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유·불·도 삼교와 역사서 편찬 및 문학
7장 유·불·도 삼교와 역사서 편찬 및 문학
고구려는 광개토왕-장수왕-문자명왕 때를 거치면서 전성기를 보냈다. 그러나 안장왕-안원왕, 안원왕-양원왕의 왕위 계승이 순조롭지 않았다. 특히 양원왕(재위 545~559년)은 치열한 왕위 다툼을 거치고 즉위하여 정국이 불안하고 왕권이 예전 같지 않았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고구려 후기라 하고 정치 운영양상을 귀족연립정권이라고 부르고 있다. 왕권의 불안정은 연개소문의 독재체제로 이어졌으며, 그의 사후 아들끼리 다시 권력투쟁이 벌어져 결국 고구려는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였다.
고구려는 372년 전진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다. 국내성에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짓고 평양에 9사를 창건하는 등 불교 홍포에 적극적이었다. 이때 제작된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는 연꽃 그림이 많이 나타난다. 한편 승려 승랑은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 삼론종의 토대를 마련하기도 했다. 이렇듯 고구려 전기와 중기 불교는 신앙과 교학 양 측면에서 꾸준히 발전해가고 있었다.
6세기 중반 두 외척세력인 추군(麤群)과 세군(細群) 두 파는 그 이름이 불교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불교계의 싸움이기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왕고덕은 승려 의연을 북제에 보내 지론종(地論宗) 등 당시 불교계의 흐름을 파악하고 고구려 불교계의 통합을 이루려고 했지만 불교적 갈등이 여전히 해소되지 않아 혜량과 보덕 같은 이름난 승려들이 신라로 망명하기도 하였다. 불교계의 갈등이 채 봉합되기도 전에 연개소문은 자신의 독재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당의 도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당에서 온 도사를 절에 머무르게 하는 등 불교계를 자극했고 열반종에 능통한 보덕은 신라 땅 완산주로 망명하기도 했다.
중국이 수·당으로 통일되면서 고구려도 대비를 해야 했다. 중국의 도교를 받아들이는 등 유화적인 입장을 취하면서도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충을 강조하기 위한 역사책 『신집(新集)』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고구려에 퍼진 여러 문학적인 이야기로는 안장왕과 한씨 미녀 이야기, 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가 있다. 고구려 멸망을 전후해서는 연개소문이 원래 전생에 수나라 사람이었다는 등 여러 참언이 퍼지기도 하였다. 이 글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고구려 후기 종교·문화에 관한 일반적인 내용과 더불어 추군과 세군의 불교적 의미, 혜량과 거칠부의 만남, 보덕의 망명 시기, 고구려의 3년상 등을 다루었다. 특히 도교와 불교의 갈등 여부에 주목했다.
고구려에서는 불교·유교·도교 삼교가 나름 균형을 이루며 발전하였다. 승려 의연은 유교와 도교에도 능통했다고 한다. 고구려 후기 영류왕, 보장왕, 연개소문이 도교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여 ‘3교 정립’을 추구하려고 했던 시도가 고구려 후기 사상사, 더 나아가 한국의 사상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고민해볼 문제이다. 연개소문의 도교정책으로 나라가 망했다는 과도한 비판은 도교가 불교와 유교와 더불어 한국 사상사의 한 축을 형성하지 못한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