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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6장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고구려의 천하관

  • 저필자
    이정빈(충북대학교 역사교육과 부교수)

6장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고구려의 천하관

5세기를 전후한 고구려의 금석문(金石文)을 보면 자국과 국제관계 인식이 드러나 있는데, 이는 ‘천하(天下)’라는 현실에서 하나의 세계(世界)로 인식되었다. 이를 천하관(天下觀)이라고 한다.
고구려의 천하관은 자국을 중심으로 하였다. 천손(天孫)인 태왕(太王)이 다스리는 국토가 천하의 중심이었고, 주변의 여러 나라는 태왕의 질서를 지키고 조공(朝貢)해야 할 신하와 같았는데, 그들이 천하의 외곽이었다. 다만 고구려 태왕의 천하는 동아시아 주요 강국의 천하와 구분하였다. 동아시아의 여러 권역에서 주요 강국을 중심으로 한 복수의 천하가 병립한다고 여기며, 그 속에서 고구려 중심의 천하를 상정한 것이다.
고구려의 천하관은 4세기 무렵에 형성되어 후기까지 유지되었다. 그러나 고구려의 천하관이 곧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현실 그대로는 아니었다. 천하관은 어디까지나 고구려 왕실과 지배층의 관념적인 국제관계 인식이자 이상(理想)이었다. 그러므로 타국의 인식과 차이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현실과 유리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특히 6세기 중반 이후 동아시아 국제정세가 변동하며 천하관의 이상과 국제관계의 현실 간의 틈새는 더욱 큰 폭으로 벌어졌다. 다만 고구려의 천하관이 동아시아 국제관계와 전혀 무관하지는 않았다. 4세기 이후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현실에 토대를 두고 형성되었고, 6세기 중반까지 고구려가 추구한 이상으로 동북아시아 국제관계 속에서 기능하였다.
4~6세기 중반 동아시아는 주요 강국이 병립하며 다원적인 국제질서를 형성하였는데, 이에 따라 각지에서는 자국 중심의 천하관이 등장하였다. 이 시기 고구려 역시 주요 강국의 하나로 성장하면서 자국 중심의 천하관을 표방한 것이다. 이를 위해 중원 왕조의 화이(華夷) 관념을 수용하였고 유교정치사상을 통해 왕권을 수식하기도 하였는데, 그 바탕에는 태왕이 천손(天孫)이라는 구래(舊來)의 신화적인 세계관이 자리하였다.
고구려의 천하관은 정치사상의 측면에서만 아니라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국제관계와 인식을 보다 폭넓게 이해하고, 각지의 역사적 특징을 밝히는 데에도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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