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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1장 수의 등장과 고구려의 대응

  • 저필자
    김현숙(동북아역사재단 수석연구위원)

1장 수의 등장과 고구려의 대응

고구려의 최전성기는 5세기 대였다. 영토와 주민 수의 확대로 인한 경제적 부가가치 상승, 이것을 견인한 국내의 정치적 안정이 전성기를 이끈 주요 요소였다. 외부 요인으로는 오랫동안 유지된 동북아시아의 세력균형을 들 수 있다. 남·북조로 나눠져 있는 중원 지역, 유연(柔然)을 중심으로 한 북방 유목세력, 그리고 독자적 천하관 아래 구축된 고구려 세력이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어 어느 한쪽이 무력으로 깨뜨릴 수 없는 구조였기 때문이다(노태돈, 1984).
그러나 6세기 중엽이 되면서 이러한 세력균형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균열은 먼저 유목세력에서 일어났다. 유연의 지배 아래 있던 돌궐(突厥)이 550년경 급성장하여 유연의 예하에서 벗어나 세력을 키움으로써 국제질서에 변동을 가져오는 변수가 되었다. 고구려 중심의 세력권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고구려의 보호 아래 성장한 신라가 그 그늘에서 벗어나 백제와 우호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고구려 서변 일대에서 일어난 소요를 기회로 삼아 백제와 신라가 힘을 합쳐 한강 유역을 차지하였다. 이로 인해 고구려 중심의 천하가 흔들리게 되었다.
균열과 충돌은 중원 지역에서도 발생했다. 6세기 전반 북위(北魏)가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분열되었고, 6세기 중반에 동위를 이어 북제(北齊)가 들어서고, 서위를 이어 북주(北周)가 들어섰다. 두 나라가 서로 치열하게 경쟁한 끝에 575년 마침내 북주가 북제를 정복했다. 6년 뒤인 581년 양견(楊堅)이 한족(漢族) 관료들의 지지를 받아 북주 정권을 탈취하여 수(隋) 왕조를 개창했다. 그리고 589년 수가 50여 만 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남조의 진(陳)을 멸망시킴으로써 오랫동안 분열되어 있었던 중원 지역을 통일했다.
수는 북주 대부터 진행해온 개혁을 계속 추진하며 역량을 키웠는데, 북주 때와 달리 초창기부터 주변 세력에 대해 강경책을 구사했다. 수는 중원을 통일한 기세에 힘입어 본격적으로 자국 중심의 일원적인 국제질서를 수립하려고 했다. 이에 따라 그동안 힘의 균형 속에 각자 독자적인 세력권을 유지해왔던 동아시아 세계는 새로운 국제질서로의 전환을 두고 서로 치열한 싸움을 전개하게 되었다.
6세기 후반 동아시아의 중심세력은 수와 돌궐, 고구려였다. 이들은 서로 직접적으로 충돌하기에 앞서 요서 일대에 있던 거란(契丹), 말갈(靺鞨), 해(奚), 습(霫), 실위(室韋) 등을 둘러싸고 각축전을 벌였다. 따라서 이 시기 요서 지역은 강대 세력의 진출 노력이 숨가쁘게 추진되는 가운데 요서 제족(諸族)이 자구책을 도모하기 위해 치열하게 움직이는 역동적인 현장이 되었다. 당시 요서 서쪽 방면, 수와 서역을 연결하는 교통로가 되는 곳에 토욕혼(吐谷渾)이 있었다. 또 고구려 동남쪽 방면에는 수와 외교관계를 맺고자 애쓰는 백제와 신라가 있었다. 그리고 그 외곽에 고구려가 새로운 국제관계 형성을 위해 활용 가치가 있다고 본 왜가 있었다.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이런 구조 속에서 새로운 국제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정치세력 간 충돌, 협력, 분열, 이탈, 구애 등 각종 활동이 급박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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