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지방제도의 구조와 대민 지배
지방은 국가의 유지와 발전을 담보하는 정치・경제・군사적 기반이므로 지방 지배는 예나 지금이나 국가 통치의 근간으로 인식되고 있다. 지방통치제도는 국가운영체제의 중요한 일부로서 전체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체계화되고 정비되어 간다. 따라서 이를 통해 국가의 발전 과정, 정치체제의 구조와 변천 및 민의 성격과 사회적 위상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고, 나아가 그 국가의 성격도 살펴볼 수 있는 포괄적이면서도 기본적인 주제이다.
고구려왕은 초기에는 왕경과 5나부(那部) 외 다른 지역에 대해서는 자국 영토라는 개념을 분명하게 가지지 않았고, 지역민에 대해서도 자국민으로 보는 인식이 약했다. 이때에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지방’은 존재하지 않았다. 3세기까지 고구려민에 대한 지배는, 함께 연합하여 고구려를 건국했던 5나부의 주민과 건국 이후 편입된 복속민의 두 갈래로 나누어 이루어졌다. 초기의 고구려는 내부 운영을 자율적으로 해나가는 여러 정치 집단의 누층적 결합 위에 왕이 존재하는 형태였다. 이때 고구려왕의 명령은 나부의 장(長)과 그 외 세력집단의 장을 통해 민들에게 간접적으로 전달되었다. 즉 다원적이고 간접적인 지배방식이었다.
그러나 중기 이후에는 지방통치제의 기본적인 성격이 국왕 중심의 일원적이고 직접적인 지배를 실현하는 방식으로 변화되었다. 5나부 중심의 정치 운영에서 중앙집권적 통치로 변하면서 지방에도 왕명을 대행하는지 방관을 파견하여 직접 지배를 하게 된 것이다. 이런 변화는 3세기 중·후반경부터 진행되었고, 4세기 이후 통치체제 자체가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중·후기 지방제 연구는 1990년대에 들어와서 비로소 활기를 띄게 되었다. 고구려 초기의 통치체제와 운영원리가 구체적으로 밝혀짐으로써, 중기 이후의 연구도 힘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중국의 개혁・개방에 따라 고구려 유적답사가 가능해져 산성 연구가 많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점도 기여한 바 크다. 고구려의 지방 통치는 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성의 분포 양상이나 규모, 위치 등이 영역 지배 규명에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고자료의 실견과 활용이라는 이점에도 불구하고 관련 문헌사료가 워낙 단편적으로만 남아 있는 데다가, 전해지는 사료도 서로 잘 부합하지 않아서 연구자들 사이에 견해차가 나타났다. 다만 성 축조 기사와 지방관 사료가 나오기 시작하는 3세기 말부터 교통로상의 주요 지점에 축조된 성을 중심으로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이 지역 지배를 했다고 보는 것과, 지방 지배의 진전에 따라 점 중심의 거점지배에서 면적 지배인 영역지배로 발전했다고 보는 것에는 대다수 연구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중기 고구려의 지방 지배를 둘러싼 논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가장 논란이 집중되고 있는 것은 당시 지방통치제의 구조를 어떻게 보는가 하는 점이다. 이 문제를 분석할 때 주목하는 대상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나오는 ‘수(守)’, ‘태수(太守)’, ‘재(宰)’와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와 〈충주고구려비〉에 나오는 ‘수사(守事)’ 같은 지방관이다. 이들의 성격과 상호관계, 역할에 따라 지방통치제의 구조를 달리 보기 때문이다. 이외 지방통치제의 단계별 발전 과정, 옛 낙랑(樂浪)·대방(帶方) 지역에 대한 지배, 군현제 실시 여부, 말갈을 비롯한 특수한 존재들에 대한 지배 방식 등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다.
그런 한편, 지방 지배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대민 지배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당시 민의 위상과 성격은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도 연구가 이루어졌다. 율령제와 관련지어 검토하기도 하고, 광개토왕비에 나오는 국연(國烟)과 간연(看烟)을 통해 당시 민의 성격과 편제 방식을 들여다보려는 노력도 이루어졌다.
지방 지배는 국가의 전체 정치운영체제와 연동되어 운영되었다. 또 고대시기에는 지방관이 행정관이자 군사지휘관이자 사법관의 역할을 겸임했고, 방어체계 역시 지방조직과 직접 연결되어 있었다. 따라서 대외전쟁과 국내 정치상황에 따라 지방통치제도가 적절하게 조정되거나 변화되었다. 고구려 중기 지방 지배체제의 변화를 살필 때 이런 국내외 상황을 변화의 주요 계기 및 근거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