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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2. 광개토왕의 영토 확장과 백제의 굴복

2. 광개토왕의 영토 확장과 백제의 굴복

384년, 소수림왕이 재위 14년 만에 죽었는데, 아들이 없었으므로 아우 이련(伊連)이 즉위하였으니, 제18대 고국양왕(384~391년)이다. 고국양왕은 즉위한 이듬해인 385년 여름 6월에 군사 4만 명으로 요동 지역을 습격해 요동군과 현도군을 빼앗고 남녀 1만 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전년 겨울에 전진이 동진을 공격했다가 크게 진 뒤 부견의 부하였던 모용수(慕容垂)가 업(鄴) 부근에서 독립해 후연(後燕)을 세우면서 요동 지역이 어수선해지자 그 틈을 노린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같은 해 겨울에 요동군과 현도군을 다시 후연에게 빼앗겼다. 서방 진출이 여전히 쉽지 않자, 고국양왕은 386~390년까지 남쪽으로 백제와의 전쟁에 집중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386년 가을 8월, 389년 가을 9월, 390년 가을 9월 등 3회에 걸쳐 고구려와 백제의 전투 기사가 실려 있는데, 지명이 아니라 ‘변경’ 등으로 표현하였으므로 전투 지점을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런데 같은 책 백제본기에는 백제 진사왕 2년(386년) “봄에 나라 안 사람으로 나이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국경을 방비하는 관문을 설치하였는데, 청목령(靑木嶺)에서부터 북쪽으로는 팔곤성(八坤城)에 닿았고, 서쪽으로는 바다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다. 청목령과 팔곤성의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청목령을 지금의 개성 지역에 비정하는 것이 통설이다. 그렇다면 고국양왕 때 고구려의 남방 영토가 더욱 넓어져서 지금의 황해도 지역을 모두 장악했다고 볼 수 있다.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을 거치면서 고구려의 남방 영토만 넓어진 것은 아니었다. 정치·외교적 영향력 범위는 더욱 넓어졌다. 특히 신라에 대한 외교적 영향력이 매우 커졌는데, 377년과 382년 두 차례에 걸쳐 고구려 사신이 신라 사신을 전진(前秦)에 데려갈 정도로 두 나라의 관계가 가까워졌다. 이는 당초 백제와 우호관계를 맺었던 신라가 입장을 바꾼 것이어서 더욱 흥미롭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366년 봄 3월에 백제가 사신을 신라에 보내 예방했으며, 368년 봄 3월에는 백제 근초고왕이 신라 나물왕에게 좋은 말 2필을 보내주었다고 한다. 이 무렵 백제는 신라는 물론 가야(加耶)·왜(倭)로도 사신을 보내 우호관계를 맺으려 노력하였는데, 이는 모두 정치·군사적으로 남쪽을 안정시키고 지원세력으로 만들어 북쪽 고구려에 적극 대항하려는 의도로 보인다(김기섭, 2020). 그리고 이러한 근초고왕의 노력이 고구려에 대한 군사적 우위라는 성과를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377년과 382년에 연달아 신라가 고구려를 통해 전진에 사신을 보냈다는 것은 백제 근초고왕이 죽은 뒤 신라의 외교적 입장이 바뀌었음을 시사한다. 그리하여 『통전(通典)』·『태평어람(太平御覽)』·『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통지(通志)』 등에 “나라가 작아서 혼자서는 사신을 보내지 못한다”라는 기록을 남길 정도로 국제사회에서 신라는 고구려의 지원을 받는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가 나물(奈勿)마립간 26년(381년)에 사신 위두(衛頭)를 전진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으며, 『태평어람』에는 “건원 18년(382년)에 신라국왕 누한(樓寒)이 사신 위두를 보내 미녀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가 어떻게 전진에 사신을 보낼 수 있었는지 자세한 기록이 없지만, 고구려 사신이 갈 때 데려갔다는 것이 통설이다. 그리하여 4세기 말~5세기 초에는 고구려가 신라의 왕위 계승에도 관여할 정도로 신라사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392년에 나물마립간이 “고구려가 강성하므로 이찬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실성(實聖)을 볼모로 삼았”는데, 401년 가을에 실성이 신라로 돌아왔으며, 이듬해(402년) 봄에 나물마립간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나물왕이 조카인 실성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으며, 그로부터 9년 뒤에 실성이 신라에 돌아오자마자 왕위에 올랐다는 사실은 신라사회에서 고구려의 정치적 영향력이 매우 커졌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4세기 중엽의 백제-신라 우호관계는 4세기 말엽에 급격히 깨지고 대신 고구려-신라 연합체제가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바야흐로 고구려와 신라의 우호관계가 강화되고 있던 391년 여름 5월에 고국양왕이 죽고 아들 담덕(談德)이 즉위하였다. 그가 제19대 광개토왕(廣開土王)인데, 〈광개토왕비문〉에 따르면 즉위할 때 나이가 18세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392년에 고국양왕이 죽고 아들 광개토왕이 즉위했다고 잘못 기록되어 있지만, 〈광개토왕비〉와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전쟁 기사에 따르면 광개토왕이 즉위한 해는 391년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광개토왕이 즉위하자마자 가을 7월에 남쪽으로 백제를 공격해 10성(城)을 빼앗고, 북쪽으로 거란을 공격해 남녀 500명을 사로잡았으며, 거란에 잡혀갔던 고구려 백성 1만 명을 데려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광개토왕비문〉에는 그런 내용이 없고 영락(永樂) 5년(395년)에 비려(稗麗)를 토벌해 3개 부락 600~700영(營)을 격파하니 소·말·양이 이루 헤아릴 수없이 많았다는 기록만 있다. 영락은 광개토왕의 연호이고, 비려는 거란을 가리킨다.
고구려 광개토왕 2년(392년), 백제 진사왕 8년(392년)에 고구려는 백제를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많은 영토를 빼앗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진사왕 8년 “가을 7월에 고구려왕 담덕(談德)이 군사 4만 명을 이끌고 북쪽 변경을 쳐들어와서 석현성(石峴城)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는데, 왕은 담덕이 군대를 잘 부린다는 소문을 듣고 나아가 막지 못하였으며 한수(漢水) 북쪽의 여러 부락을 많이 빼앗겼다”는 기록이 있다. 같은 사실을 고구려본기에는 광개토왕 원년 “가을 7월에 남쪽으로 백제를 쳐서 10성을 빼앗았다”고 간단히 적어놓았는데, 이는 사건의 연대와 경과 및 결과에 대한 내용이 부정확한 것이어서 대개 무시하고 백제본기의 기록을 이용한다.
392년 겨울 10월에 광개토왕이 백제의 관미성(關彌城)을 빼앗았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관미성은 사면이 가파르고 바닷물로 둘러싸인 곳이므로 광개토왕이 군사를 7개 무리로 나누어 공격해서 20일 만에 빼앗았다고 한다. 관미성은 〈광개토왕비〉에 ‘각미성(閣彌城)’으로 적혀 있는데, 그 위치에 대해서는 약간의 논란이 있었다. 조선 후기의 지리학자 김정호(金正浩)는 그의 저서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 “오두성(烏頭城)은 임진강과 한강이 합치는 곳에 위치하며, 본래 백제의 관미성으로 둘레 2,072척이다. 사면이 가파르기에 오직 동쪽에서만 산기슭으로 나아갈 수 있고, 3면은 바닷물로 둘러싸여 있다”라고 하였다. 이후 관미성을 강화도(江華島)·교동도(喬桐島)의 산성에 비정하거나 예성강 중류 지역 관미령(關彌嶺)에 비정하는 견해도 제기되었으나, 임진강과 한강의 들머리에 위치한 파주 오두산성(烏頭山城)에 비정하는 설이 유력하다(윤일녕, 1990).
백제 진사왕은 관미성을 빼앗긴 뒤 곧바로 구원(狗原)으로 사냥을 떠났으며 10일 만에 구원 행궁에서 죽었다. 『삼국사기』 기록에는 암살당했다는 말이 없지만 평범하지 않은 죽음이다. 『일본서기』에는 “이 해에 백제 진사왕이 즉위하여 귀국(貴國)의 천황에게 무례하였다. 그래서 키노츠노노스쿠네(紀角宿禰), 하타노야시로노스쿠네(羽田矢代宿禰), 이시카와노스쿠네(石川宿禰), 츠쿠노스쿠네(木菟宿禰)를 보내 그 무례함을 꾸짖었다. 이에 백제국이 진사왕을 죽여 사죄하니 키노츠노노스쿠네 등이 아화(阿花)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서기』 특유의 황국사관으로 왜곡한 부분을 걷어내면, 실상은 침류왕의 맏아들이자 진사왕의 조카인 아신왕이 쿠데타를 통해 즉위한 일을 기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김기섭, 2000). 고구려 광개토왕의 활발한 군사활동이 백제에 영향을 미쳐서 진사왕이 암살되고 아신왕이 즉위하는 큰 정치 변동을 유발한 것이다. 이에 대한 관점을 바꾸어서 백제 내부가 분열하고 북중국 지역 및 몽골 지역의 정세가 혼미했기 때문에 광개토왕의 백제 공격이 성공할 수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신정훈, 2018).
393년 가을 8월, 백제 아신왕은 고구려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해 군사 1만 명을 보내 관미성을 공격했다가 실패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아신왕이 “관미성은 우리 북쪽 변방의 요충인데, 지금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어 가슴 아프다”면서 외삼촌 진무(眞武)에게 군사 1만 명을 주고 공격하게 하였으나 고구려가 굳게 지키고 군량 지원이 원활하지 못하므로 물러났다는 내용이 자세하게 실려 있다. 그런데 같은 사건을 고구려본기는 “가을 8월에 백제가 남쪽 변경을 쳐들어왔으므로 장수에게 명령해 물리쳤다”고 매우 간단히 기술하였다. 그리고 “평양에 9개의 사찰을 세웠다”는 기록을 덧붙여 놓았다. 기록의 ‘구사(九寺)’를 9개의 사찰이 아니라 절이름으로 보기도 하지만, 이때 광개토왕이 평양에 9개의 불교 사찰을 세웠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해석이다(신동하, 1988). 고대의 불교 사찰은 주요 교통로 및 인력 공급과 관련된 부분이 많으므로, 평양 9사 건립은 광개토왕이 평양 지역을 거점으로 남하정책을 굳건히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394년 가을 7월, 백제 군사가 수곡성 아래까지 쳐들어갔다가 고구려에게 졌다. 이 전투를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고구려와 수곡성 아래에서 싸웠는데 졌다”고 간단히 적었는데, 고구려본기는 “백제가 쳐들어오니 왕이 날랜 기병 5,000명을 거느리고 맞받아쳐서 이겼다. 나머지 적들이 밤에 도주하였다”고 하여 조금 더 자세하며, 뒤이어 8월에는 나라 남쪽에 7성을 쌓아 백제의 침략에 대비했다고 하였다. 바야흐로 백제는 그동안 빼앗긴 북쪽 영토를 회복하려고 애쓰고, 고구려는 굳건히 대응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395년 가을 8월, 백제 아신왕이 좌장 진무 등에게 고구려를 치게 했는데, 고구려왕 담덕이 몸소 군사 7,000명을 이끌고 패수(浿水)가에서 진을 치며 막는 바람에 백제가 크게 져서 군사 8,000여 명이 죽거나 사로잡혔다. 이때의 패수를 흔히 정황을 고려하여 예성강으로 추론하는데, 앞서 나온 패하(浿河)와 같은 곳인지 다른 곳인지 분명하지 않다. 여하튼 백제 아신왕은 겨울 11월에 패수전투의 패배를 되갚으려고 직접 군사 7,000명을 이끌고 한수(漢水)를 건너 북진하다가 청목령(靑木嶺) 아래에서 큰 눈을 만나 군사들이 많이 얼어 죽자 군대를 돌려 한산성(漢山城)으로 돌아와서 군사를 위로했다고 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따르면, 398년 가을 8월에도 백제 아신왕이 고구려를 치려고 군사를 내어 한산 북쪽의 목책에 이르렀는데, 그날 밤 큰 별이 병영 안에 떨어져 소리가 나니 왕이 매우 꺼리어 전쟁을 중지하였다. 이듬해인 399년 가을 8월에는 왕이 고구려를 치려고 군사와 말을 크게 징발하니 전쟁에 동원되지 않으려 신라로 도망하는 백성이 많아 호구가 줄었다고 한다.
이처럼 광개토왕이 즉위한 뒤 해마다 벌인 고구려와 백제의 전투에서 번번이 고구려가 크게 승리하였다. 당시 고구려군은 갑옷과 투구를 몸에 걸친 채 손에는 활과 긴 창을 들고 개마(鎧馬)를 탄 중장기병(重裝騎兵)이 앞에 서고, 그 뒤로 역시 활과 창을 든 경기병(輕騎兵), 그리고 갑옷과 투구로 무장하고 활·쇠뇌·창·도끼·칼 등의 무기를 든 보병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러한 무장 상태는 백제·가야에 비해 우수한 것이었다(이인철, 2000). 이로 인해 백제의 북방 영토가 줄어든 것은 물론이고 백제 군사들의 사기도 크게 떨어졌다. 391년에 진사왕이 광개토왕의 용병술이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직접 대항하지 못한 일, 395년 아신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출동했다가 큰 눈을 만나 되돌아온 일, 398년 아신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출동했다가 큰 별이 병영에 떨어지자 되돌아온 일, 399년 백제가 고구려를 치려고 군사와 말을 징발하니 백성들 중 상당수가 신라로 도망간 일 등은 고구려의 군사력에 압도되어 백제 군사의 사기가 크게 떨어져 있었음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백제 아신왕은 397년 가을 7월에 한수 남쪽에서 크게 사열하고, 398년 9월에는 왕도에 사는 사람들을 모아 서쪽 돈대(西臺)에서 활쏘기를 익히게 하였는데, 군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백제는 외부의 군사적 도움을 받으려는 노력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397년 여름 5월에 아신왕이 “왜국과 우호를 맺고 태자 전지(腆支)를 볼모로 보냈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에 대해서는 흔히 백제가 고구려의 군사적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왜국에 군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하기 위해 태자를 보냈다고 해석하거니와 고구려의 군사적 위협이 워낙 강력하여 태자를 보호하기 위해 왜국에 잠시 피난시켰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또, 백제 아신왕이 왜국과의 연대를 강화하기 위해 10세 안팎이던 어린 태자 전지를 왜 왕실의 여인 팔수(八須)와 혼인시키려고 왜국으로 보낸 일을 볼모로 기록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김기섭, 2005). 이후 백제와 왜국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졌다. 402년 5월에 사신을 왜국으로 보내 큰 구슬을 구하니, 이듬해 봄 2월에 왜국의 사신이 왔고, 아신왕이 이를 맞아 특별히 후하게 위로했다고 한다.
그런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와 백제본기에 모두 실려 있는 기록, 곧 392~395년에 일어난 고구려와 백제 사이의 치열한 전쟁과 이후의 미묘한 움직임은 전혀 또는 거의 〈광개토왕비문〉에 실려 있지 않다. 그 대신 문헌기록과 달리 〈광개토왕비문〉에는 396년에 큰 전쟁이 일어났으며, 결국 백제왕이 무릎 꿇고 사죄했다는 글이 실려 있다. 〈광개토왕비〉에 새겨진 글자는 대개 표1과 같이 판독한다.
표1 | 광개토왕비문
Ⅰ면1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出自北夫餘天帝之子母河伯女郞剖卵降世生而有聖□□□□□□命駕
2巡幸南下路由夫餘奄利大水王臨津言曰我是皇天之子母河伯女郞鄒牟王爲我連葭浮龜應聲卽爲
3連葭浮龜然後造渡於沸流谷忽本西城山上而建都焉不樂世位天遣黃龍來下迎王王於忽本東罡履
4龍頁昇天顧命世子儒留王以道興治大朱留王紹承基業遝至十七世孫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5二九登祚號爲永樂大王恩澤洽于皇天武威振被四海掃除□□庶寧其業國富民殷五穀豊熟昊天不
6弔卅有九晏駕棄國以甲寅年九月卄九日乙酉遷就山陵於是立碑銘記勳績以示後世焉其詞曰
7永樂五年歲在乙未王以稗麗不□□人躬率往討過富山負山至鹽水上破其三部洛六七百營牛馬群
8羊不可稱數於是旋駕因過襄平道東來□城力城北豊五備□遊觀土境田獵而還百殘新羅舊是屬民
9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以六年丙申王躬率□軍討伐殘國軍□□
10□攻取寧八城臼模盧城各模盧城幹氐利城□□城閣彌城牟盧城彌沙城□舍蔦城阿旦城古利城□
11利城雜珍城奧利城勾牟城古模耶羅城頁□□□□城□而耶羅城瑑城於利城□□城豆奴城沸□□
Ⅱ면1利城彌鄒城也利城太山韓城掃加城敦拔城□□□城婁賣城散那城那旦城細城牟婁城于婁城蘇灰
2城燕婁城析支利城巖門□城林城□□□□□□□利城就鄒城□拔城古牟婁城閏奴城貫奴城彡穰
3城曾□城□□盧城仇天城□□□□□其國城殘不服義敢出百戰王威赫怒渡阿利水遣刺迫城□□
4□穴□便圍城而殘主困逼獻出男女生口一千人細布千匹跪王自誓從今以後永爲奴客太王恩赦□
5迷之愆錄其後順之誠於是得五十八城村七百將殘主弟幷大臣十人旋師還都八年戊戌敎遣偏師觀
6帛愼土谷因便抄得莫□羅城加太羅谷男女三百餘人自此以來朝貢論事九年己亥百殘違誓與倭和
7通王巡下平穰而新羅遣使白王云倭人滿其國境潰破城池以奴客爲民歸王請命太王恩慈矜其忠誠
8□遣使還告以□計十年庚子敎遣步騎五萬往救新羅從男居城至新羅城倭滿其中官軍方至倭賊退
9       □□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城卽歸服安羅人戍兵□新羅城□城倭寇大潰城□
10                □□盡□□□安羅人戍兵新□□□□其□□□□□□□言
Ⅲ면1□□□□□□□□□□□□□□□□□□□□□□□□□□辭□□□□□□□□□□□□□潰
2□□□□安羅人戍兵昔新羅寐錦未有身來論事□國罡上廣開土境好太王□□□□寐錦□□僕勾
3□□□□朝貢十四年甲辰而倭不軌侵入帶方界□□□□□石城□連船□□□王躬率□□從平穰
4□□□鋒相遇王幢要截盪刺倭寇潰敗斬煞無數十七年丁未敎遣步騎五萬□□□□□□□□□師
5□□合戰斬煞蕩盡所獲鎧鉀一萬餘領軍資器械不可稱數還破沙溝城婁城□住城□城□□□□□
6□城卄年庚戌東夫餘舊是鄒牟王屬民中叛不貢王躬率往討軍到餘城而餘□國駭□□□□□□□
7□□王恩普覆於是旋還又其慕化隨官來者味仇婁鴨盧卑斯麻鴨盧椯社婁鴨盧肅斯舍鴨盧□□□
8鴨盧凡所攻破城六十四村一千四百守墓人烟戶賣句余民國烟二看烟三東海賈國烟三看烟五敦城
9民四家盡爲看烟于城一家爲看烟碑利城二家爲國烟平穰城民國烟一看烟十訾連二家爲看烟俳婁
10人國烟一看烟卌三梁谷二家爲看烟梁城二家爲看烟安夫連卄二家爲看烟改谷三家爲看烟新城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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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看烟勾牟客頭二家爲看烟求底韓一家爲看烟舍蔦城韓穢國烟三看烟卄一古模耶羅城一家爲看烟
13炅古城國烟一看烟三客賢韓一家爲看烟阿旦城雜珍城合十家爲看烟巴奴城韓九家爲看烟臼模盧
14城四家爲看烟各模盧城二家爲看烟牟水城三家爲看烟幹氐利城國烟一看烟三彌鄒城國烟一看烟
Ⅳ면1    七也利城三家爲看烟豆奴城國烟一看烟二奧利城國烟一看烟八須鄒城國烟二看烟五百
2殘南居韓國烟一看烟五太山韓城六家爲看烟農賣城國烟一看烟七閏奴城國烟二看烟卄二古牟婁
3城國烟二看烟八瑑城國烟一看烟八味城六家爲看烟就咨城五家爲看烟彡穰城卄四家爲看烟散那
4城一家爲國烟那旦城一家爲看烟勾牟城一家爲看烟於利城八家爲看烟比利城三家爲看烟細城三
5家爲看烟國罡上廣開土境好太王存時敎言祖王先王但敎取遠近舊民守墓洒掃吾慮舊民轉當羸劣
6若吾萬年之後安守墓者但取吾躬巡所略來韓穢令備洒掃言敎如此是以如敎令取韓穢二百卄家慮
7其不知法則復取舊民一百十家合新舊守墓戶國烟卅看烟三百都合三百卅家自上祖先王以來墓上
8不安石碑致使守墓人烟戶差錯唯國罡上廣開土境好太王盡爲祖先王墓上立碑銘其烟戶不令差錯
9又制守墓人自今以後不得更相轉賣雖有富足之者亦不得擅買其有違令賣者刑之買人制令守墓之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시(集安市) 태왕향(太王鄕) 구화리(九華里) 대비가(大碑街)에 위치한 〈광개토왕비〉는 광개토왕이 죽은 지 2년 뒤인 414년 9월 29일 건립한 높이 6.39m, 폭 1.3~2m 크기의 사각기둥 모양 안산암질 용결 래피리응회암(welded lapilli tuff) 비석으로서, 예서(隸書) 체의 한자 1,775자가 4면 44행에 새겨져 있다. 제1면 11행 449자, 제2면 10행 387자, 제3면 14행 574자, 제4면 9행 365자이며, 글자 크기는 세로 9~12cm, 가로 10~12cm이다. 한 행의 글자는 기본적으로 41자이지만, 제1면의 6행, 제2면의 9행과 10행, 제4면의 1행 등은 글자를 적게 새겨 넣어 모두 합쳐 1,775자를 새긴 것으로 추정한다. 그중 140여 글자는 전혀 알아볼 수 없다.
비문 내용은 크게 3단락으로 나뉜다. 첫 단락은 제1면 6행까지 고구려 왕조의 유래와 광개토왕의 생애에 관한 내용이고, 둘째 단락은 제3면 8행 15자까지 광개토왕의 군사활동에 관한 내용이며, 마지막 단락은 왕릉을 지키는 사람들과 법령에 관한 내용이다. 사료적 가치는 모든 단락이 다 높지만 광개토왕의 활동에 비해 문헌기록이 워낙 적은 탓에 둘째 단락에 대한 관심이 조금 더 높은 편이다. 판독하기 어려운 글자도 주로 둘째 단락에 많다. 판독문 가운데 남쪽 관련 사항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① 백잔(百殘)과 신라는 예로부터 속민이므로 조공해왔다. 그런데 왜(倭)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을 격파하고 신라를 □□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그래서 6년 병신에 왕이 몸소□군을 이끌고 잔국(殘國)을 토벌하였다. 군이 □□□하여 영팔성, 구모로성, 각모로성, 간저리성, □□성, 각미성, 모로성, 미사성, □사조성, 아단성, 고리성, □리성, 잡진성, 오리성, 구모성, 고모야라성, 혈□□□□성, □이야라성, 전성, 어리성, □□성, 두노성, 비□□리성, 미추성, 야리성, 태산한성, 소가성, 돈발성, □□□성, 누매성, 산나성, 나단성, 세성, 모루성, 우루성, 소회성, 연루성, 석지리성, 암문□성, 임성, □□□□□□□리성, 취추성, □발성, 고모루성, 윤노성, 관노성, 삼양성, 증□성,□□로성, 구천성, □□□을 공격해 뺏고 그 도성을 □하였다. 백잔이 의로움에 복종하지 않고 감히 나와 수없이 싸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선발대를 보내 성에 다가서고□□하여 성을 에워쌌다. 이에 잔주(殘主)가 괴롭고 급해지자 남녀 생구(生口) 1,000명과 고운 베 1,000필을 내어 바치며 왕에게 무릎 꿇고 스스로 맹세하기를 지금부터 영원히 노객(老客)이 되겠다고 하였다. 태왕이 앞의 어지럽힌 잘못을 은혜로이 용서하고 뒤의 순종하는 정성을 새겨두었다. 이에 58성 700촌을 얻고 잔주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거느리고 군사를 돌려 도읍으로 돌아왔다.
② 9년 기해에 백잔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왕이 평양으로 행차하여 내려가니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왕에게 아뢰길 “왜인이 국경에 가득하여 성과 연못을 부수고 노객을 백성으로 삼으려 하니 왕께 돌아와 명령을 기다립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이 은혜롭고 자애롭게 그 충성을 갸륵히 여겨 □ 사신을 보내 돌아가서 계책을 알리게 하였다.
③ 10년 경자에 교를 내리셔서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을 거쳐 신라성에 이르니 왜가 그 안에 가득하였다. 관군이 바야흐로 도착할 즈음에 왜적이 물러났는데, □□ 뒤를 급히 쫓아 임나가라 종발성에 이르니 성이 곧 귀복하였다. 안라인 수병이 신라성 □성을 □하고 왜구가 크게 무너지니 성□□□이 다□□□하고 안라인 수병이 □□□□□□□□□□□□□□□□□□□□□□□□□□□□□□□□□□□□□□□□□□안라인 수병에게 □□□□하였다. 옛날에는 신라 매금이 직접 와서 일을 의논한 적이 없었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이 □□□□하여 매금이 □□ □□□□조공하였다.
④ 14년 갑진에 왜가 질서를 지키지 않고 대방지역에 침입해 □□□ □석성을 □□하고 배를 이어 □□□하니 왕이 몸소 □□를 이끌고 평양에서부터 □□□하여 군대가 서로 부딪쳤다. 왕의 군대가 길을 끊고 싹쓸어버리니 왜구가 궤멸하였다. 참살한 것이 무수히 많았다.
⑤ 무덤을 지키는 사람들[守墓人烟戶]은 매구여 백성은 국연(國烟) 2, 간연(看烟) 3이며, 동해가는 국연 3, 간연 5이며, 돈성 백성은 4집 모두 간연으로 하고, 우성은 1집을 간연으로 하고, 비리성은 2집을 국연으로 하고, 평양성 백성은 국연 1, 간연 10이며, 자련은 2집을 간연으로 하고, 배루인은 국연 1, 간연 43이며, 양곡은 2집을 간연으로 하고, 양성은 2집을 간연으로 하고, 안부련은 22집을 간연으로 하고, 개곡은 3집을 간연으로 하고, 신성은 3집을 간연으로 하고, 남소성은 1집을 국연으로 한다. 새로 온 한예는 사수성은 국연 1, 간연 1이고, 모루성은 2집을 간연으로 하고, 두비압잠한은 5집을 간연으로 하고, 구모객두는 2집을 간연으로 하고, 구저한은 1집을 간연으로 하고, 사조성한예는 국연 3, 간연 21이며, 고모야라성은 1집을 간연으로 하고, 경고성은 국연 1, 간연 3이며, 객현한은 1가를 간연으로 하고, 아단성과 잡진성은 합쳐서 10집을 간연으로 하고, 파노성한은 9집을 간연으로 하고, 구모로성은 4집을 간연으로 하고, 각모로성은 2집을 간연으로 하고, 모수성은 3집을 간연으로 하고, 간저리성은 국연 1, 간연 3이며, 미추성은 국연 1, 간연 7이며, 야리성은 3집을 간연으로 하고, 두노성은 국연 1, 간연 2이며, 오리성은 국연 1, 간연 8이며, 수추성은 국연 2, 간연 5이다. 백잔 남쪽의 한은 국연 1, 간연 5이며, 태산한성은 6집을 간연으로 하고, 농매성은 국연 1, 간연 7이며, 윤노성은 국연 2, 간연 22이며, 고모루성은 국연 2, 간연 8이며, 전성은 국연 1, 간연 8이며, 미성은 6집을 간연으로 하고, 취자성은 5집을 간연으로 하고, 삼양성은 24집을 간연으로 하고, 산나성은 1집을 국연으로 하고, 나단성은 1집을 간연으로 하고, 구모성은 1집을 간연으로 하고, 어리성은 8집을 간연으로 하고, 비리성은 3집을 간연으로 하고, 세성은 3집을 간연으로 한다. 
비문 ①에 따르면, 고구려 광개토왕이 “6년 병신년(396년)에 몸소 □군을 이끌고 잔국을 토벌하니” 백제 아신왕이 “남녀 생구 1,000명과 고운 베 1,000필을 내어 바치며 … 지금부터 영원히 노객이 되겠다고 맹세하고” 왕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볼모로 바쳤다고 한다. 그런데 고구려가 백제로부터 58성 700촌을 빼앗은 것은 396년 한 해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392년부터 396년까지 5년간의 성과를 모두 합한 것일 개연성이 높다(武田幸男, 1978; 이기동, 1986; 이도학, 1988). 앞에서 보았듯이,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 광개토왕이 백제로부터 관미성(각미성)을 뺏은 것은 392년 겨울 10월이었다. 그리고 비문에서는 잔주(백제 아신왕)가 396년에 “지금부터 영원히 노객이 되겠다”고 맹세해놓고 399년에 왜와 화통했다고 하였지만, 『삼국사기』에는 아신왕이 397년 가을 7월에 “한수 남쪽에서 크게 사열하고” 398년에 고구려를 공격하려고 아신왕이 몸소 군대를 이끌고 나섰다가 도중에 돌아온 일이 적혀 있다. 비문은 어디까지나 고구려의 주변국에 대한 침략행위를 천하관(天下觀)으로 정당화하고(양기석, 1983; 노태돈, 1988; 이인철, 2000) 광개토왕의 행적을 영웅담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므로 많은 사실을 극적으로 과장하였을 개연성이 있다. 〈광개토〉가 5세기 초에 세워졌다고 해서 그 비문 내용이 12세기 중엽에 편찬된 『삼국사기』 기록보다 반드시 정확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비문 ①의 “백잔과 신라는 예로부터 속민이므로 조공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을 격파하고 신라를 □□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그래서 6년 병신에 왕이 몸소 □군을 이끌고 잔국을 토벌하였다”는 표현은 역사왜곡에 가까운 매우 과장된 것이다. 우선 백제를 백잔(百殘)이라 하여 마치 흉악한 도둑무리인양 표현함으로써 백제에 대한 극도의 적개심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마치 백제가 예부터 고구려에 조공해온 복속국인 것처럼 기술하였는데, 이는 불과 20여 년 전 광개토왕의 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이 평양성에서 백제군이 쏜 화살에 맞아 죽었다는 사실조차 덮어버리려는 역사왜곡으로서 고구려의 백제 공격을 정당화하려는 명분에 불과하다(浜田耕策, 1974; 서영수, 1982).
비문 ①의 왜곡은 왜(倭)가 신묘년(391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데에서 정점을 이룬다. 그랬기 때문에 고구려 광개토왕이 병자년(396년)에 정의로운 군대를 발동하여 백제를 공격했다는 논리이다. 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고구려의 주관적 상황 인식으로서 전쟁 발발의 책임을 상대에게 돌리려는 자기합리화에 불과하여 비문 내용 자체로도 논리적 모순을 드러낸다. 만약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 고구려의 오랜 복속국인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면, 병자년에 고구려는 왜를 공격했어야 한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백제를 공격한 것이다.
논리적 모순이 일어난 이유에 대한 해석은 두 갈래로 나뉜다. 한 갈래는 비문 ①의 글자 판독과 해석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이다. 그렇다면 앞에서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한 해석법에 다시금 주목해야 한다. 다른 한 갈래는 고구려가 의도적으로 백제를 낮추고 왜를 부각시켰을 가능성이다. 고구려는 백제를 나라 이름조차 제대로 불러주기 싫어 백잔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런 백제와 친밀한 왜의 군사외교활동을 한껏 과장함으로써 백제를 저급한 도둑무리의 졸개처럼 만들었다는 것이다. 백제-가야-왜를 악의 축으로 만들고 그중 가장 먼 곳에 위치한 왜를 절대악으로 규정함으로써 상황을 과장하고 광개토왕의 공적을 부풀리려는 의도적 왜곡인 셈이다.
〈광개토왕비〉에서 왜라는 글자는 적어도 8회 이상 나온다. 그중 일부를 위작으로 보기도 하지만(이형구·박노희, 2014) 대개 왜(倭) 4회, 왜구(倭寇) 2회, 왜인(倭人)과 왜적(倭賊) 각각 1회씩으로 파악한다. 이러한 명칭은 백제를 가리켜 백잔(百殘) 4회, 잔주(殘主) 2회, 잔(殘) 1회, 잔국(殘國) 1회 등으로 표현한 것과 비슷하지만 백제에 대한 적개심보다는 낮은 편이다. 반면, 신라와 임나가라는 이름 그대로 담담히 적어놓았다. 비문 ③의 “안라인 수병”을 ‘신라인 수비병을 배치했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견해(王健群, 1985; 鈴木英夫, 1987; 高寬敏, 1990; 김태식, 2000; 백승옥, 2005)와 ‘안라국(安羅國)의 수비병’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末松保和, 1956; 김석형, 1966; 천관우, 1977; 이영식, 1985; 연민수, 1987; 武田幸男, 1985; 田中俊明, 1992; 山尾幸久, 1989)가 있는데, 안라(安羅)=아라가야(阿羅加耶)라면 이름 그대로 담담히 적어놓은 사례가 1개 더 늘어난다.
비문은 이름만으로도 고구려의 주적(主敵)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드러냈다. 고구려에게 백제가 주적이며 왜는 주적을 힘써 돕는 해적 무리로 인식한 것이다. 가야에 대해서는 편을 갈라 표현하지 않았으나 전쟁터가 가야 지역에까지 이르렀는데도 가야왕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점, 『일본서기』에서 가야 여러 나라 중 하나인 탁순국(卓淳國)이 백제와 왜를 연결하는 교통로로 묘사된 점 등을 감안하면 고구려의 소극적 반대세력으로 분류했을 개연성이 있다.
그렇다면 왜와 가야는 백제를 어떤 방식으로 도왔을까? 비문에는 적혀 있지 않으나,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아신왕 8년(399년)에 “백성들이 (고구려와의) 전쟁에 시달리자 신라로 많이 도망 가니 호구가 줄었다”는 기사, 아신왕 12년(403년) “봄 2월에 왜국의 사신이 왔다. 왕이 맞아 위로하였는데 특별히 도타웠다. 가을 7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쳤다”는 기사를 참고해 추정할 수 있다. 즉, 신라가 백제의 정세 불안에 편승해 이득을 얻으며 비문 ②, ③에서처럼 고구려와 군사연합체계를 형성하자 백제는 가야와 왜를 이용해 신라를 공격하며 견제한 것이다.
비문 ②, ③에서 신라를 침입한 왜와 비문 ④에서 대방 지역을 침입한 왜가 같은 세력인지는 알 수 없다. 400년에 남쪽 신라에서 고구려군에게 궤멸된 뒤 4년 만에 다시 서북쪽 대방 지역에 침입했다가 고구려군에게 궤멸된 것이라면 〈광개토왕비〉의 왜는 통일된 국가의 군대가 아니라 약탈을 목적으로 한 해적집단이라는 견해도 있다. 왜인이 백제의 군사적 관심지역에만 출몰했다는 것은 백제가 왜를 움직였다는 뜻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당시 백제를 도운 왜군의 병력은 대략 500~1,000명 규모였을 것으로 보인다(김현구, 1993). 동원된 병력이 적은 이유는 군사를 수송하는 선박의 규모 및 항해술 수준과 관련이 깊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는 405년에 태자 전지가 8년 만에 왜에서 귀국할 때 왜왕이 군사 100명을 보내 호위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일본서기』 웅략기(雄略紀)에는 479년 왜에 있던 동성(東城)이 백제왕으로 즉위하기 위해 귀국할 때 왜왕이 규슈(九州)에 위치한 츠쿠시국(筑紫國)의 군사 500명을 보내 호위케 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므로 4세기 무렵에 이미 군사 3만~4만 명을 동원하는 고구려·백제의 군사력에 비한다면 왜군이 한반도에서 실질적인 물리력을 행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도 백제의 요청에 따라 동원된 왜군은 배를 타고 신속하게 이동하며 해변에서 가까운 지점의 고구려 시설을 급습하는 방식으로 백제를 도왔을 것이다.
404년(甲辰) 왜의 대방 지역 침입은 백제의 사주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가 고구려와 직접 충돌하기보다 왜·가야 등 주변 지원세력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작전을 변경한 이유 중 하나는 고구려를 직접 자극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비문 ①에 실린 고구려의 인질정책이 나름의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광개토왕비〉에는 백제에서 잡혀온 사람들이 “새로 온 한예(新來韓穢)”라고 적혀 있다. 사수성(沙水城), 모루성(牟婁城), 두비압잠한(豆比鴨岑韓), 구모객두(勾牟客頭), 구저한(求底韓), 사조성한예(舍蔦城韓穢), 고모야라성(古模耶羅城), 경고성(炅古城), 객현한(客賢韓), 아단성(阿旦城), 잡진성(雜珍城), 파노성한(巴奴城韓), 구모로성(臼模盧城), 각모로성(各模盧城), 모수성(牟水城), 간저리성(幹氐利城), 미추성(彌鄒城), 야리성(也利城), 두노성(豆奴城), 오리성(奧利城), 수추성(須鄒城), 백잔 남쪽의 거한[百殘南居韓], 태산한성(太山韓城), 농매성(農賣城), 윤노성(閏奴城), 고모루성(古牟婁城), 전성(瑑城), 미성(味城), 취자성(就咨城), 삼양성(彡穰城), 산나성(散那城), 나단성(那旦城), 구모성(勾牟城), 어리성(於利城), 비리성(比利城), 세성(細城) 등이 이에 해당한다. 여섯 곳의 이름 끝에는 한(韓)이라는 종족 특징을 특별히 밝혀 놓았고, 그중 한 곳에는 예족도 함께 밝혀 놓았다. “백잔 남쪽의 거한”은 ‘백제 남쪽에 거주하는 한’으로 해석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거(居)’한이 ‘진(辰)’한 또는 ‘마(馬)’한의 글자 모양과 비슷해서 글자를 잘못 새겨 넣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들은 아마도 마한 사람으로서 백제에 흡수되었다가 396년 백제 아신왕이 고구려 광개토왕에게 항복하며 남녀 1,000명을 바칠 때 고구려에 전리품으로 보낸 사람들일 것이다.
백제에서 잡혀온 사람 중 상당수는 왕실무덤을 지키고 청소하는 일을 했다. 맡은 일에 따라 국연(國烟)과 간연(看烟)으로 나뉘었으며, 국연 30호, 간연 300호로서 국연 1호당 간연 10호를 연계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김현숙, 1989). 국연과 간연의 역할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국연은 무덤을 직접 지키며 지휘·관리하는 사람이고, 간연은 그것을 보조하거나 국연의 생계 부담을 나누어 지는 사람이라는 견해(武田幸男, 1979·1989; 조인성, 1988; 김현숙, 1989; 조법종, 1995; 이인철, 1996), 그리고 국연은 본래 각 지역에서 지배층이었던 사람이고 간연은 그에 속했던 사람이며 국연이 무덤 주변에 거주하며 관리하는 동안 간연은 지방에서 농업생산을 통해 뒷받침했다는 견해(박시형, 1966; 손영종, 1986; 임기환, 1994; 김락기, 2006)이다.
그림1 광개토왕비(동북아역사재단)
〈광개토왕비문〉에서는 서쪽 후연과의 전쟁 기록을 찾기 어렵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후연(後燕)과의 갈등·전쟁 기록이 많은 점에 비추어보면 참 이상한 일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399년 봄에 후연왕 모용성(慕容盛)이 고구려왕의 예절이 오만하다면서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습격해 신성(新城)과 남소성(南蘇城)을 함락시키고 700여 리를 넓힌 뒤 5,000여 호를 옮겨 놓고 돌아갔다고 한다. 401년에는 광개토왕이 군사를 보내 숙군성(宿軍城)을 공격하니 후연의 평주자사 모용귀(慕容歸)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는 기록이 있다. 403년 겨울에도 군대를 내어 후연을 침공했다고 한다. 그리고 『삼국사기』에는 404년 봄 정월에 후연왕 모용희(慕容熙)가 직접 요동성을 공격했다가 실패하고 돌아갔다는 기록, 405년 겨울 12월에 모용희가 거란을 습격하려고 출동했다가 거란 무리가 많은 것이 두려워 되돌아가던 중 무거운 짐을 버리고 가볍게 무장한 채 고구려 목저성(木底城)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는 기록, 407년 봄 3월에 북연으로 사신을 보내 종족(宗族)의 정을 베풀자 북연왕 운(雲)이 사신을 보내 답례하였다는 기록 등이 있다. 그러나 〈광개토왕비문〉에는 이런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영락 8년(398년)에 군사를 보내 백신(帛愼) 지역을 순시하고 가태라곡(加太羅谷)의 남녀 300명을 잡아왔으며, 이후 조공을 받게 되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백신은 숙신(肅愼)을 가리킨다. 영락 9년(399년)에는 “백잔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므로 왕이 평양으로 행차했는데, 그때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왜인이 국경에 가득차서 성을 부수니…구원을 요청”하였고, 영락 10년(400년)에는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신라로 보내 남거성(男居城)부터 신라성(新羅城)까지 가득찬 왜적을 물리치고 추격해 임나가라(任那加羅) 종발성(從拔城)까지 함락시켰다고 한다. 영락 14년(404년)에는 왜가 대방 지역에 침입하였으나 왕이 직접 평양을 거쳐 가서 왜구를 궤멸시켰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영락 17년(407년)에는 보병·기병 5만 명을 보내 적을 분쇄하고 갑옷 1만여 벌과 군대에서 쓰는 기계를 무수히 얻었으며, 사구성(沙溝城)·누성(婁城) 등을 깨뜨렸다고 하였는데, 비문의 글자가 훼손되어 대상이 누구인지 분명치 않다. 사구성을 『삼국사기』에 나오는 백제 사구성(沙口城)과 같은 곳으로 보고 백제를 공격한 것이라는 설이 있지만(王健群, 1985; 이도학, 2006; 노태돈, 2020), 갑옷 1만 벌과 군용기계를 언급한 것을 보면 후연과의 전쟁일 개연성이 있다. 영락 20년(410년)에는 동부여를 토벌하자 모두 항복하였으며 왕의 교화를 사모해 미구루(味仇婁)압로(鴨盧)를 비롯한 여러 압로가 따라왔다고 적혀 있다. 압로는 집단의 수장을 가리킨다.
광개토왕은 391~412년까지 22년을 재위하는 동안 고구려 영토를 많이 확장하였다. 그래서 그가 죽은 뒤 시호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으로 〈광개토왕비〉에 새겨져 있다. 국강상(國岡上)은 광개토왕이 묻힌 곳을 가리키고, 광개토경(廣開土境)은 영토를 많이 넓혔다는 뜻이며, 평안(平安)은 세상을 편안하게 만들었다는 뜻이고, 호태왕(好太王)은 호왕(好王)과 태왕(太王)을 합친 말로서 위대한 왕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그를 기리는 이름은 ‘영토를 많이 넓히고 세상을 편안하게 만들고 나라언덕(國岡)에 묻힌 위대한 임금’인 것이다. 그런데 비문에 따르면 그의 이름에 걸맞은 영토 확장 업적은 대체로 남쪽의 백제를 군사적으로 제압하고 굴복시킨 일과 관련이 깊다. 특히 백제로부터 58성 700촌을 빼앗고 남한강 유역을 거쳐 신라·가야 지역까지 진격하는 교통로를 확보함으로써 이후 고구려 군대가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도 활발히 활동하게 되는 기반을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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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광개토왕의 영토 확장과 백제의 굴복 자료번호 : gt.d_0003_0020_004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