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고구려의 낙랑군·대방군 지역 지배
3. 고구려의 낙랑군·대방군 지역 지배
고구려는 4세기 이후 급속한 영역 확장을 이루었고, 이 과정에서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종족을 영역권 안에 포함하게 되었다. 특히 고구려는 낙랑군·대방군 지역을 장악하면서 이 지역에 대한 지배를 모색하였다. 그런데 고구려의 이 지역 지배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삼국사기』를 비롯한 문헌기록에는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아 해석에 어려움이 있다. 단지 당시 상황을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자료를 소개한다.
① 고구려 왕 사유(斯由)가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치양(雉壤)에 와서 주둔하며 군사를 시켜 민가를 약탈하였다. 왕이 태자에게 군사를 주어, 지름길로 치양에 이르러서 불시에 공격하여 그들을 격파하고, 적병 5,000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_ 『삼국사기』 백제 근초고왕 24년(369년)
② (백)제왕(근초고왕)이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와서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이에 (고국원)왕은 군사를 내어 막다가 화살에 맞아 이달 23일에 돌아갔다. _ 『삼국사기』 고구려 고국원왕 41년(371)
② (백)제왕(근초고왕)이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와서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이에 (고국원)왕은 군사를 내어 막다가 화살에 맞아 이달 23일에 돌아갔다. _ 『삼국사기』 고구려 고국원왕 41년(371)
① 자료는 고구려와 백제가 처음으로 서로 마주한 장면을 기록한 것이다. 고구려 고국원왕이 군대를 이끌고 치양에 와서 백제군과 격돌한 것을 기록하였다. 치양은 오늘날 황해남도 배천군(白川郡) 지역에 해당한다. 고구려왕이 이끄는 중앙군이 배천 지역까지 진출했다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것은 4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백제와 고구려의 중간지대에 세력을 가지고 있던 낙랑군·대방군의 잔존세력에 대한 영역 확장을 어느 정도 마무리한 데 따른 상황을 설명한다.
② 자료는 고구려와 백제의 국왕이 평양성에서 싸우다 고국원왕이 전사한 기록이다. 이 자료는 백제 근초고왕이 북진하여 평양 지역까지 진출하였음을 말해준다. 이를 통해 낙랑군·대방군의 잔존세력이 상황에 따라 각기 백제와 고구려의 정치적 영향력하에 있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나아가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서 정치적 갈등을 겪었을 낙랑군·대방군의 잔존세력들의 모습까지도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을 염두에 두고서 옛 낙랑군·대방군에 대한 고구려의 지배 과정 및 상황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1) 무덤자료의 변화상과 고구려
고구려의 낙랑군 지역 지배는 평양의 대성산 주변 지역에 상당수 분포되어 있는 고구려 적석총을 통해 연상해 볼 수 있다. 그 이전 시기 낙랑군·대방군이 있던 일부 지역(신천군, 봉산군, 안악군, 평양시)에는 중원 왕조의 전통적인 무덤 양식인 벽돌무덤을 사용하고 있는 토착세력집단이 낙랑군·대방군이 멸망한 이후 100여 년가량이나 존속하고 있었다. 이 집단은 우리 삼국과는 다른 문화전통을 가지고 있던 집단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각기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는 중원 왕조(서진·동진·후조·전진·후연)의 연호를 채용함으로써 서로의 정치적 관련성을 암시하였다. 또한 비록 허구화된 관직이긴 하지만, 중원 왕조의 고위관직을 자칭함으로써 주변에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려 하였다.주 031
이와 같은 벽돌무덤을 축조하던 이 지역에 변화가 나타났다. 벽돌무덤의 전통에다가 석재가 혼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천장 부분을 석재로 활용하더니 점차 무덤의 상층부를 석재로 사용하는 경우가 나타났다. 석재를 이용하여 무덤을 만드는 양식은 일찍부터 고구려 적석총에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를 통해 고구려가 평양 지역에 영향을 끼치는 상황을 추정해 볼 수 있다.주 032 대방군 지역에서는 이와 같은 무덤의 변화 양상에 더하여 4세기 중엽부터 대형 석실봉토분이 나타나게 되었다. 물론 4세기 중엽이라면 당시 국내성 지역의 무덤 양식인 적석총과 비교해 볼 때 고구려라기보다는 요동 지역의 영향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표2는 축조 연대가 분명한 자료로, 벽돌무덤에서 석실봉토분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추적해 볼 수 있다. 이 자료를 통해 이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의 상황을 어느 정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 상황을 이해하는 데 기준을 제공해 주는 단서는 357년에 해당하는 안악3호분이다. 안악3호분은 석실봉토분으로 축조되었다. 하지만 무덤 주변에 뒷채움용으로 벽돌이 사용되었다. 벽돌무덤 축조 전통이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요서 지역에서 이주해온 무덤의 주인공 동수는 동진의 연호, 중원 왕조 계통의 관직을 사용하였다. 무덤 안에는 현실생활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다양한 벽화를 그렸다. 이와 같은 사례는 이 지역에서 석실봉토분 축조의 이른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나아가 4세기 중엽부터 5세기 초에 축조된 태성리3호분, 안악3호분, 덕흥리벽화무덤과 같은 대형 석실봉토분은 요동 지역에서 유행했던 전통이 이 지역으로 유입된 것이라는 해석이 일반적이다(岡崎敬, 1963).
표2 | 낙랑군·대방군 고지의 연대가 알려진 무덤 자료
| 구분 | 서읍태수 장씨무덤 | 대방태수 장씨무덤 | 동리묘 | 안악 3호분 | 덕흥리벽화무덤 |
| 축조 연대 | 342 | 348 | 353 | 357 | 408 |
| 무덤 형태 | 벽돌무덤 (돌천장) | 벽돌무덤 (돌천장) | 벽돌무덤 (상단부 석축) | 석실봉토분, 벽화 | 석실봉토분, 벽화 |
| 신분 | 서읍태수 | 사군 대방태수 무이교위 | 요동·한·현도태수 | 사지절 도독제군사 평동장군 호 무이교위 낙랑상창려・현도・대방태수 도향후 | 건위장군 국소대형 좌장군 용양장군 요동태수 사지절 동이교위 유주자사 |
| 성명 | 장씨 | 장씨 | 동리 | 동수 | □□씨 진 |
| 출신지 | 서읍군 | 어양군 | 유주 요동(군) 평곽(현) 도향 경상리 | □□군 신도현도향 중감리 | |
| 연호 | 후조 | ? | 동진 | 동진 | 고구려 |
| 출토지 | 안악군 | 봉산군 | 평양시 | 안악군 | 남포시 |
안악3호분은 동진의 연호를 채용하였다. 연호의 사용은 자신의 정치적 소속을 드러내는 것이라서 유의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와 유사한 연호 채용 사례는 동리묘에서도 발견된다. 그 뿐만 아니라 이 지역에서 동진의 연호를 사용한 또 다른 벽돌무덤이 다수 발견되고 있다. 서읍태수무덤의 경우에는 후조의 연호를 사용하여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드러냈다. 이처럼 이 지역에는 후조의 연호를 채용한 또 다른 발견 사례도 있다. 이들은 낙랑군·대방군 고지에 살면서 거리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중원 왕조의 연호를 채용한 것이다.
또한 이들은 중원 왕조의 관직을 비롯하여 다양한 관직을 사용하였다. 이들이 사용한 관직의 대부분은 현실적인 측면에서 그 관직이 가지는 실제적 효용성을 인정하기 어려운 것이 대부분이다(공석구, 2000). 이들은 왜 이런 관직을 사용했을까? 아마도 이들은 이 지역에서 살면서 이와 같은 행위를 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이 지역의 사회・문화적 기반이 그렇게 하는 것이 본인에게 유리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렇게 해도 무방할 정도의 상황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들이 직면한 현실에 따라 각자의 정치적 성향을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표2에 제시한 5개의 사례는 불과 60여 년 동안에 나타난 고고자료의 변화상이다. 그들이 살았던 근거지를 비교해보면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다. 특히 대방태수 장씨무덤과 안악3호분의 경우는 거리 차이가 불과 수십 km 이내에 해당한다. 이들 4명은 모두 비슷한 시기에 서로 멀지 않은 거리에서 살았다. 이들은 서로의 존재 사실을 알았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어쩌면 이들은 살아가는 과정에서 만났을지도 모른다.
서읍태수 장씨무덤과 대방태수 장씨무덤의 경우는 비교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양자는 중원에서 이주해 온 인물(서읍태수: 서읍, 대방태수: 낙랑군·대방군)임을 내세워 자신의 출자의식을 표명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서읍태수라는 중원계 관직(후조)을 표명하거나, 현지 관직인 대방태수를 표명하였다. 무이교위 장씨가 내세운 대방태수 관직은 그의 세력이 재지세력에 기반한 것임에 비하여, 서읍태수 장씨의 경우는 서읍이라는 이주민 집단을 기반으로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상당한 차이라 할 수 있겠다. 그것은 아마도 이들 지역이 내포하고 있는 정치・사회적 환경이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서읍태수 장씨무덤과 안악3호분의 경우는 근거지가 불과 5~6km 가량 떨어져 있다. 안악3호분 주인공인 동수는 336년에 이곳에 이주한 인물이어서 서읍태수 장씨와 만났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이들은 각기 다른 형태의 무덤에 묻혔다. 표 2에 드러나듯이 이주민들의 무덤을 통해 묘제상의 변화를 확인하였다. 이는 이 지역의 무덤 양식이 전형적인 벽돌무덤에서 석실봉토분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전통성이 강한 묘제의 급격한 변화는 이 지역에서 발생하고 있는 급격한 사회·문화적 변화상을 말해준다. 이와 같은 변화상의 이면을 한두 가지 생각해보자. 첫째로, 벽돌무덤을 축조하는 과정에서 많은 인력과 경비, 전문적인 기술 등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건축학적인 측면에서 벽돌무덤을 완벽하게 축조하기 어려울 정도의 기층사회가 붕괴된 상황을 반영하였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둘째로, 무덤의 상층부에 석재가 혼입되는 현상은 이 지역에 불어닥친 정치・사회적 영향력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묘제의 변화가 나타나게 된 배경에 고구려가 있음을 생각해보는 견해(王培新, 2003)는 자연스러운 해석일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을 통해 이 지역의 사회·문화적 현상을 유추해보자. 고구려는 중국계 이주민을 배치하였지만, 이 지역에 남아 전하는 사회·문화적 특수성을 감안하였다. 이주민들이 독자적으로 연호나 중원 왕조의 관직을 사용하는 것을 용인하였다. 그 배경은 고구려의 지방통치정책과도 관련되었다고 생각된다. 이 지역의 현실적인 여건상 그들의 독자적인 활동 공간을 어느 정도 용인해주었던 것이다. 그 결과 중국계 이주민들은 지역적 특수성에 따라서 각기 자신이 가지고 있던 정치・사회적 배경을 향유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점차 가중되는 고구려의 남진에 따른 정치적 영향력은 이들의 무덤 양식까지 변화시키기에 이르렀고, 결국 고구려에 통합되는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2) 벽화 주제의 변화상과 고구려
옛 낙랑군·대방군이 있던 일부 지역(신천군, 봉산군, 안악군, 평양시)에는 4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벽돌무덤에서 석실봉토분으로 교체되었다. 석실봉토분 안에 벽화가 있는 무덤이 등장한 것이다. 벽화무덤을 검토하기 위해서는 기준 연대의 설정이 중요한데, 이를 대표하는 것은 357년의 안악3호분이다. 이 지역의 벽화무덤은 5세기 중엽 이후부터 제작 방식이나 벽화 주제 등이 전반적으로 바뀌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표3은 벽화무덤의 축조 방식이 여러 방 양식에서 외방 양식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벽화의 주제가 생활풍속도 → 생활풍속도+사신도 → 사신도로 변해가는 과정을 나타내주고 있다. 이 관계를 좀 더 추적해보자. 고구려벽화무덤의 제작 시기는 크게 세 시기로 구분되는데, 제1시기는 3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엽에 걸치는 시기로 다실분에 생활풍속이 주로 그려지는데, 그 기법은 습지벽화법(프레스코기법)이다. 제2기는 5세기 중엽에서 6세기 초엽에 걸치는 시기로서 다실분 또는 단실분에 생활풍속, 장식무늬, 사신도가 독자적으로 또는 뒤섞여서 그려지는데, 그 기법은 기존의 습지벽화법에 건지벽화법(쎄코기법)이 더해진다고 한다. 제3시기는 6세기 중엽에서 7세기 중엽에 걸친 시기로 단실분에 사신도가 거의 유일한 벽화 주제로 등장하는데, 돌 위에다가 직접 벽화를 그린다고 한다(전호태, 1998).
표3 | 낙랑군·대방군 고지의 벽화무덤 비교
| 구분 | 안악 3호분 | 덕흥리벽화무덤 | 약수리벽화무덤 | 대안리1호분 | 진파리4호분 |
| 축조 연대 | 357 | 408 | 5세기 전반 | 5세기 중엽 | 6세기 전반 |
| 벽화 주제 | 생활풍속도 | 생활풍속도 | 생활풍속도+사신도 | 생활풍속도+사신도 | 사신도 |
| 행렬도 | 회랑(대행렬도) | 행렬도 | 행렬도 | 행렬도 | 없음 |
| 천장 그림 | 연꽃 | 연꽃 | ? | ? | 별자리 |
| 무덤 구조 | 앞방, 널방, 곁방 | 앞방, 널방 | 앞방, 널방 | 앞방, 널방 | 널방 |
| 출토지 | 안악군 | 남포시 | 남포시 | 대안군 | 평양시 |
4세기대 벽화무덤에 나타나고 있는 외래적 요소로 볼 때 관료집단에 둘러싸인 초상화와 의장을 갖춘 행렬도를 표현한 벽화무덤의 주인공들은 당시 중원 지역의 정치적 혼란이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여러 이유로 이주해온 집단이었으며, 일부는 종래부터 이 지역에 할거해오던 일부 세력 집단에 의해 축조되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한편 초기 벽화무덤의 제재를 분석해보면 피장자의 정치·사회적 위상을 나타내는 의장을 갖춘 행렬도나 관료집단에 둘러싸인 초상화를 그리는 전통은 평양과 안악 지역에서 급속히 사라졌다. 평양 지역에서는 4세기 중엽으로 편년되고 있는 평양역전벽화무덤 이후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 다음 시기의 벽화무덤(고산리7호분, 5세기 전반), 순천 지역의 동암리벽화무덤(5세기 초) 단계에서는 생활풍속도를 주 제재로 하고 있으나 행렬도나 무덤 주인의 초상화 등이 보이지 않고 가정생활상, 수렵도 등이 주로 나타나고 있다. 고구려 세력의 평양 지역에 대한 본격적인 유입은 벽화무덤에 행렬도나 초상화가 사라지는 현상과 일정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에 나타나고 있는 낙랑군·대방군 지역 벽화무덤의 주요 제재 가운데 특히 불교와 관련된 몇 가지 요소, 일례를 들어 연꽃의 비중이 점차 높아지는 현상은 문헌적으로 392년 광개토왕에 의한 평양에 9개소의 사찰 창건(『삼국사기』 광개토왕 2년)과 같은 불교의 확산정책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이는 고구려 천하의식의 이 지역 확산 과정과 더불어 행렬도와 초상화와 같은 그림들이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는 배경이 되었다.
또한 안악 지역에서는 이와 같은 요소가 4세기 말을 전후하여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 다음 단계의 5세기 후반 벽화무덤인 안악2호분에서는 연도 좌우에 문지기장수와 창을 잡은 무사 대열이 있으나 현실 내의 벽화에서는 이러한 요소가 나타나지 않으며, 비천상이나 여인이나 여러 아이들의 모습, 실내생활 등이 나타나고 있다. 이후 6세기 전반으로 편년되는 평정리벽화무덤에서는 산(山)과 같은 제재가 나타나는 정도이다. 안악 이남 지역에서 4세기 말경부터 이와 같은 요소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이 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진출이 어느 정도 진행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369년 고구려 고국원왕에 의한 대대적인 백제 공략(『삼국사기』 고국원왕 39년)과도 연관되어 있다고 파악하고자 한다.
한편, 평양 외곽부에 해당하는 대동강 하류의 강서 지역에서는 무덤 주인의 초상화, 행렬도를 그리는 전통이 타 지역보다 늦게까지 잔존하고 있는 현상을 볼 수가 있다. 408년에 축조된 덕흥리벽화무덤은 비록 고구려와의 정치적 예속관계에 놓여 있었지만, 무덤 주인공의 초상화와 대행렬도 등의 요소는 안악3호분과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덕흥리벽화무덤보다 비슷하거나 좀 늦은 시기로 편년되고 있는 팔청리벽화무덤, 감신총 등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볼 수가 있다. 또한 벽화의 제재가 생활풍속도에 사신도가 결합되어 동시대 또는 그 이후 단계로 편년되고 있는 약수리벽화무덤(5세기 초엽), 대안리1호분(5세기 중엽), 쌍영총(5세기 후반) 등에서 이러한 요소를 일부 발견할 수가 있다. 강서 지역에서 나타나고 있는 이와 같은 현상은 이 지역의 특수한 정치적 상황과 연관시켜 검토할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현 단계로서는 고구려가 유입해오는 중원 지역의 이주민들을 계속 이 지역으로 옮겨서 살게 했던 것으로 해석하고자 한다.주 033
이 지역에서도 6세기 이후부터 이와 같은 요소가 자취를 감추게 된다. 이후 이 지역에서는 생활풍속도의 경우에 행렬도나 초상화 대신 다른 요소들이 등장하고 있다. 즉 무덤 주인의 가정생활이나 정신세계 또는 장식문이나 사신도 등이 등장하고 있다. 이는 무덤 주인의 정치·사회적 위상과 연관되는 것으로 무덤 주인의 권력을 상징하는 동수의 경우, 왕에 버금가는 행렬도나 초상화와 같은 제재를 그릴 수 없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6세기 중엽 이후의 벽화무덤은 무덤 주인의 현실세계를 표현하던 종래 경향에서 벗어나 내세관을 표현한 사신도가 거의 유일한 제재로 자리 잡게 된다. 이는 동시기 중원 왕조 벽화무덤의 변천상과는 구별되는 고구려 독자적인 표현에 해당한다.
이처럼 낙랑군·대방군 지역에서 5세기 중엽 이후부터 고구려벽화무덤의 제작방식이나 제재 등이 전반적으로 바뀌게 되는 현상은 고구려의 평양 천도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된다. 고구려가 이 지역으로의 천도를 전후하여 가까운 지역부터 율령을 바탕으로 한 직접지배를 추진해나갔고, 이는 기존의 행렬도, 초상화를 그리는 사회적 분위기에 대한 정치・사회적 제약으로 작용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3) 낙랑군·대방군 지역의 지배방식
고구려는 낙랑군·대방군 지역을 어떻게 지배하였을까? 앞에서 살펴본 내용을 정리하면서 고구려의 이 지역 지배 과정을 알아보기로 하자. 고구려는 4세기 초반 이후 비약적으로 확대된 영역을 관리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형태의 통치 방안을 강구하였을 것이다. 고구려의 이 지역 지배는 단계별로 진행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사실 학계는 낙랑군·대방군 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영향력을 이해하는 방식에서 다양한 관점과 견해가 제출된 상태이다. 이를 간략하게 소개한다면, 하나는 토착세력, 중원계 망명인 집단과 고구려와의 정치적 관계가 직접적이기보다는 간접적이었다고 이해하는 견해이다. 간접지배를 했다는 입장이다. 또 다른 견해는 양자의 관계가 보다 직접적이었다고 이해하는 견해이다. 직접지배를 했다는 입장이다. 이것은 앞서 제시한 무덤 자료에 나타난 명문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해석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가 낙랑군·대방군 지역을 어떻게 지배했는지는 일률적으로 평가하기 어렵다. 이 지역을 둘러싼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 상황에 따라 지배방식의 변화가 있었다고 파악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벽돌무덤, 대형석실봉토분에 나타난 양상으로 볼 때 고구려는 처음에 이 지역의 정치·사회적 특수성을 인정하는 지배방식을 택하였다고 생각된다. 이 지역은 오래전부터 중원 왕조의 율령적 통치체제에 적응해왔던 중원계 이주민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고구려의 관습법 내지는 율령을 적용시켜 지배하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결국 고구려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지배방식을 탄력적으로 운영하는 방식이었다.
고구려는 이 지역에 세력권을 확대해 나가는 과정에서 직접통치를 강행하지 않고, 또한 기존의 사회질서를 완전히 해체하지 않은 채 이들을 집단적·총체적으로 파악하면서 간접지배의 형태를 취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입증할 만한 고고학적인 증거는 낙랑군·대방군 멸망 이후에도 전통적 무덤 양식인 벽돌무덤 등이 여전히 축조되고 있었다는 데 있다. 다수의 벽돌무덤이 축조되었는데, 벽돌무덤의 주인공들은 각기 중원의 연호, 관직을 채용하여 정치적 연관성을 추구하려고 하였다.주 034
한편, 중원 지역의 정치적 혼란 상황은 낙랑군·대방군 지역에도 영향을 끼쳐 수많은 망명인이 몰려들었다. 이 지역은 당시 중원 지역에 비해 정치・사회적으로 안정된 곳이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안악3호분 주인공인 동수이다. 안악 지역에 배치된 그는 동진의 연호(영화 13년, 357년)를 채용하고 중원 왕조 계통의 관직을 사용하였다. 호화스런 관직을 자칭하며 동진과의 정치적 연관성을 이 지역에 살고 있던 집단에게 알리려고 했던 것이다. 그 집단이란 고구려와는 문화적・종족적 계통을 달리하는 세력이었을 것이다. 특히 동수가 칭한 ‘낙랑상(樂浪相)’이란 관직은 당시 고구려는 물론 동진에도 없는 관직체계로서 이 지역에 있던 낙랑계의 잔존 주민집단을 의식하여 만들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4세기 중엽 이 지역에 고구려의 행정적인 지배체제가 직접 관철되고 있었다면 동수와 같은 경우는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동수가 낙랑군·대방군 지역에 이주하게 된 정치적 배경에는 고구려의 힘이 작용하였다는 점을 외면하기 어렵다. 고구려는 요서 지역에 있던 전연의 고위관료로서 망명해 온 동수를 수도인 국내성 부근에 안치시킨 것이 아니라 당시 고구려의 변방이라고 할 수 있는 낙랑군·대방군 지역으로 이주시켰던 것이다. 그 이유는 이 지역의 정치·사회적 특수성에 기인한다. 고구려가 낙랑군·대방군 지역 좁게는 안악 지역을 장악하게 되면서 이 지역의 새로운 문화와 일부 이질적인 종족집단을 흡수하게 되었다. 고구려가 이 지역을 장악하기 위한 방법으로 채택한 것이 이 지역의 독자적 정치력을 어느 정도 거세하는 대신에 종래의 사회·문화적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게끔 용인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에 있던 다양한 종족을 관리하는 차원에서 동수를 배치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토착세력 또는 고구려가 이주시킨 망명인 집단은 고구려의 의도와 다르게 간접지배방식의 허점을 이용하여 각기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중원 정권과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였다.
이처럼 고구려가 이미 점령한 낙랑군·대방군 지역에 대하여 철저한 통제력을 행사하지 않고 기존의 토착 호족세력을 중심으로 한 사회질서를 어느 정도 용인하면서 이 지역에 대한 간접적·소극적인 통제에 만족할 수 밖에 없었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4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북중국에서의 정치 상황 변화에서 찾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고구려는 북중국의 정치 상황에 편승하여 능동적으로 요동 지방 진출을 수행하였고, 이에 따라 상대적으로 낙랑군·대방군 고지에 대한 지배 통제에 소홀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고구려는 낙랑군·대방군 지역에 대한 보다 직접적인 지배체제로 전환하였다. 그 배경은 고구려 왕권 신장, 그리고 중원 및 요서 지방에서의 정치상황에 자신감을 가지게 되면서부터라 하겠다. 이러한 증거 자료는 평양 대성산 주변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상당수에 달하는 고구려 적석총을 통해 추정해 볼 수 있다. 또한 덕흥리벽화무덤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망명객으로서 대동강 하류의 남포시 지역에 정착한 진은 세력가로 성장하여 건위장군 국소대형 좌장군 용양장군 사지절 동이교위 유주자사라는 호화로운 중원계 관직을 주변에 과시하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광개토왕의 연호인 영락(영락 18년, 408년)을 채용하였다. 고구려 연호를 채택한 사실은 정치・사회・문화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는 적극적으로 고구려와의 정치적 관련성을 내세우려고 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는 고구려로부터 관직을 수여받았다. 그가 받은 국소대형이란 관직은 고구려 관직체계에서 중간급의 위계에 해당하였다. 그가 고구려로부터 어느 정도 수준의 대접을 받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이렇듯 357년 동수부터 408년 진에 이르는 기간 동안에 고구려의 이 지역 지배는 간접지배에서 직접지배 양상으로 전환되었음을 알 수 있다.
4세기 중엽 이후 고구려는 비약적으로 확대된 영역 그리고 유입해온 중원 왕조 이주민들을 통치하기 위하여 낙랑군·대방군 지역에 대한 포괄적이고 효과적인 편제 및 지배방식을 강구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소수림왕에 의한 불교 수용과 율령 반포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주 035
각주 035)

고구려로 유입해 온 중원 지역의 이주민들은 이와 같은 고구려의 불교정책과 더불어 고구려 사회에 동화되어 갔다고 생각된다. 또한 사회·문화적 배경이 상이한 이주민들에게 고구려의 관습법 내지는 독자적 율령을 적용시켜 지배하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는 고구려 영역 안의 모든 구성원에게 적용할 보편적 율령체계의 개발이 필요하였다. 중원으로부터 온 유이민도 이와 같은 고구려의 율령체계에 직접적인 적용 대상이 되면서 점차 고구려의 행정적 지배를 받게 되었다.4세기 후반 이후 강력해진 왕권은 불교의 수용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고구려 왕실에 서는 왕권의 절대성, 초월성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하는 보편적인 관념체계가 필요하였을 것이다. 불교는 고구려 왕실의 이와 같은 소망을 교리로 뒷받침할 수가 있었다. 고구려왕 을 부처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현세의 왕권을 숙세인연(宿世因緣)의 인과응보로서 이해하 고, 나아가 왕은 여래의 절대적 권위를 현세에서 구현하는 존재로서 인식하고 주장하려고 하였다. 또한 불교의 인과응보설, 업설은 길흉화복이 현세 개인의 행위, 즉 선악(善惡)에 의해 결정된다고 하는 보편적인 관념을 제시해 주었다. 나아가 윤회전생관은 현실의 신분 적인 제약이나 사회적 차별을 극복할 수 있는 보편성을 제시해 주었다. 고구려 왕실에 의 하여 도입된 불교는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하에 전파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확립된 왕권에 따라서 고구려의 독자적 천하관이 형성되는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 각주 031)
- 각주 032)
- 각주 033)
- 각주 034)
-
각주 035)
4세기 후반 이후 강력해진 왕권은 불교의 수용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고구려 왕실에 서는 왕권의 절대성, 초월성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하는 보편적인 관념체계가 필요하였을 것이다. 불교는 고구려 왕실의 이와 같은 소망을 교리로 뒷받침할 수가 있었다. 고구려왕 을 부처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현세의 왕권을 숙세인연(宿世因緣)의 인과응보로서 이해하 고, 나아가 왕은 여래의 절대적 권위를 현세에서 구현하는 존재로서 인식하고 주장하려고 하였다. 또한 불교의 인과응보설, 업설은 길흉화복이 현세 개인의 행위, 즉 선악(善惡)에 의해 결정된다고 하는 보편적인 관념을 제시해 주었다. 나아가 윤회전생관은 현실의 신분 적인 제약이나 사회적 차별을 극복할 수 있는 보편성을 제시해 주었다. 고구려 왕실에 의 하여 도입된 불교는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하에 전파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확립된 왕권에 따라서 고구려의 독자적 천하관이 형성되는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