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고구려의 남진과 백제 왕도 함락
4. 고구려의 남진과 백제 왕도 함락
고구려 장수왕은 465년 봄 2월부터 거의 해마다 북위(北魏)로 사신을 보냈다. 466년에는 북위의 문명태후(文明太后)가 고구려 장수왕에게 딸을 헌문제(獻文帝)의 후궁으로 시집보내라고 요구하기도 했으나, 장수왕은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불편한 관계를 만들지 않고 회피하였다. 이후 고구려는 매년 봄 2월 또는 3월에 북위로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으며,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고구려의 서쪽 경계는 평온을 유지하였다.
중국 방면으로는 평화를 유지하던 무렵에 고구려의 창끝은 남쪽을 향하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장수왕 56년(468년) 봄에 고구려가 말갈군 1만 명을 동원해 신라 북쪽의 실직성(悉直城)을 쳐서 빼앗았으며, 같은 해 가을 9월에 신라가 하슬라(何瑟羅)의 15세 이상인 자들을 징발해 이하(泥河)에 성을 쌓았다고 한다. 이 기록은 실직을 지금의 삼척, 하슬라를 지금의 강릉에 비정하는 지리관에 비추어 영토 범위를 설명하기 쉽지 않다는 점 때문에 약간의 논란이 있지만(장창은, 2014),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가 점점 악화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백제는 이러한 상황을 이용해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려 하였다. 그래서 469년 가을 8월에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공격하였으며, 겨울 10월에는 쌍현성을 수리하고 청목령에 큰 목책을 설치해 고구려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이처럼 신라와 백제가 차례로 변경에서 고구려 군사와 충돌하며 관방시설을 쌓은 것은 그만큼 고구려 세력이 남쪽으로 진출하려는 기류가 강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472년에는 봄 2월과 가을 7월, 특별히 2회에 걸쳐 고구려가 북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으며, 이때부터 공물을 2배로 늘렸다고 한다. 이는 같은 해에 백제 개로왕이 북위에 조공하고 북위 군사를 백제로 보내주면 함께 무도한 고구려를 쳐서 징벌하겠다는 내용의 표(表)를 올렸기 때문일 것이다. 백제 개로왕은 북위에 보낸 표에서 자신의 딸을 효문제(孝文帝)의 후궁으로 보내고 아들도 신하로 보내겠다고 제안하면서 하루바삐 고구려를 협동공격하자고 적극적으로 북위를 종용하였다. 6년 전 고구려 장수왕이 딸을 헌문제의 후궁으로 시집보내라는 북위의 요구에 응하지 않은 점을 은근히 되새긴 제안이었다. 그러나 북위 효문제는 고구려가 최근 예절을 잘 지키고 특별히 잘못한 바도 없으니 공격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고 고구려에게 백제를 침공하지 말라고 엄준히 경고하겠다는 답장만 보낼 뿐이었다. 그리고 북위 사신이 백제로 가는 길을 고구려가 가로막고 통과시켜주지 않는데도 군사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이에 실망한 백제 개로왕이 북위를 원망하며 조공외교를 끊어버렸다는 기록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실려 있다.
아무런 소득 없이 끝난 백제와 북위 사이의 외교는 고구려를 자극하였다. 그리하여 475년 가을 9월에 장수왕이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백제를 침략해 왕도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과 그의 가족을 모두 죽였으며, 남녀 8,000명을 사로잡아갔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고구려군이 한성을 에워싸고 7일 밤낮으로 공격하면서 불을 놓아 성문을 불태우니 마침내 백제 개로왕이 수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문을 나서 서쪽으로 달아나다가 고구려군에게 붙잡혔으며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끌려간 뒤 죽었다고 적혀 있다. 그리고 장수왕이 백제를 공격하기 전 바둑을 잘 두는 불교 승려 도림(道琳)을 간첩으로 보내 개로왕으로 하여금 성벽과 제방을 크게 쌓고 궁궐·누각·무덤 등을 화려하게 짓도록 꾀여 백제의 국가재정과 민심을 어지럽게 만들었다는 내용의 설화가 장황하게 실려 있다.
설화에 따르면, 개로왕은 고구려군이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아들 문주(文周)에게 “나는 마땅히 사직(社稷)을 위해 죽겠지만 네가 이곳에서 함께 죽는 것은 유익함이 없다”고 하면서 목협만치(木劦滿致)·조미걸취(祖彌桀取)와 함께 남쪽으로 피난하게 했다고 한다. 문주왕 즉위년조에는, 개로왕이 문주로 하여금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게 하여 문주가 군사 1만 명을 얻어 돌아왔는데, 고구려 군사는 비록 물러갔으나 성이 파괴되고 왕이 죽었으므로 문주가 마침내 왕위에 오르고 겨울 10월에 웅진(熊津)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같은 책 신라본기에는 자비마립간 17년(474년) 가을 7월에 고구려왕 거련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자 개로왕이 아들 문주를 보내와 도움을 요청하므로 왕이 군사를 내어 구원하였으나 구원병이 이르기도 전에 백제가 함락당하고 백제왕도 역시 살해되었으며 이듬해 봄 정월에 왕이 명활성(明活城)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적혀 있다.
이에 대한 기록은 내용이 저마다 조금씩 다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고구려의 백제 침공 시점을 474년으로 잘못 기재하였고, 같은 책 백제본기는 제21대 개로왕의 아우인 제22대 문주왕을 아들로 잘못 기재하였다. 백제본기에는 문주가 신라로부터 군사 1만 명을 얻어 한성으로 돌아왔다가 폐허에서 즉위한 뒤 웅진으로 천도한 것처럼 서술되어 있으나 신라본기는 “구원병이 이르기도 전에 백제는 이미 함락되고 경(개로왕)도 살해당하였다”고만 하여 느낌이 사뭇 다르다. 이 때문에 고구려가 백제의 왕도 한성을 함락시킨 뒤 그곳을 장악하고 지배했다는 견해와 고구려군이 한성을 함락시킨 뒤 평양으로 되돌아갔다는 견해가 대립하고 있다. 통설은 고구려가 475~551년까지 약 76년간 한강 유역을 지배했다는 것이지만(이기백, 1978; 김영심, 2003; 노중국, 2004; 노태돈, 2005; 김수태, 2006; 강종훈, 2006; 임기환, 2007; 이도학, 2009; 여호규, 2013; 전덕재, 2018), 475년에 고구려가 백제 왕도 한성을 함락시킨 뒤 퇴각했으며, 한강 유역 또는 한강 남쪽 지역은 줄곧 백제 영토였다는 견해(박현숙, 2001; 김병남, 2002; 임범식, 2002; 문안식, 2006; 정운용, 2015), 백제가 고구려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긴 것은 475년이 아니라 성왕 때인 529년 무렵이라는 견해(최창빈, 1989; 김영관, 2000), 475년에 백제가 고구려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겼지만 동성왕 또는 무령왕 때 되찾았다는 견해(양기석, 1979; 박찬규, 1991; 서영일, 2005; 김현숙, 2003; 주보돈, 2006; 장창은, 2014; 백미선, 2018)도 있다.
그런데 서울 구의동과 아차산 일대에서 20여 개의 고구려 보루(堡壘) 유적이 발견되었고, 백제 왕도 한성의 일부였던 몽촌토성에서도 5세기~6세기의 고구려 도로·건물지·집수지 등이 발견되었다. 지금까지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수백 점의 고구려토기류는 일상생활용기보다 의례용기라는 특징이 두드러지며, 구의동보루, 홍련봉 1·2보루, 아차산보루군, 용마산보루군 등 아차산 일대의 고구려 보루에서 출토된 수천 점의 철기류 및 토기류는 이곳에 장기간 고구려 군대가 주둔하였음을 시사한다(최종택, 2013). 모두 475년 이후 고구려가 줄곧 한강 유역을 직접 장악했을 개연성을 높여주는 고고자료라고 할 수 있다.
연천 호로고루(瓠蘆古壘)·당포성(堂浦城)·은대리성(隱垈里城)·무등리 2보루·전곡리 목책, 양주 천보산 2보루 등 고구려가 5세기~6세기에 쌓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한강 북쪽의 군사시설은 아차산보루군과 함께 고구려군의 남하 경로를 시사한다. 그리고 청원 남성골산성, 대전 월평동산성 등 금강 유역의 고구려식 목책유구는 5세기 말엽 고구려의 군사활동 범위 및 영토가 금강 유역에 이르렀음을 시사한다(차용걸, 2003; 양시은, 2010, 2013). 진천 대모산성에서도 고구려 토기가 출토되었다. 이 밖에 임진강유역의 연천 신답리·강내리의 고분군과 춘천 천전리, 성남 판교·창곡동, 용인 보정동·신갈동, 화성 청계리, 충주 두정리 등 한강 유역에 폭넓게 분포한 고구려계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墓)은 5세기 후엽부터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경영했다는 통설의 강력한 근거 자료이다.
고구려의 침입으로 백제 왕도가 함락되고 백제 왕실이 몰살당하자, 신라의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은 476년 봄 정월에 거처를 명활성으로 옮겼다.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한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자비마립간 18년(475년) “봄 정월에 왕이 명활성으로 옮겨 거처하였다”고 적혀 있지만, 이는 백제의 왕도가 함락된 뒤의 일이므로 자비마립간 19년(476년)으로 고쳐야 한다. 479년 봄 2월 3일에 자비마립간이 죽고 소지마립간(炤智麻立干)이 즉위하였다. 소지마립간은 488년 봄 정월에 월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장장 13년간이나 명활산성이 왕성으로 쓰인 것이다. 그만큼 신라 왕실은 오랫동안 고구려의 침입을 걱정하고 긴장하였던 것이다. 이후 신라와 고구려 사이에서는 우호적인 교류 기록을 찾을 수 없다. 반면, 신라와 백제는 왕실 간 혼인을 통해 우호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였다. 493년 봄 3월, 백제 동성왕(東城王)의 요청에 따라 신라가 이벌찬 비지의 딸을 시집보냄으로써 신라 출신 백제 왕비가 처음 탄생하였다. 고구려의 남진정책은 자연스럽게 백제와 신라의 유대를 강화시킨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