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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8장 요동 지역의 군사방어체계와 천리장성

  • 저필자
    여호규(한국외국어대학교 사학과 교수)

8장 요동 지역의 군사방어체계와 천리장성

고구려는 7세기에 동아시아 최강국인 수(隋)·당(唐)과 국가적 명운을 건 전쟁을 벌였다. 수는 612년에 전투병만 100만이 넘는 대군을 동원했지만, 요하 동쪽의 고구려 성곽을 하나도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어 613년과 614년에도 고구려 원정에 나섰다가 번번이 실패했다. 수는 결국 고구려 원정의 후유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농민란의 와중에 멸망했다.
당도 오랜 준비 끝에 645년에 대군을 이끌고 침공했지만, 요동성과 백암성 등 요동평원의 성곽 몇 개만 점령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당은 수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오랜 준비를 통해 치밀한 전략과 전술을 수립한 다음 고구려 원정에 나섰지만, 결국 천산산맥(千山山脈)을 넘지 못하고 요동평원 일대만 맴돌다 퇴각해야 했다. 647년 이후 당이 다시 게릴라 전술을 구사하며 요동 지역을 여러 차례 공격했지만, 고구려에 결정적 타격을 주지는 못했다.
고구려가 665년 연개소문의 사망 이후 내분으로 인해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했지만, 전쟁의 전개양상만 놓고 본다면 수·당의 거듭된 침공을 물리쳤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가 수·당의 침공을 물리친 원동력으로는 뛰어난 전략·전술 및 군(軍)·민(民)의 단결력 등을 들 수 있다. 612년 살수대첩이 뛰어난 전략·전술이 가장 잘 발휘된 전투라면, 645년 안시성전투에서는 군·민의 단결력이 승리의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뛰어난 전략·전술이나 군·민의 단결력이 빛을 발휘할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성을 중심으로 하는 군사방어체계가 있다. 고구려 군사방어체계의 위력은 수·당의 장수나 관인들도 잘 알고 있었다. 수 양제의 고구려 원정에 참여했던 정천숙(鄭天璹)은 644년 고구려 원정에 나서려는 당 태종에게 “고구려는 성을 잘 지키기 때문에 쉽게 항복시킬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647년 고구려 침공 방안을 논의하던 당의 대신들도 “고구려는 산에 의지하여 성을 만들기 때문에 쉽게 함락시킬 수 없다”고 입을 모았다(『삼국사기』고구려본기9 보장왕 3년 및 6년조).
고구려가 성곽을 축조해 군사방어체계를 튼튼하게 구축했기 때문에 쉽게 함락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구려와 수·당의 전쟁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성곽을 중심으로 구축한 고구려의 군사방어체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실제 고구려는 성을 거점으로 수·당에 맞섰을 뿐 아니라, 당의 침공에 대비해 서북방 국경에 천리장성을 축조하기도 했다.
수·당과의 전장은 요하(遼河) 유역에서 평양성에 이르는 구간이었다. 이 지역은 천혜의 해자로 인식된 압록강을 경계로 요하~압록강 유역과 압록강~평양성 등 두 구간으로 대별된다. 이 글에서는 요하~압록강 구간의 고구려 성곽 분포현황과 방어체계의 구성을 살펴본 다음, 고구려가 수·당과의 전쟁에서 군사방어체계를 운용한 양상을 고찰하고자 한다. 아울러 고구려가 631년부터 16년간 축조했다는 천리장성의 경로와 축성 배경도 검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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