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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3장 남북조 및 주변 국가와의 대외관계

고구려 안장왕(安臧王: 511~531년)부터 평원왕(平原王: 559~590년) 시기는 흔히 중국사에서 남북조시대라고 부르는 시대의 후반부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 고구려의 서방에는 북위(北魏)가 남쪽의 양(梁)과 대립하였고, 뒤에 가서는 북위를 이은 동위(東魏)·북제(北齊)·북주(北周)가 남조를 상대하였다. 이들은 저마다 자신을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를 세우기 위해, 또는 상대의 후방을 노리려는 현실적 필요에서 배후에 위치한 국가와의 관계 구축에 나섰다. 이 점에서 북조와 경계를 접한 고구려는 이들의 외교 교섭에서 늘 빠질 수 없는 존재였다.
이에 대응하여 고구려는 북조와 남조 모두를 상대로 외교관계를 맺었지만 가장 중요한 상대는 역시 북조의 여러 국가였다. 북위에서 6진(鎭)의 난이 일어나 그 여파가 요하(遼河) 일대로 밀려들었던 것이나 북제 문선제(文宣帝)가 요서(遼西)를 친정하고 고구려에 유인(流人)의 송환을 요구했던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북조의 대외전략이나 정세 변화에 따라 고구려는 매번 요하 일대로 밀려든 이들의 힘과 맞닥뜨리곤 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 고구려의 대외관계에서 북조와의 관계는 다른 방면의 대외관계를 추동하는 주요 변수가 되었다고 이해된다.
한편 남조와 북조의 대치라는 중국 내의 형세는 양이 들어서며 변화가 일어났다. 양을 창건한 무제(武帝 蕭衍: 502~549년)의 치세 전반기는 남조 전 시기를 통해 국세가 가장 강성한 시기였다. 북위의 남진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맞서 종리전(鍾離戰: 507년) 등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이를 배경으로 무제시기 양과 주변 국가 간에 사행과 책봉이 이어졌다(金鍾完, 2002). 특히 양 무제는 즉위 이틀 뒤에 고구려 문자왕(文咨王)을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에 진호(進號)하였고, 508년 다시 무동대장군(撫東大將軍)으로 개수(改授)하고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더하여 수여하였다. 이에 대해 고구려가 양에 보낸 사절은 모두 10여 차례에 이른다. 특히 양에의 사행은 북위에서 내란이 일어나 혼란해진 시기부터 동·서위 분열 시기까지 모습을 보인다. 또한 요령성(遼寜省) 조양(朝陽)에서 발견된 〈한기묘지(韓曁墓誌)〉는 고구려가 북위의 내란 시기에 요서 방면으로 군사행동에 나섰던 일을 전한다. 이 같은 사실에 주목하여 이 시기 고구려의 외교전략에 변화가 있었다고 이해하기도 한다(井上直樹, 2001; 김종완, 2002). 그러므로 6세기 전반 고구려와 남북조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이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550년 무렵까지 고구려는 내란을 수습한 북위 그 뒤를 이은 동위와 우호적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해 나갔다. 그리고 550년 5월 동위를 무너뜨리고 북제가 들어서자, 그 직후인 6월에 고구려는 곧바로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왕조의 창건을 축하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양국의 관계는 오래 가지 못하였다. 외교관계를 맺은 지 겨우 2년 만인 552년 양국은 북위 말 고구려로 들어온 유인의 송환을 둘러싸고 대립하였던 것이다. 고구려는 유인을 돌려보내라는 북제의 요구에 따르려 하지 않다가, 북제의 군사적 압력이 가해지고 나서야 유인을 돌려보냈다. 유인이 양국 관계에서 어떤 의미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북제는 이들의 송환을 강력히 요구했던 것일까. 전대와 달리 이 시점에 와서 이들의 존재가 양국 관계의 현안으로 떠오른 것은 어떤 연유일까 하는 점들은 이 시기 양국의 관계 변화, 나아가 동북아 세계의 정세 변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문제가 된다.
한편 북제의 유인 송환 요구를 비롯한 서방의 위기상황은 당시 고구려가 직면해 있던 내정의 혼란, 남방의 위협과 연관지어 이해하는 것이 이 시기 고구려사를 파악하는 하나의 관점이 되어 왔다. 고구려는 545년 안원왕(安原王)의 후계를 둘러싸고 왕위계승전이 벌어졌었고 7년이 지난 이 무렵까지 여전히 분란이 일고 있었다. 이를 틈타 북진해온 나·제 동맹군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긴 상태였다. 그뿐만 아니라 551년에는 돌궐(突厥)이 침입해오는 등 고구려는 안팎으로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북제와 분쟁할 수 없었던 고구려는 유인을 돌려보내야 했고, 과거와 달리 긴장감이 높아져 가는 서방에도 힘을 나눔으로써 한강 유역의 실지 회복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였다는 것이다(盧泰敦, 1976). 그렇다면 이 문제의 이해는 550년대 고구려 서방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뿐만 아니라 당시 고구려가 당면했던 문제를 어떻게 대처해 나갔는지를 살피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내정의 혼란, 남방의 위협에 서방 관계의 위기까지 더해졌다는 점에서 고구려가 직면한 위기상황은 전방위적인 것이었다. 즉, 유인 송환의 의미를 고구려와 북제의 관계와 관련지어 구체적으로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나아가 이 문제는 한강 유역의 상실로부터 시작된 국가적 위기가 어떻게 수습되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새로운 시사점을 제기해준다.
6세기가 되어 고구려의 대외관계에서 나타난 문제이자 가장 큰 변화는 북조와의 외교관계가 종전과 달라졌다는 점이다. 435년 고구려의 조공에 대해 북위가 곧바로 장수왕(長壽王)을 책봉함으로써 양국은 책봉·조공(冊封朝貢)의 형식을 통해 외교관계를 맺었다. 이후 북위는 동방 여러 나라로부터 조공을 받았으면서도 고구려 외에는 책봉해주지 않았다(朴漢濟, 1997). 양국 관계는 책봉·조공의 교환을 통해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고구려가 북위와 맺은 책봉·조공 관계는 북위의 내란기간을 거쳐 동·서위의 분열시기에도 계승되었다. 북위의 마지막 황제 효무제(孝武帝)가 안원왕에게 영호동이교위(領護東夷校尉)를 포함한 책봉호를 수여하였으며, 이를 계승한 동위와 북제의 책봉이 이어졌던 것이다.
그러던 책봉·조공 관계는 565년 북제가 신라 진흥왕(眞興王)을 책봉하면서 변화의 조짐을 보인다. 북제가 신라왕에게 동이교위 관을 포함한 책봉호를 주었다는 것은 동방에 대해 고구려만을 주된 교섭대상으로 여겼던 기존 자세에서 벗어났음을 보여준다(盧泰敦, 1976). 또한 북제는 570년과 571년에 백제왕을 책봉하였고, 573년에는 백제의 조공도 이어졌다. 신라·백제가 남조 일변도의 관계에서 벗어나 북제와 연결을 꾀하였으며, 북제도 고구려 배후에 위치한 양국을 주목했다는 것은 새로운 양상이었다. 6세기 중·후반 고구려를 둘러싼 국제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새로운 국면이 이후 어떻게 전개되었는가에 대해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한편 북제에 대해 고구려는 573년까지 사절 파견을 중단하였다. 대신 이 기간 동안 남조의 진(陳)에 세 차례 사절을 파견하였다. 이 시기 고구려가 새로운 대외전략으로 선보인 것이 대왜외교(對倭外交)이다. 고구려가 오랫동안 교류가 없었던 왜와 공식적 통교를 시도하여 570~574년 사이에 세 차례 사절을 보냈던 것이다. 북제의 대외정책 변화와 신라의 약진에 따라 고구려가 보인 대외적 조치라는 점에서 이들 외교의 내용과 그 의미를 살펴, 이 시기 고구려가 직면해 있던 대외적 위기를 어떻게 수습해 나갔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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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남북조 및 주변 국가와의 대외관계 자료번호 : gt.d_0005_001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