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북위와의 교섭 재개와 5세기 후반의 대외관계
4장 북위와의 교섭 재개와 5세기 후반의 대외관계
5세기 후반은 장수왕의 재위 후반기와 문자왕이 즉위한 초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 고구려의 대외관계는 몇 가지 점에서 이전 시기와 다른 양상을 보인다. 우선 439년 이래 단절 상태에 놓여 있던 고구려와 북위(北魏)의 관계가 재개되었다. 재개된 양국 관계에서 고구려는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그 어느 때보다 빈번했던 사절 파견의 횟수가 이를 보여준다. 이 경향은 6세기까지 이어졌다. 한편 송(宋)과의 관계는 북위와 송이 대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지되었다. 송을 이은 남제(南齊)에 대해서도 고구려는 사절을 보내고 그 책봉(冊封)을 받음으로써 관계를 이어나갔다. 이와는 별도로 고구려 북방에서는 물길(勿吉)이, 한반도 방면에서는 전대 이래의 숙적인 백제에 더하여 신라가 본격적으로 고구려에 적대하기 시작하였다. 백제가 북위에 고구려 공격을 요청한 일이나 만주 북부의 물길이 북위에 조공(朝貢)하고 고구려 공략의 의사를 밝힌 사건은 이들의 존재가 고구려와 북위의 관계에 새롭게 개재되기 시작했음을 알려준다. 또한 신라가 고구려에 적대하였다는 것은 종속적 관계에 있던 신라가 고구려 세력권으로부터 이탈해 나갔음을 뜻한다. 고구려를 둘러싼 국제환경이 급변하고 있었고, 그것은 어느 한 방면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 이 시기 대외관계의 특징이 있었던 것이다.
462년 3월 장수왕은 사절을 북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이때의 사절 파견은 장수왕 27년(439년) 이후 23년만의 일이었다. 이 사실은 대북위 외교를 중단하고 있던 고구려가 태도를 바꾸었음을 뜻한다. 장수왕은 그동안의 대립관계에서 벗어나 양국의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가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급격한 외교의 변화는 어떤 배경에서 나온 것일까. 이를 살피는 것은 이 시기 고구려의 대외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첫 번째 과제가 된다.
이와 관련하여 고구려가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대북위 외교를 중단한 채 송 일변도의 외교를 전개해 왔다는 사실은 고구려가 대북위 외교를 재개하게 된 배경과 의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고구려가 대북위 외교를 재개하였다는 것은 송 일변도의 외교전략이 더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음을 뜻한다. 이러한 판단이 나올 수 있었던 정세의 변화는 어떠한 것이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462년 이래 고구려는 거의 매년 사절을 북위에 보냈고, 북위의 사자도 고구려를 오갔다. 이러한 양국의 교류와 별도로 고구려는 대송외교를 이어나갔고, 송을 이은 남제에 대해서도 사절을 파견하였다. 북조(北朝)와 남조(南朝)가 대치하고 있던 중국 내의 형세 속에서 고구려는 양측을 오가는 외교를 전개했던 것이다. 언뜻 보기에 양면외교로 이해될 수도 있지만, 이 시기 남북조와의 관계에서 고구려가 중시한 것은 북위였다. 북위에 보낸 사행의 압도적인 빈도가 이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북위 위주의 외교를 통해 고구려가 의도했던 국제관계는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파악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외교가 6세기 전반까지 유지된다는 점에서도 그 내용과 의도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한편 472년 개로왕이 북위에 사자를 보냄으로써 백제의 존재가 고구려와 북위의 관계에 등장하게 된 사건은 이 시기 고구려를 둘러싼 국제환경이 매우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고구려 북쪽의 물길이 북위에 조공하고 고구려 공략의 의사를 밝힌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이렇듯 만주 북부에 자리잡은 물길과 한반도에 자리잡은 백제는 고구려를 적대하고 있었다. 그러던 백제·물길과 고구려의 관계가 북위와의 관계로 확대되었다는 점에서 백제·물길과 고구려의 대북위 외교를 추동한 계기는 무엇인지, 백제·물길의 대북위 외교는 고구려의 대외관계에서 어떤 문제를 불러왔는지 살필 필요가 있다.
고구려를 둘러싼 국제환경의 변화와 더불어 한반도 동남부의 신라가 고구려 세력권에서 벗어나 고구려를 적대하게 되었다. 신라가 적대하면서 고구려는 한반도 방면 전역에서 적대세력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이 새로운 국면에서 고구려는 한성(漢城) 공략과 함께 신라에 대한 파상적 공세를 이어나갔다. 고구려의 공세에 맞서 신라와 백제가 상호 간 원병을 보낸 것도 이 시기의 일이었다. 이들 공방전의 추이를 살펴, 이 시기 고구려가 직면했던 한반도 방면의 문제와 그것이 고구려를 둘러싼 국제환경에서 어떠한 위치를 점했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이상의 이해를 토대로 이 시기 고구려의 국제적 지위에 대한 논의도 재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435년 책봉·조공 관계의 성립 이래, 북위가 고구려를 동북아 지역의 패자(霸者)로 인정해왔다는 견해가 있는데, 이 시기 고구려를 둘러싼 국제환경은 결코 그렇게 볼 수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