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장수왕 전반기의 대외관계
3장 장수왕 전반기의 대외관계
412년 10월 광개토왕이 죽고 맏아들 거련(巨連)이 왕위에 올랐다. 광개토왕 18년(408년)에 태자로 책봉된 지 5년이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는데, 광개토왕이 39세에 갑자기 사망하면서 이루어진 전격적인 즉위였다. 거련은 아버지와 달리 491년까지 재위하면서 98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에 걸맞는 장수왕(長壽王)이라는 시호를 얻게 된 이유이다.
장수왕 전반기에 해당하는 5세기 초·중반 고구려를 둘러싼 국제관계는 복잡다단하며 역동적으로 전개되었다. 중원의 패자인 북위(北魏) 태무제(太武帝, 424~452년)는 북위와 고구려 사이에 존재했던 북연(北燕)을 436년에 공격해 멸망시켰고, 439년에는 북량(北涼)까지 복속하였다. 이로써 140여 년간 이어졌던 중국의 16국시대가 끝났다. 그리고 강남(江南)에서 420년에 동진(東晉)에서 송(宋)으로 왕조가 바뀌면서 본격적인 남북조시대의 막이 열렸다. 한편 막북(漠北)의 몽골초원에서는 유연(柔然)이 세력을 키워 호시탐탐 중원의 북위를 노리고 있었다.
송은 군사력 등에서 북위에 비해 전반적으로 열세였다. 이에 북위를 견제하기 위해 고구려와의 제휴를 시도하였다. 북위도 남쪽의 송과 막북의 유연에 둘러싸여 있는 형국에서 고구려마저 적으로 마주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장수왕은 이러한 중국 남북조의 대립 국면을 이용하여 남북조 모두에게 양면 외교를 추구하였다. 고구려는 남북조와 유연의 분쟁에 직접 개입하기보다는 송과 유연의 연결을 중재해주고 북위를 견제하면서 결과적으로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와 같은 국제관계의 역학구도하에서 장수왕은 숙적 백제를 주요 목표로 한 남방 진출에 주력하였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4세기 후반부터 고구려에 종속되어 있었던 신라가 5세기 중반에 이르러 고구려의 세력권에서 이탈해갔기 때문이다. 433~434년부터 시작되었던 백제와 신라의 군사협력 관계 모색은 고구려의 대남방관계에서 전환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글에서는 장수왕 전반기의 대외관계를 중국의 남북조와 한반도 백제·신라로 나누어 검토하고자 한다. 먼저 북위와 첫 교섭을 했던 425년부터 조공·책봉 관계를 맺은 후 관계가 단절되는 439년까지의 관계 추이를 살필 것이다. 그와 연계되어 있는 북연을 둘러싼 고구려·북위·송의 국제 분쟁과 유연의 동향을 추적하는 것도 중요하다. 남조와의 관계는 장수왕이 즉위 후 곧바로 추진한 413년 동진 외교를 시작으로 대송 외교의 추이와 배경을 당시 국제관계를 고려해 입체적으로 조명하겠다. 한편 『삼국사기』에 유독 송과의 관계 기사가 누락되어 있는 이유에 대해서도 고민해보려 한다. 동시에 한반도 남부에서 백제 및 신라와의 관계도 계기적으로 추적할 예정이다. 이를 통해 장수왕 전반기 남방 진출의 양상이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