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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2장 나당연합군의 공세와 고구려의 멸망

고구려와 중국 대륙을 통일한 거대제국 수·당과의 70여 년에 걸친 전쟁은 고구려의 멸망으로 귀결되었다. 고구려와의 전쟁을 거듭하면서 멸망에 이르게 된 수를 이은 정통왕조라는 명분과 당 태종의 야심에 의해 진행된 645년의 고구려 공격 실패는 또 다른 전쟁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647년에서 648년에 소규모로 진행된 고구려 공격은 또 다른 전면전을 위한 준비 단계였으며, 공동의 목적을 가진 당 태종과 신라의 김춘추 간에는 나당동맹이 합의되었다. 그 결실로 신라가 얻게 되는 것은 ‘평양 이남의 백제 땅(平壤已南 百濟土地)’이었다.
이 전쟁은 당 태종의 죽음으로 중단되었지만, 고구려와 백제에 둘러싸여 위태로웠던 신라에게는 이를 현실화하는 것이 위기에서 탈출해 도약할 수 있는 기회였으므로 여기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적극적인 친당정책으로 실현되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김춘추는 진덕여왕을 이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태종을 이어 왕위에 오른 고종 역시 고구려와의 전면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 태종의 죽음으로 중단된 전쟁은 650년대 거란을 둘러싼 고구려와 당의 충돌로 재개되었다. 그리고 660년에 신라와 연합해 백제를 멸망시킨 당은 곧이어 고구려와의 전면전에 들어갔다. 이 전쟁은 고구려와 당의 두 번째 전면전이라는 점에서 2차 려·당전쟁(민덕식, 2002; 박경철, 2007) 혹은 2차 고당전쟁(정원주, 2013; 장창은, 2016; 이상훈, 2023), 2차 고구려-당전쟁(김용만, 2004; 이민수, 2021 등)으로 불리고 있다. 또한, 나당동맹 차원에서 본다면 660년의 백제 멸망전에 이어 두 번째로 진행된 전쟁이었다. 백제 지역에서 활발히 전개된 부흥운동으로 인해 신라는 적극적으로 이 전쟁에 참여할 수 없었지만, 나당동맹 차원에서의 활동은 고구려 멸망까지 이어졌다.
이전까지 2차 고당전쟁은 단독으로 다루어지기보다는 고구려 멸망전쟁 혹은 삼국통일전쟁 속의 나당전쟁이라는 측면에서 다루어졌다. 그러나 고구려와 당의 전면전을 645년은 1차, 661~662년은 2차, 666~668년은 3차로 규정하면서 다른 국지전과는 구분되어야 한다는 견해(김용만, 2004)가 제기되면서 2차 전면전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최근에는 이 전쟁을 집중해서 다루는 연구가 나오기 시작해 어느 정도 전쟁의 윤곽이 잡혀가고 있다. 또한, 전쟁에서의 결과를 토대로 662년 이후의 고구려와 당의 관계를 이전처럼 고구려를 전쟁의 피해국이라는 입장에서 바라보는 시각과는 달리 고구려 공격에 실패한 당의 입장과 상황에 맞추어 고찰하려는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죽음과 자식들 간의 권력다툼으로 촉발된 세 번째 전면전인 3차 고당전쟁은 666년에서 668년까지 이어졌고 그 결과는 고구려의 멸망이었다. 이 전쟁 역시 나당동맹에 의해 신라의 참전이 이루어졌으며, 신라는 667년과 668년 두 번에 걸쳐 군대를 꾸려 고구려로 향하였다. 3차 고당전쟁과 관련된 연구는 소략한 기록과 충돌되는 기사로 인해 연구자마다 전쟁 상황을 달리 기술하고 있을 뿐 아니라 본격적인 연구도 미약한 실정이다.
고구려와 수의 첫 충돌이 있었던 598년부터 시작해 668년의 고구려 멸망에 이르기까지 70년에 걸친 전쟁은 주변국과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동아시아 국제대전의 양상을 띠고 있다. 힘의 강약에 따라 그 향방을 달리하던 거란, 해, 말갈 등의 동향과 고구려와 당의 전쟁을 이용해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공격의 방향을 달리했던 설연타, 철륵과 같은 유목국가와 백제 등의 행보도 이 전쟁의 결과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무엇보다 나당동맹의 한축을 담당했던 신라의 움직임은 이 전쟁의 진행 상황을 이해하는 데 한몫을 하고 있다. 따라서 660년에 시작된 2차 고당전쟁에서 668년 고구려 멸망으로 귀결된 3차 고당전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구려와 당의 전쟁이라는 측면만이 아니라 신라와 주변국들의 동향과 역할에 대해서도 세심하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또한, 662년에서 666년에 진행된 고구려와 당의 관계 변화와 고구려 정국을 주도하던 연개소문의 사망과 연남생(淵男生) 형제들의 권력다툼으로 이어지는 고구려의 국내 상황에 대한 이해 역시 3차 고당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을 보완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시기의 정치 상황에 대한 이해가 고구려 멸망의 원인을 파악하는 주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고구려 멸망은 외침에 의한 것이지만 이러한 상황을 가져오게 된 기저에는 내분(內紛)이라는 결정적 요인이 작용하였다. 이로 인해 전근대 사서에서부터 오늘날까지 고구려 멸망의 원인으로 연개소문의 독재정치와 그의 사후 아들들의 권력투쟁을 꼽고 있다(손진태, 1979; 이병도, 1976).
이 글의 1절에서는 660년 백제의 멸망 이후 진행된 당의 고구려 공격 시기와 부대 편성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와 신라의 참전이 어떠한 방식이었는지에 대해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를 토대로 살펴보고자 한다. 2절에서는 661년에서 662년까지 진행된 전쟁에서 당군의 고구려 공격이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고구려의 대응으로 인해 어떠한 결과로 이어졌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3절에서는 전쟁 이후 고구려의 정국을 이해하기 위해 연개소문의 죽음과 자식들의 분열로 내전이 일어난 시기와 배경을 살펴보고, 이 당시 진행되었던 당의 봉선참례가 갖는 정치적 의미를 여러 연구자의 연구결과를 토대로 파악하고자 한다. 4절에서는 3차 고당전쟁의 배경이 되는 연남생의 당 투항과 666년 당군의 행보를 통해 전쟁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더불어 여러 묘지명을 통해 당에 투항한 고구려 지배층의 행적을 살펴보는 것 역시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5절에서는 본격적으로 진행된 667년과 668년 전쟁 상황에 대해 살펴보겠다. 이 시기 자료들의 미비함과 불완전함으로 인해 전쟁의 전모를 밝히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이에 따라 지금까지 연구된 결과를 반영해 주요 전장 중심으로 진행 상황을 파악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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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나당연합군의 공세와 고구려의 멸망 자료번호 : gt.d_0007_0010_0020