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민의 위상 정립과 대민 지배
2. 민의 위상 정립과 대민 지배
1) 고구려왕의 대민관 변화와 민의 위상 정립
414년에 세워진 〈광개토왕비〉에는 광개토왕의 은택(恩澤)이 천하 사방에 미침으로써 국가가 부강해지고 민의 생활이 윤택해졌고 생산력도 높아졌다고 적혀 있다. 비문에는 ‘민(民)’과 ‘속민(屬民)’이라는 두 부류의 민이 나온다. 이때 민은 고구려 영토 안에 거주하면서 고구려 율령에 따라 지배를 받는 존재이고, 속민은 백제, 신라, 동부여, 백신 등 고구려의 세력권 아래 있음을 자인하는 의미로 조공논사(朝貢論事)하지만, 일상생활에서는 고구려 율령이 아닌 자신이 속한 정치집단의 자체 규정에 따라 통치를 받는 존재이다(김현숙, 2005b).주 009
각주 009)

〈광개토왕비〉를 보면 상대국이나 세력집단의 생각 및 실제상황과 관계없이 5세기 초 고구려왕의 관념 속에는 고구려민인 민과 속민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주보돈(朱甫暾)은 비문에 나오는 민(民)을 고구려 영역 내에서 직접적인 지배를 받는 민과 독자적인 세력으로서 고구려와 조공 관계를 맺었던 속민(屬民)의 두 유형으로 크게 나누었다(주보돈, 1994, 25쪽). 임기환은 속민은 국제관계상에서 국가 간에 설정된 개념으로 백제, 신라, 동부여와 고구려의 관계를 보여주는 용어라고 했다. 속민 관계의 형식적인 형태는 복속국의 조공이며 그에 대한 고구려의 대가는 태왕의 은자(恩慈)로서 속민은 고구려 태왕을 정점으로 하는 천하의 2차적 범주를 이룬다고 했다(임기환, 1996). 그러나 필자는 백신(帛愼)도 조공논사(朝貢論事)를 했다는 점에서 속민에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았다(김현숙, 2005b).
그렇다면 이 ‘민’은 과연 어떤 존재이며 고구려왕은 이들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광개토왕비〉에는 왕릉을 관리하고 지키는 수묘인으로 ‘구민(舊民)’과 ‘신래한예(新來韓穢)’가 나온다. 여기서 구민은 광개토왕 이전에 편입된 지역 출신이고, 신래한예는 광개토왕대에 ‘새로 (데리고) 온 한예’인 한강 이북의 백제 지역에서 차출해온 사람들로서 학계에서는 둘 다 복속민 출신이라 보고 있다. 하지만 세부적으로 들여다보면 구민의 ‘구(舊)’는 단지 시간적 의미로서 ‘신(新)’에 반대되는 일반적인 개념이라고 보는 견해(김현숙, 1989)와 구민은 원고구려민과 다른 광개토왕 이전의 복속민을 지칭한다고 보는 견해(임기환, 1996)로 나눠져 있다.
후자의 경우, 〈광개토왕비〉에 나오는 고구려 민의 구조가 원고구려민-민(구민·신민)-속민의 3단계로 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 경우 복속민이 4세기 이후 공민으로 편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민이라 하지 않고 복속민에 한정되는 구민, 신민이란 용어를 차별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직 보편적이고 일원적인 대민관이 성립되지 못한 것이라고 이해했다. 즉 민에 대한 중층적 인식이 나타나는 것으로 이러한 대민관의 이중성은 초기 율령체제의 한계를 보여준다고 했다. 반면 전자는 구민을 원고구려민과 구분하는 차별적 용례라 보는 것은 ‘구’를 붙이면서도 ‘민’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에 담긴 시대적 변화상과 고구려왕이 가진 대민관의 성장을 너무 홀시한 해석이라고 보았다. 과거에는 복속민이었던 존재도 이제는 모두 태왕의 민이 되었다는 의미에서 구민이라 했다고 보는 것이 당시 고구려왕의 위상과 국가 발전에 걸맞게 변화된 대민관을 반영한다고 보는 것이다.
구민 수묘인 출자지 가운데 하나인 비리성(碑利城, 安邊에 비정)은 예(濊)의 중심지였고, 태자하(太子河) 상류 유역에 비정되는 양곡(梁谷)과 양성(梁城)은 유리왕대에 편입된 양맥(梁貊)주 010의 거주지였다. 이곳은 3세기 중엽까지 고구려의 집단예민으로 편제된 복속민의 거주지였으나 이제 ‘구민’으로 표현되듯이 ‘민’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되었다. 이것은 〈모두루묘지〉에 북부여민들을 ‘성민곡민(城民谷民)’으로 표현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변화다. 부여는 4세기에 고구려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이전 시기였다면 이곳 주민도 집단예민이 되었을 것이나 ‘성민곡민’이라 표현되었다. 즉 당시 다른 일반 고구려민처럼 지역이 성(城)과 곡(谷)으로 편제된 가운데 성민과 곡민으로서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의 통치를 받으며 생활하는 지방민이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광개토왕 이전에 고구려에 편입된 지역, 즉 구민 차출지의 민을 복속민이 아닌 지방민으로 인식했다면 그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나오는 ‘신래한예’의 차출지에 살고 있는 일반민도 동일하게 고구려의 민으로 인식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즉 4세기 말 5세기 초에는 복속민도 모두 ‘민’으로 인식했으며, 그들의 실제 위상도 이전의 집단예민에서 민으로 상승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신래한예는 구민에 상대되는 개념으로서 신민이라는 의미를 저변에 갖고 있으면서도 아직 신민이라 쓰지 않았고, 한예란 종족명을 굳이 썼다는 점에서 신래한예의 고구려민으로서의 위상 정립과 관련하여 더 주목해 볼 필요는 있다고 본다.
여하튼 〈광개토왕비〉에 나오는 민은 3세기 중엽과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이것은 과거 집단예민이었던 옥저, 예, 양맥 등이 고구려민으로 편제되고 원고구려 지역의 하호도 민으로서의 지위를 정립하는 등 민의 사회적 위상이 변화된 것과 맞물리는 현상이다.
3세기까지의 고구려민은 원고구려민과 편입민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고구려왕은 당시 이 두 부류의 민을 동일한 존재로 인식하지 않았다. 전자에 대해서는 고구려민이라 인식했지만 후자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5나부민 가운데 하호층에 대해서도 국가의 기간세력인 민으로 인식하지 못했다. 나부의 하호들은 넓게 보면 고구려의 민이자 국왕의 민이지만, 이때까지는 나부민에 대한 국왕의 대민의식이 성숙되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정복에 의해 편입된 복속민에 대한 배타성과 차별성은 더 강할 수 밖에 없었다. 이들은 분명 고구려 영역에 속해 있던 고구려인이었지만 적대의식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으며, 지방민이 아닌 집단예민으로 인식되었다. 이들은 수취 대상이 아닌 수탈 대상으로서 조세가 아닌 공납을 바쳤다. 그러므로 편입민이 고구려민으로서 위상을 갖게 되는 것은 원고구려 피지배계층에 비해 더 어려웠다.
그런데 〈광개토왕비〉에 나오는 ‘민’ 관련 내용을 보면 국왕의 대민의식이 이전과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기존 고구려민은 물론이고 복속되어 고구려로 들어온 편입민도 민으로 간주하고 있다. 4세기 말 5세기 초반경 고구려왕의 민에 포함되는 대상이 이렇게 확대된 것은 원고구려민 가운데 하호층에 대한 불신감과 복속민에 대한 적대감이 해소되면서 그들 모두를 자신의 민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 조공을 바치는 속민도 또 다른 부류의 민으로서 자신의 지배권 아래 있는 민으로 의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고구려왕의 의식 속에서 민의 외연이 이처럼 확대된 데에는 고구려의 발전에서 비롯된 자신감이 작용한 것이다.
귀족, 특히 나부의 대가(大加) 출신으로서 나부민을 자신의 세력기반으로 삼고 있던 귀족의 경우, 자신의 지배권 아래 있는 부민(部民)을 수탈 대상으로만 보는 의식을 오래도록 가지고 있었다. 반면에 국왕 측은 이전의 나부민을 민으로 인식하는 의식이 귀족에 비해 일찍 성장했다. 국왕과 귀족이 가진 나부민의 존재에 대한 의식에 한동안 괴리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에는 왕이나 귀족 모두 같은 인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경제적 측면에서의 가치판단이 변화되면서 민에 대한 의식도 바뀔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즉 국왕과 귀족 모두 더 많은 이득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이 지배하는 사람들을 약탈과 수탈의 대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호, 육성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게 된 것이다.
고국천왕대의 진대법(賑貸法) 시행은 그런 면을 잘 보여준다.주 011 진대법은 기민이 늘어나 사망하거나 노비로 전락함으로써 민이 줄어들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시행했다. 조세원인 민이 감소하면 나라의 재정이 어려워지므로 그들을 보호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진대법의 시행 사실을 통해 나부체제기에도 이미 각 나부의 민이 나부민이면서 동시에 국가의 민이라는 사실을 지배계층 모두가 공통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의식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확대되었다. 그리고 나부체제가 해체되고 중앙집권체제가 확립되면서 민의 지위가 정립되고 대민관도 성숙되어 갔다. 따라서 〈광개토왕비〉에서 확인되는 대민관은 3세기 말~4세기 말에 성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민관 변화의 배경으로는 나부체제에서 중앙집권체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민의 위상이 귀족의 사적 예속민에서 국가의 공민(公民)으로 상승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정복전쟁이 치열해짐에 따라 하호와 편입민도 전쟁에 동원되었으므로, 이들의 사회적 위상이 복속민에서 지방민으로 상승했고, 이들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는 점도 들 수 있다. 또 왕권강화 결과 성립된 ‘태왕’ 의식도 관념적 배경으로 지적할 수 있다. 태왕이기에 자신의 지배권 아래 들어온 모든 대상을 덕으로 보살펴 주어야 할 민으로 의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중앙집권체제의 구축 과정에서 왕이 민을 자신의 세력기반이자 국가의 근간이라 인식하게 되고, 민이 경제적으로 자립하여 조세와 군역을 부담할 수 있는 존재로 성장함에 따라 대민의식도 전환되었다. 따라서 대민관의 변화는 곧 고구려의 발전과 민의 성장 결과라 할 수 있다.
대민관의 변화는 편입민에게까지 확산되었다. 물론 예나 옥저 같은 집단예민을 고구려민으로 인식하는 것이 5나부 지역민에 대한 것과 동일한 시기에 동일한 정도로 되지는 않았다. 시간차와 차별성이 있었다. 하지만 집단예민의 독자성과 집단성을 해체하고 국왕 아래 일원적으로 재편하는 작업이 나부 해체와 거의 같은 시기에 진행된 것으로 보아 이들도 3세기 후반부터는 점차 고구려의 민(民)으로 인식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4세기 이후에는 고구려의 민,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지방민이란 인식이 보다 분명하게 정립되었다. 또한 엄연히 독립국가를 유지하고 있던 백제와 신라까지도 속민으로 규정하면서 또 다른 유형의 민으로서 고구려 국왕 자신의 지배하에 있는 존재로 치부하는 자신감도 가지게 되었다.
〈광개토왕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고구려왕의 대민관 변화는 역으로 민의 위상을 더욱 안정되게 해주었다. 국왕의 대민관이 바뀜으로써 그들에 대한 귀족의 사적인 예속이나 무분별한 착취가 행해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전보다 향상된 고구려민의 사회적 위상은 그들의 존재가 법적으로 규정되면서 더욱 안정될 수 있었다. 율령 반포는 국내의 모든 구성원을 보편적인 공법질서체계 아래 편입시켜 공민으로서의 위치를 법제적으로 확정지었다. 이제 민은 호적에 모두 등재되어 법적 지위를 갖게 되었다. 물론 이전에도 구성원 파악을 위한 호적은 존재했을 것이지만 율령 반포로 호적에 들어갈 항목과 작성 절차 등이 법제화되었을 것이다. 이 호적을 근거로 장수왕대 수묘 연호 차정이 이루어졌을 것이라 보고, 호의 공식 명칭은 ‘연호(烟戶)’, 호주는 ‘연호두(烟戶頭)’였으리라고 본 견해도 나왔다(김창석, 2019). 〈광개토왕비〉에 나오는 ‘연호’와 〈집안고구려비(集安高句麗碑)〉에 처음으로 보이는 ‘연호두’는 모두 수묘인 관련 기록에 나오는 용어인데, 당시 호적에 등재된 가호와 호주의 명칭 자체가 연호와 연호두였는지는 아직 단정할 수 없다.
이제 국가는 적의 침공으로부터 민을 지켜주는 대신 그 지배체제를 이탈하거나 저해하는 일체의 행위에 대해 강력하게 제재를 가했다. 그리고 일률적이고 보편적인 조세제의 확립과 함께 가호별 또는 개인별로 조세 납부와 군역 부담 등의 의무를 지웠다. 그런 가운데 고구려의 영역 확대 과정에서 새로 유입되는 민을 고구려 공민으로 위치 지우는 작업도 계속 진행했다. 율령에 입각하여 고구려민으로 편제함으로써 편입민도 점차 의식과 실제적인 면에서 명실상부하게 고구려인이 될 수 있었다.
한편, 고구려왕이 자기의 천하에 들어있는 또 다른 민으로 생각했던 속민에는 백제, 신라, 백신, 동부여 등이 있었다. 고구려에서는 이들을 모두 속민이라 표현해 놓았지만, 고구려와의 관계가 모두 같은 것은 아니었다. 고구려에서 행사한 영향력의 종류와 정도 등 여러 면에서 속민마다 상당히 차이가 있었다. 속민은 기존의 집단성과 독자성을 해체당하지 않은 상태에서 내부 통치를 자체의 법에 따라 자율적으로 해나가되 고구려왕에 대해 노객 또는 신민으로서 그 지배권 아래 있을 것을 약속하는 의미에서 충성을 맹세하고 조공을 바쳤다. 그런 점에서 광개토왕과 장수왕의 관념 속에서 백제나 신라, 동부여, 백신은 모두 동일한 속민이었다. 4세기 말 5세기 초반경 고구려왕의 대민관에는 속민이 고구려민과 함께 자신이 보살펴야 할 또 다른 부류의 민이었으므로 속민 지배도 또 다른 대민통치의 하나로 간주했다. 물론 실제상황과 해당 정치세력의 입장은 그와 차이가 있었다. 동부여와 백신의 경우 후에 실제로 고구려민으로 편제되었지만, 백제와 신라는 끝까지 독립을 유지했을 뿐 아니라 5세기 중반 이후에는 서로 협력하여 고구려에 대응했다.
2) 지역 편제와 대민 지배
(1) 지방의 내부구조
〈모두루묘지〉에는 ‘성민곡민(城民谷民)’이란 표현이 나온다. 모두루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대의 상황을 언급하는 부분에서 나왔으므로, 4세기 중후반 부여 지역의 내부구조와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때 부여 지역에는 ‘성’과 ‘곡’으로 표현된 행정단위가 존재했고, 지방관은 성민과 곡민을 다스리는 일을 했던 것이다. 〈광개토왕비〉에는 양곡, 양성이란 지명이 나오는데, 이는 양맥으로 통칭되던 태자하 상류 일대가 곡과 성 2개의 행정구역으로 분리되었고, 지방행정 중심지로 양성을 축조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여호규, 2014). 이것은 당시 지방통치조직의 기본단위가 성과 곡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武田幸男, 1989).
곡은 초기에는 단순히 지역집단 그 자체를 지칭하는 용어였다가 3세기 후반 이후에는 성과 함께 지방행정단위로 사용되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모둔곡, 양곡(涼谷), 두곡, 적곡, 압록곡, 매구곡, 동해곡, 루두곡, 서압록곡, 양맥지곡, 거곡, 청목곡, 두눌지곡, 해곡, 단웅곡 등이 나온다. 곡은 〈광개토왕비〉에도 나오고, ‘십곡민조(十谷民造)’명 와당에도 나온다. ‘십곡민조’명 와당은 4세기 중엽(355~357년)에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여호규, 2014). 〈모두루묘지〉에 나오는 성민곡민은 5세기 전반, 〈광개토왕비〉는 4세기 중・후반부터 5세기 초까지 상황을 보여준다. 즉 곡은 고구려 관련 문헌사료와 금석문 자료에 모두 나오고, 이른 시기부터 5세기 전반경까지 출현하고 있다.
이 중 동명왕부터 신대왕까지 사료에 보이는 곡은 지역집단을 의미할 뿐 행정구역명은 아니다. 하지만 단웅곡은 단순히 단웅골짜기라고 볼 수도 있지만 고국원왕이 위기 시에 피난했던 지역이므로 지역집단 또는 행정단위로 볼 수도 있다. 두눌지곡, 양맥지곡의 경우, 단순히 두눌, 양맥골짜기로 볼 수도 있지만, 동천왕이 유옥구에게 압록 두눌하원을 식읍으로 주었고, 〈광개토왕비〉에 양맥이 양곡과 양성으로 나오는 것을 보면 역시 지역집단을 배경에 두고 있는 곡으로 볼 수 있다. 고국천왕 13년의 서압록곡은 5나부 지역의 하위 행정단위였다. 서천왕 19년 해곡의 경우, 중앙정부에서 행정단위로 파악하고 있었다. 즉 5나부 지역 안에는 그 이전부터, 외곽 지역에는 3세기 후반부터는 곡이 행정단위로 기능했다. 이 외에 다른 곡은 모두 지역집단이나 행정단위로 보는 데 주저할 이유가 없다.
〈모두루묘지〉에 나오는 성민과 곡민을 두고 도시인과 농촌민으로 보는 설(耿鐵華, 1997)을 비롯해 몇 가지 설이 있다. 그러나 단어 그대로 주요 교통로에 축조된 성을 중심으로 한 지역과 곡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각각 살던 사람들로 보면 될 것 같다. 어떻게 보든 성과 곡은 대등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지방관이 파견되는 행정단위였다는 것을 신성태수와 해곡태수를 통해 알 수 있다. 뒤 시기로 갈수록 지방행정단위로서 곡보다는 성이란 명칭이 더 많이 나오지만 〈광개토왕비〉와 『삼국사기』 지리지에도 곡(谷)이 적지 않게 나오는 것으로 보아 지역명 혹은 지역단위로서 곡은 성과 함께 오래도록 존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3세기 후반부터 대거 축조되기 시작한 성이 곡과 함께 행정단위로 기능했는데, 5세기 이후 지방통치조직이 성 위주로 되면서부터는 곡 지배에서 성 지배로 비중이 옮겨졌다.
성과 곡 아래에는 촌이 있었다. 〈광개토왕비〉에는 성과 촌의 수가 명기되어 있고 또 그것이 일정한 비율을 보이고 있다. 이에 따라 4세기 이후 고구려의 통치체제를 성-촌 지배체제라 부르기도 했다(武田幸男, 1978). 이 경우 뒤에는 촌이 아닌 성에서 직접 호(戶)를 파악했다는 점에 주목하여 성-호 지배체제로 고쳐 불렀다(武田幸男, 1989). 아마도 촌의 기능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고구려 지역 내부구조를 살필 때 촌의 존재를 무시하고 넘어갈 수는 없다. 〈광개토왕비〉와 〈충주고구려비〉에는 구체적인 촌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광개토왕비〉에는 ‘58성 700촌’, ‘성이 64, 촌이 1400’이었다고만 나온다. 〈충주고구려비〉에서는 ‘촌사(村舍)’라는 글자가 확인되었다.
촌은 3세기에 편찬된 『삼국지(三國志)』에 처음으로 나왔고, 일반화되는 것은 남북조시대부터라고 한다. 이런 점에서 『삼국사기』에 이른 시기부터 나오는 촌은 당대의 표현이 아니라 후대의 부회라고 보기도 한다(주보돈, 2007). 그러나 5세기에 고구려에서 촌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분명하다. 〈광개토왕비〉에 나오는 ‘58성 700촌’은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여 취한 것으로 한강 이북 지역에 분포해 있었다. 공파한 ‘성이 64, 촌이 1400’이라는 구절은 동부여 원정 기사의 말미에 나오지만, 대부분 백제로부터 획득한 영역이라고 보고 있다. 백제에도 4세기 말 5세기 초에 촌이 존재했던 것이다. 58성과 64성이 모두 동급의 행정단위 성은 아니었다. 당시 상급 성(곡)-하급 성(곡), 혹은 상급 성(곡)-중급 성(곡)-하급 성(곡)으로 지역단위가 편제되어 있었고, 이 각급 성(곡) 아래 촌이 소속되어 있었다.
고구려는 백제로부터 성-촌을 공취한 후, 여기에서 왕릉 수묘인을 가호 단위로 차출했다. 이때 구민과 신래한예를 합쳐 330가(家)의 수묘인을 차출했는데, 그중 구민 수묘인은 110가, 신래한예 수묘인은 220가였다. 〈광개토왕비〉에는 수묘인을 어느 성, 어느 곡에서 차출했는지, 그리고 그때 국연은 몇 가, 간연은 몇 가를 차출했는지를 꼼꼼히 새겨두었다. 즉 촌 단위가 아닌 성과 곡 단위에서 수묘인의 차출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광개토왕비〉에 왕이 획득한 영역을 58성 700촌, 성 64, 촌 1400이라고 분명하게 기록해 놓은 것으로 보아, 수묘인 차출 시 고구려 중앙정부에서 촌의 현황도 파악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촌이 아닌 성과 곡 단위에서 수묘인 차출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촌이 지방행정단위가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때의 촌은 신라사에서 보이는 행정촌이 아니라 자연촌에 가깝지만 자연발생적인 지역단위로 볼 수는 없다. 700촌, 1400촌이라는 숫자 자체가 인위적인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다. 행정촌은 아니지만 어떤 기준 아래 국가에서 파악하고 있는 단위였던 것 같다. 촌 안에는 복수의 자연취락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촌이 국가에서 파악하는 단위였다면 전정호구(田丁戶口)나, 취락의 수와 규모 같은 어떤 기준에 따라 편제했다고 보아야 할 것인데, 그 기준이 어떤 것이었는지 추정할 실마리가 전혀 없다.
촌의 상급단위인 성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58성 700촌’이라는 구절에 따라 성과 촌의 비가 1:12가 아니었나 추정할 수도 있지만 ‘64성 1400촌’을 보면 이 구성비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700촌, 1400촌이라는 식으로 숫자가 딱 떨어지게 제시되었다는 점에서 성·곡과 촌의 편제에서 정해진 비율이나 기준에 의해 인위적으로 지역을 재편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떨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촌, 혹은 촌과 유사한 성격의 지역단위가 나부체제 단계부터 발견되므로 고구려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미치는 단위임은 분명하다는 점에서 인위적인 지역 재편의 가능성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충주고구려비〉에 나오는 ‘촌사’의 ‘사(舍)’는 마을 또는 마을의 관부를 의미하며, 곧 촌장을 의미한다는 해석이 있다(李丙燾, 1954). 이것은 신라의 경우를 설명하는 가운데 나온 해석이지만, 촌사라는 글자의 의미상 고구려사에서도 동일하게 이해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와 관련하여 떠오르는 것이 〈단양적성비〉에 나오는 전사법(田舍法)이다. 이도 역시 촌과 관련된 것으로, 마을의 경제적 사안을 규정한 법일 것으로 짐작된다. 물론 적성비는 신라에서 건립한 것이므로 전사법도 신라의 법이지 고구려의 법은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적성이 고구려에서 신라로 넘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였으므로 ‘소녀자’ 등이 고구려시기부터 호구 파악 기준에 의해 성립된 것이었고, 전사법 역시 고구려 제도를 계승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5세기 중반 이후 6세기경에는 고구려에도 촌에 대한 지배방침이 마련되어 있었고, 촌을 통치하는 관부가 존재했으며, 주민 통치를 담당하는 촌장이나 촌주 같은 존재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충주고구려비〉에 나오는 ‘태왕국토의 대위제위 상하(太王國土大位諸位上下)’가 옛 백제땅이면서 지금은 고구려땅이 된 지역의 토착지배층이었고, 이들이 촌주로서 고구려 지방 지배의 말단을 담당했을 것으로 본 견해가 있다(심정현, 2018). 이 경우 경기도 지역에서 확인된 고구려계 석실분의 주인공들이 바로 이들이었을 가능성도 지적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광개토왕비〉와 〈충주고구려비〉를 통해 촌이 인력 차출이나 조세 수취 등을 관장하는 행정단위가 아니었다는 것, 촌 안에도 관부가 있어 촌의 일을 관장했다는 것까지만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는 촌의 존재 시기나 촌의 편제방식, 내부구조, 촌의 성격, 시기별 성격 변화에 관한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일찍부터 등장하는 촌의 존재를 인정할 수 있다면 〈광개토왕비〉 건립 이전부터 촌이 성립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사료에 나오는 촌이 후대의 용례를 소급 적용한 것이라 볼 수도 있지만, 사료의 내용은 당대 사실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촌 관련 사료를 모두 후대의 부회라고 일괄 치부해버리기 전에 일단 그 내면을 들여다볼 필요는 있다.
고구려사에서 촌 관련 사료는 2세기 말부터 나온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국천왕 13년(191년) 4월조에 나오는 ‘좌물촌’이 그것이다. 4연나가 모반을 하자 기내 병마를 동원하여 진압한 뒤 국정 쇄신이 필요함을 절감한 고국천왕이 4부에 우수한 인재를 천거할 것을 명한다. 그러자 사람들이 동부 안류를 추천했는데, 안류는 서압록곡 좌물촌에 사는 을파소를 자기 대신 추천했다. 서압록곡 좌물촌은 국내성의 서쪽이었을 것이다. 을파소가 유리왕대의 대신 을소의 손자로서, 할아버지의 터전에서 그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면, 서압록곡 좌물촌은 계루부 소속의 촌이라 볼 수 있다. 고국천왕대 고구려는 나부체제기였으므로 다른 나부 출신이라면 소속 부를 밝혔을 텐데 서압록곡 좌물촌이라고만 한 것을 보아도 계루부 소속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동부 안류’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이때는 이미 왕도 안의 귀족거주집단을 방위별로 구분한 방위명부가 존재했던 시기인데 방위명부를 칭하지도 않았다. 즉 을파소는 계루부 안에서도 방위명부가 아닌 외곽에 살았던 것이다.
산상왕 12년(208년) 11월조 기사에 주통촌이 나온다. 교제에 쓸 희생용 돼지가 달아나서 담당자가 쫓아갔으나, 아무리 해도 잡히지 않던 돼지가 20세쯤 되는 아름다운 주통촌의 아가씨 품에 안겨 있어 이상하게 여긴 담당자가 산상왕에게 그 사실을 고했다. 그러자 산상왕이 밤에 주통촌으로 찾아가 그 여인과 인연을 맺었는데, 그녀가 낳은 아들이 동천왕이었다. 『삼국지』 고구려전에 의하면 주통촌녀는 관노부(灌奴部) 출신이었다. 따라서 주통촌은 관노부 내부의 단위집단인 곡에 속해 있었을 것이다.
촌 기사는 미천왕 즉위년조(300년) 기사에도 나온다. 봉상왕의 위해를 피해 달아났던 을불이 고생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전하는 대목에 수실촌, 동촌, 사수촌 등이 나온다. 을불은 배를 타고 소금장수를 하고 다니다가 압록강 동쪽 사수촌의 노구를 만나 곤욕을 치렀다. 그리고 비류수가에서 그를 찾아다니던 북부 조불(祖弗)과 동부 소우(蕭右)를 만났다. 비류수와 압록강을 오르내리며 생활했던 것이다. 이곳은 5나부 지역 안에 속하는 곳이다. 그런데 이때는 이미 북부, 동부 등 방위명부만 존재했다.
노구가 신을 훔쳐갔다고 모함해 을불을 압록재에게 고소하자, 압록재는 신값으로 소금을 빼앗아 할멈에게 주고 을불에게 태형을 가했다. 3세기 말경 지방에는 재와 태수를 파견하여 통치했다. 사수촌에서 노구와 분쟁이 일어났을 때 촌 내에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바로 압록재에게 고소한 것으로 보아 사수촌 내에는 이런 분쟁을 처리할 기관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에도 촌은 행정단위가 아니었던 것이다. 압록재는 중앙에서 보낸 지방관으로 사수촌을 위시한 복수의 촌을 관할한 지방관이었다. 압록재는 아마도 곡이나 성 단위에 파견되었을 것이다. 즉 4세기 초반에도 5세기 초반과 마찬가지로 지역이 성-촌 또는 곡-촌으로 편제되어 있었으며, 촌은 행정단위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광개토왕비〉에 나오는 촌과 같은 성격인 것이다.
국가발전단계상 미천왕 즉위년조에 나오는 촌 관련 기사는 후대의 부회가 아니라 당시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 본다. 즉 촌이란 명칭의 사용 시기를 3세기 후반 4세기 초반경까지 올려볼 수 있다는 것이다. 고구려는 3세기 말부터 중앙집권체제 아래 지방통치가 실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수촌, 동촌 등은 고구려 수도 인근 지역이었으므로 다른 곳에 비해 상대적으로 지역 편제가 일찍 이루어졌고, 직접통치도 이른 시기에 이루어졌다.
그럼 고국천왕과 산상왕대에는 상황이 어떠했을까? 좌물촌과 주통촌은 각각 계루부와 관나부에 속했다. 역시 다른 지역보다 지역 분해와 편제가 빨리 일어난 곳이다. 좌물촌은 계루부의 직할령이었므로 당연히 중앙정부의 권력이 일찍부터 미쳤다. 관나부는 연나부나 비류나부에 비해 세력이 약했고 소후가 배출된 나부였으므로 다른 나부보다 먼저 해체되었고, 계루부의 영향력이 내부에 미친 시기도 다른 나부에 비해 앞섰다.
이렇게 보면 촌이라는 명칭 자체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3세기 말 이전에 이미 어떤 식으로든 자연취락을 일정한 기준에 따라 묶어 파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단지 용어만 후대의 것을 소급 적용했을 뿐이고, 내용과 성격상 뒤 시기의 촌과 같은 것이 성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2세기 말경에는 이미 후대의 촌처럼 복수의 자연취락을 일정한 원칙 아래 묶어 행정단위인 곡 아래 편제했었다. 그런데 『삼국사기』의 고구려 후기 사료에는 촌이 더이상 나오지 않고, 성읍, 주현, 주읍이라고 나온다. 하지만 촌에 대한 기사가 실리지 않았다고 하여 반드시 촌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촌은 끝까지 지방통치단위가 되지 않았다.
요컨대 고구려의 촌은 행정촌이 아닌 자연촌이었다. 그러나 자연취락은 아니었다. 복수의 자연취락이 일정한 기준 아래 묶여 하나의 촌이 되었다. 행정단위는 복수의 촌이 소속된 곡과 성이었다. 고구려에서는 곡-촌, 성-촌으로 지역을 편제하여 통치하였다. 처음에는 곡-촌이 더 많았으나 뒤에 성-촌 지배체제가 더 중심이 되었다. 지방관은 성·곡 단위까지만 파견되었다. 지방관은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촌에 촌사를 두고 지역 토착세력을 촌주(村主) 혹은 촌장(村長)으로 삼아 조세 수취와 역역 동원 등을 담당토록 했다. 이처럼 촌에 촌사를 두고 지방관의 지역 지배를 돕게 한 것은 3세기 말 이후 전국을 일원적으로 직접 통치하게 된 이후의 일이었다. 촌은 후기까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2) 민의 위상 정립과 대민 지배
3세기까지의 고구려민은 원고구려민과 편입민으로 나누어졌다. 당시 국왕을 비롯한 지배층은 편입민을 복속민으로 인식했다. 편입민은 나부연맹체에 조세가 아닌 공납(貢納)을 바치며 집단적으로 예속되어 간접지배를 받는 집단예민이었으므로 고구려민이란 인식이 없었다. 이들은 관념적으로나 법제적으로나 고구려민으로 제대로 자리잡기 어려웠다.
율령 반포 이후 수탈 대상이라고만 여겼던 복속민도 국가의 경제적・군사적 기반인 공민(公民)이 되었다. 왕도 고구려 율령에 의거해 통치하는 모든 주민이 곧 고구려민이자 자신의 백성이라고 간주하게 되었다. 물론 이때에도 원고구려민은 왕도(王都)와 근기(近畿)의 주민으로서 우월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왕경인(王京人)과 지방민으로서의 차별일 뿐 고구려민과 집단예민으로서의 차별은 아니었다. 중기 이후 원고구려민과 그 외 지역민 사이에 현실적인 차별이나 차이는 있었을지라도 관념적으로나 법제적으로는 모두 같은 고구려민이 되었다. 따라서 지방민도 동일하게 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가졌다.
중기 고구려민은 고대시기 일반 민이 보편적으로 그랬던 것처럼 조세 납부와 역역 부담, 그리고 군역 의무를 지고 있었다. 역역과 군역 관련 사료로는 봉상왕대에 15세 이상의 국내 남녀를 동원하여 궁실을 조영한 것과 병사로 전쟁에 동원한 기사들이 있다. 전쟁 기사를 시기별로 보면 2세기에는 5,000~1만여 명 정도의 병력이 동원되었지만, 3세기 중엽에는 2만여 명으로 늘어났고, 4세기 이후에는 3만~5만 명으로 대거 증가했다(여호규, 2014). 이것은 귀족들만 전투에 참여했던 초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중기에는 왕도와 왕기의 거주민과 지방민이 모두 군역을 지고 전쟁에 동원되었다(임기환, 1994). 이외에 〈광개토왕비〉에 나오는 수묘 연호를 통해 세습적으로 수행하는 특수한 직역이 있었다는 것도 확인되었다(김현숙, 1989). 즉 중기 고구려사에서는 요역과 군역에 대한 기사만 나올 뿐 그 외 조세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사가 나오지 않는다.
고구려 조세에 대해서는 『주서』 권49 고려전에 “賦稅則絹布及粟 隨其所有 量貧富差等輸之”했다는 기사, 『수서(隋書)』 권81 고려전에 “人稅布五匹 穀五石 遊人則三年一稅 十人共細布一匹 租戶一石 次七斗 下五斗”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또 역역 부담에 관해서는 사람들을 동원해 평양성 성벽을 축조한 내용이 새겨져 있는 석각 명문이 있다. 중기에도 이 기사들에 보이는 것처럼 소유에 따라 조세를 차등 있게 부과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지만, 관련 사료가 없어서 단정할 수는 없다. 아무튼 민에게 조세를 거두고 그들을 요역과 군역에 동원하는 일은 지방관의 주요 임무였다. 각 지역에 파견된 재, 태수, 수사 등의 지방관들이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지역 상황에 대해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광개토왕비〉에 나오는 국연과 간연의 차출 상황을 통해 당시 지역상황을 살펴본 연구가 있다. 국연과 간연은 같은 수묘인으로서 모두 가호 단위로 차출되었다. 국연과 간연의 역할과 성격 차이에 대해 그동안 다양한 학설이 나왔다. 이 중 국연과 간연의 비율이 1:10인 것은 당시 재지사회의 계급적 구조를 반영하는 것으로, 국연-간연은 3세기의 호민-하호의 관계에 견줄 수 있다고 본 견해가 있다(임기환, 1994). 이 경우 국연은 호민층에서 유래한 재지지배세력과 일부 경제적 성장을 이룬 부호농민층이고, 간연은 과거 하호층이 성장한 자영 소농민층 등이 중심으로, 이들이 각종 국가적 수취 부담 대상자인 연(烟)으로 파악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또한 이때 수묘인들은 번상입역(番上立役)을 했고, 국연과 간연이 함께 노동조를 꾸려 수묘역을 담당했는데, 이것은 수묘인 연호의 편제방식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고구려 국역을 부담하는 연호 일반을 파악하는 보편적인 편제방식일 것이라며 ‘국연-간연체제’라 부르기도 했다. 국연을 호민층과 연결시켜 고구려 조세제를 살핀 연구는 이전에도 있었지만(김기흥, 1991), 국연-간연체제를 고구려의 보편적인 국역 편제방식이라고 본 것이 주목된다.
수묘역이 번상역인가, 사민되어 왕릉 가까이에 있으면서 일상적으로 묘역을 지키고 관리를 했는가를 두고는 지금까지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여기에서 관련 논의를 소개하지는 않겠다. 수묘역이라는 특수한 역을 통해 지역의 내부구조를 살핀 것은 매우 흥미롭다. 하지만 전체 역역체계까지 연결시킬 수 있는지는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왕릉 관리라는 일의 성격과 왕릉의 안전한 관리 문제를 매우 걱정하여 새로운 법을 만들기도 했던 당시 상황에서 세습직인 수묘역을 수자리 서듯 돌아가면서 맡겼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광개토왕비〉의 수묘 연호 차출 내용을 통해 당시 지방관들이 지역 내부의 상황을 비교적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당시 조세 수취와 역역과 군역 동원제도가 생각보다 더 정밀하게 갖추어졌을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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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9)
주보돈(朱甫暾)은 비문에 나오는 민(民)을 고구려 영역 내에서 직접적인 지배를 받는 민과 독자적인 세력으로서 고구려와 조공 관계를 맺었던 속민(屬民)의 두 유형으로 크게 나누었다(주보돈, 1994, 25쪽). 임기환은 속민은 국제관계상에서 국가 간에 설정된 개념으로 백제, 신라, 동부여와 고구려의 관계를 보여주는 용어라고 했다. 속민 관계의 형식적인 형태는 복속국의 조공이며 그에 대한 고구려의 대가는 태왕의 은자(恩慈)로서 속민은 고구려 태왕을 정점으로 하는 천하의 2차적 범주를 이룬다고 했다(임기환, 1996). 그러나 필자는 백신(帛愼)도 조공논사(朝貢論事)를 했다는 점에서 속민에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았다(김현숙, 2005b).
- 각주 010)
- 각주 0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