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남진과 한강 이남 지역 지배
8장 남진과 한강 이남 지역 지배
4세기~6세기에 고구려는 남쪽 영토를 넓히려 노력하였다. 4세기 초에 대동강 유역의 낙랑군을 멸망시키고 그 남쪽의 대방군까지 제압하였으며, 4세기 중엽에는 대방군이 통치하던 지금의 황해도 지역에서 백제와 영유권 전쟁을 벌였다. 그리하여 4세기 후반에 고국원왕(331~371년)이 평양성(平壤城)에서 백제의 근초고왕이 이끄는 3만 군을 맞아 싸우던 중 화살에 맞아 죽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로써 고구려 왕실은 백제에 큰 원한을 갖게 되었다.
4세기 중·후엽에 고구려와 백제가 군사적으로 충돌한 지점은 대개 지금의 황해도 지역이지만, 구체적으로 두 나라의 영토 경계가 어디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백제사 연구자의 다수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3년조의 기사를 이용해 4세기 무렵 백제의 북방 경계선을 예성강 유역으로 추론하는 경향이 있으며, 소수는 대동강 유역을 한때 경계선으로 보기도 한다.
4세기 말엽, 고구려는 요동 지역을 공격할 때 군사 4만 명을 동원할 정도로 군사력이 성장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백제를 공격하여 남방 영토를 넓히고 신라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시켰으며, 이에 고구려-신라 연합과 백제-가야-왜(倭) 연합이 대치하는 국제관계가 형성되었다. 이 무렵 고구려는 우수한 무기로 중무장한 군대를 앞세워서 한강 유역의 백제 왕도(王都)를 위협하고 볼모를 받아낼 정도로 백제를 군사적으로 압도하였다. 이에 관한 내용이 〈광개토왕비〉에 새겨져 있으나, 사료의 특성상 서술자의 관점이 일방적이고 표현도 과장되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고구려의 5세기는 79년을 재위한 장수왕(413~491년)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수왕은 전반기에 도읍을 평양으로 옮기며 남방정책에 힘을 쏟았고, 신라의 왕위 계승에 깊이 관여할 정도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에 백제와 신라가 서로 사신을 주고받으며 고구려의 남진에 대항하려 하였지만, 후반기에 장수왕이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가 백제 왕도 한성(漢城)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잡아 죽였다. 큰 타격을 입은 백제는 금강 유역의 웅진(熊津)으로 도읍을 옮기고 왕실을 다시 세웠으나, 한동안 내분에 시달리는 등 대내외적으로 고전하며 고구려에 직접 도전하지 못하였고, 신라도 왕궁을 명활산성으로 옮기고 방어에 골몰하였다.
고구려는 새로 획득한 한강 유역과 그 주변 지역에 군현(郡縣)을 설치하는 등 통치조직을 구성하였다. 특히 충주 지역에 국원성(國原城)을 설치한 것으로 알려지는데, 이는 고구려가 충주 지역을 남방의 지배거점으로 개발하여 북방의 국내성(國內城)에 대응시키려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에 〈충주고구려비〉를 고구려가 한강 유역 통치 의지를 천명하기 위해 5세기 후반 또는 그 이후에 세운 비석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6세기 전반기에 고구려 왕실은 왕위 계승을 두고 큰 내분을 겪었다. 옛 수도인 환도성을 기반으로 한 외척세력과 현재 수도인 평양의 외척세력이 충돌하여 환도성의 외척세력이 패배하였고, 그 와중에 2,000명이 살해당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이처럼 내부 정세가 어수선하던 시기에 고구려는 한강 유역에서 백제・신라의 연합 공격을 받았다. 그리하여 551년 한강 하류 지역의 6개 군(郡)은 백제에게 빼앗기고, 상류 지역 10개 군은 신라에게 빼앗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