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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1장 4세기 대외관계의 흐름과 의미

4세기 고구려는 ‘좌충우돌’의 과정을 통해 내부질서를 재편하고 영역을 확장했으며, 그에 걸맞는 지배체제를 모색해 나갔다. 그 결과 5세기 들어 광개토왕과 장수왕 재위 시에 동북아시아 최강 국가로서의 면모를 대내외에 과시하며 국제질서를 능동적으로 주도해 나가려 움직였다. 4세기 고구려의 대외관계는 크게 두 방면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하나는 북중국에서 5호16국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전연(前燕), 전진(前秦), 후조(後趙), 후연(後燕) 등과 상쟁과 우호 관계를 다층적으로 맺은 서북 방면이며, 다른 하나는 한(漢)군현 중 한반도 서부와 중부에 설치된 낙랑군(樂浪郡)과 대방군(帶方郡)을 넘어 백제와 대립하게 된 남부 방면이다.
대외관계는 국가 간의 대립과 우호라는 표면적인 측면 외에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사람의 유입과 유출에 따른 제도와 문물의 교류를 수반하게 되는데, 고구려에서는 불교 수용, 율령 반포, 종묘제도 정비, 태학 설치 등 국가 경영의 요소와 내용을 파악하고 갖추는 결과로 이어졌다. 미천왕(재위 300~331년), 고국원왕(재위 331~371년), 소수림왕(재위 371~384년), 고국양왕(재위 384~391년) 등 네 명의 국왕이 재위한 이 시기는 공교롭게 각 국왕별 활동과 특징이 비교적 명확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4세기 전반 미천왕대에는 서북 방면에서 현도군(玄菟郡)을 축출하고 주변 세력의 동향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한편 남부 방면에서 낙랑군과 대방군을 영유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사실상 이후 고구려의 대외관계와 세력 확장의 토대를 닦았다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4세기 중반 고국원왕대에는 앞선 성과를 확대하기 위한 다각적인 공세를 취했으나, 서북 방면의 전연, 남부 방면의 백제로부터 강력한 역공을 받아 국도(國都)가 함락되고 국왕이 서거하는 국가적 비극을 겪었다.
4세기 후반 소수림왕대와 고국양왕대에는 대외관계의 기본 방향을 유지하며 양대 세력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한편, 대내적인 체제 정비에 나서서 율령을 반포함으로써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적 국가체제의 완비를 꾀했다(이정빈, 2020).
요컨대 4세기는 고구려가 멸망기까지 유지한 대외관계의 기본 틀을 형성했으며, 전연 등 상대 세력과의 역관계 속에서 성과와 한계를 겪은 시기였다. 다시 말해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의 기간 동안 주변 상황을 주시하면서 대내적인 정비를 통해 최전성기의 발판을 마련한 시기 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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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4세기 대외관계의 흐름과 의미 자료번호 : gt.d_0004_001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