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고구려·수의 갈등 심화와 주변국의 동향
2장 고구려·수의 갈등 심화와 주변국의 동향
5~6세기 후반 요서 지역은 동아시아 주요 강국의 변경이었다. 고구려의 서방 변경이었고, 북조 여러 나라의 동북방 변경이었으며, 유연·돌궐의 동남방 변경이었다. 주요 강국의 세력이 교차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요서 지역은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변화를 민감하게 반영하였다.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축소판과 같았다.
5세기 이후 고구려는 요서 지역의 동부에 일정한 세력범위를 유지하며 서방의 여러 강국과 역관계(力關係)의 균형을 추구하였는데, 이를 통해 동북아시아 지역 내에서 패권적인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589년 수가 중원 지역을 통일하고 동아시아 최강국으로 부상하며 역관계의 균형이 동요하였다. 요서 지역에서 전개된 고구려와 수의 갈등이 이를 잘 보여준다.
고구려와 수의 갈등은 590년대 중반 이후 표면화하였다. 요서 지역에서는 군사적 긴장감이 점차 높아졌다. 수가 영주총관부를 통해 요서 지역의 제종족을 포섭하며 점차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해 왔기 때문이다. 수의 동진이 지속된다면, 이제 요하 동쪽의 영역마저 직접적인 위협에 노출될 수 있었다. 고구려는 위기의식을 갖고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598년 고구려의 영양왕은 말갈의 군대 1만 명을 이끌고 수의 영주총관부를 공격하였다.
598년 고구려의 영주총관부 공격은 영주총관 위충이 격퇴하였다고 하는데, 수 문제는 그에 그치지 않고 대대적인 고구려 공격을 지시했다. 수는 30만의 육군과 수군(水軍)을 동원하였다. 고구려 역시 수의 공격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양국은 전면적인 전쟁 국면으로 돌입하였다. 그러나 598년 수의 고구려 공격은 실행되지 못하였다. 장마와 태풍으로 인한 군수 보급과 교통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전쟁은 공식적으로 중단되었다. 598~607년까지 고구려와 수는 우호관계를 유지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요서 지역에서 수의 동진은 계속되었고, 양국 간의 갈등은 깊어졌다.
605년 수에서는 양제가 즉위했다. 양제는 대외정책에 한층 적극적이었다.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한 계획도 구상하였다. 고구려는 백제, 왜 등과 교섭하며 외교적인 측면에서 위기를 타개하고자 했다. 607년에 시도하였던 동돌궐 교섭도 그와 같은 외교적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고구려의 다각적인 외교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 국제관계 속에서 수의 패권은 더욱 확고해졌다. 북방의 여러 세력마저 제압한 수 양제는 고구려 공격을 결정했다. 수는 609년부터 본격적인 전쟁 준비에 착수하였다. 군수 보급을 위한 교통로를 정비하였고, 전국 각지의 인력과 물자를 징발하였다.
고구려의 영양왕과 지배층 역시 전쟁에 대비하였다. 요서 지역에 설치된 수의 군사기지를 공격하며 견제했다. 수 역시 요서 지역에 설치된 고구려의 군사기지를 공격했다. 611년 요하의 서쪽에 있었던 고구려의 무려라(武厲邏)가 함락되었다. 양국의 변경이었던 요서 지역에서는 이미 612년의 전쟁이 개시되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