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국내 정국의 변화와 귀족연립체제의 성립
1장 국내 정국의 변화와 귀족연립체제의 성립
6세기 이후 고구려 정치사에 대한 근래의 연구동향을 보면, 왕권 약화 및 귀족 중심의 정치 운영양상을 보인 이 시기 정권 내지 정치운영체제를 ‘귀족연립정권’ 혹은 ‘귀족연립체제’로 이해하는 견해가 현재 학계의 주류이다. ‘귀족연립정권’이란 개념은 이기백이 통일신라 후기 혜공왕 이후 왕권이 약화되고 진골귀족들이 정치적으로 연립하면서 왕위계승전 등을 전개한 시기를 설명하는 개념으로 처음 사용하였다(이기백, 1974). 노태돈은 이 귀족연립정권이란 개념 및 용어를 고구려 후기 정치사 이해에 적용하였다(노태돈, 1976; 1999). 6세기 중반 이후 고구려 국내 정치 상황을 보여주는 『주서(周書)』와 『구당서(舊唐書)』 고려전은 국정을 주도하는 중심적인 지위에 있었던 대대로(大對盧)를 귀족들이 선임하였고, 이에 대해 국왕이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였다는 상황을 전해주고 있는데, 노태돈은 이런 정치적 상황을 귀족연립정권의 성립으로 파악하였으며, 이때 성립한 귀족연립정권의 기본적인 틀이 고구려 멸망 때까지 유지되었다고 이해하였다. 이와 같은 노태돈의 이해는 이후 여러 연구자들에 의하여 별다른 비판 없이 받아들여져 고구려 후기 정치사를 파악하는 하나의 관점이 되었다.
그러나 중기에 지속되었던 강력한 왕권 중심의 정치체제가 왜 붕괴되었고, 이를 대신하여 귀족연립정권이 등장하게 되는 배경이 무엇인지, 그리고 귀족연립정권의 구체적인 정치운영체제 즉 귀족연립정치체제의 양상은 어떠하였는지 등등 귀족연립정권의 구체적인 실체에 대한 연구는 그다지 진전되지 않았다. 귀족연립체제라는 시각에서 6~7세기 정치사의 변동 과정을 귀족세력의 존재 형태에 초점을 맞춘 접근에는 임기환의 연구가 있다(임기환, 1992). 그 뒤 귀족연립정권의 존부에 대한 비판적인 논의가 나타나자, 이에 대한 반론으로 노태돈은 귀족연립정권설의 타당성을 다시 논증하였다(노태돈, 1999).
그럼에도 근래에 귀족연립정권의 존재 여부에 대해 여러 측면에서 회의적인 시각이 여전하다. 이는 귀족연립정권을 설명하는 중국 측 기록 양상이 왕위계승전을 비롯한 정변 뒤에 나타난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하나의 정치체제로서 지속되었다고 볼 수 있느냐라는 의문에서 출발한다. 이런 입장에서 양원왕에서 영류왕에 이르기까지 왕권 위상에 주목하는 연구가 이어졌다. 이들 견해는 대체로 다음 두 측면에서 문제를 제기하는데, 첫째 사료상의 근거에 대한 것이며, 둘째 평원왕 이후 각 왕대의 정치적 양상으로 볼 때 귀족연립정권의 지속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귀족연립정권설의 주요한 사료적 근거는 『주서』와 『구당서』 고려전에 보이는 대대로 선임 기사이다.
그 대대로는 강약(疆弱)으로 서로 다투어 빼앗아서 스스로 취임하는데, 왕이 임명하지 않는다.주 001
그 나라의 관으로 존귀한 것을 대대로라고 부르는데, 1품에 비견되며, 국사(國事)를 총괄한다. 3년마다 한 번 교대하지만, 만약 직을 잘 수행하면 연한에 얽매이지 않는다. 교체일에 혹시 서로 공손히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모두 군사를 이끌고 서로 공격하여 승자가 이를 한다. 그 왕은 단지 궁을 닫고 스스로 지킬 뿐 제어할 수 없었다.주 002
그 나라의 관으로 존귀한 것을 대대로라고 부르는데, 1품에 비견되며, 국사(國事)를 총괄한다. 3년마다 한 번 교대하지만, 만약 직을 잘 수행하면 연한에 얽매이지 않는다. 교체일에 혹시 서로 공손히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모두 군사를 이끌고 서로 공격하여 승자가 이를 한다. 그 왕은 단지 궁을 닫고 스스로 지킬 뿐 제어할 수 없었다.주 002
이 두 기사는 내용이 서로 통하는데 대대로 선임 시에 귀족들 간에 상쟁이 있었고, 이긴 자가 취임하며 왕은 대대로 임명에 결정권이 없다는 내용이다. 국정 운영의 중심이 되는 자리인 대대로를 귀족 사이에서 실력 행사를 통해 스스로 결정한다는 양상은 분명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세력이 정국 운영의 중심이 되는 귀족연립정권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더욱 관련 기록이 있는 『주서』와 『구당서』라는 역사서 기록이 6세기 후반부터 고구려 멸망기까지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구려 후기 내내 이러한 양상이 지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귀족연립정권설에 비판적인 입장에서는 위 기사의 상황을 제한된 시기로 해석한다. 즉 『주서』 고려전의 기록은 대체로 북주나 북제 시기에 수집된 정보이지만, 대대로 관련 기록은 평원왕대라기보다는 양원왕대의 상황을 반영하는 기록이며, 『구당서』 고려전 기사는 『주서』 이후의 대대로 기록과 연개소문(淵蓋蘇文) 정변 이후의 상황이 복합되어 기록된 것으로 파악하여, 대대로 관련 기록을 특정 시기의 양상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민철희, 2002). 하지만 각 중국 사서가 포함하는 고구려 관련 기사의 성격으로 보아 동의하기 어렵다.
한편, 국내 사료인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기사를 중심으로 양원왕대부터 영류왕대까지 각 왕대 왕권의 위상을 검토하여 적어도 평원왕 이후에는 왕권이 안정되어 귀족세력을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귀족연립정권으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김진한, 2007; 2009; 최호원, 2012; 최일례, 2015; 2016). 그러나 왕권의 위상 회복이 곧 귀족연립정권의 붕괴를 뜻하는 것은 아니며, 정치 운영에서 왕권과 귀족세력 사이의 균형이 어떻게 이루어지냐에 따라 귀족연립정권이 유지될 수도 있다.
귀족연립정권에서 정치 운영의 핵심이었던 귀족회의가 이전 시기부터 이어져 온 기구로 파악된다는 점에서, 정치체제의 전환이란 시각에서 귀족연립체제를 파악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장병진, 2017). 그러나 고구려 초기에 등장하는 귀족회의는 나부(那部) 통치체제에서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확보하고 있던 제가(諸加)세력으로 구성된 회의체인 반면, 집권체제기 귀족회의의 양상에 대해서는 아직 실체가 밝혀지지 않아 비교하기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중기의 정치 운영양상이 후기의 정치 운영양상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기 때문에 귀족회의의 성격 역시 차이가 있으리라 짐작된다. 후기의 귀족연립정권 혹은 귀족연립체제는 중앙집권적 관료체제 내에서 운영되었다는 점에서 초기의 귀족회의와는 그 성격을 달리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와 같이 귀족연립정권설에 대한 비판적인 문제 제기가 아직은 귀족연립정권의 실재를 부정하는 논거를 충분히 확보하고 있다고 판단되지는 않는다. 고구려 후기 귀족연립정권의 실재 여부에 대해서는 애초 논의 제공자인 노태돈이 제기한 논증이 아직까지는 유효하다고 생각한다(노태돈, 1999). 다만 귀족연립정권을 인정하면서도 중리제(中裏制)로 표현되는 평원왕 이후 왕권의 위상을 고려하는 연구(이문기, 2008)도 동시에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후기 귀족연립정권에 대한 연구동향을 염두에 두고, 이 글에서는 다음과 같은 점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첫째, 6세기 이후 고구려 정국에서 나타나는 왕권의 약화 및 귀족세력들의 분열·대립이라는 정국의 변화가 어떠한 정치세력의 역학관계에서 나타나는가를 검토한다. 이는 귀족연립정권의 성립 배경과도 연관되는 문제이다. 둘째, 귀족연립정권에서 귀족세력의 존재 형식과 정치 운영구조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전체적인 논지는 귀족연립정권의 존재를 긍정하는 입장에서 논의를 전개하되, 이에 대한 비판적 견해도 충분히 수용하면서 정리하도록 하겠다. 마지막으로 그동안 사용되어온 귀족연립정권 혹은 귀족연립체제라는 용어 중에서 이 글에서는 귀족연립체제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하겠다. 왜냐하면 단순히 귀족 중심의 정권 운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정치운영체제가 구성되고 그 틀에서 정국이 운영되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물론 논지 전개에 따라 귀족연립정권이라는 용어도 함께 사용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