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6세기 전반의 대외관계
5장 6세기 전반의 대외관계
5세기 중앙집권적 통치체제의 확립과 함께 대외적으로 팽창했던 고구려는 안으로 문자왕대 말 왕권의 약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어 안장왕이 시해되고 안원왕 말 왕위계승다툼을 겪는 등 심각한 내분에 휩싸였다. 밖으로는 강고했던 북위(北魏)가 6진의 난을 거치면서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나뉘었으며, 북방의 유연(柔然)은 중원의 분열을 활용하여 그 세력을 과시하였다. 또한 북위에 비해 열세를 면치 못하던 남제(南齊)가 망하고 등장한 양(梁)은 무제대 국력을 팽창하였다.
한편, 한반도 내 백제와 신라의 동향도 심상치 않았다. 백제는 한성 함락 이후 웅진으로 천도한 뒤 문주왕과 삼근왕의 혼란기를 겪었으며 동성왕대 일련의 정비를 마쳤다. 501년 무령왕은 즉위 뒤 다시 백제의 영광을 꿈꾸었으며 성왕대까지 양과 교섭하며 줄곧 고구려와 대립을 이어나갔다. 신라는 백제와의 동맹을 바탕으로 고구려로부터 자립에 성공하였으며, 소백산맥 이북으로까지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이어 지증왕과 법흥왕대 체제 정비를 이루었다.
이렇듯, 고구려사에서 6세기 전반은 안으로 전제왕권이 무너지고 귀족연립정권이 등장하였을 뿐 아니라 밖으로 국제정세가 재편되는 시기로 주목을 받았다. 그동안 6세기 전반 고구려 대외관계에 대한 주요한 이해의 흐름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고구려의 대남북조(對南北朝) 관계는 장수왕대 후반부터 문자왕대까지 이어져 오던 북위 중시 정책이 안장왕대를 기점으로 대양(對梁) 중시 정책으로 바뀌었으며, 안원왕대를 기점으로 다시 북위 중시 정책으로 바뀌고 있다. 이러한 대외정책의 변화에 대해서는 고구려 정국에 대한 이해와 맞물려 논의가 이루어졌다.
둘째, 고구려의 대남방(對南方) 관계에 대해 일반적으로 고구려 대 백제·신라의 대립구도로 이해한다. 단 세부 내용에서는 이해의 차이가 보인다. 고구려와 백제는 5세기에 이어 6세기 전반에도 대립하였다. 두 나라는 각각 양과 우호관계를 이어갔으며 한강 유역과 그 일대에서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특히, 한강 유역의 영유를 둘러싸고 문헌에 기재된 기사와 고고학 발굴을 통해 드러난 유적·유물에 대한 해석이 엇갈리면서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고구려와 신라는 대립하였을 것으로 보는 의견이 우세하지만 일부에서는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반 고구려와 신라가 화약을 맺었다는 주장도 하였다. 이는 551년까지 나제동맹이 이어졌다는 학계의 통설에 문제가 제기되고 백제와 신라 관계를 새롭게 이해하려는 일각의 연구가 진전되면서 이와 연동해 고구려와 신라 관계에 대해서도 재검토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한편, 6세기 전반 고구려와 가야 관계를 살펴볼 만한 고고·문헌 자료는 거의 없다. 그 결과 이 방면 연구는 사실상 진척이 없다. 고구려와 왜 관계를 이해할 만한 자료 여건도 그다지 나아보이지 않는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보이는 일부 자료를 제외한다면 우리 측 자료와 중국 측 자료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에 따라 『일본서기』에 보이는 관계 자료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를 두고 일부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이 글에서는 6세기 전반 고구려 정국의 변화 과정을 따라가면서 대외관계를 둘러싸고 주로 다뤄졌던 주제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대체로 통설과 대치되는 설을 중심으로 사료를 소개하고 논쟁점을 서술하되 그 근거를 제시하여 비교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통설이 없는 경우에는 여러 학설을 소개하였다. 이를 통해 각 주장들의 입장차를 확인함과 동시에 앞으로 나아가야 할 연구방향에 대해서도 되짚어보는 계기로 삼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