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낙랑군·대방군 고지의 상황
2. 낙랑군·대방군 고지의 상황
낙랑군·대방군은 멸망 후에 일부 주민이 요서 지방으로 옮겨갔고, 거기에 새로운 낙랑군·대방군이 설치되었다. 그렇다면 고구려 미천왕의 공격으로 멸망한 낙랑군·대방군 지역은 어떤 상황이 되었을까? 아쉽게도 멸망 이후 낙랑군·대방군과 관련된 내용은 『삼국사기』·『삼국유사』를 비롯한 문헌기록에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그 상황을 상세히 알기 어렵지만, 일반적으로 고구려가 이 지역을 장악, 통치하였을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고고자료(특히 무덤자료)를 살펴보면 뜻밖에도 우리 생각과 다른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 당시 이 지역의 상황을 알아보자.
1) 벽돌무덤에 나타난 토착집단과 이주민집단
우리 조상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한 무덤 양식은 흙무덤이거나 돌무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낙랑군·대방군이 있었던 한반도 중・북부 지역에서는 다소 이례적인 무덤 양식이 유행하였다. 그것은 벽돌무덤, 즉 전축분(塼築墳)이다. 벽돌무덤은 벽돌을 소재로 하여 무덤을 만드는 것인데, 한반도 지역에서는 이례적인 무덤 양식에 해당한다. 낙랑군·대방군 지역에는 1,000여 기가 넘는 벽돌무덤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주 011 이와 같은 벽돌무덤의 분포범위는 황해남・북도(신천군, 봉산군, 안악군, 재령군, 은율군, 황주군, 송화군 등지), 평안남도(평양시, 대동군, 용강군, 중화군, 순천군, 안주군 등지) 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낙랑군 지역에서 벽돌무덤 이전 시기에 만들어진 무덤 양식은 목곽분, 귀틀무덤주 012이라고 한다. 목곽분, 귀틀무덤과 벽돌무덤의 상호관계를 알아보자. 낙랑군이 있던 평양 지역에서는 목곽분, 귀틀무덤과 벽돌무덤이 순차적으로 연결되는 데 비하여, 대방군의 치소가 있었던 황해도 봉산군 지역에서는 그 이전 시기의 묘제로 알려진 목곽분, 귀틀무덤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은 대방군 설치를 전후하여 이 지역에서 새로운 묘제인 벽돌무덤이 축조된 것이라고 해석된다.

그림2 | 귀틀무덤과 벽돌무덤 - 귀틀무덤(평양 채협총)

그림2 | 귀틀무덤과 벽돌무덤 - 벽돌무덤(평양 장진리무덤)
그렇다면 낙랑군·대방군 지역에서 발견되는 벽돌무덤에 대한 가장 합리적인 해석은 중원 문화의 이입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주 013 벽돌무덤이 한반도 중·북부 지역에서 축조되기 시작한 구체적인 시기는 언제일까? 단지 제조연대를 벽돌에 기록한 것을 보면 후한시기 이후부터로 나타난다. 대방군 치소가 있던 당토성에서 출토된 벽돌에 182년에 해당하는 연대가 기록되었는데, 이것이 초기라고 알려져 있다. 역사적인 상황과 비교해보면 벽돌무덤은 시기적으로 낙랑군과 대방군이 쇠퇴하는 시기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낙랑군·대방군 멸망 이후는 어떤 상황이었을까?
표1은 낙랑군·대방군이 멸망한 이후 시기에 해당하는 벽돌무덤 자료이다. 4세기~5세기대 벽돌무덤의 분포범위를 보면, 황해도 신천군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안악군, 봉산군 지역 및 평양시 지역에서 일부 나타나고 있어 낙랑군·대방군 소멸 이전 시기보다 현저히 축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종래 평양 낙랑토성을 중심으로 번성하였던 목곽분, 벽돌무덤 축조집단의 주 세력이 남으로 퇴축되어 황해남도 지역으로 옮겨갔다는 상황을 유추할 수 있다. 벽돌무덤 세력권의 퇴축과 고구려 세력의 남진이 서로 맞물려 있음은 생각하기 어렵지 않다. 이와 같은 벽돌무덤의 존재는 이 지역의 역사적 상황과 관련하여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낙랑군·대방군이 소멸한 이후 약 1세기 가까이 중원 세력과 연결 관계를 보이는 단서가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 집단은 어떻게 살아갔을까? 또한 이 지역의 역사와 어떻게 관련시켜 보아야 할까?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한 분명한 대답은 어렵지만, 벽돌에 새겨진 명문에 대한 종합적인 해석을 통하여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표1 | 낙랑군·대방군 고지 출토 연대 표기 벽돌
| 번호 | 연대 | 명문 내용 | 국가 | 출토 지역 |
| 1 | 316 | 建興四年會景□□ | 진 | 傳 황해도 지방 |
| 2 | 327 | 泰寧五年三月十□ | 동진 | 황해남도 안악군 용순면 복우리 제2호분 |
| 3 | 335 | 咸和十年 太歲乙未孫氏造 | 동진 | 황해남도 신천군 신천면 사직리 |
| 4 | 342 | 建武八年 西邑太守, 西邑太守張君塼 | 후조 | 황해남도 안악군 로암리 |
| 5 | 343 | 建武九年三月三日王氏造, 奉車□ | 후조 | 傳 황해남도 신천군 |
| 6 | 345 | 建元三年太歲,□巳八月孫氏造 | 동진 | 황해남도 신천군 가산면 간성리 |
| 7 | (348) | 大歲在戊漁陽張撫夷塼, 大歲戊在漁陽張撫夷塼, 大歲申漁陽張撫夷塼 八月八日造塼日八十石□, 張使君塼, 使君帶方太守張撫夷塼 | 동진(?) | 황해남도 봉산군 문정면 소봉리 제1호분 |
| 8 | 350 | 建武十八年 太歲□ | 후조 | 황해남도 신천군 용문면 복우리 제8호분 |
| 9 | 352 | 永和八季二月四日 韓氏造塼 | 동진 | 황해도 신천군 북부면 |
| 10 | 353 | 永和九年三月十日遼東韓玄菟太守領佟利造 | 동진 | 평양시 평양역구내 |
| 11 | 386 | 太安二□ | 전진 | 황해남도 신천군 북부면 토성리 |
| 12 | 397 (407)* | 昭明王□建始元季韓□, □季韓氏造塼 | 후연 | 황해남도 신천군 용문면 복우리 제5호분 |
| 13 | 404 | 元興三年三月艹日 | 동진 | 황해남도 신천군 북부면 서호리 |
* 建始 연호는 후연 모용상(397년 1월~7월)과 후연 모용희(407년 1월~7월)가 제정, 사용하였다. 따라서 그 연대를 결정하기 어렵다.
첫째로, 벽돌무덤 축조 집단의 정치·사회적 계보를 추정할 수 있다. 그 계보가 중원 정권과 연결되고 있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보자. 무덤의 축조 연대 표기는 중원 정권의 연대 표기 방법을 채용하였다. 역대 중원 정권은 전통적으로 연 (햇수)을 표기하기 위한 방편으로 제왕이 선포한 연호를 이용하여 구별하는 방법을 사용해왔다. 표 1에 나타난 연대 표기는 모두 중원 왕조의 연호에 해당한다.주 014
이와 같은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는 벽돌무덤 조영 집단과 중원 여러 왕조와의 사이에 모종의 정치적 관계가 성립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보통 독자적인 연호 사용 여부를 가지고 자주국가로 판단하는 잣대로 삼기 때문이다.주 015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은 중국의 연호를 본격적으로 채용하여 연대 표기를 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 집단이 중원 왕조의 연호를 채용한 사실은 양자의 정치적인 관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 집단이 만일 고구려의 영역 안에 포함되어 있어 고구려의 행정적인 지배를 받거나 종족적인 계통을 같이한다면 중원 여러 정권의 연대 표기 방식을 채택, 사용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낙랑군·대방군 고지에서 벽돌무덤을 조영한 집단은 고구려 전통사회의 관습법 내지는 율령을 바탕으로 한 직접적인 행정통치를 받지 않았던 별도의 집단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또한, 표 1에 나타난 연호를 분석해보면 이를 채용한 집단의 성격에 대해 어느 정도 해석이 가능하다. 이들 연호 기년은 표기상에서 약간의 문제점이 나타난다. 즉 연호가 중국에서 사용한 실제 연대와 차이가 있는 것을 다수 찾을 수 있다. 이와 같은 착오가 나타난 원인은 다음 두 가지 경우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벽돌무덤이 출토되는 황해도, 평안도 지역이 중원과 멀리 떨어져 있어 급변하는 정세에 어두웠을 경우, 둘째는 이 집단과 중국 왕조와의 정치적 상호관계에 있어 단절과 같은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이다. 연대 표기의 착오 현상은 이 두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나타난 결과라고 생각한다. 반면, 급변하는 중원의 정치상황을 정확하게 반영한 사례도 나타난다. 이와 같은 현상이 나타나게 된 배경은 중국계 이주민의 정보에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를 통해 한반도 중・북부 지역과 중원에서 명멸해 간 여러 정권과의 밀접한 관계까지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림3 | 낙랑군·대방군 지역 출토 벽돌(국립중앙박물관)
둘째로, 벽돌무덤 축조 집단에 대한 개인정보를 알 수 있다. 축조 관계자의 성씨 또는 성명 등이 기록되어 있다. 4세기~5세기대에 축조된 벽돌무덤에 나타나는 성씨는 왕(王)씨·한(韓)씨·장(張)씨·손(孫)씨·동(佟)씨·회(會)씨 등이 있다.주 016 이들 대다수가 황해도의 봉산군과 신천군 지방 벽돌무덤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어 이들 무덤 축조 집단의 세력 범위를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삼국시대 성씨에 대한 각종 기록을 살펴보면, 중국화된 성씨는 중원 문화가 대대적으로 유입되는 통일기를 전후하여 보편적으로 사용하기 시작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표 1에 보이는 성씨와 우리 삼국에서 특히 5세기 초 이전에 사용되었던 성씨를 서로 비교해 보면 어떠한 공통점도 발견되지 않는다. 즉 낙랑군·대방군 지역과 삼국은 성씨나 성명을 표기하는 전통이 달랐음을 의미한다. 또한 성씨 자료를 계량적인 수치로 비교해보면, 낙랑군·대방군 멸망 이전에 모두 30개의 사례 중 13개에 성씨가 기록된 것에 비해 양 군 멸망 이후에는 모두 13개의 사례 중 10개나 기록되어 있다. 즉 양 군 멸망 이후의 시기에 와서 무덤 축조 관련 인물의 성씨를 무덤 안에 많이 남겼다고 볼 수 있다.
셋째는 벽돌무덤 축조 관련 인물의 출신지를 알 수 있다. 표 1에서 7의 “태세신 어양장무이전(太歲申漁陽張撫夷塼)”이라는 명문을 통하여 무덤 주인이 어양군 출신임을 알 수 있다. 어양군은 현재 북경시 일대 지역에 해당한다. 348년에 사망한 장씨가 고구려로 이주해 오기 전 살았던 어양군 지역은 대체로 전조(前趙, 304~329년) 혹은 후조(後趙, 319~351년)의 영역에 해당한다. 북쪽으로는 대국(代國, 338~376년)과의 경계 지점이기도 하다. 장씨는 중원의 혼란을 피해 황해도 봉산군 지역으로 흘러들어온 인물임을 짐작할 수 있다.
넷째는 벽돌무덤 축조 관련 인물의 신분 특히 관직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세 가지 사례가 확인된다. 봉거□(奉車□),주 017 사군 대방태수 장무이전(使君帶方太守張撫夷塼), 요동·한·현도태수령동리조(遼東韓玄菟太守領佟利造) 등이다. ‘봉거명’ 벽돌이 343년이란 후조의 연호 기년을 사용한 사실을 고려할 때, 시기적으로 비슷한 동진대의 ‘봉거도위’와 공통점이 있을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그런데 봉거라는 관직 명칭이 이 지역에서 나타난 사실은 관직의 성격상 이해하기 어렵다. 즉 후조에서 이 지역에 파견한 관리에게 수여한 봉작으로 합당하지 않다. 또한 봉거명 관직의 무덤 주인공은 낙랑 최대의 토착세력으로 알려져 있는 왕씨이기 때문에, 그렇게 파악하기도 어렵다. 그렇다면 왕씨가 받은 관직이라기보다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 칭하였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지역에서 세력기반을 형성하고 있던 왕씨 집단이 자신의 세력을 주변에 과시하기 위하여 후조와의 관련성을 표방하고 봉거도위라는 실체가 없는 관직을 스스로 만들어 칭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은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이 지역으로 이주해 온 유민에 대한 몇 가지 단서를 구체적으로 추적해 보기로 하자.
(1) 서읍태수 장씨무덤
서읍태수라는 관직에 있던 장씨무덤이 발견, 조사되었다(한인덕, 1990). 그의 무덤은 황해남도 안악군 노암리에 위치한다. 안악읍에서 서남쪽으로 4km 떨어진 지점에 해당하는데, 이 무덤에서 남쪽으로 약 6km 지점에는 안악3호분이 위치해 있다. 무덤은 산 능선에 위치한다. 벽돌로 축조된 반지하식의 단실분이다. 평면은 배부른 장방형이며, 천장부는 무덤 안으로 무너져 내렸다. 발견 당시 무덤 안 바닥에는 40~50cm 크기의 판돌 조각들이 널려 있었다. 이 무덤의 구조와 관련하여 조사자는 이를 근거로 천장부가 돌천장이었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무덤 안길의 천장부에는 길이 19cm, 넓이 148cm, 두께 40cm 가량의 판돌 1장을 올려놓았다. 무덤은 여러 차례 도굴되었다. 조사 당시 내부에서 토기, 관못, 명문벽돌이 발견되었다. 이 중 명문벽돌은 무덤 안길과 현실 사이의 돌천장 위에 쌓은 벽체에 끼워져 있었다.

그림4 | 서읍태수 장씨무덤(한인덕, 2003)
벽돌에는 “서읍태수 장군전(西邑太守張君塼)”, “건무 8년 서읍태수(建武八年西邑太守)”라고 새겨져 있다. 명문 내용을 해석하자면 ‘서읍(군)태수인 장군(張君)의 벽돌’ 또는 ‘건무 8년(342년)에 축조된 서읍태수’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다. 무덤 주인은 성이 장씨지만 이름은 알 수 없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내용은 ‘서읍태수(西邑太守)’인데, 서읍의 태수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서읍군이라는 행정구역을 연상케 된다.주 018 또한 건무는 후조왕 석호가 제정하여 335년부터 348년까지 사용한 연호이다. 건무 8년은 342년에 해당한다. 따라서 후조의 행정구역 안에 서읍군이 존재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명문전의 내용을 342년 당시 역사적 상황과 비교하여 검증해 보자. 현재의 산서성 서안(西安) 지역이 전조 및 후조의 영역범위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확인하면 궁금증은 해소될 것이다. 확인해보자면, 서안 지역은 당시 후조의 영역에 포함되었다. 하지만 후조의 지방행정체제에 서읍군이 별도로 존재하였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정리해보자면 이 무덤의 주인공인 장씨가 후조의 연호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후조의 영역이었던 서읍 지역에서 이주해 온 인물임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이를 근거로 하여 어쩌면 안악군 노암리 일대에 서읍 지역에서 옮겨온 이주민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했음도 추정해 볼 수 있겠다. 서읍태수 관련 인물은 언제 고구려로 이주해 왔을까? 사실 고구려와 후조의 공식적인 접촉으로는 338년에 “배 300척에다가 식량 300만 가마”를 고구려에 실어 보낸 사건이 있다(『진서』 권106 석계룡 상). 이는 후조가 전연을 정벌하려는 계획 중 일환으로 실행된 것이다. 또한 341년에 후조가 압록강 하류의 서안평(西安平)을 장악했다는 상황을 전하는 『자치통감』 기록, 그리고 황해남도 신천군에서 후조의 연호 기년(343년)을 새긴 벽돌이 출토된 상황을 바탕으로 할 때 후조(後趙) 사람들이 고구려로 들어왔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그렇다면 장씨는 어떤 경로를 통해 이 지역으로 이주해 왔을까? 육로인 요서 지방을 적대 세력인 전연이 장악하고 있던 상황을 감안해 볼 때, 장씨는 해로를 통해 고구려땅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여기서 필자가 주목하는 부분이 있다. 이 무덤은 완전한 벽돌무덤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현실의 천장 부분, 그리고 판돌로 덮인 연도의 천장 부분 등을 석재를 사용하여 축조한 것이다. 이로 보아 서읍태수 장씨는 벽돌무덤 축조 전통이 있는 지역에 이주해 와 살면서 독자세력을 형성하다가 죽은 인물이다. 장씨무덤은 기본적으로 벽돌무덤으로 만들었지만, 일부에 석재가 사용되었다. 그것은 이 지역에 돌무덤의 축조라는 새로운 변화상을 반영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와 유사한 사례는 대방태수 장씨무덤에서도 찾을 수 있다.
(2) 대방태수 장씨무덤
황해북도 봉산군 문정면 소봉리에서 발견, 조사되었다. 성은 장씨이지만 이름은 알 수 없어, 일반적으로 ‘대방태수 장무이(帶方太守張撫夷)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무덤은 밑변 길이가 30m에 달하는 대형 벽돌무덤이다. 구조는 널방과 널길 그리고 널길 좌우에 마련된 측실(耳室)이 있어 2실 무덤의 형태를 띠고 있다. 널방은 궁륭상의 천장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사 당시 널방에서 큰 판석이 발견되었는데, 이를 주목하여 천장돌이라고 해석한 견해가 있는데(정인성, 2010), 필자도 타당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볼 경우 이 무덤은 벽돌무덤이지만 천장부는 석재를 사용한 무덤이라 할 수 있겠다.
이 무덤에서는 다수의 글자가 새겨진 벽돌이 출토되어 축조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가 나왔다. 연대 표기가 생략되고 무신(戊申)이란 간지만 남아 있어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지만, 348년(동진 목제 영화 4년)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무덤은 낙랑군·대방군 멸망 이후 30여 년이 지난 뒤에 축조되었음을 뜻한다.
또한 주인공의 신분을 추정할 수 있는 명문벽돌도 발견되었는데, 사군 대방태수 장무이전(使君帶方太守張撫夷塼), 태세신 어양장무이전(太歲申漁陽張撫夷塼), 태세재무 어양장무이전(大歲在戊漁陽張撫夷塼), 장사군전(張使君塼) 등의 관직명이 새겨져 있다. 이는 장씨가 생전에 역임한 관직을 나열한 것으로, 이를 통해 몇 가지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첫째, 무덤 주인의 출신지를 알 수 있다. 주인공 장씨는 어양군 출신이다. 어양군은 오늘날 중국 하북성 북경시(北京市) 부근인 계현(薊縣) 지역으로, 장씨는 이 근처에서 살다가 이주해 온 인물이라는 점을 추정할 수 있다. 그는 황해도 봉산군 지역에 살다가 죽은 뒤에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이곳에 묻힌 인물이었다.
둘째, 무덤 주인의 관직에 대하여 알아보자. 장씨의 관직은 사군(使君)+대방태수(帶方太守)+무이(撫夷)로 나눌 수 있다. 사군은 천자의 명을 받아 직무를 수행하는 자에 대한 존칭으로 일종의 칙사와 비슷한 개념이다. 또한 관직명으로서 태수를 부군(府君)이라고 부르는 데 비하여 자사(刺史)의 별칭이라고도 한다. 즉, 천자의 명령을 수행하는 대방태수 장 아무개란 뜻이다. 무이는 무이교위(撫夷校尉)라는 관직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주 019 무이교위라는 관직명을 통해서 이 지역에 사는 이민족을 안무했음을 알 수 있다.주 020
한편, 314년 대방군이 멸망한 후 30여 년이 지난 후에도 대방태수라는 관직이 현지에서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무덤 주인 장씨는 이주민이었지만 대방태수라고 하는 토착적・지역적 성격이 강한 관직을 사용한 것이다. 이 무덤은 낙랑고분 가운데 태수급 관리의 분묘로서는 최초의 예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당시 대방군은 이미 요동 지방으로 옮겨가서 요서 지방에서 세력을 형성한 모용씨의 행정군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한반도 중・북부 지역에서 대방태수라는 관직이 실질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볼 때 이 관직은 실체를 인정하기 어렵다. 장씨가 사용한 관직은 같은 시기 고구려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관직이다. 그렇다면 장씨가 낙랑군·대방군의 옛 땅에서 ‘사군 대방태수 장무이’라는 허구화된 고위관직을 스스로 만들어 칭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림5 | 대방태수 장씨무덤(정인성, 2010)
장씨가 들어온 경로를 생각해보자면, 요서 지방에 있던 전연 모용씨의 존재를 감안해 볼 때 해로를 통해 낙랑군·대방군 고지로 이주해 왔던 것으로 생각된다. 장씨가 연호를 사용하지 않아 이주 시기를 비롯한 자세한 사정을 알 순 없다. 제반 상황을 감안해 볼 때 무덤 주인인 장씨가 연호를 사용하였다면 후조의 연호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건무 14년에 해당한다. 하지만 장씨가 연호를 사용을 하지 않은 것은 어쩌면 장씨가 이주해 오기 이전의 정치적 상황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봉산군 지역에서 연호 사용의 효율성을 기대하기 어려웠을 만한 기층사회의 상황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장씨무덤에서 남쪽으로 4km 떨어진 곳에 지탑리토성(唐土城)이 있다. 이로 볼 때 장씨는 황해도 봉산군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장씨는 벽돌무덤 축조 전통이 있는 지역에 이주해 와 살면서 독자세력을 형성하다가 죽은 인물이다.
(3) 요동·한·현도태수 동리무덤
평양에서 동리라는 인물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1932년 평양역 구내에서 발굴조사된 벽돌무덤이다. 이 무덤에서는 글자를 새긴 벽돌이 발견되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野守建 榧本龜次郞, 1933). 글자를 새긴 벽돌에는 “영화 9년 3월 10일 요동·한·현도태수령 동리조(永和九年三月十日遼東韓玄菟太守領佟利造)”라 적혀 있다. 이 내용은 ‘영화 9년(동진 목제의 연호로 353년) 3월 10일에 요동태수, 한태수, 현도태수라는 관직을 지낸 동리라는 인물을 위해 만들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 무덤이 축조된 연대는 353년인데, 동진의 연대 표기 방식인 ‘영화(永和)’를 채용하였다. 또한 동리의 신분을 이해할 수 있는 관직 명칭이 기록되었다.
무덤 주인의 관직에 대하여 좀 더 알아보자. 관직 명칭은 요동(遼東)+한(韓)+현도(玄菟)+태수(太守)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는 동리라는 인물이 역임한 관직을 나열한 것이거나 또는 포괄적으로 어느 한 시기의 관직을 뜻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관직이 어느 쪽을 의미하는지 논의하기 이전에, 이 관직 자체를 그대로 인정하기 어려운 몇 가지 문제가 있다.주 021
동리는 벽돌무덤 축조 전통이 있는 지역에서 독자세력을 형성하며 활동하다가 죽은 인물이다. 동리무덤은 기본적으로 벽돌무덤으로 만들었지만, 일부에 석재가 사용되었다. 그것은 이 지역에서 유행한 돌무덤 축조라는 새로운 변화를 반영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림6 | 요동·한·현도태수 동리무덤
이상 벽돌무덤의 주인공인 세 인물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검토하였다. 검토 결과를 정리해보면, 앞에 제시한 3인의 무덤은 순수한 벽돌무덤이 아니라 벽돌에다가 석재를 혼합하여 축조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대방태수 장씨무덤(342년), 서읍태수 장씨무덤(348년)의 경우는 천장부를 석재로 덮었다. 벽돌무덤이지만 무덤의 천장이나 연도의 이마 부분에 돌을 사용한 무덤은 이미 오래 전부터 평양 지역의 전통이라고 한다.주 022 동리무덤(353년)의 경우는 벽돌무덤의 상층부를 석재로 쌓았다. 석재가 보다 많이 사용된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이 지역의 전통 묘제인 벽돌무덤이 퇴화되고 석실봉토분이라는 새로운 무덤 양식이 출현하는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안악3호분(357년)에 이르러서는 석실봉토분으로 변화하였다. 이와 같이 무덤 양식에 나타난 미묘한 변화상은 낙랑군·대방군이 멸망한 지 40여 년이 지난 후의 상황을 나타낸 것이다. 이를 통해 이 지역이 직면한 사회·문화적 변화를 읽어낼 수 있다.
벽돌무덤은 낙랑군·대방군이 멸망하기 이전부터 축조되기 시작하여 멸망하고 100여 년 가까이 존속하였다. 이렇게 볼 때 벽돌무덤 축조 집단은 이 지역에서 기존세력이 계속 유지되는 한편 중원 왕조의 혼란을 비롯한 여러 가지 사유로 이주해 온 집단이라고 생각된다. 이주민이 이 지역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산물일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2) 석실봉토분(벽화무덤)에 나타난 이주민집단
낙랑군·대방군 지역에서 석실봉토분주 023이라는 무덤 양식이 나타난 것은 4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였다. 이 시기 석실봉토분에는 벽화가 그려진 경우가 많다.주 024 다음에서는 이 시기 축조 연대가 분명한 안악3호분(357년), 덕흥리벽화무덤(408년)에 나타난 인물 정보를 토대로 고구려 지역에 들어온 중원계 유이민에 대해 살펴보자.
(1) 안악3호분(동수무덤)
안악3호분은 재령강 북쪽 지역에 인접한 황해북도 안악군에서 발견, 조사되었다. 이 무덤은 다실분의 구조를 가진 석실봉토분이다.주 025 큰 판석으로 여러 개의 무덤방을 만들고 벽화를 그렸다. 이 시기 황해남도 지역에서 석실봉토분의 등장은 고구려의 전통 묘제와는 상이한 것이다. 이 무덤은 규모나 벽화의 내용, 다양성 등에서 고구려 최대, 최고급의 벽화무덤이라고 할 수 있다. 무덤 안에는 생활풍속을 주요 제재로 한 다양한 벽화와 더불어 동수라는 인물의 묘지명이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동수라는 인물에 대하여 구체적인 정보를 알게 된 것은 무덤 벽면에 다양한 글자가 먹으로 쓰여 있는 것을 해독하면서부터이다. 벽면에 쓰인 글씨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그림7 | 안악3호분 전경(국립문화재연구소·남북역사학자협의회, 2006)
이와 같은 동수라는 인물에 대한 묵서(먹글씨)는 묘주 부부의 벽화가 그려져 있는 전실 서측실 문밖의 벽면에 기록되어 있다. 이 글자는 많은 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발견 이후 한·중·일 학계에서 다양한 논쟁이 제기되었다.주 027
각주 027)

학자들의 연구는 주로 무덤의 주인공이 과연 누구냐 하는 문제로 귀결되었다. 안악3호분을 처음으로 소개한 학자는 발굴조사에 직접 참여한 도유호였다. 그러나 그는 1949년 안악3호분의 조사내용을 간략히 보고하는 정도였으며, 무덤의 주인공 문제는 언급하지 않았다. 무덤의 주인공 문제를 처음으로 언급한 것은 김광진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동수의 묘지명을 근거로 하여 무덤의 주인공을 전연의 망명인 동수로 파악하였다고 한다(전주농, 1959).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당분간 이 무덤에 관한 논의가 전개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동수라는 인물에 대한 정보와 무덤의 주인공이 동수라는 견해는 일찍부터 제기되었다고 한다. 이후 1955년 리여성이 간략하게 고국원왕릉설을 제시하였다. 1956년 북한 측에서는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 주최로 ‘안악3호분의 연대와 무덤의 주인공에 대한 학술토론회’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안악3호분의 주인공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즉 동수(김용준, 황욱, 황철산, 김재효), 미천왕(박윤원), 고국원왕(리여성, 김일출) 등등의 견해가 있었지만, 동수설이 다수를 차지하였다고 한다. 1957년 김용준은 동수묘설을 또다시 적극적으로 제기하였다. 논쟁은 1958년에 발간된 안악3호분 발굴조사보고서(과학원출판사, 『안악 제3호분 발굴보고』) 집필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보인다. 즉 발굴보고서에는 이러한 논쟁을 감안한 듯 무덤의 주인공 문제를 구체적으로 거론하지 않았다. 1959년 전주농은 벽화 속의 인물이 들고가는 깃발 속에서 ‘聖上幡(성상번)’이라는 글씨가 있는 것을 주목하고는, 이를 근거로 해서 진지하게 고구려왕릉설을 제기하였다. 1963년에는 전주농, 박윤원, 주영헌 등이 고구려왕릉설을 보강하여 그 대안으로서 미천왕릉설을 동시에 제기하였다. 이를 계기로 하여 북한 학계의 논쟁은 일단락되었다. 즉 『미천왕무덤』이라는 단행본의 출간(고고학 연구실, 1966)을 계기로 하여 미천왕릉설로 단일화되었다. 이후 20여 년간 북한 학계에서는 미천왕릉설이 정설로서 굳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북한학계의 연구동향에 큰 변화가 나타났다. 1990년 3월 손영종이 고국원왕릉설을 주장한 이래 이를 지지하는 견해가 늘어나 북한 학계의 새로운 정설이 되었다. 한편, 2005년 11월에는 고구려연구재단과 북한 사회과학원 공동학술대회에서 안악3호분의 주인공 문제가 주요한 이슈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여기서는 조희승(『안악3호무덤의 주인공와 신원장수산 유적에 대하여』), 송순탁(『안악3호무덤 행렬도의 력사적 배경에 대하여』)이 발표되었는데, 이들은 무덤 주인을 고국원왕으로 이해하는 종래의 견해를 고수하였다. 남한 학자 중에서도 북한학계의 고국원왕릉설에 동조하는 입장이 나타났다(강인구, 1991). 한편. 안악3호분과 유사한 형태의 무덤이 인근에서 발굴조사되었는데, 태성리3호분이다. 이 무덤은 묘실의 구조나 규모 등에서 안악3호분과 유사한 형태를 보이는 고구려 벽화무덤이다. 두 무덤의 유사성에 착안하여 북한 학자들은 이 무덤을 미천왕릉(안악3호분은 고국원왕릉)으로 비정하기도 한다(김인철, 2002; 송순탁, 2005). 이와 같은 북한 학계의 연구경향을 요약해본다면, 안악3호분의 주인공이 미천왕에서 고국원왕으로 바뀌었지만, 기본적으로는 무덤의 주인공을 고구려왕으로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안악3호분의 발굴 소식은 인접한 중국, 한국, 일본 학계에서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안악3호분의 존재를 가장 먼저 소개한 것은 중국 학계이다. 1952년 숙백(宿伯)은 안악3호분의 조사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고는 무덤의 주인공을 동수라고 파악하였다. 이후 양홍(楊泓, 1958), 홍청옥(洪晴玉, 1959), 소철(蘇哲, 1999), 손진기(孫進己, 2004) 등이 관심을 가졌는데, 중국 학계는 대체로 동수묘설을 지지하고 있다. 일본 학계에서 처음으로 안악3호분에 관심을 가진 학자는 이진희였다. 그는 무덤의 주인공을 동수라고 파악하였다(이진희, 1956). 그 후 구마가이 노부오(熊谷宣夫, 1958)의 소개가 있었고, 오카자키 다카시(岡崎敬, 1964)는 요양 지역의 무덤과 비교하여 동수묘설을 주장하였다. 이후 일본 학계는 대체로 동수묘설을 지지하게 되었다.
남한 학계는 채병서에 의하여 이 사실을 접하게 되었다(채병서, 1954; 1967). 그는 안악3호분의 발굴조사에 직접 참여하였던 인물이라고 하는데, 동수묘설을 주장하였다. 이후 김원룡은 고구려 고분벽화의 전반적인 발전 과정 속에서 동수묘설을 주장하였다(김원룡, 1961). 김정배는 주인공 논쟁을 정리하여 소개하였는데, 미천왕릉설에 무게를 실었다(김정배, 1978). 공석구는 안악3호분 문제를 보다 심층적으로 접근하였다. 무덤 안에 기록된 묵서 명문 중에 동수의 묘지문 내용을 중국의 경우와 상호 비교해서 구체적으로 고찰해보고는 동수묘설을 지지하였다(공석구, 1989). 이후 공석구는 안악3호분의 벽화에 나타나는 물상 중 무덤 주인공의 신분과 관련되는 물건(절, 당, 책과 관) 등을 구체적으로 검토하는 일련의 연구결과를 발표하였다.
안악3호분의 발굴 소식은 인접한 중국, 한국, 일본 학계에서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안악3호분의 존재를 가장 먼저 소개한 것은 중국 학계이다. 1952년 숙백(宿伯)은 안악3호분의 조사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고는 무덤의 주인공을 동수라고 파악하였다. 이후 양홍(楊泓, 1958), 홍청옥(洪晴玉, 1959), 소철(蘇哲, 1999), 손진기(孫進己, 2004) 등이 관심을 가졌는데, 중국 학계는 대체로 동수묘설을 지지하고 있다. 일본 학계에서 처음으로 안악3호분에 관심을 가진 학자는 이진희였다. 그는 무덤의 주인공을 동수라고 파악하였다(이진희, 1956). 그 후 구마가이 노부오(熊谷宣夫, 1958)의 소개가 있었고, 오카자키 다카시(岡崎敬, 1964)는 요양 지역의 무덤과 비교하여 동수묘설을 주장하였다. 이후 일본 학계는 대체로 동수묘설을 지지하게 되었다.
남한 학계는 채병서에 의하여 이 사실을 접하게 되었다(채병서, 1954; 1967). 그는 안악3호분의 발굴조사에 직접 참여하였던 인물이라고 하는데, 동수묘설을 주장하였다. 이후 김원룡은 고구려 고분벽화의 전반적인 발전 과정 속에서 동수묘설을 주장하였다(김원룡, 1961). 김정배는 주인공 논쟁을 정리하여 소개하였는데, 미천왕릉설에 무게를 실었다(김정배, 1978). 공석구는 안악3호분 문제를 보다 심층적으로 접근하였다. 무덤 안에 기록된 묵서 명문 중에 동수의 묘지문 내용을 중국의 경우와 상호 비교해서 구체적으로 고찰해보고는 동수묘설을 지지하였다(공석구, 1989). 이후 공석구는 안악3호분의 벽화에 나타나는 물상 중 무덤 주인공의 신분과 관련되는 물건(절, 당, 책과 관) 등을 구체적으로 검토하는 일련의 연구결과를 발표하였다.

그림8 | 안악3호분의 여주인공(국립문화재연구소·남북역사학자협의회, 2006)

그림8 | 안악3호분의 남주인공(국립문화재연구소·남북역사학자협의회, 2006)
이와 같은 학계의 다양한 해석을 염두에 두고서 동수라는 인물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먹글씨는 동수라는 인물에 대한 사망일자, 동수가 역임한 관직과 작위, 동수의 출신지와 성명, 사망한 나이 등 신상정보를 간략하게 기록하였다. 동수라는 이름은 『자치통감』에서 발견되는데, 요서 지방의 모용씨 정권에서 발생한 내란을 피해서 336년에 동수와 곽충이라는 인물이 고구려로 이주해 왔음을 기록하였다. 역사서에 기록된 동수와 그의 무덤이 실제로 발견된 것이다. 이 무덤은 기본적으로는 석실분이다. 하지만 벽돌을 무덤의 빈 공간을 메우는 용도로 사용한 흔적이 있다. 이처럼 기본적으로 석실분이지만 무덤에 일부 벽돌을 사용한 예는 상당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양시 낙랑구역 낙랑동에는 근래 고구려 벽화무덤이 여러 개 출토 조사되었는데, 기본적으로 석실분이면서도 무덤 안에 일부 벽돌이 발견된다고 한다. 벽돌무덤 축조 풍습이 석실무덤에 일부 반영된 것으로 생각된다.
글자의 내용을 간단히 알아보자. 첫째로 동수의 사망일자(영화 13년 10월 26일)를 기록하였다. 안악3호분에 동진의 연호 기년이 채용된 사실은 동수묵서명뿐만 아니라 이 고분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런데 영화 13년(357년)이란 연대 표기는 문제가 있다. 영화라는 연호는 동진 목제가 재위 12년까지 사용하다가 13년째 되던 해 정월에 승평이란 연호로 바꾸었다. 따라서 동수가 사망한 햇수를 기록한 영화 13년은 승평 원년을 잘못 표기한 것이다. 이는 동진에서 연호를 바꾼 사실을 한반도에서 약 10개월 동안이나 알지 못했음을 나타낸다.
둘째로 동수의 관작인 사지절 도독제군사 평동장군 호무이교위 낙랑상 창려·현도·대방태수 도향후를 기록하였다. 이는 관직(사지절 도독제군 사평동장군 호무이교위 낙랑상 창려·현도·대방태수)과 작위(도향후)로 구성되어 있다. 전연의 모용씨 정권에서 사마(司馬)라는 관직에 있던 동수가 336년 한반도로 도망해 온 이후 21년 만에 나타난 그의 관직이다. 외관상으론 체계적이고도 호화스런 관직으로 보여져 동수가 한반도로 도망해온 이후의 생활상을 연상케 한다.주 028
셋째로 동수의 출신지를 기록하였다. 출신지는 ‘유주 요동(군) 평곽(현) 도향 경상리’이다. 이 지명은 일정한 체계에 따라 기록되었다. 유주 → 요동(군) → 평곽(현) → 도향 → 경상리로 구분되어 주 → 군 → 현이 순차적으로 기록된 것이다. 진(晉) 왕조의 지방행정조직인 군현제의 틀로 동수의 출신지를 표기한 것이다. 출신지 기록은 동수가 요서 지역에서 이주해온 인물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한편, 동수는 본래 낙랑군 지역 토착호족 출신이었는데, 요서 지역에 살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인물이라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이동훈, 2010).
안악3호분은 고구려 벽화무덤 중 단연 최대급이라는 점에서 학자들의 호기심과 다양한 해석을 불러일으켰다. 이 논쟁은 안악3호분의 주인공이 고구려왕인가, 아니면 망명객 동수인가 하는 문제로 정리할 수 있다. 그 논쟁거리를 정리해보자.
① 묵서명은 무덤 주인공의 것인가, 동수의 것인가
고구려왕릉설에서는 묵서명을 동수 개인의 것으로 파악한다. 묵서명이 무덤 주인공과 관련이 없다는 해석이다. 묵서명은 그 하단부에 그려진 인물, 즉 ‘장하독(帳下督)’이란 관직명을 가진 인물에 대한 것으로 파악한다. 그렇다면 동수는 바로 장하독이란 인물이 된다. 따라서 고구려왕릉설에서는 묵서명의 가치를 크게 인정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묵서명을 낙서로까지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전주농, 1959). 또한 동수묵서명이 문 입구의 궁벽진 곳에 조잡한 모습으로 씌여 있다고 하여 무덤 주인과의 관련성을 부정하기도 한다. 나아가 동수묵서명이 무덤 주인의 묘지가 될 수 없다는 근거로 반대편에 있는 또 다른 장하독의 머리 위에 있는 글자의 흔적을 제기하기도 한다(박진욱, 1990). 이는 북한 학계의 새로운 발견이고 고구려왕릉설이 존립하는 중요한 논거가 된다. 사실 동수 이외에 또 다른 장하독의 묘지명이 존재한다면 동수묘설은 근거가 희박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로 발견한 묵서명의 글자 내용 등이 흐린 상태여서 상황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어렵다.
동수묘설에서는 묵서명을 무덤 주인공의 것으로 파악한다. 묵서명이 무덤 주인의 묘지가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동수가 안악3호분의 주인공이 된다. 동수라는 한 개인의 묘지문이 씌여 있다는 사실은 동수묘설의 중요한 존립 근거가 된다. 이 묵서명은 4세기 당시 중원 지역에서 유행한 일반적인 묘지문 표기 방식과 큰 차이가 없다고 한다. 나아가 무덤 안에 무덤 주인공 이외의 인물에 대한 묘지명을 써넣은 사례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고 한다.
② 묵서명 관직과 주변 인물 관직의 서열관계 비교
서측실 입구에서 바라다보이는 안쪽의 내부 벽면(서벽)에는 무덤의 주인공상과 장방생활도가 그려져 있다. 즉 무덤의 주인공이 평상에 앉아있고 그 앞에는 좌우 2인씩 관리가 각기 도열해 있다. 이들 관리 위에는 각기 기실(記室: 한 손엔 홀을, 다른 한 손엔 붓을 들고 무언가 기록하는 형상을 한 남자)과 소사(小史: 기실 뒤에서 손에 홀을 잡고 있는 여인) 그리고 성사(省事: 두 손으로 문서를 펼쳐 들고 있는 남자)와 문하배(門下拜: 뒤쪽에서 두 손으로 홀을 들고 있는 남자) 등 붉은 색의 글씨로 쓴 관직명이 있다. 이 그림은 무덤의 주인공이 장방에 앉아서 부하들과 함께 정사를 돌보는 장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서측실의 입구에 기록된 묵서명 하단에 한 인물이 그려져 있는데, 머리 우측부에 붉은 글씨로 장하독(帳下督)이라는 관직명이 기록되었다.
이는 무덤 속 인물에 대한 신분, 즉 관직을 알려주는 단서가 된다. 나아가 무덤 주인의 신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결국 무덤 주인과 그 주변 부하들과의 서열관계를 통해 동수가 주인공인지 여부를 판별하는 잣대이다. 여기서 장하독이란 관직이 동수의 관직인지의 문제로 연결된다. 종래 무덤의 주인공 문제가 되풀이되었던 배경에는 바로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하여 분명한 해석을 제시하지 못한 데 있다. 따라서 무덤 주인과 그 주변인물과의 관계를 서로 비교하여 이들의 상하관계 또는 예속관계를 밝혀낼 수 있다면 무덤의 주인공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명된다.
고구려왕릉설에서는 동수와 장하독이란 인물을 동일인으로 파악한다. 무덤 주인공 옆 시위 인물들의 관직(기실, 소사, 성사 문하배)과 입구를 지키는 인물의 장하독이란 관직을 『진서』 직관지에서 대조해보면 왕의 부하로 나타나기도 한다. 따라서 시위 인물을 왕의 신하로 해석할 수 있다면 자연히 중앙에 있는 무덤의 주인공은 고구려왕이 된다. 또한 묵서명을 분석해보면 신분이 왕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동수와 무덤의 주인공은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 나아가 동수묵서명은 장하독이란 인물의 주변에 씌여 있다. 따라서 동수묵서명은 서벽에 그려진 무덤의 주인공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한다.
동수묘설에서는 동수와 장하독이란 인물을 별개 인물로 파악한다. 무덤 주인공 옆 시위 인물들의 관직과 입구를 지키는 인물의 장하독이란 관직은 고구려의 고유한 관직이 아니라 중원 왕조의 관직이다 이들 관직은 『삼국사기』 등의 사료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들 관직을 『진서』 직관지와 대조해 보면 대체로 태수급의 부하로서 나타난다. 그렇게 볼 때 동수는 관직이 태수급에 해당하기 때문에 무덤의 주인공으로 해석할 수 있다. 나아가 동수 관직과 그 아래 그려진 인물의 관직(장하독)의 위계관계를 비교해보면, 이들은 상하관계 또는 주종관계로 나타난다. 따라서 동수의 관직이 가장 높은 위계에 해당하여 무덤의 주인공을 동수로 파악한다.
③ 무덤의 규모와 고구려왕을 지칭한다는 ‘성상번’ 문제
안악3호분은 남북 길이 33m, 동서 길이 30m, 높이가 6m가량 되는 초대형 무덤이다. 큰 판석으로 짜인 석실분인데, 남쪽인 앞으로부터 연도, 연실, 전실, 후실로 구성되어 있다. 전실에는 좌우에 조그만 옆방(側室)이 하나씩 달려 있다. 이는 삼국시대 벽화무덤 중에서 단연 최대급이라 할 수 있다. 후실의 동쪽에 마련된 회랑부에는 무덤 주인공의 대행렬도가 그려져 있다. 무덤 주인공이 타고 있는 수레 앞부분에서 주인공을 인도하고 있는 의장병이 들고 있는 검은 색 깃발 중에 “성상번(聖上幡)”이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이 글자는 무덤 주인공의 신분을 나타내는 근거가 되고 있다.

그림9 | 성상번 깃발
고구려왕릉설에서는 안악3호분이 고구려벽화무덤 중에서 단연 최대급에 속하고, 묘실의 구조도 복잡하고 웅대하며, 대행렬도에 등장하는 인물이 수백 명 이상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규모로 보아서 안악3호분은 고구려 왕릉급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또한 무덤 주인공의 수레 앞부분 의장기수가 들고 있는 깃발에 쓰여 있다고 하는 ‘성상번’이라는 글씨는 분명히 확실하다고 한다. 따라서 ‘성상(聖上)’이 왕을 상징하는 용어이기 때문에, 무덤의 주인공은 고구려왕이라고 한다. 이는 고구려왕릉설의 강력한 논거가 되고 있으며,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동수묘설에서는 ‘성상번(聖上幡)’이라는 글씨가 확실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안악3호분 발견 초기부터 조사자들 사이에서는 ‘聖’자의 인정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전주농, 1959). 실제로 그림 9를 보면 ‘聖’자의 윗부분 글자, 즉 ‘耳’와 ‘口’가 서로 뒤바뀐 형태의 글자(■)로 나타나고 있다. 『안악3호분 발굴조사보고서』에도 ‘성상번’이라고 추정은 했지만 ‘聖’에 대해서는 불확실한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동수묘설에서는 아직까지 이 부분에 대한 뚜렷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④ 주인공이 착용한 관모는 고구려왕이 쓰는 백라관일까
안악3호분을 보면 무덤 주인공의 형상이 두 번 나타난다. 하나는 전실 서측실 입구에서 바라다보이는 벽면(서벽)에 그려진 무덤의 주인공 부부상이다. 무덤의 주인공이 평상에 앉아 있고, 그 앞에 좌우 2열로 관리가 각기 도열해 있다. 무덤의 주인공은 정면상인데, 머리 부분에 관모를 착용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후실 회랑부에 있는 대행렬도인데, 무덤의 주인공이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가는 모습이 있다. 주인공은 측면상인데, 머리 부분에 관을 착용하고 있다.두 그림에 나타난 무덤의 주인공은 흑색의 책(幘) 위에다가 투명한 백색 계통의 관을 썼는데, 책의 중앙부 윗부분을 보면 백색의 옥(屋)을 얹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림10 | 안악3호분 남주인공의 관모(정면도)

그림10 | 안악3호분 남주인공의 관모(측면도)
고구려왕릉설에서는 무덤의 주인공이 착용한 관을 고구려왕이 착용했다는 백라관(白羅冠)이라고 해석한다. 『구당서』 열전 고려에 따르면 고구려왕은 다섯 가지 색의 비단옷을 입었고 금으로 장식한 백라관을 착용하였으며, 대신들은 계급에 따라서 청라관이나 비라관을 썼다고 기록하였다.
동수묘설에서는 백라관설을 부정한다. 그 대안으로 무관의 관직에 있는 인물이 착용한 무관(武冠)이라고 해석한다. 『진서』 직관지를 보면 흑책 위에다가 무관을 착용하는 계층에 대하여 주로 3품의 장군을 비롯한 일부 장군 계층이었던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동수의 관직은 3품 장군에 해당하므로, 안악3호분의 주인공의 관을 착용할 수 있는 신분적 위치에 있다.
⑤ 무덤의 입지 여건
안악3호분은 황해남도 안악군 오국리에 소재한다. 축조 연대는 4세기 중엽(357년)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시기 고구려의 수도는 국내성에 위치하고 있었다. 안악3호분의 위치는 무덤 주인공 문제와 관련하여 중요한 근거가 된다. 당시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고구려 왕릉을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 축조할 수 있었느냐 하는 문제이다. 이는 당시 고구려의 지방 지배 방식과 관련되는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림11 | 안악3호분의 위치
고구려왕릉설에서는 종래 이 부분에 대하여 진지한 해석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1990년 무덤의 주인공 비정이 미천왕에서 고국원왕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주요한 논거로서 제시되었다. 즉, 343년 고국원왕이 평양 동황성(북한은 현 평양 지역으로 해석함)으로 천도한 이후 계속 머물고 있다가 371년 평양성에서 전사하였으므로, 무덤이 국내성 주변에 조영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하였다(박진욱, 1990). 또한 황해남도 신원군에 소재한 장수산성 일대에서 대규모 고구려유적이 발견된 바 있는데, 이 유적을 남평양유적이라고 이해하였다. 따라서 고국원왕이 전사한 평양성을 신원군 지역으로 비정하고, 그 부근인 안악 지방에 고국원왕의 무덤을 축조하였다고 해석한다(孫永鐘, 1990).
동수묘설에서는 무덤 입지 조건의 부자연스러움을 지적한다. 한국사에서 왕릉은 거의 대부분 왕성에서 멀지않은 지역에 만들어져 있다고 한다. 당시 수도가 국내성이었고, 그 주변에는 광개토왕릉을 비롯하여 역대 고구려 왕릉이 분포되어 있는데, 유독 이 왕릉만 국도에서 멀리 떨어진 안악 지방에 조영된 것이 부자연스럽다는 지적이다(김용준, 1957). 또 무덤의 축조 전통과 관련하여, 4세기대 고구려왕의 무덤은 대부분 적석총인 데 비하여 안악3호분은 석실봉토분이므로, 고구려 왕릉의 일반적인 축조 경향에서 벗어난다고 한다.
⑥ 주인공 옆에 세워진 의장물
무덤의 주인공과 그 우측에 있는 신하(省事라는 관직이 기록되어 있음) 사이에 세워져 있는 물건이 있다. 이 의장물의 명칭을 절(節)이라고 하는데, 금속으로 보이는 흑색의 받침대에 끼워져 있다. 붉은 색을 칠한 기둥부 상단에는 3층의 털장식이 붙어 있다. 이 털장식은 모두 내부에 흑색의 털장식 흔적이 보이며 그 외곽에 적색의 털장식을 덧붙인 모습을 띄고 있다. 또한 첫 번째와 두 번째 털장식 사이에는 방형으로 된 적색의 헝겊 비슷한 것이 기둥에 묶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다른 하나는 무덤의 주인공이 외출하는 광경을 표현한 대행렬도에서 찾을 수 있다. 무덤의 주인공의 수레 뒤편을 보면 기마인물이 있는데, 왼손에 절을 들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고구려왕릉설에서는 안악3호분의 주인공 옆에 세워져 있는 절의 존재에 대하여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
동수묘설에서 새로 주목한 것이 절(節)이다. 절은 고대 중원 왕조에서 황제나 왕이 하사하는 위세품이다. 주로 외국으로 파견되는 사신이나 전쟁터에 나가는 장군에게 수여되었는데, 이들은 절을 가지고 권한을 행사하였다. 안악3호분의 주인공 옆에 놓인 절은 동수의 관직 중에 나타나는 ‘사지절(使持節)’과 자연스럽게 연관된다. 사지절을 가진 자는 자신이 위임받은 권한으로서 녹봉 2,000석 이하의 관리를 죽일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고 한다. 문제는 안악3호분의 주인공 옆에 놓인 절이 누구에게 받은 것이냐 하는 데 있다. 그런데 무덤의 주인공이 수여받은 절을 자신의 옆에 두고 이를 주변에 과시하는 장면은 안악3호분의 주인공을 고구려왕으로 비정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이 당시 각지에서 독립한 여러 정치집단은 각기 절을 제작·수여하고 있다는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볼 때, 고구려왕은 오히려 절을 수여할 만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절과 유사한 성격을 띠고 있는 것 중에 당(幢)이란 의장물이 있다. 안악3호분에는 모두 5개소에서 당이 나타나고 있다. 당은 절보다 한 단계 아래의 신분 계급이 소지하는 위세품이다. 본래 당은 중원 왕조에서 천자가 수여하는 물건이었다. 그런데 4세기 무렵에 이르러서는 중원 왕조의 정치적인 혼란으로 인하여 각지에서 정권을 잡은 세력가들이 천자의 이름을 빌어 당을 수여하였다. 그들은 당을 주변 국가나 세력집단에 수여해줌으로써 그 정권의 정통성이나 자신의 존재를 주변에 과시하였다. 이 시기 고구려는 급격한 영역 확장으로 자신의 세력권으로 편입한 다양한 세력에게 당과 같은 위세품을 수여하여 통치 수단으로 활용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림12 | 안악3호분에 나타난 절의 모습(주인공 옆)

그림12 | 안악3호분에 나타난 절의 모습(주인공 수레 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안악3호분의 주인공 문제는 다양한 방면에서 논쟁이 진행되었다. 주인공을 누구로 결정하느냐에 따라서 4세기 고구려사의 전개 과정에 대한 이해는 확연하게 달라진다. 고구려왕이라면 고구려가 낙랑군·대방군 지역을 직접 지배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반면에 동수라면 고구려의 이 지역 지배는 직접지배보다 간접지배였다는 관점에 무게가 실린다.
학계는 이 지역의 지배 문제를 염두에 두고서 다양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주인공에 대한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는 동수를 주인공으로 해석한다. 또한 이러한 입장에도 학자마다 해석의 차이가 있다. 고구려와 동수의 정치적 관계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크게 세 가지 견해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고구려와 동수와의 관계가 독립적이었다고 이해한다(金元龍, 1961; 武田幸男, 1978). 즉, 고구려에 대해서 동수는 이 지역에서 독립적이고 자치적인 상태였다고 이해한다. 둘째는 동수가 낙랑군·대방군 고지에 배치된 것은 고구려의 일정한 영향력하에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이해한다(李成市, 1992; 김미경, 1996; 공석구, 2000; 여호규, 2009). 하지만 고구려의 영향력이라는 측면에서도 학자마다 차이가 있다. 자치적인 상황 속에서 어느 정도 고구려의 영향력을 인정하는 견해(공석구, 2004), 고구려가 막부제를 활용하여 이 지역을 지배했다는 견해(임기환, 1995) 등이 있다. 셋째는 고구려의 직접지배를 연상케 하는 입장이다(안정준, 2013).
이와 같은 학계의 견해 중에서 합리적인 것은, 고구려가 낙랑군·대방군 고지를 장악한 이후 즉시 이 지역에 대한 행정력을 수반한 직접지배방식을 취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고구려는 이 지역의 사회·문화적 특수성을 감안하여 지역의 토착세력 또는 망명인을 이곳에 배치하여 지배하도록 하는 간접지배방식을 취했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좀 더 직접적인 지배에 대해서는 고구려 관직과 중원 왕조의 관직이 함께 기록된 덕흥리벽화무덤을 통해서 추적할 수 있다.
(2) 덕흥리벽화무덤(□□씨 진무덤)
덕흥리벽화무덤은 대동강 하류에 위치한 남포시 지역에서 1976년 12월에 발견, 조사되었다. 이 무덤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1978년 일본의 『アサヒ グラフ』 및 『每日 グラフ』에 벽화 사진이 일부 소개되면서부터였다. 무덤 안에는 생활풍속을 주요 제재로 한 다양한 벽화와 더불어 무덤 주인의 묘지명이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무덤 주인은 성씨 부분이 지워져 알 수 없지만 이름이 진(鎭)이란 인물로 알려졌다. 진에 대하여 구체적인 정보를 알게 된 것은 무덤 벽면에 다양한 글자가 먹으로 쓰여 있는 것(묵서명)을 해독하게 되면서부터이다. 벽면에 쓰인 글씨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군 신도현 도향 중감리 출신으로서 석가모니부처의 제자인 □□씨 진(이름)은 건위장군 국소대형 좌장군 용양장군 요동태수 사지절 동이교위 유주자사라는 벼슬을 역임하였다. 진의 나이 77세에 죽어서 영락 18년(408년, 고구려 연호) 12월 25일에 무덤을 완성하였다. 관을 옮기는 날에 주공이 땅을 봐주고, 공자가 택일하였으며, 무왕이 시간을 선택해 주었다. 일시가 좋아서 장례 이후부터는 부유함이 7세손까지 미치고, 자손이 번창하여 그 벼슬이 제후와 왕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무덤을 만드는 데 수많은 노력이 들었고, 날마다 소와 양을 잡아 술과 고기, 밥, 반찬을 다 먹지 못할 정도였다. 아침식사로 먹을 간장을 한 창고 분량이나 두었다. 이를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며, 이 무덤이 영원하기를.주 029
이 기록은 무덤 주인공의 출신지, 역임한 관직, 무덤을 만든 연대(고구려 광개토왕의 연호인 영락 18년, 408년)로 구성되어 있다. 이 무덤이 학자들의 관심을 끈 것은 글자 중에 고구려 광개토왕이 제정했다고 알려진 영락(永樂)이라는 고구려 연호가 함께 쓰여 있다는 점이었다. 이와 같은 먹글씨의 존재는 고구려사의 또 다른 이면을 드러내는 것이어서 학자들이 주인공의 국적을 주목하게 되었다. 문제는 주인공이 고구려인인가, 아니면 망명객인가로 집약되었다.
① 무덤 주인의 국적
무덤 주인의 국적은 덕흥리벽화무덤에 대한 역사·고고학적인 상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그 단서는 무덤 벽면에 먹글씨로 “□□군 신도현 도향 중감리(□□郡信都縣都鄕中甘里)”라는 내용에 있다. 이 글씨는 주인공의 출신지를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 이 중에서 ‘신도현(信都縣)’에 대한 정보는 뜻밖에도 『고려사』에 나타난다. 『고려사』 지리지에 ‘가주 본 고려 신도군(嘉州本高麗信都郡)’이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 기록된 ‘본 고려’가 고구려를 뜻하는 것이냐, 아니면 고려를 뜻하는 것이냐에 따라 논쟁이 있었다. 무덤의 주인공을 고구려인으로 해석하는 입장에서는 고구려로 해석하였고, 망명인설을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고려로 해석하고 있다.
고구려인설은 주로 북한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김용남이 처음 견해를 표명하였다(김용남, 1979). 그는 신도현을 평안북도의 운전, 박천 지역 일대라고 비정하여 그를 고구려인으로 해석하였다. 이를 근거로 무덤 주인의 관직까지 모두 고구려의 것으로 해석하고는 무덤 주인이 살았던 4세기 말~5세기 초에 이르러 고구려의 통치제도는 상당히 정비되어 있었다고 해석하였다. 더욱이 무덤 주인이 역임한 유주자사 관직에 대하여, 이는 “고구려가 한때 요하 유역에서부터 만리장성을 넘어 하북성 북부를 지나 산서성 북부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유주를 설치하고 통치하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까지 해석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같은 해에 출간된 『조선전사』 3에서 구체화되어 북한 학계의 공식 견해로 자리 잡게 되었다. 즉 『조선전사』 제4장 「요동회복·영토의 확장」 제2절 「유주지역에로의 진출. 주, 군, 현의 설치」에서 그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이를 간략히 요약해 보면 무덤 주인의 출신지로 기록되어 있는 ‘□□군 신도현(□□郡信都縣)’을 『고려사』 지리지 북계조에 보이는 ‘가주 본 고려 신도군(嘉州本高麗信都郡)’ 기록과 연관시켜 이를 평안북도 운전군, 박천군 지역으로 비정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은 ‘□□郡 信都縣’이라는 먹으로 쓴 글자와 ‘가주 본 고려 신도군’이라는 『고려사』 지리지 기록이 어떻게 동일시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며, 또 이에 대한 구체적인 해명도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무덤 주인이 유주자사라는 관직을 역임한 것을 근거로 하여 그를 유주(幽州)의 행정적인 책임자로 해석하고는 고구려가 370년경 전연 왕조의 멸망으로 인하여 혼란에 빠진 북중국 일대로 진격하여 확보된 넓은 영토를 지키기 위하여 광계(廣薊: 현 중국 하북성 지역) 지역에 유주의 행정 치소를 설치하고는 이 지역을 13개 군, 75개 현의 행정구역으로 편성하여 통치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림13 | 덕흥리벽화무덤 안의 모습(동북아역사재단, 2009)
북한에서는 『덕흥리 벽화무덤 발굴조사보고서』를 간행하였다(사회과학원, 1981). 여기서 기존의 고구려인설에 대한 주장을 좀 더 구체화시켰다. 이 보고서에서 주영헌은 덕흥리벽화무덤을 다른 고구려 고분벽화 및 인접 지역의 묘제와 비교하여 결론을 도출하고 있다. 즉 신도라는 지명은 중원 지역에도 고구려에도 있지만, 묘제로 보아 고구려에 소재한 지명으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고 한다. 박진욱은 덕흥리벽화무덤 안에 그려진 ‘13군 태수내조도(13郡太守來朝圖)’와 유주 관할 13군 75현의 명문 내용에 대한 상황을 근거로 삼아 이를 중원의 역대 왕조에서 설치한 유주의 군현 수와 일일이 비교하여 상호 차이점을 도출하고는 이를 결국 고구려 독자의 행정구역인 유주라고 해석하였다. 그는 나아가 고구려의 북중국 지배와 연관된 유주의 설치 시기를 370년부터 376년까지로 보았고, 그 범위를 요하 일대에서 하북성 북부와 산서성 북부의 동쪽에까지 미치는 것으로 비정하였다. 이는 기존의 고구려 대외관계사에 대한 인식체계와는 판이하게 다른 것으로, 실로 고구려로서는 획기적인 영토 확장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87년 북한의 손영종은 『고려사』 지리지 기록에 보이는 ‘본 고려’의 실체가 왕건의 고려가 아니라는 점을 논증해 나갔다. 결국 『고려사』 지리지의 ‘본 고려’가 고구려를 의미할 가능성과 함께 고구려의 멸망 이후인 7세기 말엽 의주 지방을 중심으로 세워진 또 하나의 ‘고려’일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이에 대한 비판은 다케다 유키오(武田幸男, 1989)와 공석구(1990)에 의해 제기되었다. 손영종(1991)은 이들 비판에 대한 반대 비판을 시도하였는데(손영종, 1991) 그것은 주로 다케다 유키오의 주장에 대한 반박이었다고 할 수가 있다. 그는 먼저 『고려사』 지리지에 기록된 ‘본 고려’에 대하여 이는 『고려사』 찬자가 지리지의 형식적 통일을 기하기 위하여 기계적으로 작업한 것이 아니라 선행의 문헌기록을 참조하여 기록한 것이라는 전제에서 ‘본 고려’를 684년 의주 지방을 중심으로 건국된 새로운 고구려국으로 해석하였으며, 또 새 고구려국의 (행정) 지명들은 고구려의 (행정)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러한 손영종의 견해는 그해에 출간된 『조선전사』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손영종의 재비판을 계기로 북한 학계에서는 7세기 말 새로운 고구려국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논문이 나오고 있다. 이 고구려국의 존재에 대하여 손영종은 10세기 초엽에 이르기까지 평안남도와 평안북도 북부 그리고 압록강 중류 우안지역을 포괄하여 지배한 실체로 파악하였다. 또한 장국종은 이를 발해에 예속된 이른바 ‘고려후국(高麗侯國)’으로 해석하고는, 이 고려후국이 처음에는 현 평안남도 성천 지방에 있다가 이후 압록강 중류 지역으로 이주해간 세력으로 파악하였다(장국종, 1992).
그런데 이와 같은 연구결과는 무덤 주인의 국적 문제를 해결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문제의식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하겠다. 설령 북한 학계의 주장을 인정하여 『고려사』 지리지의 ‘본 고려 신도군’ 기록을 고구려의 멸망 이후에 세워진 새고구려국 또는 발해에 예속된 고려후국으로 해석한다고 하더라도, 이를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엽에 걸친 덕흥리벽화무덤에 기록된 내용인 “□□군 신도현 도향 중감리(□□郡信都縣都鄕中甘里)”와 서로 비교하여 일치시키고자 한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부합하지 않는다. 어쨌든 이후 북한 학계에서는 무덤 주인의 국적 문제가 일단락된 듯하다.
망명인설은 대체로 한국, 일본, 중국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다. 1976년 12월 덕흥리벽화무덤이 발견, 조사된 이후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78년 일본의 『アサヒ グラフ』 및 『每日 グラフ』에 벽화 사진이 일부 소개되면서부터였다. 여기에 소개된 먹으로 쓴 묘지문은 우에하라 카즈(上原和)가 평양역사박물관에 진열된 설명문에 의한 것이라 한다. 이를 통해 북한 측에서는 위 명문 중 신도현에 보이는 ‘신도(信都)’라는 지명이 현 평북 운전군 가산에 해당되며, 따라서 무덤 주인을 고구려인이라고 해석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김원룡(1979)은 일본에서 발표된 자료를 검토하면서 신도현은 고구려의 지명이 아니라 중국 하북성 지역에 소재한 지명이라고 해석하고는 무덤 주인을 중국계 망명인이라고 주장하였다. 이후 일본인 다나카 도시아키(田中俊明)은 묘지문의 첫머리에 판독 불능의 상태로 남아 있는 ‘□□군 신도현(□□郡信都縣)’의 ‘□□군(□□郡)’에 대하여 중국의 현 하북성 지역(冀州)에 있었던 ‘안평(安平)’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는데, 그 근거로서 『진서』 지리지 기록을 보면 신도현은 당시 기주에 소속된 안평국의 속현이었다는 점을 들었다. 중국 학자인 유영지(劉永智, 1983)와 강첩(康捷, 1986) 등은 무덤의 벽화나 문자자료에 보이는 중국적 요소를 강조하면서 무덤 주인이 중국인이라고 주장하였다. 특히 강첩은 판독 불능 상태인 ‘□□郡’을 장락(長樂)으로 복원하였다. 장락은 중국 하북성 지역에 소재했던 당시의 행정구역 명칭이다. 또한 일본 학자인 사에키 아리키요(左伯有淸, 1987) 역시 주인공=중국인 설을 주장하였다. 그는 무덤 안에 쓰인 인명과 지명의 기록 방식이 고구려의 기록 방식과 차이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다케다 유키오(武田幸男, 1989)와 공석구(1990)가 차례로 무덤 주인 진(鎭)=망명인설을 재확인하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다케다 유키오의 논지는 신도라는 지명과 『고려사』 지리지의 ‘본 고려’ 기록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다케다 유키오는 신도=고구려지명설의 근거가 되는 『고려사』 지리지 기사를 포괄적으로 분석하였고, 결국 거기에 기록된 ‘본 고려’는 『고려사』 찬자가 다른 지역의 연혁 기사와 서술체제의 통일성을 기하기 위하여 고려시대에 제작된 별호를 지리지에 기계적으로 갖다 붙인 것으로 해석하였다. 요컨대 한국, 중국, 일본의 학자들은 덕흥리벽화무덤의 주인공을 중국인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그림14 | 덕흥리벽화무덤 주인공의 이력을 설명한 먹글씨(동북아역사재단, 2009)
② 무덤 주인의 관직
무덤 주인 진(鎭)이 역임한 관직은 그의 국적과 연결되어 있다. 그의 관직은 건위장군 국소대형 좌장군 용양장군 사지절 동이교위 유주자사(建威將軍國小大兄左將軍龍驤將軍使持節東夷校尉幽州刺史)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인설을 주장하고 있는 북한 학자들의 경우 이 관직을 고구려 관직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에 비해 망명인설을 주장하고 있는 학자들의 경우 이 관직을 망명해 오기 이전의 관직과 망명해 온 이후의 관직으로 구분하려는 경향이 있다. 벽면에 쓴 먹글씨는 영락(永樂)이라는 광개토왕이 제정한 연호를 채용하여 연대(408년)를 표기하였다. 이는 주인공 진과 고구려와의 정치적 관계를 암시하는 것으로서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무덤의 주인공이 역임한 관직 중에 고구려의 관직으로 보이는 국소대형주 030
각주 030)

과 고구려의 요동 지방 지배를 상징하는 요동태수, 유주자사라는 관직을 띄고 있었다.국소대형이란 관위의 예는 중원 왕조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고구려의 관직에서 추정해 볼 수가 있다. 따라서 이것이 종래 진을 고구려인으로 주장하는 근거의 하나가 되어 왔다. 한편 소대형이란 관위는 고구려에서도 동일한 유례가 확인되지 않는다. 단지 『주서』 고려전에 기록된 고구려의 관위를 설명하는 내용 중에 ‘태대형, 대형, 소형, 태대사자, 대사자, 소사자’와 같은 기록에서 소대형의 존재 가능성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이들 관직은 고구려 초기부터 존재하였던 형이나 사자 등의 관직이 분화되어 나타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평안북도 태천군 농오리에 소재하고 있는 고구려산성의 성벽에 쓰인 명문 중에 ‘前部小大使者’라는 구절이 있어 소대사자라는 관직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학계에서 벌어진 논쟁을 요약하여 정리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주인공 진의 관직은 그가 평생 역임한 관직을 순서대로 나열해 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관직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성격상 행정적인 측면과 군사적인 측면에서의 권한과 책임을 각기 규정하고 있으며 이 두 가지 측면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이 점은 당시 중원에서의 관직 수여 경향과 맥락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진의 관직은 성격상 그 분류가 가능해지는데, 건위장군 → 국소대형 또는 좌장군 → 용양장군·요동태수 → 사지절 동이교위 유주자사 등으로 구분해 볼 수가 있다. 여기서 국소대형이란 관직명이 뜻하는 성격에 따라 건위장군·국소대형 → 좌장군 → 용양장군·요동태수 → 사지절 동이교위 유주자사와 같이 볼 수도 있다. 이 점은 국소대형이라는 관직에 대한 검토를 통하여 해결할 문제겠지만, 진이 중원 지역에서 들어온 이주민이라는 점과 국소대형이란 고구려계 관직을 사용한 점에서 볼 때, 진이 망명해 올 당시에는 비교적 높은 신분의 인물이었음을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국소대형 이전의 관직인 건위장군이 망명해오기 이전에 진이 사용했던 관직일 가능성도 가지고 있다. 국소대형은 고구려의 관위 중 6등급 정도에 해당한다. 따라서 진에게 수여된 관직을 고위급이라 하기는 어렵다.
한편, 칠보행사도의 인물 주변에 쓰인 ‘중리도독(中裏都督)’이라는 묵서를 무덤의 주인공 진과 연결시켜 고구려의 근시직(近侍職)에 해당한다고 해석하는 견해(이문기, 1999; 2003)도 있다. 하지만 중리도독 인물상은 무덤 주인공 진과는 다른 인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는 견해도 있다. 후자의 견해가 타당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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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27)
학자들의 연구는 주로 무덤의 주인공이 과연 누구냐 하는 문제로 귀결되었다. 안악3호분을 처음으로 소개한 학자는 발굴조사에 직접 참여한 도유호였다. 그러나 그는 1949년 안악3호분의 조사내용을 간략히 보고하는 정도였으며, 무덤의 주인공 문제는 언급하지 않았다. 무덤의 주인공 문제를 처음으로 언급한 것은 김광진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동수의 묘지명을 근거로 하여 무덤의 주인공을 전연의 망명인 동수로 파악하였다고 한다(전주농, 1959).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당분간 이 무덤에 관한 논의가 전개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동수라는 인물에 대한 정보와 무덤의 주인공이 동수라는 견해는 일찍부터 제기되었다고 한다. 이후 1955년 리여성이 간략하게 고국원왕릉설을 제시하였다. 1956년 북한 측에서는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 주최로 ‘안악3호분의 연대와 무덤의 주인공에 대한 학술토론회’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안악3호분의 주인공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즉 동수(김용준, 황욱, 황철산, 김재효), 미천왕(박윤원), 고국원왕(리여성, 김일출) 등등의 견해가 있었지만, 동수설이 다수를 차지하였다고 한다. 1957년 김용준은 동수묘설을 또다시 적극적으로 제기하였다. 논쟁은 1958년에 발간된 안악3호분 발굴조사보고서(과학원출판사, 『안악 제3호분 발굴보고』) 집필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보인다. 즉 발굴보고서에는 이러한 논쟁을 감안한 듯 무덤의 주인공 문제를 구체적으로 거론하지 않았다. 1959년 전주농은 벽화 속의 인물이 들고가는 깃발 속에서 ‘聖上幡(성상번)’이라는 글씨가 있는 것을 주목하고는, 이를 근거로 해서 진지하게 고구려왕릉설을 제기하였다. 1963년에는 전주농, 박윤원, 주영헌 등이 고구려왕릉설을 보강하여 그 대안으로서 미천왕릉설을 동시에 제기하였다. 이를 계기로 하여 북한 학계의 논쟁은 일단락되었다. 즉 『미천왕무덤』이라는 단행본의 출간(고고학 연구실, 1966)을 계기로 하여 미천왕릉설로 단일화되었다. 이후 20여 년간 북한 학계에서는 미천왕릉설이 정설로서 굳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북한학계의 연구동향에 큰 변화가 나타났다. 1990년 3월 손영종이 고국원왕릉설을 주장한 이래 이를 지지하는 견해가 늘어나 북한 학계의 새로운 정설이 되었다. 한편, 2005년 11월에는 고구려연구재단과 북한 사회과학원 공동학술대회에서 안악3호분의 주인공 문제가 주요한 이슈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여기서는 조희승(『안악3호무덤의 주인공와 신원장수산 유적에 대하여』), 송순탁(『안악3호무덤 행렬도의 력사적 배경에 대하여』)이 발표되었는데, 이들은 무덤 주인을 고국원왕으로 이해하는 종래의 견해를 고수하였다. 남한 학자 중에서도 북한학계의 고국원왕릉설에 동조하는 입장이 나타났다(강인구, 1991). 한편. 안악3호분과 유사한 형태의 무덤이 인근에서 발굴조사되었는데, 태성리3호분이다. 이 무덤은 묘실의 구조나 규모 등에서 안악3호분과 유사한 형태를 보이는 고구려 벽화무덤이다. 두 무덤의 유사성에 착안하여 북한 학자들은 이 무덤을 미천왕릉(안악3호분은 고국원왕릉)으로 비정하기도 한다(김인철, 2002; 송순탁, 2005). 이와 같은 북한 학계의 연구경향을 요약해본다면, 안악3호분의 주인공이 미천왕에서 고국원왕으로 바뀌었지만, 기본적으로는 무덤의 주인공을 고구려왕으로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안악3호분의 발굴 소식은 인접한 중국, 한국, 일본 학계에서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안악3호분의 존재를 가장 먼저 소개한 것은 중국 학계이다. 1952년 숙백(宿伯)은 안악3호분의 조사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고는 무덤의 주인공을 동수라고 파악하였다. 이후 양홍(楊泓, 1958), 홍청옥(洪晴玉, 1959), 소철(蘇哲, 1999), 손진기(孫進己, 2004) 등이 관심을 가졌는데, 중국 학계는 대체로 동수묘설을 지지하고 있다. 일본 학계에서 처음으로 안악3호분에 관심을 가진 학자는 이진희였다. 그는 무덤의 주인공을 동수라고 파악하였다(이진희, 1956). 그 후 구마가이 노부오(熊谷宣夫, 1958)의 소개가 있었고, 오카자키 다카시(岡崎敬, 1964)는 요양 지역의 무덤과 비교하여 동수묘설을 주장하였다. 이후 일본 학계는 대체로 동수묘설을 지지하게 되었다.
남한 학계는 채병서에 의하여 이 사실을 접하게 되었다(채병서, 1954; 1967). 그는 안악3호분의 발굴조사에 직접 참여하였던 인물이라고 하는데, 동수묘설을 주장하였다. 이후 김원룡은 고구려 고분벽화의 전반적인 발전 과정 속에서 동수묘설을 주장하였다(김원룡, 1961). 김정배는 주인공 논쟁을 정리하여 소개하였는데, 미천왕릉설에 무게를 실었다(김정배, 1978). 공석구는 안악3호분 문제를 보다 심층적으로 접근하였다. 무덤 안에 기록된 묵서 명문 중에 동수의 묘지문 내용을 중국의 경우와 상호 비교해서 구체적으로 고찰해보고는 동수묘설을 지지하였다(공석구, 1989). 이후 공석구는 안악3호분의 벽화에 나타나는 물상 중 무덤 주인공의 신분과 관련되는 물건(절, 당, 책과 관) 등을 구체적으로 검토하는 일련의 연구결과를 발표하였다. - 각주 028)
- 각주 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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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30)
국소대형이란 관위의 예는 중원 왕조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고구려의 관직에서 추정해 볼 수가 있다. 따라서 이것이 종래 진을 고구려인으로 주장하는 근거의 하나가 되어 왔다. 한편 소대형이란 관위는 고구려에서도 동일한 유례가 확인되지 않는다. 단지 『주서』 고려전에 기록된 고구려의 관위를 설명하는 내용 중에 ‘태대형, 대형, 소형, 태대사자, 대사자, 소사자’와 같은 기록에서 소대형의 존재 가능성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이들 관직은 고구려 초기부터 존재하였던 형이나 사자 등의 관직이 분화되어 나타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평안북도 태천군 농오리에 소재하고 있는 고구려산성의 성벽에 쓰인 명문 중에 ‘前部小大使者’라는 구절이 있어 소대사자라는 관직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