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요동 진출과 요동 지역 지배
7장 요동 진출과 요동 지역 지배
오늘날 중국 요령성(遼寜省) 동남의 환인(桓仁)과 집안(集安)을 중심지로 한 고구려는 요동군(遼東郡) 및 현도군(玄菟郡)과의 항쟁을 거쳐 성장하였다. 이들 한 군현을 서쪽으로 몰아내는 형태로 진출이 이어진 결과, 고구려는 광개토왕(廣開土王)대에 이르러 요하(遼河) 이동 지역을 확보하고 요하를 자연 국경선으로 삼을 수 있었다. 이후 요동 지역은 고구려가 요하 저편으로부터 밀려들어오는 중국 세력을 가로막는 최전선이 되었다. 또한 요동을 고구려가 확보함으로써 중원 왕조의 동방 거점은 서쪽으로 후퇴하여 줄곧 요하 이서의 용성(龍城: 현재의 朝陽)에 머물게 되었다. 이로써 고구려는 요하를 경계로 삼아 서방으로부터의 여러 위협에 대처하면서 동북아시아 세계의 한 축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고구려가 요동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기까지, 요동군과 현도군은 고구려의 성장을 가로막은 걸림돌이었다. 특히 현도군은 군현의 설치 목적 자체를 고구려에 대한 통제에 두고 있었고, 그 기능이 약화되자 요동군이 그 역할을 떠맡았다. 고구려는 현도군의 외곽을 이룬 현성(縣城)들을 탈취하면서 요동으로 진출하였다. 고구려가 요동의 중심지로 나아가는 가도(街道)의 초입에 이른 것은 고국원왕(故國原王) 5년(335년)의 일이었다. 제3현도군 군치를 차지한 뒤 신성(新城)을 쌓음으로써 혼하(渾河) 유역주 001
각주 001)

에 도달했던 것이다. 그러던 고구려의 요동 진출이 일단락된 것은 광개토왕대에 이르러서였다. 이때에 와서 고구려는 요동의 수부(首府)였던 양평(襄平: 현재의 遼陽市)주 002제3현도군 군치 고구려현의 위치에 대해서는 요령성(遼寜省) 무순시(撫順市)의 노동공원고성(勞動公園古城, 永安臺古城)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지만, 그 동쪽의 동주소갑방고성(東洲小甲邦古城)이나 무순 서쪽의 상백관둔고성(上伯官屯古城)으로 보기도 한다. 어느 설을 따르더라도 혼하 유역에 자리잡고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田中俊明, 1996). 신성은 무순시 혼하 북안의 고이산성(高爾山城)이라 보고 있는데, 이곳은 요동평원과 동부 산악지대의 접경지대로 고구려에서 요동 방면으로 나아가거나, 요동에서 고구려로 들어올 때 거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여호규, 1995).
각주 002)

을 차지하였고, 요동반도 전역을 통제 아래 둘 수 있었다. 이는 고구려의 요동 진출이 지속적으로 시도되었음에도 그 과정이 순조롭지 못했음을 알려준다. 어떤 과정을 거쳐 고구려가 요동 지역을 확보하게 되었는가를 살피기 위해, 우선 요동 지역의 정세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요양에는 근래까지 명대(明代) 요동도사(遼東都事)의 진성(鎭城), 청대(淸代) 요동부성이었던 요양구성(遼陽舊城)이 남아 있었다. 요양 백탑(白塔)의 동쪽에 작은 하천이 있는데, 요양구성의 서벽 해자에 해당한다. 이 구성과 한대(漢代) 이래의 양평현성 그리고 고구려의 요동성이 거의 같은 위치에 있었다는 견해가 있었다. 그러나 구성 동벽의 아래층에서 후한대 벽화묘가 발견되어, 적어도 전한시대 양평현성은 구성과 규모를 달리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한원(翰苑)』에 인용된 『고려기(高麗記)』에는 고성의 남문에 후한 요동태수 경기(耿夔)의 비(碑)가 매몰되어 있다고 언급하고 있어, 그 고성(후한대 현성)이 고구려 요동성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東潮·田中俊明, 1995).
이 글에서는 고구려 중기에 해당하는 4세기 초 서진(西晉)이 요동을 차지하고 있던 시기부터 살펴볼 것이다. 고구려의 요동 진출과 관련하여 주요한 상대는 선비모용씨(鮮卑 慕容氏)가 세운 전연(前燕)과 그 뒤를 이은 후연(後燕)이었다. 고구려는 이들에 대해 군사적 대결과 함께 외교적 교섭으로 상대하였다. 즉, 요동을 둘러싸고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는 한편으로 양측은 책봉(冊封)·조공(朝貢) 관계를 맺었다. 어떤 국면에서 고구려가 상대에 조공하였으며, 고구려왕을 책봉했던 전연과 후연의 의도는 어디에 있었는지를 살펴, 당시 요동에 대한 양측의 역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양측의 공방은 요동 지역의 주요 지점에서 벌어지곤 하였다. 이 점에서 이들의 지리적 위치와 함께 해당 지점이 요동의 향방에서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었는지에 대한 지식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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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1)
제3현도군 군치 고구려현의 위치에 대해서는 요령성(遼寜省) 무순시(撫順市)의 노동공원고성(勞動公園古城, 永安臺古城)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지만, 그 동쪽의 동주소갑방고성(東洲小甲邦古城)이나 무순 서쪽의 상백관둔고성(上伯官屯古城)으로 보기도 한다. 어느 설을 따르더라도 혼하 유역에 자리잡고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田中俊明, 1996). 신성은 무순시 혼하 북안의 고이산성(高爾山城)이라 보고 있는데, 이곳은 요동평원과 동부 산악지대의 접경지대로 고구려에서 요동 방면으로 나아가거나, 요동에서 고구려로 들어올 때 거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여호규,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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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2)
요양에는 근래까지 명대(明代) 요동도사(遼東都事)의 진성(鎭城), 청대(淸代) 요동부성이었던 요양구성(遼陽舊城)이 남아 있었다. 요양 백탑(白塔)의 동쪽에 작은 하천이 있는데, 요양구성의 서벽 해자에 해당한다. 이 구성과 한대(漢代) 이래의 양평현성 그리고 고구려의 요동성이 거의 같은 위치에 있었다는 견해가 있었다. 그러나 구성 동벽의 아래층에서 후한대 벽화묘가 발견되어, 적어도 전한시대 양평현성은 구성과 규모를 달리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한원(翰苑)』에 인용된 『고려기(高麗記)』에는 고성의 남문에 후한 요동태수 경기(耿夔)의 비(碑)가 매몰되어 있다고 언급하고 있어, 그 고성(후한대 현성)이 고구려 요동성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東潮·田中俊明, 199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