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고구려의 한강 유역 지배와 충주고구려비
5. 고구려의 한강 유역 지배와 충주고구려비
5세기에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경영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대표적인 사례는 〈충주고구려비(忠州高句麗碑)〉이다. 비면 높이 144cm, 너비 55cm 크기의 4면 비인데, 글자 마모가 심해 앞면과 한쪽 옆면에서만 글자를 확인하였으며, 그마저도 내용이 분명하지 않다. 글자는 예서체에 가깝고 크기가 지름 3~5cm 정도이다. 지금까지 판독된 글자는 대체로 표 2와 같이 정리할 수 있다.
표2 | 충주고구려비문
| 앞면 | 1 | 五月中高麗大王祖王公□新羅寐錦世世爲願如兄如弟 |
| 2 | 上下相和守天東來之寐錦忌太子共前部大使者多亏桓 | |
| 3 | 奴主簿貴德□□□安□□去□□到至跪營□太子共□ | |
| 4 | 向□上共看節賜太霍鄒□食□東夷寐錦之衣服建立處 | |
| 5 | 用□賜之隨□節□□奴客人□敎諸位賜上下衣服敎東 | |
| 6 | 夷寐錦遝還來節敎賜寐錦土內諸衆人□□□□王國土 | |
| 7 | 大位諸位上下衣服來受敎跪營之十二月卄三日甲寅東 | |
| 8 | 夷寐錦上下至于伐城敎來前部太使者多亏桓奴主簿□ | |
| 9 | □□□境□募人三百新羅土內幢主下部拔位使者補奴 | |
| 옆면 (왼쪽) | 10 | □□奴□□□□盖盧共□募人新羅土內衆人拜動□□ |
| 1 | □□□中□□□□城不□□村舍□□□□□□□□□ | |
| 2 | □□□□□□□□班功□□□□□□□□節人□□□ | |
| 3 | □□□□□□辛酉□□□□十□□□□□大王國土□ | |
| 4 | □□□□□□□□□□□□□□□□□□□□□□□ | |
| 5 | □□□□□□□□□上有□辛酉□□□□東夷寐錦土 | |
| 6 | □□□□□□方□故□沙□斯色□□古鄒加共軍至于 | |
| 7 | □□□□□古牟婁城守事下部大兄耶□ | |
| 옆면 (오른쪽) | 1 | □公□□□□衆殘□□□□□□□□□不□□使□□ |
| 2 | □壬子□□伐□□□□□□□□□□□□□□□□□ | |
〈충주고구려비〉에 제액(題額)이 있었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구체적으로는 ‘고려건흥사년(高麗建興四年)’, ‘△△칠년(七年), ‘영락칠년세재정유(永樂七年歲在丁酉)’ 등을 추정 판독한 바 있는데, 영락 7년(397년)으로 읽으면 4세기 말 광개토왕 때 비석을 세웠다는 뜻이 되고 나머지는 5세기 또는 6세기 초를 염두에 둔 견해이다. 공간이 좁아 제액을 새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비석 건립 시기에 대해서는 광개토왕대설, 421년 무렵설, 449~450년설, 481년설, 문자명왕대설(5세기 말~6세기 초) 등 학설이 다양하다(여호규, 2019). 449년에 장수왕이 태자 공(共)을 우벌성(于伐城)으로 보내서 신라 매금 눌지마립간에게 의복을 내려주는 의식을 치르게 했던 일을 손자인 문자명왕 때 비석을 세우면서 새겨 넣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비문 해석은 매우 까다롭다. 비문에 고려대왕(高麗大王)·대사자(大使者)·발위사자(拔位使者)·대형(大兄)·주부(主簿) 등의 글자가 있어 고구려가 세운 비석임은 분명하지만, 언제 누가 왜 비석을 세웠는지에 대해서는 학설이 매우 다양하다. 우선, 앞면 첫째 줄 ‘고려대왕조왕공(高麗大王祖王公)’을 ‘고려태왕조왕령(高麗太王祖王令)’, ‘고려대왕상왕공(高麗大王相王公)’ 등 달리 판독하는 견해가 적지 않은데, 이에 따라 해석이 전혀 달라질 수 있다. 해석도 ‘고려대왕의 조왕과 공’, ‘고려대왕인 조왕과 공’, ‘고려대왕의 조왕 공’, ‘고려대왕과 조왕 공’, ‘고려태왕인 조왕의 명령’ 등으로 다양하며, 고려대(태)왕과 할아버지왕(조왕)을 서로 다른 사람으로 보더라도 광개토왕과 고국원왕, 장수왕과 소수림왕, 문자명왕과 장수왕 등 그 차이 폭이 매우 크다. 고려대(태)왕을 광개토왕으로 보면 비석을 세운 시점은 대략 4세기 말~5세기 초에 해당하며, 문자명왕으로 보면 5세기 말~6세기 초에 해당한다. ‘조왕령(祖王令)’으로 판독한 경우에는 ‘영(令)’을 명령, 율령, 사람 이름 등 여러 다른 해석이 있다. 대체로 비문의 첫 줄에 대해서는 “5월에 고려대왕의 조왕과 공(또는 고려대왕과 조왕 공)이 신라매금(新羅寐錦)과 대대로 형처럼 아우처럼 되어 위와 아래에서 서로 하늘의 도리를 잘 지키길 원해 동쪽으로 왔다”고 해석한다.
앞면 둘째 줄에서는 ‘매금기(寐錦忌)’와 ‘태자공(太子共)’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이용현, 2020). 먼저, ‘매금기’에서 ‘기(忌)’를 동사 ‘꺼리다’로 해석하면 신라 매금이 중원 지방에 오기를 꺼려 하여 5월 중에 오지 않았고 12월에야 왔다는 뜻이 된다. ‘공경하다’로 해석하여 ‘신라 매금이 공손히 응했다’고 보기도 한다. 가장 일반적인 해석은 기(忌)를 신라 매금의 이름으로 보는 것이다. 이때의 신라 매금을 눌지마립간(417~458년) 또는 소지마립간(479~500년)으로 추정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충주고구려비〉를 광개토왕대에 세웠다고 한다면, 나물마립간(356~402년) 또는 실성마립간(402~417년)도 대상이 될 수 있다. ‘태자 공’의 ‘공(共)’에 대해서는 부사 ‘함께’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으며, 일반적으로는 옆면 여섯 번째 줄의 고추가공(古鄒加共)과 함께 고구려 태자의 이름으로 본다. “매금 기, 태자 공, 전부 대사자 다우환노, 주부 귀덕…”처럼 여러 사람의 직함과 이름을 나열한 대목으로 보는 것이다.
앞면 열 번째 줄의 개로(盖盧)를 백제 제21대 개로왕의 개로(蓋鹵)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만약 그렇다면 비문은 5세기 말엽 이후에 작성한 셈이 되지만, 일반적으로는 개로를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 곧 신라땅에 주둔하고 있던 고구려 군대의 지휘관 이름으로 해석한다.
앞면 여덟 번째 줄에 적힌 우벌성(于伐城)에 대해서는 신라 서라벌성(徐羅伐城)의 약칭이라는 설, 충주 지방에 위치한 성이라는 설, 지금의 경북 영주 순흥 지역에 설치한 이벌지현(伊伐支縣)의 성이라는 설 등이 있다. 옆면(왼쪽) 일곱 번째 줄에 적힌 고모루성(古牟婁城)은 〈광개토왕비〉에 광개토왕이 백제에게서 뺏은 58성 중 하나로도 적힌 것인데, 경기 포천 고모리산성(古毛里山城)설 및 반월산성(半月山城)설, 충남 덕산설, 충북 음성 고산성(高山城)설, 충북 충주설, 한강 하류 지역설, 남한강 상류 지역설, 북한강 유역설 등이 있다(장창은, 2014).
비문 속에 ‘대왕의 국토(大王國土)’, ‘매금의 땅(寐錦土)’, ‘신라땅 안의 뭇사람(新羅土內衆人)’, ‘신라땅 안의 당주(新羅土內幢主)’ 등 영토 표시와 연관된 기술이 여러 번 나오는 것을 근거로 고구려가 신라와 관련한 영역 경계를 확정하고 그에 수반되는 문제를 매듭지은 것을 기념해 비석을 세운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그에 따르면 고구려왕은 신라왕을 ‘동이매금(東夷寐錦)’으로 표현함으로써 천손국인 고구려가 주변국인 신라에서 조공을 받는 방식의 상하 서계화된 국제질서 및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을 구현해 내었다고 한다(노태돈, 1999).
이와 같은 비문 내용은 신라를 고구려에 복종하는 나라로 본다는 점에서 〈광개토왕비문〉과 다를 바 없지만, 신라를 속민(屬民)으로 표현하지 않았다는 점, 고구려왕과 신라왕의 관계를 형제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신라의 처지를 한결 존중한 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충주고구려비〉를 5세기 중엽 고구려의 영향권에서 점점 이탈하고 있는 신라를 회유·포섭하여 예전 관계로 회복하려는 고구려의 마지막 노력이 낳은 결과물로 보기도 한다(장창은, 2014).
『삼국사기』 지리지(2)에는 “중원경(中原京)은 본래 고구려 국원성(國原城)이었는데, 신라가 평정하여 진흥왕이 소경(小京)을 설치하였다. … 지금의 충주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국원성이 다른 기록에서는 미을성(未乙省), 탁장성(託長城), 완장성(薍長城) 등으로 적혀 있기도 하다. 551년 신라와 백제가 한강 유역에서 고구려를 몰아내었고, 553년에 신라가 한강 유역을 독차지하였다. 그리고 557년에 진흥왕이 국원성을 국원소경(國原小京)으로 바꾼 것이다. 신라가 충주 지역에 국원소경을 설치할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가 구축한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시설 기반을 신라가 그대로 활용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장악한 뒤 충주 지역에 지배거점인 국원성을 설치하였고, 그곳에 고려대왕이 내려와 신라 매금을 만났으며, 그때의 일을 기록한 것이 바로 〈충주고구려비〉일 개연성이 있다. 이에 국원성이라는 이름은 국내성의 국강(國岡)에 대응하는 것이므로, 평양 천도(427년) 이전에 고구려가 충주 및 남한강 상류 지역을 장악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이도학, 1988; 정운용, 1989; 장준식, 1998; 박현숙, 2010). 그러나 장미산성을 비롯한 충주 및 남한강 상류 지역의 고고학적 지표는 5세기 중엽까지 백제의 지배력이 여전히 강고했던 것으로 나타난다(서영일, 2003; 차용걸·이규근, 2006; 이규근, 2008;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2011; 장창은, 2014).
491년 겨울 12월, 고구려 장수왕이 죽고 손자인 문자명왕이 즉위하였다. 문자명왕은 고추대가 조다(助多)의 아들로서 이름은 나운(羅雲, 羅運)이다. 이듬해인 원년(492년) 봄 3월에 북위가 사신을 보내 문자명왕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하고 세자를 조공사절로 보내라고 요구했으나, 문자명왕은 병이 있다면서 거절하고 종숙을 보냈다고 한다. 494년에는 봄 2월에 부여왕이 항복해왔으며, 가을 7월에 신라와 살수(薩水: 충북 괴산) 들판에서 전쟁하였다. 이때 신라군이 져서 물러나 견아성(犬牙城)을 지키자 고구려군이 포위하였는데, 백제가 군사 3,000명을 보내 신라를 도왔으므로 고구려군이 후퇴했다고 한다. 495년 가을 8월에는 고구려군이 백제 치양성(雉壤城)을 포위하자 신라가 구원군을 보내 백제를 도왔다. 남쪽으로 진격하는 고구려에 대항하여 백제·신라의 군사연합이 굳건히 유지되고 있었던 것인데, 문자명왕 재위 내내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문자명왕은 519년에 죽었으며, 뒤이어 아들 안장왕(519~531년)과 안원왕(531~545년)이 차례로 즉위하였다. 그런데 『일본서기』에는 531년 3월에 “고려가 그 왕 안(安)을 시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안장왕의 이름이 흥안(興安)이며 재위 13년(531년) 여름 5월에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서기』 권19 흠명기(欽明紀) 6년조(사료 ①)와 7년조(사료 ②)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도 있다.
① 이 해에 고려가 크게 어지러워 죽임을 당한 자가 많았다. [백제본기에 이르길 “12월 갑오에 고려국 세군과 추군이 궁궐 문에서 싸웠다. 북을 치며 싸웠는데, 세군이 지고 군사를 3일 동안 풀지 않자 세군의 자손을 모두 잡아 죽였다. 무술에 박국(狛國)의 향강상왕이 죽었다”고 하였다.]
② 이 해에 고려가 크게 어지러워 무릇 싸우다 죽은 자가 2천여 명이다. [백제본기에 이르길 “고려가 정월 병오에 중부인 아들을 왕으로 세웠는데, 나이가 8세이다. 박왕(狛王)은 3명의 부인이 있었다. 정부인은 아들이 없고, 중부인은 세자를 낳았는데, 외할아버지가 추군이다. 소부인도 아들을 낳았는데, 외할아버지가 세군이다. 박왕의 병이 심해지자 세군과 추군이 각자 그 부인의 아들을 세우려 하였다. 그래서 세군의 죽은 자가 2,000여 명이다.]
② 이 해에 고려가 크게 어지러워 무릇 싸우다 죽은 자가 2천여 명이다. [백제본기에 이르길 “고려가 정월 병오에 중부인 아들을 왕으로 세웠는데, 나이가 8세이다. 박왕(狛王)은 3명의 부인이 있었다. 정부인은 아들이 없고, 중부인은 세자를 낳았는데, 외할아버지가 추군이다. 소부인도 아들을 낳았는데, 외할아버지가 세군이다. 박왕의 병이 심해지자 세군과 추군이 각자 그 부인의 아들을 세우려 하였다. 그래서 세군의 죽은 자가 2,000여 명이다.]
위의 기록에서 박국(狛國)은 ‘이리의 나라’라는 뜻으로서 백제가 고구려를 미워하여 부른 별명이다. 고구려가 백제를 백잔이라고 부른 것과 같다. 향강상왕(香岡上王)은 안원왕(531~545년)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①과 ②의 ‘이 해’는 안원왕이 죽은 545년을 가리킨다. 『삼국사기』에는 545년에 특별한 일 없이 안원왕의 맏아들인 양원왕(545~559년)이 즉위한 것으로 적혀 있다. 그런데 양원왕은 이름이 평성(平成)으로서 안원왕 3년(533년)에 이미 태자가 되었고 그로부터 12년 뒤인 545년에 즉위하였으므로 『일본서기』에서 말한 중부인의 아들이 즉위할 때의 나이 8세와는 전혀 들어맞지 않는 인물이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고구려의 왕위 계승 다툼은 오히려 557년 여름에 양원왕이 왕자 양성(陽成)을 태자로 삼았고, 같은 해 겨울에 환도성 간(干) 주리(朱理)가 반역했다가 죽임을 당했으며, 559년 봄에 양원왕이 죽자 태자(평원왕)가 즉위했다는 『삼국사기』 기록과 견줄 수 있다. 옛 수도인 환도성을 기반으로 한 외척세력과 현재 수도인 평양의 외척세력이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충돌하여 환도성의 외척세력이 패배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국내정세가 어수선하던 시기에 고구려는 한강 유역에서 백제·신라의 연합공격을 받았다. 551년 백제가 먼저 한강 하류 지역을 공격하고 이어서 신라가 상류 지역을 공격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하류 지역의 6군을 백제에게 빼앗기고, 상류 지역의 10군을 신라에게 빼앗겼다. 그 뒤 고구려의 국내정세가 안정을 되찾자 평원왕(559~590년)은 한강 유역을 되찾으려 노력하였는데, 그 내용이 『삼국사기』 온달(溫達)열전에 설화 형태로 실려 있다. 그러나 589년 남조의 진(陳)이 멸망하고 수(隋)가 중국 대륙을 통일했다는 소식이 이듬해에 고구려로 전해지자 군사를 훈련하고 군량을 쌓아서 방어할 계책을 세우느라 고구려는 더이상 한강 유역에 신경쓸 수 없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