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전기 평양시기의 도성
2. 전기 평양시기의 도성
1) 평양으로의 천도 시기와 동기
고구려가 국내 지역에서 평양으로 천도한 시기는 장수왕 15년(427년)이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동천왕대와 고국원왕대에 평양으로 천도하였다는 설도 존재한다. 이는 『삼국사기』에 실린 다음 기록 때문이다. 우선 동천왕 21년(247년) “왕이 환도성이 난을 겪어 다시 도읍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사직을 옮겼다”고 한 기록이 있다. 또한, 고국원왕 13년(343년)에 “평양 동쪽 황성(黄城)으로 이거(移居)하였다. 성은 지금의 서경 동쪽 목멱산 중에 있다”고 한 기록도 있다. 이 기록을 그대로 인정한다면 427년의 평양천도 이전에 이미 고구려가 평양을 왕도로 사용하고 있었다는 역사상이 성립되므로, 이에 대한 해석을 두고 많은 논란이 있었다.
북한 학계에서는 동천왕대의 천도 기록을 신뢰하는 경향성을 보인다. 3세기 중반에 평양 지역에서 낙랑 세력은 이미 축출되었다고 이해하기 때문이다(손영종, 2000). 이에 북한 학계에서는 동천왕이 머물렀던 곳이 구체적으로 현재의 평양 어느 곳인지를 찾는 것이 중요한 연구주제로 부각되었다. 하지만 북한 학계 외에는 동천왕대 평양천도설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3세기 중반에 평양 지역은 여전히 낙랑군의 판도하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기 때문이다. 낙랑군은 미천왕 14년(313년)에야 고구려에 복속되었다고 이해한다.
낙랑군 치소였던 토성이 대동강 남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낙랑군의 영역을 잠식해 가던 고구려가 동천왕대에 이미 대동강 이북 지역까지 영역화했다고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동천왕대의 평양천도 기사를 긍정하는 경우도 있다(김원룡, 1976). 그러나 고구려가 이 시기 대동강 이북 지역을 영역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하더라도, 낙랑군 세력과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는 변경 지역으로 천도하였다고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기경량, 2020).
동천왕대인 3세기 중반에 평양 지역은 여전히 낙랑군의 영역이었던 것이 분명한 이상 고구려가 이곳으로 천도를 하였다는 이야기는 성립하기 어렵다. 이에 『삼국사기』 동천왕대 기록에 등장하는 ‘평양성’을 지금의 평양 지역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찾는 시도가 있었다. 우선 동천왕대의 평양성을 집안 평지성으로 비정하는 경우이다. 관구검의 침입으로 파괴된 것은 환도성이었으므로, 평지에 새로 성을 쌓고 이곳으로 치소를 옮겼다는 것이다. 다만 명확한 근거가 아닌 개연성을 바탕으로 한 추정에 불과하다는 점이 문제이다. 고국원왕 12년(342년) “국내성을 쌓았다”는 기록과 상충한다는 지적도 나올 수 있다. 이에 동천왕대에 천도하였다는 ‘평양성’을 집안 지역에서 벗어난 북한의 강계 지역으로 비정하는 견해를 비롯해, 중국 양민(良民) 지역의 옛 성, 혹은 환인 지역의 나합성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제시되었다. 하지만 이 견해 역시 추정의 영역에 있다. 학자별로 견해차가 심하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동천왕대 쌓았다는 평양성의 실체에 대해 확정하기 어렵다. 다만 지금의 평양 지역으로 보기 어렵다는 정도의 합의는 가능할 것이다.
그다음 고국원왕대의 평양 동황성 이거 문제이다. 동천왕대의 평양 문제와 달리 고국원왕 13년(343년)은 고구려가 이미 평양 지역을 장악하여 운영하던 시기라는 점에서 지금의 평양 지역으로 볼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북한 학계에서는 평양 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경영이 동천왕대인 3세기 중엽에 이미 시작되었다는 전제 아래 평양 동황성을 장안성 북성으로 비정하거나(채희국, 1965), 고방산의 용당산성(정찬영, 1966), 청호동토성(손영종, 2000) 등으로 비정하는 연구가 일찍부터 제시되었다. 남한 학계에서도 청암동토성을 평양 동황성으로 비정하는 데 동의하는 견해가 제시된 바 있다(민덕식, 1989; 장효정, 2000).
이와 달리 고국원왕대의 ‘평양 동황성’을 평양 지역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찾는 경우도 있다. 동천왕대 평양성 위치 비정의 연장선에서 고국원왕대의 평양 동황성마저 강계 지역으로 비정하는 경우(이병도, 1956), 집안 평지성 동쪽에 자리한 동대자(東臺子)유적으로 보는 경우(魏存成, 1985), 중국 임강(臨江) 지역으로 비정하는 경우(張福有, 2005) 등이다.
『삼국사기』‘평양 동황성’ 기록의 성격에 대해 의문을 품고 접근하는 연구도 있다. ‘평양 동황성’ 서술이 당대 사실을 전하기보다 후대 인식의 반영이라는 전제하에 실제 고구려의 왕성으로 활용되었던 청암동토성의 동쪽, 대성산 아래 위치한 안학궁지를 평양 동황성으로 비정하는 경우가 그것이다(임기환, 2007). ‘평양 동황성’ 기록을 역사적 사실과 무관하게 『삼국사기』 편찬 과정에서 수집된 지역전승의 채록 및 삽입으로 보기도 한다. 조선시대의 고지도와 지리지 등을 통해 『삼국사기』에서 ‘평양 동황성’이 위치한 곳으로 지목한 목멱산의 위치가 의암동 일대임을 확인하고, 해당 지역에 자리한 의암동토성유적을 ‘평양 동황성’의 실체로 파악한 것이다(기경량, 2020).
동천왕대의 평양성 천도 기록과 고국원왕대의 평양 동황성 이거 기록은 공히 자료의 성격 및 해석상의 불안함을 가지고 있다. 앞으로 다각적인 탐구가 필요하며, 학자들의 견해가 안정적으로 정리될 때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고구려가 평양 지역으로 천도한 시기로 가장 신뢰성이 있는 연대는 장수왕 15년(427년)이다.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하게 된 동기는 여러 가지가 거론되고 있다. 우선 고구려 대외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던 남진정책을 주목한다(박성봉, 1979; 田中俊明, 2004). 고구려는 광개토왕대부터 이미 적극적인 남진정책을 펼치고 있었고, 장수왕대의 평양천도 역시 그 흐름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취지이다. 이와 반대로 북위(北魏)와의 군사적 긴장이라는 정세를 배경으로, 수도의 안정성을 확보하려는 방어 목적에서 천도가 추진되었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장종진, 2011).
경제적 측면에서 천도의 동기를 찾기도 한다. 졸본과 국내성이 자리한 혼강과 압록강의 경제적 기반은 당시 고구려의 국가 규모에 비해 한계가 있었으므로, 보다 우월한 농업생산력을 가지고 있어 안정된 토대를 확보할 수 있는 평양 지역으로 천도를 모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서영대, 1981). 또 다른 동기로 거론되는 것은 정치적 목적이다. 국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화 과정에서 국내 지역을 세력기반으로 하는 기존 귀족들을 배제할 필요가 발생하였고, 이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평양천도가 단행되었다는 지적이다(서영대, 1981). 평양 지역이 고조선 이래의 전통과 낙랑군 이후 중국 문화의 세례를 받은 우수한 문화전통을 지니고 있는 곳이라는 점을 들어, 훌륭한 관료 후보군으로서의 인적·문화적 기반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기도 하였다(임기환, 2007).
천도 동기는 복합적 성격을 가질 수 있는 만큼 이 같은 견해를 두루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만 근래 연구경향을 보면 일반에 널리 퍼져 있는 남진정책설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가 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임기환, 2007; 김병곤, 2011; 장종진, 2011). 천도의 동기로 남진정책을 거론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선적인 접근인 데다, 천도가 이루어진 시점과 고구려가 백제에 대한 공세를 벌인 시점과의 시간적 격차가 크므로 양자의 인과관계에 의문이 있다는 것이다.
평양으로의 천도가 단행된 것은 장수왕대의 일이었지만, 이 지역에 대한 적극적인 경영은 이미 그 전대부터 시행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삼국사기』에는 광개토왕 2년(392년)에 평양에 9개의 절이 창건되었음을 전하고 있고, 〈광개토왕비문〉에는 영락 9년(399년)에 왕이 평양 지역으로 내려가 왜의 침입을 받은 신라 사신을 만나 군사적 지원을 약속해주는 모습이 확인된다.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하기 19년 전인 광개토왕 18년(408년)에는 나라 동쪽에 독산(禿山) 등 6개의 성을 쌓고 평양의 민호를 이주시키는 사건이 있었다. 이는 평양 지역의 토착세력을 자기 기반에서 유리시켜 이 일대에 대한 고구려 중앙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서영대, 1981). 평양으로의 천도가 기획된 구체적 시점이 언제인지에 대해서는 지목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광개토왕대에 이미 천도 계획이 추진되고 있었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2) 전기 평양성시기 산성과 평지성
장수왕대 고구려가 천도를 한 평양 지역의 중심지가 지금의 대성산 부근일 것이라는 점에는 학자들 간에 이견이 없다. 『삼국사기』에서는 “평양으로 이도하였다”는 간단한 내용이 전해질 뿐이지만, 중국 측 기록을 보면 당시 평양성의 위치와 형태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묘사가 확인된다.
5세기 북위의 인물 역도원(酈道元)이 편찬한 『수경주(水經注)』에는 고구려 사신을 만나 패수(浿水: 대동강)가 흐르는 방향을 물어보고 대답을 들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때 고구려 사신은 “성은 패수의 북쪽에 있으며, 그 물은 서쪽으로 흘러 옛 낙랑 조선현을 지나니 곧 낙랑군치이며 한무제 때 설치한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이는 당대 고구려인의 입을 통해 나온 증언이라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무척 높다.
역도원이 전하는 고구려 사신의 설명은 평양 대동강의 흐름 및 주변 유적의 상관관계와 정확하게 부합한다. 이를 통해 장수왕대 이래 고구려 평양성이 낙랑군 치소 근처를 흐르는 대동강의 상류에 있으며 강 북쪽에 있었음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주목하는 자료는 7세기 초에 편찬된 『주서(周書)』의 기록이다. 이 내용을 보면 “치소는 평양성이다. 그 성은 동서로 6리이고, 남쪽으로는 패수에 임해 있다. 성안에는 오직 창고를 채우고 무기를 쌓아 방비하니, 적이 이르는 날에는 모두 들어가 굳게 지킨다. 왕은 그 곁에 따로 집을 지어 놓아서 항상 거기 머무르지는 않는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주서』에서 묘사하는 평양성은 창고와 무기가 쌓여 있고, 유사시 적이 이르렀을 때 들어가 농성을 할 수 있는 장소이다. 이에 일찍부터 주목받았던 곳이 대성산성이다.

그림9 평양 지역 주요 성 유적
대성산은 평양시 동북쪽에 위치한 산으로, 소문봉·을지봉·장수봉·북장대·국사봉·주작봉의 6개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가장 높은 봉우리는 해발 274m의 을지봉이며, 각 봉우리가 능선으로 연결되며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서남쪽으로는 골짜기가 형성되어 있는데, 골짜기는 산 안쪽에서 두 갈래로 나뉘어 동천호와 미천호라는 두 개의 거대한 호수를 이룬다. 대성산성은 대성산의 능선을 이용해 돌을 쌓아 조영한 포곡식산성으로, 성의 규모는 동서 너비 2,300m, 남북 너비 1,700m, 둘레 7,076이며, 산성 안의 면적은 대략 200만㎡이다(김일성종합대학 고고학 민속학강좌, 1973).
주작봉과 소문봉 사이의 계곡 입구에는 산성의 정문인 남문이 있는데, 980m 구간을 이중의 성벽으로 쌓았고, 주작봉과 국사봉 사이도 삼중으로 성벽을 쌓았다. 이곳의 성벽은 현재 모두 무너지고, 허물어진 성돌은 본래 성벽을 따라 10~15m 너비로 쌓여 있다. 소문봉 일부 구간에 40~50cm 높이의 성벽이 일부 남아 있을 뿐이다. 성내 건물터는 성문 자리를 포함해 성벽과 성내의 높은 지대, 산중턱 골짜기에 배치되어 있다. 성안에는 170개의 연못이 확인되었으며, 남문 부근에 있는 이중으로 된 성벽 사이의 연못은 방어를 목적으로 한 해자 역할을 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민덕식, 1989).
대성산성의 형태와 규모는 집안 지역에 있는 환도성과 매우 흡사하다. 고구려가 평양 지역으로 천도하면서 의식적으로 환도성과 유사한 대성산성 일대를 선정하여 활용하였다고 짐작하는 점이다. 한편, 대성산성 인근에 있는 유적 중 가장 주목하는 것은 바로 안학궁유적이다.
안학궁은 대성산 남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평지성 유적이다. 한 변이 622m가량 되는 마름모 형태의 방형토성으로, 성벽의 전체 길이는 2,488m이다. 성벽의 높이는 5.8m인데, 외관은 토성이지만 성벽 밑 부분은 돌을 이용하여 쌓았다(전제헌·손량구, 1985). 발굴자료로 복원한 성벽의 하폭은 8.8m, 상폭은 4.4m, 높이는 8~10m로 추정된다. 문은 동·서·북벽에 1개씩 있고, 남벽에는 3개가 있다. 소문봉의 남쪽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세 물줄기 중 동쪽과 서쪽 물줄기는 성벽 밖을 따라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가운데 물줄기는 성의 북벽을 뚫고 성안의 동부 저지대를 흘러 남쪽으로 흐른다. 성안에서는 52채의 집자리 중 궁전터 51채, 궁전을 연결하는 회랑터 31채, 집자리 기둥구멍 2,590개가 발굴되었다. 궁전터는 위치에 따라 동궁·서궁·남궁·북궁·중궁으로 부른다(閔德植, 1989b). 그런데 국내성은 왕궁뿐 아니라 주요 관청 및 귀족의 거주지가 포함된 왕성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데 반해, 안학궁은 성 내부에 왕의 거처인 궁궐만 존재하는 궁성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과거 연구에서는 고구려의 왕도가 ‘산성-평지성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모델에 입각하여, 대성산성과 짝을 짓는 평지성이 어디인지를 찾는 데 집중하였다. 일본 학자 세키노가 처음 제시한 조합은 대성산성-안학궁유적이었다(關野貞, 1914). 그러나 세키노가 대성산성의 짝으로 안학궁을 제시한 데 특별한 근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대성산성과의 인접성과 안학궁의 토성 규모가 집안 평지성과 비슷하다는 점이 고려되었을 뿐이다. 실제로 대성산성과 환도성의 둘레 길이는 모두 약 7km로 비슷하며, 안학궁의 성벽과 국내성의 둘레 길이 역시 약 2.5~2.7km 정도로 유사한 편이다.
하지만 세키노는 대성산성-안학궁 조합을 상정하였던 견해를 곧 철회하고, 대성산성-청암동토성의 조합을 새롭게 제시하였다(關野貞, 1928). 안학궁유적에서 출토된 와당의 연대가 시기적으로 늦어서 대성산성 출토기와와 시기적으로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하였기 때문이다. 반면 인근 청암동토성에서 출토된 와당은 구획선이 있는 연화문와당으로서 대성산성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계통이었고, 집안 지역에서 출토된 5세기의 연화문와당과도 형태적 유사성을 지닌 것이었다.
세키노가 새로 주목한 청암동토성은 평양시 동북쪽 대동강 북안에 위치한 성벽 길이 3,450m의 토성이다. 성의 전체적인 형상은 반달 모양이며, 남쪽은 대동강에 접해 있고, 동쪽으로는 대동강의 지류인 합장강이 흐른다. 동쪽, 서쪽, 북쪽 3개소에 문이 있다(남일룡·김경찬, 1998; 2000; 2001). 서남쪽 방향으로 나 있는 대성산성의 정문에서 직선으로 뻗은 도로가 청암동토성의 동북쪽 문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두 성의 밀접한 관계를 상정하기도 한다.

그림10 청암동토성의 형태(小泉顯夫, 1940)
그런데 1938년 발굴조사에 따르면 청암동토성 내에서도 왕궁유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세키노가 왕궁터로 유력하다고 지적했던 장소에서는 왕궁이 아니라 사찰유적이 확인되었다. 유적 중심부에 탑지인 팔각형 건물지가 자리하고, 그 주위를 세 건물이 둘러싸고 있는 형상으로서 전형적인 고구려의 1탑 3금당 형태 사찰이다. 이 사찰유적은 문자명왕 7년(498년)에 창건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금강사터로 추정되었다(小泉顯夫, 1940). 『동국여지승람』에는 평양부 동북쪽 8리 지점에 금강사터가 남아 있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사』를 보면 숙종 7년(1102년) 9월에 평양을 방문한 왕이 금강사에 행차하여 승려들에게 밥을 대접하고 옛 탑이 있던 자리를 보았다고 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 금강사가 고구려 때 창건된 금강사라고 확정할 수 있는 근거가 확보된 것은 아니지만, 고려시대에도 ‘옛 탑’의 자리를 운운한 것을 보면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고 여겨진다. 여하튼 청암동토성 내에서 가장 입지가 좋은 유력한 장소에서 왕궁이 아닌 사찰유적이 확인됨에 따라 산성인 대성산성과 조합을 이루는 평지성이 어디인지는 미궁에 빠지게 되었다.
3) 안학궁의 조영 시기 문제
북한 학계에서는 안학궁이 장수왕의 평양천도기에 대성산성과 함께 조성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일찌감치 제시되었으며(채희국, 1964), 더 나아가 3세기 초에 이미 안학궁이 건설되었다는 견해도 있다(전제헌·손량구, 1985). 그 근거로 제시되는 것이 남포시 강서구역에 있는 약수리벽화무덤의 성곽도이다. 약수리벽화무덤에 그려진 성곽도의 형상은 마름모 모양인데, 이는 안학궁 북쪽에 위치한 대성산에 올라 안학궁을 내려다본 모습을 묘사했다고 이해된다는 것이다(전제헌·손량구, 1985). 약수리벽화무덤은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조영된 무덤으로 편년하고 있으므로, 이 그림이 안학궁을 그린 것이 틀림없다면 안학궁이 5세기 초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였다고 판단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약수리벽화무덤의 그림이 실제로 안학궁을 묘사하였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약수리벽화무덤의 성곽도가 정말 마름모꼴의 성벽 형상을 묘사하려는 의도를 가졌던 것인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림에서 묘사하려는 대상의 실제 모습이 정방형이라 하더라도 바라보는 각도나 투시도법에 따라 기울어진 것처럼 묘사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기경량, 2017a).

그림11 약수리벽화무덤의 성곽도와 안학궁터의 도면(채희국, 1964;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2009)
안학궁의 조성 연대를 판단하는 데 보다 실질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의 편년이다. 하지만 안학궁에서는 유적의 규모에 비해 유물이 그다지 많이 나오지 않은 편이며, 그나마 수량이 확보된 것이 기와류이다. 안학궁에서는 다양한 와당이 출토되었는데, 이 중 상당 수가 통일신라 내지 고려 때의 것으로 여겨진다. 안학궁유적에서 출토된 와당은 평양시기 고구려에서 전형적으로 제작하였던 붉은색이 아니라 주연부에 연주문이 부가된 청회색 계통이다. 이는 안학궁이 고려시대에 사용되었다는 증거로 여겨진다. 이와 관련해 안학궁에서 출토된 수막새의 접합기법을 보면 대부분의 고구려 수막새에서 확인되는 긁는 형태의 제작기법이 확인되지 않으며, 따라서 고구려 기와로 볼 수 없다는 지적도 제시된 바 있다(주홍규, 2014).
이처럼 와당 연대의 문제 때문에 남한 학계와 일본 학계에서는 안학궁을 전기 평양성시기에 조영된 것으로 보는 시각이 드물다. 그럼에도 안학궁을 전기 평양성시기에 조영된 것으로 보는 관점에서는 개와(改瓦)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안학궁이 장기간에 걸쳐 사용된 건축물이라면 기와를 교체하는 행위가 이루어졌을 것이므로, 현존하는 와당의 편년만으로 안학궁의 축조 시기를 늦춰 볼 수 없다는 것이다(민덕식, 1989b). 하지만 장기간 사용으로 개와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은 대성산성과 청호동토성도 마찬가지 조건이다. 이들 유적에서는 안학궁 출토 와당과 비슷한 성격의 것이 확인되지 않는 점, 그리고 유독 안학궁에서만 이른 시기의 기와가 출토되지 않는 이질성을 보이는 것은 역시 의문스러운 점이다.
이에 안학궁을 고구려 말기에 조영된 별궁으로 보거나(關野貞, 1928; 田村晃一, 1988), 아예 고려시대의 것으로 내려 보는 견해가 제시되었다(田中俊明, 2004; 박순발, 2012). 안학궁 고려시대 축조설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다나카 도시아키가 제시한 서경 좌궁설이다. 그는 『고려사』 문종 35(1081년) 8월 신유조에 보이는 기록을 제시하였다. “서경의 궁궐은 오래 되어서 훼손된 것이 많으니, 마땅히 장인들을 모집하여 수리하도록 하라. 또 서경에서 동서로 각각 10여 리 떨어진 지역에 다시 땅을 택하여 좌우 궁궐을 지어서 지방을 순회할 때 머무는 장소로 삼도록 하라”는 내용이다. 고려 문종대에 조영된 좌궁과 우궁 중 서경의 서쪽 10리에 조영된 우궁에 해당하는 것이 주궁지(珠宮址)이고, 동쪽 10리에 조영된 좌궁에 해당하는 곳이 안학궁이라는 것이다(田中俊明, 2004).

그림12 다나카 도시아키가 제시한 우궁(주궁터)과 좌궁(안학궁터)(田中俊明, 2004)
박순발은 안학궁에서 출토된 주연부에 연주문이 있는 수막새는 7세기 전반·중엽 이전으로 소급하기 어렵고, 암막새의 경우는 한반도에서 통일신라 이전으로 시기를 소급하기 어렵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안학궁 조영 과정에서 파괴된 석실묘를 5세기~6세기대의 것으로 이해하는 한편, 안학궁 2호 석실묘에서 출토된 회청색 경질토기호는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하였다. 고구려 때의 석실묘를 고려시대에 재사용하면서 해당 토기가 부장품으로 들어갔는데, 이 석실묘를 파괴하면서 안학궁이 조영되었으므로, 자연히 안학궁은 고려시대에 조영된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박순발, 2012).
안학궁이 기존 묘역을 파괴하고 그 위에 조영되었다는 것은 발굴을 수행한 북한 학계에서도 인정하는 바이다. 다만 북한 학계는 안학궁 하층의 고분들을 2세기 말~3세기 초에 해당하는 매우 이른 시기의 것으로 편년하고 있다. 따라서 안학궁이 전기 평양성시기에 조영되었다고 보는 데 문제가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전제헌·손량구, 1985).
청암동토성과 안학궁의 관계에 대해 절충적인 이해를 구하는 접근도 있다. 장수왕 천도 때는 청암동토성이 궁성으로 사용되다가 이후 도성 정비 과정에서 안학궁성이 축조되자 궁성이 교체되었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시기로는 문자명왕 7년(498년)을 지목한다. 해당 연도는 금강사를 창건한 때이므로, 기존에 왕궁성으로 사용하던 청암동토성에 금강사를 창건하고, 대신 안학궁을 왕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임기환, 2007). 유물이 아니라 안학궁의 건축군 배치를 통해 조영 시기를 추정하려는 시도도 있다. 안학궁의 건축군 배치를 보면 북위식의 태극전과 동・서당제의 영향이 확인되는데, 이는 수·당대에는 폐기가 되는 방식이므로, 안학궁의 연대 역시 그보다 빠른 6세기 이전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양정석, 2008b).
이처럼 안학궁유적 조영 시기에 대해서는 이견의 폭이 매우 크다. 언급되는 조영 시기는 이르게는 3세기 초, 늦게는 11세기 말에 이른다. 양자의 연대 폭은 무려 900년이 넘는다. 이렇게까지 유적 연대에 대한 시각차가 큰 경우는 드문 편이다.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게 만드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보다도 유적에 대한 조사 및 정보의 접근에 제한이 있다는 점이다. 학자들 간 인식의 폭을 좁히기 위해서는 2006년에 있었던 남북공동학술조사와 같이 해당 분야 연구자들이 현장을 답사하고 조사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마련할 필요가 있다.
4) 전기 평양성시기 도성의 도시 형태
『주서』의 내용을 보면 치소인 평양성은 산성인 대성산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런데 『주서』에는 평지에 별개의 성이 있다는 설명은 없으며, 단지 평양성 옆에 “따로 집을 지어 놓아서 항상 거기(평양성) 머무르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이에 전기 평양성시기 고구려왕의 평지 거소는 성의 형태가 아닐 수 있다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공식적인 왕성으로서의 위상은 대성산성에 부여하고, 왕은 저택의 형태를 갖춘 평지의 별궁에서 생활하기도 했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이때 고구려왕이 머물렀다고 하는 평지 거소의 위치는 대성산과 대동강 사이에 존재하는 평지 공간으로 상정하였다(기경량, 2017a).
반면 『주서』 기록에서 서술하고 있는 평양성을 대성산성이 아닌 후대의 장안성을 묘사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성의 크기가 동서 6리이고, 남쪽으로 패수에 임해 있다는 『주서』의 내용이 “국도는 평양성으로 장안성이라고도 한다. 동서 6리이며 산을 따라 굴곡이 있고 남쪽은 패수에 임한다”고 한 『수서』의 서술과 사실상 일치한다는 것이다. 『주서』의 내용은 북제·북주뿐 아니라 수대에 이르기까지 수집된 정보에 기초한 것이고, 평양성에 대한 서술 역시 수대의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임기환, 2007).

그림13 대성산성 및 그 남쪽의 고구려 고분군과 안학궁터(朝鮮總督府, 1929)
『주서』의 사료적 성격 문제와 별개로, 전기 평양성시기 중심 주거지가 대성산 남쪽에 형성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크게 이견이 없으며, 이는 몇 가지 고고자료를 통해 뒷받침된다. 우선 고산동에서 발견된 우물이다. 고산동 우물의 깊이는 7.5m로 확인되었는데, 보고자는 본래 9m 이상이었을 것으로 보았다. 우물에서는 질그릇·마구류·기와·벽돌·숫돌을 비롯하여 철제품·조개껍질·사슴뿔·썩은 돌배·복숭아씨·바가지 조각 등이 나왔다. 그런데 여기서 나온 기와와 그릇이 대성산성에서 출토된 것과 공통성을 가진다고 한다. 따라서 이 우물은 고구려 전기 평양성시기의 것으로 파악된다(김사봉, 1986).
1981년 대동강 기슭 청호동 일대에서 발견된 나무다리유적도 주목된다. 보고자에 따르면 이 다리는 대동강을 가로지르는 형태로 북쪽의 청호동과 남쪽의 휴암동을 이어 주었다고 한다. 다리의 총길이는 375m, 너비는 9m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다리유적이 확인된 문화층에는 질그릇 조각과 기와 조각이 나왔고, 모두 고구려시기의 것이라 하였다(안병찬, 1982).
하지만 무엇보다 주목되는 유적은 대성산 남쪽 기슭에 펼쳐진 고구려 고분군이다. 대성산 일대에는 1,000여 개의 고구려 무덤이 확인되는데, 대성산 서북쪽의 화성동고분군, 대성산 서남쪽의 미산동 및 흥부동 고분군, 대성산 동남쪽의 노산리 및 호남리 고분군이 대표적이다. 대성산 기슭의 무덤은 거의 대부분 석실봉토분이며, 약간의 적석총도 존재한다(김일성종합대학 고고학 민속학강좌, 1973). 산성 아래 산기슭에 고분군이 밀집해 조영되는 양상은 환인 오녀산성, 집안 환도성에서도 공히 확인되었던 바이다. 따라서 이는 고구려의 독특한 매장문화로 이해할 수 있다.
무덤이 밀집해 있다는 것은 인근에 중심주거공간이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무덤이 대성산의 남쪽 기슭에 집중적으로 밀집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고구려 당시의 도심은 역시 그 남쪽 대성구역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와 관련해 북한 학계에서는 고구려의 왕궁인 안학궁을 중심으로 격자형의 도로망을 가진 도시가 건설되었다는 견해가 제시된 바 있다.
북한 학계의 발굴조사에 따르면 청호동과 임흥동, 그리고 안학궁의 서쪽 지역에서 도시유적이 확인되었고, 고구려시기의 건축지 여러 곳과 강 자갈로 포장한 도로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도로 구획은 정방형의 평면을 이루며 작은 것은 한 변 140m, 큰 것은 한 변 280m여서, 전(田)의 형태를 이루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안학궁 부근의 고구려 이방(里坊) 구획에 대한 복원을 시도하였는데, 안학궁 남문터와 대동강의 나무다리를 가상의 선으로 그어 남북대로(주작대로)로 설정하고, 이것을 축으로 삼아 동서남북으로 도로 구획을 배합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안학궁 일대에서 484개의 작은 정방형 구획과 121개의 큰 정방형 구획을 설정하였다(한인호·리호, 1991). 더 나아가 중간 구획 192개, 작은 구획 768개로 구획을 설정하고 중간 구획 단위를 다시 4개씩 묶어 560m를 한 구획으로 하는 ‘방’을 설정해 총 50개의 방(4개의 중간 구획과 16개의 작은 구획으로 구성)이 존재하였다고 추정하였다(한인호, 1998).

그림14 고구려 평양 안학궁 부근 이방(里坊) 평면복원도(한인호, 1998)
전기 평양시기 고구려가 관료군에게 관품에 따른 택지 분급을 하였다고 이해하기도 한다. 북한 학계의 발굴성과 및 연구를 수용하고, 일본과 당 도성의 사례를 참조한 것이다. 대성산 남쪽 안학궁 일대의 격자형 도시 구획이 장수왕대의 초월적 왕권과 관료사회로서의 공간 구현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분석이다(권순홍, 2020). 반면 이 일대에 실제로 격자형 도시 구획이 존재하였을지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북한 학계에서 수행한 조사 내용에 대해 객관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구체적인 도면이나 사진 등이 제시된 바 없다는 점, 보고자들은 1910년대 고지도에도 격자형 도로의 흔적이 확인된다고 언급하였으나, 실제로는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 등이 그 이유이다(기경량, 2017a).
앞서 살펴보았듯이 이 지역은 전기 평양성시기 고구려 왕도의 중심주거지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만큼 실제로 도로유적이 존재할 개연성 또한 높고, 일부 도로가 직각 형태로 교차하는 경우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도시 전체가 바둑판 형태로 계획되어 조성되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므로, 차후 면밀한 검증이 필요하다.
전기 평양시기 고구려 왕도에 실제로 격자형의 도시 구획이 전개되었는지는 차치하고, 국내성시기와 확연하게 달라진 경관을 상정할 수 있으니, 바로 왕릉의 조영이다. 이 시기 고구려 왕릉 후보군으로 언급되는 것은 평안남도 평성시의 경신리1호분, 평양시 역포구역 용산리에 자리한 전(傳) 동명왕릉을 비롯한 고분군, 광대산 자락에 자리한 토포리대총, 호남리사신총 등이 있다. 대성산성을 기준점으로 잡았을 때 토포리대총과 호남리사신총은 동쪽으로 5~7km가량 떨어진 광대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으며, 경신리1호분과 전동명왕릉고분군은 각각 동북쪽과 동남쪽으로 21~22km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는 왕도의 중심주거지와 인접한 곳에 왕릉이 조영되었던 국내성시기와 분명하게 달라진 면모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에 대해 평양 도성의 중심지에 왕실권력과 밀집한 불교사원을 밀집시켜 건립함으로써 기존에 왕릉이 담당하였던 왕실권위의 경관적 기능을 대체하였기 때문으로 보기도 한다(권순홍, 2020). 경관에 대한 이해를 통해 고구려 중기 권력투사방식의 치밀화와 불교의 영향력을 파악할 수 있는 셈이다.
고구려 도성 연구에서 자료 확보가 가장 어렵고 논란의 여지도 많은 분야가 전기 평양시기이다. 중국에 위치한 졸본·국내성 지역은 조사에 제약이 있을지언정 현장에 대한 답사 방문은 가능한 반면, 평양 지역은 남한 연구자에게 접근 자체가 불가능한 실정이다. 북한 학계에서 발표하는 소략한 자료만으로 전기 평양시기 고구려 왕도의 실상에 접근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러한 난점을 근본적으로 해소하기 위해서는 남북 관계의 획기적인 개선이 필요할 것이다. 이와 별개로 연구자들은 새로운 연구 방법론의 개발이나 자료 수집에 더욱 힘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