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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4장 당의 등장과 국제정세의 변동

  • 저필자
    이성제(동북아역사재단 책임연구위원)

4장 당의 등장과 국제정세의 변동

618년은 수 양제의 침공이 있은 지 4년째 되던 해로, 이해 9월 영양왕이 사망하고 왕제(王弟) 건무(建武)가 왕위에 올랐다. 이 무렵 고구려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급변하고 있었다. 617년 훗날 고조(高祖)가 되는 이연(李淵)이 태원(太原)에서 수에 반기를 들었고, 1년 뒤 장안(長安)에 들어가 당을 건국하였다. 당은 처음에는 수 말의 혼란에 등장한 군웅의 하나에 불과했지만, 관중(關中)을 장악한 뒤 각지의 경쟁자들을 차례로 제거하였고, 이윽고 중원을 재통일하였다. 630년에는 당이 북방 유목 세계의 동돌궐마저 무너뜨리는 데 성공함으로써 고구려를 둘러싼 국제환경은 또다시 급변하였다. 당의 침공 위협이 점차 노골화되기 시작하였고, 위기감이 정점에 이르고 있던 642년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이 시해되고 말았다.
영류왕이 즉위했을 때는 수의 붕괴로 동아시아 세계의 국제질서가 한창 뒤흔들리고 있던 시기였다. 수가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대외적 상황은 결코 안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고구려의 관심은 수를 대신하여 중국에 어떤 나라가 들어설 것인지, 그로 인해 국제정세는 어떻게 변할 것인지 등에 모아졌을 것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에 이 시기 고구려사는 당이 등장한 뒤 중국을 재통일하고 고구려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을 드러내기까지 각 국면마다 영류왕이 어떻게 대처해 나갔는가 하는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수의 멸망으로 그 위협이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수 말의 동란은 각지에 군웅이 난립하는 가운데 북방의 동돌궐이 여기에 적극 개입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 향배를 점치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과 관련하여 영류왕이 즉위 이듬해에 당에 사절을 보내 조공했다는 사실은 고구려와 당의 관계뿐 아니라 이 시기 국제관계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당은 건국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상황이었고, 장안이 있는 관중 지역조차 장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 사실은 고구려가 수 말의 동란을 예의주시하며 그 추이를 살피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점에서 이 시기 고구려사 연구에는 수 말의 혼란 상황과 함께 당의 건국, 그 성장 과정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필요해 보인다.
630년 동돌궐의 패망으로 당이 북방 유목세계를 아우르게 되기까지 양자 관계에서 우위에 선 쪽은 돌궐이었는데, 당 태종이 집권하면서 이러한 관계는 변하기 시작하였다. 당은 중원을 재통일하기 위해 군웅세력을 제압해가는 한편, 동돌궐과의 세력관계를 과거로 되돌려야 하였다. 이 두 세력 간의 관계 변화는 곧바로 고구려가 이들과 경계를 접한 요서(遼西) 일대의 정세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와 관련하여 이전 시기 수의 첨병이었던 돌지계(突地稽)의 말갈과 거란이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가 하는 점은 이 시기 고구려의 대당정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한편, 백제와 신라가 당에 사절을 보낸 것은 624년이었다. 이들과 당의 관계는 당의 대고구려정책과 긴밀하게 연결되었다는 점에서 그 내용과 입장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바다 건너 왜(倭)의 동향에 대해서도 살펴보아야 한다. 6세기 후반부터 왜는 고구려의 대외관계에서 주요 상대국의 하나이며 대외전략의 한 축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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