혹은 평민층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김현숙, 1989). 또한, 국연은 혼자서 수묘역을 감당할 수 있는 부유한 호이고, 간연은 10가가 합쳐서 국연 1가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영세한 호라고 보는 설(손영종, 1986) 등 다양한 견해가 있다. 그리고 국연과 간연을 수묘역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국역 편제에서 연호 일반을 파악하는 보편적인 편제방식인 국연-간연체계일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임기환, 1994). 국연을 광개토왕을 위한 연호, 간연은 기타 왕릉에 배정된 연호로 이해하기도 한다(기경량, 2010).
중국이나 신라 등의 사례를 볼 때 수묘인 연호는 기본적으로 집단 사민된 존재로 보인다. 중국의 경우, 한대(漢代) 이래로 수묘인은 대체로 능읍(陵邑)에 사민된 존재였다(민두기, 1957).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4년조에서는 수묘 20호가 사민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정황을 보면 고구려의 경우에도 수묘인을 각 지역에서 사민하였을 텐데, 정복한 지역의 민들을 편제한 후 수묘인으로 배속시켰다. 이렇게 편제되어 사민된 수묘인 가운데에서도 국연과 간연이 처음부터 나뉘어져 있었다. 국가는 이들이 수묘역을 질 수 있도록 집과 같은 생활터전과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주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국연과 간연의 차이에 대해 먼저 주목할 것은 차출한 지역을 기술하면서 각 지역에서 국연과 간연을 처음부터 편제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국연과 간연으로 나뉘어 차출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차출되는 과정에서부터 일정한 차이를 두고 선발되었을 것이다. 각 지역에서 차출하는 국연과 간연의 수가 일정하게 정해져 있었고, 차출된 국연과 간연의 비율이 1:10인 점을 보면, 수묘역에서 책임을 지는 위치에 있었던 국연과 국연의 감독하에 수묘역에 실제적으로 종사하는 간연으로 구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武田幸男, 1979; 조인성, 1988; 김현숙, 1989). 이런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이들 사이에는 일정한 계층적 차이를 설정할 수 있는데, 국연은 일종의 조장 역할을 하는 호민(豪民)집단, 간연은 하호(下戶)에 해당되는 집단으로 보기도 한다(정호섭, 2011).
〈광개토왕비〉에 보이는 수묘인 연호의 구성 가운데 구민은 표 1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구민들은 광개토왕 이전에 복속한 지역의 주민으로 구성되었다. 수묘인 연호로 차출된 구민은 국연 10가, 간연 100가, 총 110가인데, 14지역에서 차출하였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어떤 지역은 민(民), 인(人) 등으로 표시되어 있고 어떤 지역은 그렇지 않지만, 모두 동일하게 편제된 민으로 여겨진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들이 노예적 존재는 아니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수묘인 연호는 고구려 영역에서 징발한 가(家)로 구성되고, 성민(城民), 곡민(谷民) 등으로 구성되었다(정호섭, 2011).
구민의 구성상 주목되는 것은 평양성의 경우 국연 1가, 간연 10가로, 국연과 간연이 1:10의 비율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평양성민은 수묘인 종사의 한 그룹으로 상정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수묘역에 있어서 아마 국연 1가, 간연 10가가 가장 기본적인 단위로 기능하였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국연 1가, 간연 10가로 구성된 11가가 가장 기본 단위인 셈인데, 220가의 경우에는 국연 20가, 간연 200가이므로 20조 정도의 수묘인 연호의 기본 단위가 생긴다. 결과적으로 구민을 추가한 연호인 330가라고 본다면 30조의 수묘인 연호가 짝을 이루게 된다(박시형, 1966). 이에 대해 30가 혹은 33가가 한 조를 이루어 국내성 시기의 10왕 내지는 11왕의 왕릉 수묘에 동원되었다는 견해가 있기도 하다. 33가를 한 조로 보는 견해(김현숙, 1989; 이성시, 2008)와 30가를 한 조로 보는 견해(김락기, 2006; 기경량, 2010)가 그것이다. 30가는 수묘인 구성상 국연 1, 간연 10이라는 조 단위로 편제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33가 정도가 최종적인 단위였을 텐데, 대체로 3조 정도에 해당한다(조인성, 1988). 330가의 수묘인 연호 구성이 10개의 왕릉 수묘인으로는 볼 수 있으나, 그것이 국내성시기 고구려 전체 왕릉을 위한 것인지는 확정하기 어렵다. 예를 들면 봉상왕과 같은 경우가 수묘인 연호 편성에서 포함되고 있는지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정호섭, 2011).
표1 | 〈광개토왕비〉 구민(舊民)의 수묘인 연호 구성
지역국연간연
1賣句余(民)23
2東海賈35
3敦城(民)04
4于城01
5碑利城20
6平穰城(民)110
7訾連02
8俳婁(人)143
9梁谷02
10梁城02
11安夫連022
12改谷03
13新城03
14南蘇城10
총계14지역10100
110가(家)
2012년 〈집안고구려비〉의 발견으로 고구려 수묘제에 대한 연구는 다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집안고구려비〉의 건립 시기에 대해서는 광개토왕대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지만(耿鐵華, 2013; 林沄, 2013; 徐德源, 2013; 공석구, 2013; 이용현, 2013; 금경숙, 2013; 이도학, 2013; 여호규, 2013; 윤용구, 2013; 정호섭, 2013; 홍승우, 2013; 임기환, 2014; 김창석, 2014), 장수왕대로 보기도 한다(孫仁杰, 2013; 張福有, 2013; 徐建新, 2013; 梁志龍·靳軍, 2013; 魏存成, 2013; 李新全, 2013; 朴眞奭・서영수, 2013; 김현숙, 2013; 권인한・武田幸男, 2013; 李成市, 2019). 광개토왕대설과 장수왕대설의 핵심 쟁점은 〈광개토왕비〉와의 관계 설정 문제다. 광개토왕대설이 〈집안고구려비〉가 〈광개토왕릉비〉보다 선행한다고 보는 반면, 장수왕대설은 대체로 후행한다고 이해한다. 다만 광개토왕대설의 경우 중국 학계에서는 모두 특정 왕릉의 ‘묘상입비’ 즉 수묘비로 파악하는 반면, 한국 학계에서는 특정 왕릉 수묘비설(조법종, 2013; 여호규, 2013; 윤용구, 2013; 공석구, 2013)과 교령비(敎令碑), 수묘율령비, 문고비(文告碑), 수묘제 포고비, 선포비(宣布碑), 경고비 등으로 보는 입장이 크게 나뉜다(정호섭, 2013; 금경숙, 2013; 조우연, 2013; 이성제, 2013; 기경량, 2014; 임기환, 2014). 또한, 수묘비(守墓碑)와 율령비(律令碑)의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보기도 하는데(김수태, 2013; 홍승우, 2013), 논쟁의 핵심은 〈집안고구려비〉가 특정 왕릉에 세웠던 묘상입비의 실물인지 여부이다. 장수왕대설에서도 비수묘비(非守墓碑)라는 견해(김현숙, 2013)와 묘상입비(墓上立碑)의 실물이라는 설(李成市, 2019)이 공존한다. 다만 후자의 경우 광개토왕대가 아닌 장수왕대에 새롭게 만든 비라고 본다.
아울러 〈집안고구려비〉의 성격이 광개토왕대에 행해진 묘상입비의 실물인 수묘비인가, 묘상입비와는 다른 성격의 비인가 하는 것뿐만 아니라 ‘연호두(烟戶頭) 20인명(人名)’에 대한 해석도 차이가 있다. 〈집안고구려비〉의 ‘烟戶頭 ’에 대해서는 통상적으로 각 왕릉에 배정된 수묘인 연호 20가의 호주로 이해하거나(여호규, 2013; 공석구, 203; 임기환, 2014; 李成市, 2019), 반대로 수묘인 연호 가운데 연호들을 관리하는 책임자 내지 관리자로 보기도 한다(정호섭, 2013; 이성제, 2013; 김현숙, 2013; 張福有, 2013; 徐建新, 2013; 孫仁杰, 2013; 梁志龍·靳軍, 2013; 荊目美行, 2015). 이처럼 연호두에 대한 견해는 〈집안고구려비〉의 성격을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따라 호주설(戶主說)과 대표자 혹은 관리자설로 대별된다. 전자의 경우 〈집안고구려비〉가 〈광개토왕비〉에 보이는 묘상입비의 실물이며, 광개토왕대에 수묘인 연호가 각 왕릉에 20가씩 배치되고 그 호주의 이름이 비에 새겨진 것으로 이해한다. 후자의 경우에는 〈집안고구려비〉는 〈광개토왕비〉에 보이는 묘상입비의 실물이 아닌 전혀 다른 성격의 비이고, 수묘인 연호 가운데 국연과 같은 왕릉의 책임자 내지 관리자가 있어서 그들의 이름만 비에 새겨진 것으로 이해한다. 이렇듯 〈집안고구려비〉의 발견으로 인해 고구려 수묘제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획득하였지만, 논란이 가중된 측면도 있다.
한편, 〈광개토왕비〉에 기록된 신래한예에서 징발한 수묘인 연호는 표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총 36지역에서 국연 20가, 간연 200가로 구성하고 있다. 여기서는 수묘인 연호를 구성하면서 몇 개 지역에서 한(韓), 한예(韓穢) 등을 분명하게 밝혀 놓은 부분이 있는데, 다른 지역의 수묘인 연호도 신래한예이므로 특별한 의미를 두기는 어렵다. 다만 한예로 표기된 사조성(舍蔦城)의 경우 한과 예가 같이 포함된 지역임을 분명하게 한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아단성(阿旦城), 잡진성(雜珍城)의 경우 두 지역을 합쳐 10가의 수묘인 연호를 구성하고 있는 점이 특별하다. 서로 다른 두 지역을 합쳐 수묘인 연호를 구성한 점은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수묘인 연호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는 두 지역을 개별적으로 기록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뭔가 특별한 사정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일단 두 성 모두 수묘인 연호로 간연만 배정된 상황이라는 점을 주목한다면, 두 성이 하나의 행정단위라고 보기는 어렵다. 수묘인을 사민된 존재로 보지 않음을 전제로 하여 번상입역설의 입장에서 앞으로 계속 두 성에서 함께 간연 10가를 징발하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하고(임기환, 1994), 비가 세워진 시점에는 두 성에서 수묘호를 구체적으로 지정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김락기, 2006). 두 성의 경우에는 간연으로만 사민되었으므로 두 성의 연호가 한 조를 이루어 수묘역을 수행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즉 두 성의 간연이 항상 함께 한 조를 이루어 수묘를 행하였기에 간연 10가로 구성된 점에서 두 성의 수묘인 연호가 간연의 합으로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정호섭, 2011).
표2 | 〈광개토왕비〉 신래한예(新來韓穢)의 수묘인 연호 구성
지역국연간연
1沙水城11
2牟婁城02
3豆比鴨岑(韓)05
4勾牟客頭02
5求底(韓)01
6舍蔦城(韓穢)321
7古模耶羅城01
8炅古城13
9客賢(韓)01
10阿旦城, 雜珍城(合)010
11巴奴城(韓)09
12臼模盧城04
13各模盧城02
14牟水城03
15幹氐利城13
16彌鄒城17
17也利城03
18豆奴城12
19奧利城28
20須鄒城25
21殘南居(韓)15
22太山韓城06
23農賣城17
24閏奴城222
25古牟婁城28
26瑑城18
27味城06
28就咨城05
29彡穰城024
30散那城10
31那旦城01
32勾牟城01
33於利城08
34比利城03
35細城03
총계36지역20200
200가(家)
수묘인 연호의 역할도 〈광개토왕비〉와 〈집안고구려비〉를 통해 상정할 수 있다. 수묘인 연호가 왕릉에서 하는 일에 대해서 〈광개토왕비〉에는 무덤을 지키고 소제하는 일로 나타나고, 〈집안고구려비〉에는 여기에 사시제사(四時祭祀)하는 일이 추가적으로 드러난다. 결국 수묘인 연호들은 각 왕릉에 배정되어 평소에는 무덤을 지키고 소제하면서 지내다가 특정한 날에는 왕릉에 제사하는 일까지 맡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연간 4회만 제사지냈다고 보기 어렵다며 매일, 매월, 매년마다 4회의 제사를 거행했다고 이해하거나(공석구, 2013), 관용구로 일상적 제사행위를 지칭한다고 파악하기도 한다(조우연, 2013). 이 부분은 고구려의 왕릉 수묘제 및 조선 제사(祖先 祭祀)와 관련해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는데, 초기의 수묘제에서 능묘 제사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고, 조선 제사도 종묘 제사보다는 능묘 제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공석구, 2013; 강진원, 2014).
이 수묘인 연호들은 국내성에 사민된 수묘인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수묘한 왕릉은 국내성시기에 한정해서 볼 수 있을 것이다. 국내성으로 천도한 시기에 대해서는 다양한 입장이 있지만, 대체로 신대왕대에 수도가 국내성이었음은 어느 정도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국내성 이전 시기 혹은 졸본 지역의 왕릉 수묘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태조왕대 혹은 신대왕대에 국내성으로 천도했다는 견해가 있는 만큼 가장 빠르게 보면 태조왕대이고 그다음이 신대왕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10여 개의 왕릉 수묘를 담당하였다고 할 수 있다. 기존에는 장수왕대에 완성된 수묘인 연호로 배정된 330가를 광개토왕만을 위한 수묘인 연호로 이해하기도 했지만, 근래에는 국내성시기의 고구려 왕릉 전체를 수묘한 존재들로 상정된다(浜田耕策, 1982; 김현숙, 1989; 이성시, 2008; 기경량, 2010; 정호섭, 2011). 이와 관련하여 『진서』 풍발전(馮跋傳)을 보면 동 시기 북연왕(北燕王) 고운의 경우 원읍(園邑)에 20가를 두고 있는 점을 보더라도 그러하다. 그다지 넓지 않은 지역인 국내성(집안 지역) 일대에 한 왕릉 수묘를 위해 220가나 330가 규모의 수묘인 연호가 필요하지는 않을 듯하다. 또한 국가의 입장에서도 220가 내지 330가의 수묘인을 왕릉 주변에 집단 사민시켜 그들에게 생활터전이나 경제적 기반 을 마련해주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수묘인의 수는 국내성 일대 왕릉 수묘인 총합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2) 수묘제 운용과 개편
4세기~5세기경의 고구려 수묘제는 〈광개토왕비〉의 ‘수묘인 연호’ 내용 다음에 기술된 ‘수묘인 운용’ 기술 부분이 일찍부터 주목을 받아왔다. 이는 주로 교언(敎言)과 제령(制令)에 관한 것이다. 이를 순서대로 보면 처음 구민들이 ‘약하게 될 것(轉當羸劣)’을 염려하여 한예들을 수묘인 연호로 편성하라는 교령과 이에 대한 조처로 한예 220가로 연호를 편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에서는 적어도 4세기까지의 왕릉에는 원근의 구민들을 사민시켜 무덤을 수호하고 소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광개토왕은 구민들의 상황이 변하여 약하게 될까 염려하고 있다. 비의 내용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구민들의 경우에 수묘인 연호의 차착(差錯)현상이 있는데 다 수묘인을 사고파는 행위도 있었기 때문에 수묘인 연호로 배정된 구민들의 상황이 변하여 약해지는 현상이 있어서, 광개토왕은 이를 염려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광개토왕은 먼저 구민들을 수묘역에서 완전히 배제하는 대신 자신이 몸소 경략한 한예를 취하여 수묘인 연호로 구성하도록 명령하였다. 즉 광개토왕은 구민들로 운영하던 기존 수묘제를 개혁한 것이 아니라, 수묘인 연호 자체를 개편한 것이다(조법종, 1995). 구민을 수묘인으로 동원하지 않고 한예로만 구성하는 것이 구민들이 ‘전당리열(轉當羸劣)’하고 있는 사정을 해결하는 가장 기본적인 조치였던 것이다. 즉 한예를 수묘인으로 동원하는 것은 기존 구민들의 수묘역을 면제해주고 일반 민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준 새로운 조치였다.
광개토왕의 교령에 따라 한예의 220가를 수묘인으로 취하고 있는데, 이때 취한 한예 220가는 모두 국도로 사민된 존재였다. 당시 고구려 왕릉에는 모두 합쳐 220가 정도의 수묘인이 배치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장수왕이 신래한예 220가만으로는 수묘를 할 수 없다고 판단한 데 있다. 장수왕은 부왕의 교언에도 불구하고 한예들이 수묘법칙을 알지 못할까 염려하여 구민 110가를 추가적으로 구성하여 수묘제를 정비하고 있다. 여기서 보이는 구민들은 광개토왕대에 신래한예들이 법칙을 모를까봐 배정된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대체로 수묘에 대한 법칙을 알고 있었기에 선발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수묘법칙은 직접 수묘역을 수행한 사람들이 정확하게 알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은 종래 다른 왕릉에 배정된 수묘인 연호들의 경우 이외에는 상정하기 어렵다. 이들은 광개토왕의 교언에 의해 잠시 수묘인 연호 구성에서 제외되었다가 다시 장수왕에 의해 수묘인 연호로 차출되었던 것이다. 즉 신래한예 220가만으로 고구려 왕릉들을 수묘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기존에 왕릉 수묘인으로 배정되었다가 광개토왕의 교언에 의해 수묘인 연호 구성에서 제외되었던 연호들이 장수왕에 명에 의해 다시 수묘인 연호로 재편제되었던 것이다(정호섭, 2011).
다음으로 이어지는 수묘제 정비에 관한 내용은 광개토왕이 조선왕(祖先王)의 왕릉 곁에 석비를 세우는 묘상입비에 관한 것이다. 광개토왕이 수묘인 연호들의 차착현상에 대한 해결방안으로 조선왕을 위해 무덤 곁에 비를 세우고 수묘인 연호를 새긴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각 왕릉 곁에 수묘인 연호를 분명하게 새겨 기록하면 연호의 차착현상은 방지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묘인 연호를 관리하는 차원에서 비에다가 영구적으로 불변하는 수묘인 연호를 정확하게 기록해 놓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해결책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고구려에서는 원근의 구민들을 사민시켜 수묘하도록 하였는데, 차착현상이 있었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 가능할까? 기존 논의에서는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수묘역을 지는 노동조의 순서상 착오나 노동조의 담당 릉에 대한 역의 수행 과정에서 일어난 착종으로 이해한 바 있다(김현숙, 1989). 그런데 비문에 기록된 내용은 차출 지역과 연호수일 뿐이므로, 수묘역 수행 과정에서 나타난 문제는 아닌 듯하다. 한편으로는 예비수묘인과 관련된 문제로 이해하기도 하지만(김락기, 2006), 수묘인은 사민된 존재라는 측면이 고려되어야 한다.
차착현상은 바로 수묘역을 지는 왕릉에 대한 착오와 수묘인 연호 수의 변동에 따른 차이, 아울러 매매에 따르는 이탈 등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차착현상에 대한 대책은 각 왕릉에 수묘비를 세워 수묘인 연호를 기록하는 방법을 최선으로 여겼다. 그래서 광개토왕은 각 왕릉에 신래한예로 구성된 새로운 수묘인 연호를 비에 새겨 영구불변하도록 조치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묘상입비에 대해서는, 광개토왕의 묘역에만 수묘비를 세운 것으로 보기도 하였지만(김현숙, 1989), 조선(祖先) 왕릉에 모두 묘상입비를 한 것으로 보인다. 차착현상을 방지하기 위한 취지에서는 묘상입비를 하였음을 밝히고 있으므로 구체적인 입비 조치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아마 신래한예 220가를 분산하여 각 왕릉 수묘인 연호를 새긴 비를 왕릉 곁에 세우는 조치였을 것이다. 〈광개토왕비〉에는 전체 수묘제를 구민에서 신래한예로 개편하면서 그 개편된 내용과 장수왕이 수묘인 연호를 추가적으로 기술한 내용만을 적고 있다. 〈광개토왕비〉에 보이는 수묘인 연호는 고구려 전체 왕릉 수묘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광개토왕대에 각 왕릉에 수묘인 연호를 기록한 어떤 형태의 비가 존재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묘상입비는 각 왕릉 주변에 세워져 있었다(정호섭, 2011).
한편, 광개토왕은 수묘인이 매매되고 있는 상황에서 수묘인 매매 문제도 법제화하고 있다. 즉 수묘인 연호를 서로 사고파는 것을 금지하고, 판 자는 형벌을 받고 산 자는 대신 수묘하도록 한 조처였다. 당시에 수묘인 매매는 좌시할 수 없는 문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수묘인을 사고판다는 의미에 대해서는, 수묘인 자체의 불법적 매매나 귀족에 의한 수묘인 노동력 수탈(김현숙, 1989), 토지(조법종, 1995), 무기(이인철, 1997), 수묘인 사이에서의 노동력 매매(기경량, 2010) 등 다양한 견해가 제시된 바 있다. 〈광개토왕비〉에 나타난 문장으로 보면 매매되는 것이 수묘인 자체임은 분명하다. 어떤 구절에서도 수묘인 이외의 다른 사항을 보여주고 있지 않기 때문에 수묘인 노동력이나 수묘인 자체의 매매에 한정된다(정호섭, 2011). 일단 토지는 상정하기 어렵다. 토지가 수묘인 연호에게 배정되었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하고, 그렇더라도 사적인 토지가 아니었을 것이므로 토지 자체가 사고파는 대상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한 법제적인 공문서와 같은 형식의 비문에서 토지가 매매 대상이었다고 한다면 명확히 명시했을 것이다(임기환, 1994). 토지를 산 자가 대신 수묘하였다면 평생 수묘역을 지는 것이므로, 영구불변의 수묘인 구성을 위한 묘상입비 조치와도 배치된다. 무기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사고파는 대상이 수묘역일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만약 수묘역을 사고판다면 사는 쪽이든 파는 쪽이든 어떤 이해관계가 발생해야 한다. 그런데 수묘역을 산 자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돈을 주고 역을 대신 수행해야 하므로 부유한 자가 사들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수묘역도 매매 대상이 아닐 것이다(정호섭, 2011). 〈집안고구려비〉에 나타나는 것도 수묘인 매매 문제이지, 다른 것은 상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매매 대상은 수묘인 자체이거나 수묘인 노동력인 것이다.
수묘인을 사고파는 행위가 이 시기에 가능했다는 점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광개토왕비〉의 기록상으로는 수묘인이 사고파는 대상이라는 의미로밖에 파악할 수 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수묘인이 국가에서 공적으로 동원한 일반 호민과 하호로 구성되었다면, 수묘인 자체가 기본적으로 사고팔 수 있는 존재일지에 대해 의문이 생긴다. 당시 고구려가 국가 차원에서 수묘인을 사고파는 것은 불법적인 행위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수묘인 연호의 사회적 성격에 관한 논의는, 노예설(백남운, 1933; 王健群, 1985), 특수직역인 집단으로 양인 혹은 신량역천(身良役賤)적인 존재설(손영종, 1986; 김현숙, 1989), 그리고 양인속민(良人屬民)설(김석형, 1974) 등이 있다. 노예설은 일반적으로 수묘인 연호가 전쟁포로이고, 〈광개토왕비〉에서 매매 대상이 되었던 점에 근거하고 있다. 그런데 구민으로 구성된 수묘인 연호는 노예적 신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 점은 〈광개토왕비〉에 기록된 구민 110가를 보통 성민이나 곡민으로 표현하고 있는 점만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다만 신래한예의 경우도 정복한 지역에서 동원되긴 하였지만, 이들 역시 고구려가 대민 편제하였기 때문에 노예적 존재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신량역천설의 경우도 이 시기 신분제도에 신량역천 계층이 존재하였다는 전제하에서 성립할 수 있으므로 다소 문제의 소지가 있다. 한편, 매매의 주체를 국연, 대상을 간연으로 이해하기도 한다(武田幸男, 1979; 김현숙, 1989). 국가권력을 매개로 국연과 간연이 결합된 상황에서 이러한 상정은 어렵다. 수묘인의 사회적 위상을 아주 낮게 이해하기도 하지만, 수묘인 매매와 관련하여 구민을 모두 이러한 존재로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구민으로 구성된 수묘인 연호는 대체로 양인 신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국가가 정한 수묘인 연호에서 수묘인 인신 자체가 매매 대상이 된 점은 국가권력의 입장에서 용인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묘인 혹은 수묘인 노동력에 대한 직접적인 매매에 대해 왕이 교령 등으로 차단하고자 한 것이다. 〈광개토왕비〉와 〈집안고구려비〉는 이러한 수묘제 운영과 매매 금지에 관한 내용을 공통적으로 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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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구려의 국가 제의 자료번호 : gt.d_0003_0010_003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